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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씩 일한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원한 것은 아니죠.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도 2시인가 출근해서 새벽 1~2시까지 일해야 했으니까. 주유소라는 곳이 진짜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해요. 일한 만큼 돈을 준다면 한 달에 200만원은 줘야 돼요.” <강남 주유소에서 일했던 열아홉살 세현이>
“뜨거운 불판을 떨어뜨려 손을 뎄어요. 근데 비싼 거 그랬다고 ‘야! 너 오늘 알바비 없다’ 그래요. 너무 서럽잖아요. 손도 다치고 돈도 못 받고….” <인천 숯불고기 집에서 일한 열여덟살 은지>
2003년 노동부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다섯 명 중 한 명은 아르바이트 경험을 갖고 있다. 엄마·아빠 돈 버느라 고생하는데 용돈 달라고 손 내밀기가 너무 죄송해서, 눈치 안 보고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공부하는 데도 돈 드니까 차비라도 벌어서 보태려고, 독립 자금 모으느라고….
성인들이 품을 팔러 나오는 사연이 다양하듯, 10대들이 노동시장에 나오는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일하는 곳도 더 다양해지고 있다. 생애 첫 노동, 아르바이트 현장에 나선 10대들은 무얼 경험하고 있을까. 품을 팔면서도 노동자보다는 ‘알바생’으로 주로 불리는 청소년 노동자들. 그들의 몸과 마음엔 어떤 흔적이 아로새겨질까.
많은 청소년들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초저임 상태에서 일을 한다. 13살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6년째 온갖 일을 다 해 본 세현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최저임금을 받아본 일이 없다고 한다. 지금 일하는 편의점에서 받는 시급도 3천원. 청소년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대표적 사업장인 신림동 순대촌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첫 시급이 2천원에서 2천500원 정도. 얼마마다 몇 백원씩 올려 줄지는 업주들 마음대로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청소년 1천458명에게 물어보니 52.3%가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 채 일한다고 답했다. 그 중 4분의 1 정도는 야간노동 경험을 가졌는데, 야간에 일하고서도 초과수당을 받지 못한 청소년이 다시 절반을 넘어선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회원들은 지난 6월12일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아동(청소년)노동 근절의 날’에 맞춰 서울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청소년 노동인권 실태조사와 캠페인을 벌였다. |
ⓒ 원진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
“최저임금이 3천770원이면 지금 시급이 3천원이니까 하루 다섯 시간 일한다고 치면 한 시간은 공짜로 부려먹고 착취를 하고 있는 건데…. 너무 화가 나요. 내 한 시간 시급은 어디로 간 거지?” <순대촌에서 일했던 열여섯살 민성이>
업주들이 청소년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청소년들이 최저임금제도도 잘 모를뿐더러 적은 임금을 주고서도 막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단가 안 맞아서 안 쓴다’는 한 업주의 말은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필요한 시간만큼 이 일 저 일 함부로 시켜도 괜찮고, 실수를 했거나 중간에 일을 그만뒀다는 이유로 임금을 떼먹어도 별다른 항의가 돌아오지 않는다. 일하는 게 맘에 들지 않으면 윽박지르고 때리기도 한다.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직원을 쪼면 그 직원이 다시 아르바이트 청소년의 군기를 잡는 중층 규율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청소년들 쓰면 아르바이트 시간도 잘 안 지키고 중간에 쉽게 그만둔다고 업주들은 엄살을 피우지만, 실제로는 규율을 잡기 위한 다양한 불법장치들이 가동되고 있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거나 일하기로 한 시간을 바꾸면 시급의 수십 배에 달하는 벌금을 매기는 곳도 있다. 옷이 지저분하거나 실수를 했을 때 벌점을 매겨 두었다가 한 시간씩 무급으로 일을 하도록 아예 규칙을 정해놓기도 한다. 일을 시작할 때 몇 개월 이상 일하고 후임을 구할 때까진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하는 업주도 있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회원들은 지난 6월12일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아동(청소년)노동 근절의 날’에 맞춰 서울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청소년 노동인권 실태조사와 캠페인을 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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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중노동은 청소년의 일자리도 비켜가지 않는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학기 중 평일에 4시간 이상 일하는 청소년이 70% 가까이 이르렀고 6시간 이상 일한다는 청소년도 30%에 육박했다. 수업이 끝나고 밤늦게까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일하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이들이 이처럼 많다.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청소년 수가 확 불어나는 방학기간에는 아침 일찍부터 중노동이 시작된다. 청소년들도 워낙 시급이 낮기 때문에 ‘이왕 돈 벌러 나선 김에…’라는 생각으로 장시간 노동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하루 노동시간을 7시간, 연장할 경우에도 최대 8시간으로 제한하는 근로기준법은 현실에서 발을 디딜 틈이 없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고, 밥 먹는 시간 30분이 유일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보니 만성 피로와 근육통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아침 9시부터 일해서 밤 10시까지. 아침에 가면 캘리포니아 롤을 계속 만들어야 해요. 수십 개나. 팥빙수도 계속 만들고 만두 계속 찌고 손님들이 심부름 시키면 갖다 주고…. 부엌에서도 일하고 홀 서빙도 하고…. 진짜 다리 아팠어요. 힘들었어요. 손님이 진짜 많았어요.” <뷔페에서 일했던 열여덟살 현주>
일을 빨리 처리하라는 재촉을 계속 받다보니 몸을 돌볼 여유도 없어지고 그만큼 재해 위험도 높아진다. 노동환경이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미리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얘기하는 건 고사하고, 청소년이 알아서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것마저 금지하는 경우가 있다. 업주들에겐 일하는 청소년의 건강보다 일의 속도와 고객 서비스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유소에서 일한 청소년들은 두통이나 피부 질환에 시달린 경험을 대다수 갖고 있다. 패스트푸드 주방이나 뜨거운 음식이나 조리 기구를 날라야 하는 음식점에서는 화상의 위험이 높다.
“일 끝나고 나서 코를 풀면 휴지가 까매요. 좀 지나고 나면 후유증이 생겨요. 그거랑 비슷한 냄새 맡으면 뒷골이 쫙 당겨요. 휘발유 흘려갖고 신발에 들어가고 그러니까…. 일 끝날 때쯤 내 발톱에 기형이 온 걸 알았어요. 기름이 사람 몸에 진짜 독해요. 냄새가 워낙 심해서 마스크를 써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장갑을 끼고 주유를 하는 건데 안 쓰고 일할 때가 더 많았어요. 바쁠 때는 그냥 맨손으로 하는 거예요. 일 끝나고 가면요 여기(손등을 가리키며)가 다 벗겨져요.” <주유소에서 일했던 열아홉살 세현이>
특히 청소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산업재해라 볼 수 있는 성폭력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서비스 산업에서 10대 여성을 주로 고용하는 이유는 그녀들의 성적 매력 때문인데, 한발 더 나아가 업주나 남성 직원에 의해 직접적인 성희롱이 일어나기도 한다. 생애 처음으로 고용관계에 놓이고 노동강도로 정신적 압박도 심한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수치심과 모멸감은 청소녀의 자아상에 큰 생채기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보장받으면서 일할 수 있으려면, 먼저 청소년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바로세울 필요가 있다. 공부해야 할 나이에 왜 굳이 일을 해서 괜한 매를 버느냐는 시각, 나이도 어린데 성인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건 좀 그렇지 않느냐는 시각, 청소년들의 노동은 온전한 게 아니라 보조적인 것이라는 시각 등은 초저임 구조 아래 비틀거리는 청소년들의 노동 현실을 둔감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인식 장벽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아르바이트 청소년을 ‘알바생’이 아닌 ‘노동자’로 바로 보면서 노동인권의 일반 원칙을 청소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요구해 나가야 한다.
근로감독 강화를 비롯해 청소년 고용 사업장의 상습적인 법 위반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실질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노동부는 방학기간 동안 청소년 고용 사업장의 지도·점검에 나서지만, 대상 사업장이 워낙 제한적인데다 실제 근로감독 절차가 당사자와의 면담 조사도 없는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법 위반이 드러나더라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지도·점검시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뿐 아니라 성폭력이나 노동안전 점검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청소년들이 주로 소규모 사업장에 고용된 만큼 근로기준법을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전면 확대하는 일도 시급하다.
최저임금 액수를 포함하여 실제 청소년이 누려야 할 기본 노동인권 내용을 사업장에 직접 배포, 게시하도록 하거나 학교현장에서 교육하는 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프랑스처럼 지역별 청소년 노동 모니터 기구를 구성하여 노동부 근로감독의 한계를 보완하는 한편 청소년 노동인권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과제를 지속적으로 찾아내게끔 하는 일은 어떨까.
이 많은 과제를 단시간 내에 달성하기란 쉽지 않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실태 보고를 계기로 불붙은 관심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도록 노동부와 교육부‧국가인권위 등 관련기관들이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게끔 견인하는 한편 그 무엇보다 청소년 당사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고자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싼 값으로 부림당하는 이들의 존엄을 위하여 다른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관심도 기대한다.
“또 올게. 외로워하지 말고 잘 있어.”
납골당을 떠나는 마지막에 정애정씨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남편을 떠나보낸 지 3년이 되었지만 슬픔의 깊이가 잦아들지 않은 울음이다. 정씨의 남편은 지난 97년 7월 삼성전자(주) 반도체사업부 기흥공장에 입사, 1라인 설비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2004년 10월 급성림프모구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7월 운명했다.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삼성반도체 대책위)와 금속노조는 지난달 19일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자 고 황민웅·고 이숙영 합동추모제'를 열고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자와 관련한 진실규명을 촉구했다. |
ⓒ 원진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
정씨는 남편을 혈기왕성하고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혹시라도 감기기운이 있으면 미리 약을 사서 먹을 정도로 몸을 챙겼던 남편은 군 제대 후 바로 삼성에 입사하여 기흥공장을 떠난 적이 없었기에 정씨는 남편의 백혈병 발병 원인이 공장 내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자신도 기흥공장에서 10년을 일했던 노동자이기에 반도체 공정의 유해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의 생각은 달랐다. 회사는 단지 남편이 백혈병이 걸린 시기에 공장에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반도체 공정이 병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산재여부를 가리는 심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정씨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집단이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조합 역할을 모를 때 그저 삼성은 무노조구나라고 알고 있었다. 노조가 없다는 게 좋은 지, 나쁜 지도 몰랐다. 노조 없어도 월급 제대로 나와, 이익금도 돌려준다고 해, TV에서 보이는 싸움도 없어 굉장히 평화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 일을 당하고 나니 달랐다. 회사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접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삼성이 ‘마이다스 손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으니까 무조건 헌신하게 되는 것 같다는 것이 정씨의 판단이다. 정씨는 연말에 주는 특별성과급이 노동자를 달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업 삼성은 불법 경영승계로도 유명하지만 그에 앞선 것이 무노조 경영이다.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낌새만 있으면 그 주체는 탄압받다 해고되기 일쑤고 해고 뒤에도 끊임없이 감시·추적당한다. 그래서 굴지의 대기업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노조가 없는, ‘미조직 노동자’다. 노조가 없어도 임금과 복지에서 다른 기업에 부족한 게 없는 삼성이라 쳐도 그 외 노동자의 권리는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노동자 건강권이다.
“노조가 없으니까 사원들이 회사 방침에 무조건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김갑수씨. 그는 삼성계열 기업에서 일하다 해고돼 현재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에서 일한다.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 및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산재은폐가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그 자신도 산재를 당했던 사람이다. 생산라인이 멈출 정도의 산재가 발생했고 당사자가 산재를 원했지만 공상처리를 ‘당했다’고 한다.
브라운관을 만드는 공정에서 진공을 시키는 작업을 담당했던 김갑수씨는 브라운관 폭발로 병원에 입원했고 병실에서도 산재로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일반으로 바뀌어 있더란다. 원무과에 알아보니 회사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회사를 방문, “산재로 처리해 달라”고 했지만 그의 뜻은 반영되지 않았다.
브라운관을 진공시키는 과정에서 내부에 찬바람이 닿는다든가 외부에 충격이 가해지면 브라운관이 폭발, 유리파편이 노동자에게 튀어 얼굴·눈·손 등 신체에 상처를 낸다. 그런 사건이 매우 많다. 회사도 이미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모두 공상처리 하기 때문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고가 났을 때 지정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은 뒤 며칠 쉬고 오면 회사 근무기록표에는 다 출근한 것으로 처리하는 식이다.
김씨는 “현장에 있는 화공약품이 인체에 해로운 것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선배들도 다 썼는데 설마 회사가 노동자들 속이고 나쁜 것들을 사용하겠나하고 대충 넘기다보니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사고가 났을 때 산재를 해야 되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산재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회사에서 어떻게 해주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공상처리를 통해 외부에 산재가 알려지지 않도록 하고요.”
김씨는 삼성에서 일하면서 과로사한 동료에 대해 말했다. 그의 유족들은 처음에는 너무 억울해하며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결국엔 개인적으로 처리를 하고 말았다. 문제는 돈 때문이었다. 삼성측은 산재로 인정됐을 때 유족이 받는 보상금액을 미리 계산한 다음 그보다 약간 더 높은 액수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유족들을 갈등하게 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돈으로 억울한 마음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일어난 문제가 전체 노동자에게로 확산되지 않게 마무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삼성의 방식이라고 김씨는 강조했다.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삼성반도체 대책위)와 금속노조는 지난달 19일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자 고 황민웅·고 이숙영 합동추모제'를 열고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자와 관련한 진실규명을 촉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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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삼성에도 안전보건 교육이 있다. 하지만 김갑수씨와 정애정씨가 말하는 교육이란 것은 보호구 착용 정도였다. 공정 중에 사용하는 유해물질이나 산재와 관련한 정보는 없었다.
정씨는 “(안전보건)교육도 회사 입장에서만 하고 노동자 입장에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회사는 법만 피해가면 되니까 환경안전 교육을 몇 시간 받으면 된다는 조항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라고 했다. 기껏해야 보호구 착용방법 정도를 교육했다는 것. 정작 위험한 취급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물량이 많아 바쁜 시기에는 교육이수를 증명하는 종이에 사인만한다. 회사 관리자는 “누가 물어보면 ‘했다’고 하라”는 주문까지 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의 백혈병 문제는 황민웅씨에 그치지 않는다. 2007년 3월 황유미씨, 2006년 6월 이숙영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고 신원을 밝히지 않은 또 다른 2명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또다는 한 명은 현재 백혈병 투병 중이다. 삼성반도체 천안공장에서 일했던 한 여성 노동자도 백혈병을 앓고 있다.
정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환경을 “뉴스나 TV에서 보이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현상뿐이지 그 안의 냄새는 잡지 않는다”며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현장과 실제 현장은 다르다고 말했다. 들어가면서 착용하는 의상부터 화학약품 냄새가 나고 라인에서도 냄새가 나는데 가장 보편적인 작업환경이 그렇다. 더 들어가보면 공정별로 냄새의 정도가 다르다. 특히 작업장 내부에서 떠다니는 파티클(미세먼지)을 잡아야 해서 내부압력이 상당히 높다. 높은 압력은 인체를 짓누르기 때문에 엄청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 팔다리 붓는 것은 예사이고 몸이 허약한 사람들은 가끔 코피를 흘리기도 한다. 정씨의 동료 중 한명은 코피가 멈추지 않아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인위적인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몸이 안 좋으면 대기 상태에서 느끼는 통증의 배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은 일정한 온도·습도에서 일해 좋겠다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라며 “눈으로 안 보이는 압력·화학약품 냄새·불합리한 노동조건은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김갑수씨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과 관련해 “삼성은 백혈병이 산재로 인정을 받느냐, 마느냐보다 제3의 제보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게 제일 시급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최대한 제보가 나오지 않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노동조합이 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김씨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 알지만 삼성이 워낙 거대한 조직이고, ‘삼성권력’이 좌지우지하는 사회를 교육을 통해서도 배우고 피부로도 느끼기 때문에 노동자 개인이 적극 나서기 쉽지 않다”고 했다.
삼성 경영자는 노조가 없어 행복할지 모르나 노동자 입장을 대변하는 조직이 없는 노동자는 행복하지 않다. 노동조합 활동은 임금·복지만이 아니라 노동과 관련된 모든 조건을 유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늘 움직이기 때문이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동자 건강권이다.
정애정씨는 요즘 TV에서 삼성 이미지광고를 보면 채널을 돌린다. “실제로 공장 안은 개차반인데 모르는 사람들은 삼성은 인간적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조직되지 않은 대기업 노동자의 씁쓸한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