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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제일제당 홈피에 실린 고급그릇에 담긴 햇반 이미지 컷>
쌀소비가 매년 줄어들고 있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여전히 '밥심'으로 산다. 밥맛만 좋다면 반찬을 크게 탓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많다. 요즘은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이 알아서 척척 해놓지만 역시 맛있는 밥은 번거롭다 해도 가마솥이나 돌솥으로 지어야 한다. 뜸이 골고루 들고 잘 타지 않을뿐더러 먹을 때 쉽게 식지도 않는다. 게다가 밥맛도 좋고 누룽지와 숭늉마저 구수하다. 하지만 집에서 해먹기는 불편하다.
무엇보다 1인~2인 가구가 늘어나는 세태에선 전기밥솥도 잘 쓰지 않는 집도 늘어났다. 대신 즉석밥이 등장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6년 말에 출시된 CJ제일제당의 '햇반'이다. 햅쌀로 지은 맛있고 신선한 밥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쌀밥을 즉석 식품으로 내놓은 것 자체가 당시엔 꽤나 문화충격이어서 소비자들은 아직까지 즉석밥 하면 햇반을 떠올린다. 김치냉장고하면 딤채, 조미료하면 미원이 연상되듯 즉석밥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전자레인지로 간단히 데우기만 하면 한 끼를 때울 수 있으니 날개돋인 듯 팔렸다.
그런데 햇반 때문에 2년 연속 미슐랭가이드에 선정된 서울 청담동의 정통 고급 일식당이 문을 닫았다. CJ제일제당이 운영하던 '우오스시'다. 객단가가 런치 오마카세(주방장 특선요리) 10만원, 디너 오마카세 20만원이라고 한다. 서민들에겐 문턱이 높은 가격대다. 밥 한 끼 먹는데 이 정도 비싼 돈을 지불할 때는 재료도 신선하고 조리과정에 정성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야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슐랭가이드는 음식 맛, 가격, 분위기, 서비스를 고려해서 평가를 한다고 알려졌는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늘 한결같은 음식 맛이다. 즉 풍미의 완벽성과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오스시는 햇반을 데워서 고급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렸다. 우오스시측은 괜찮다싶었는지 몰라도 햇반을 먹어본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금방 지은밥보다 밥맛이 떨어진다. 햇반 맛의 비결이라면 공장 내부에서 현미 도정을 해서 밥을 바로 짓고 빠르게 포장을 해서 맛을 지키므로, 웬만한 수준의 밥보다는 맛이 좋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데우는 과정에서 풍미가 줄어든다. 자주 먹어본 사람들은 햇반을 명품그릇에 담아놓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판 먹방인 '고독한 미식가'에선 중소도시의 아주 작은 식당도 복장을 갖춘 요리사가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다. 밑반찬하나도 허투로 내놓는 집이 없다. 전통 있는 스시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구도(求道)의 자세'가 배어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갖고 대를 이어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슐랭가이드에 소개된 대기업 일식당에서 플라스틱용기에 담은 인스턴트밥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CJ가 내놓은 해명은 "햇반은 영양과 맛 측면에서 즉석에서 직접 지은 밥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편의적인 발상이 담긴 황당한 발언이다. 햇반이 그렇게 자신 있다면 식자재 원산지 표시하듯 손님에게 고지했어야 했다. 고급식당에 가는 손님은 그에 걸 맞는 대접을 받기 위해 가는 것이다. 우오스시가 사건 발생 후 6개월 만에 폐점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저급한 식당을 선정한 미슐랭가이드도 스타일을 구겼다. 선정위원이 바로지은 밥과 인스턴트밥도 구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선정했는지 궁금하다.
CJ제일제당 홈페이지 첫 머리엔 '세계인의 식탁에 맛있는 즐거움을 전합니다. 현지음식과 한식을 결합한 K-Food로 한국의 맛을 세계화하고, 건강하고 편리한 라이프스타일을 나누고자 합니다'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우오스시 사례를 보면 CJ를 별로 신뢰하고 싶지 않다. 다른 나라에선 이런 망신스런 짓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처/네이버블로그<박상준인사이트>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