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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如來의 意業
(1) 如來意業의 十種譬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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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의 의업(意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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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업(如來意業)의 십종비유(十種譬喩)
부처님 의업을 열 가지로 간단하게 여기서 비교를 한다.
가. 虛空의 依支
佛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心고 佛子야 如來心意識을 俱不可得이니 但應以智無量故로 知如來心이니라
譬如虛空이 爲一切物所依로대 而虛空은 無所依인달하야 如來智慧도 亦復如是하야 爲一切世間出世間智所依로대 而如來智는 無所依니라 佛子야 是爲如來心第一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불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여래의 마음과 뜻과 의식은 모두 얻어 볼 수 없으나 다만 지혜가 한량이 없음으로써 여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모든 물건의 의지가 되지마는 허공은 의지한 데가 없느니라. 여래의 지혜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 지혜와 출세간 지혜의 의지가 되지마는 여래의 지혜는 의지한 데가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마음의 첫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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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虛空)의 의지(依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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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의지한다. 10종 비유 중에서 허공은 모든 것의 의지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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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여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들이
응운하지여래응정등각심(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心)고 :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의업이 도대체 무엇이냐.
불자(佛子)야 :불자야
여래심의식(如來心意識)을 : 여래의 심의식은, 굳이 따지면 우리가 유식에서 보면 기신론 같은 데 심(心)은 제8식이요 의(意)는 제7식이요, 식(識)은 제6분별(分別) 생기식(生起識) 사식(事識)이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이렇게 따질 것은 없고 뭉쳐서 부처님의 심의식은
구불가득(俱不可得)이니 :구불가득이라.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다. 알아차릴 수도 없다.
단응이지무량고(但應以智無量故)로 :다만 단(但)은 마땅히, 지혜가 무량한 이고(以故)는 관용구절이다. 까닭으로써, 지혜가 한량이 없기 때문에, 없음으로써
지여래심(知如來心)이니라 : 지여래심이라. 여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부처님의 마음이 한량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내목을 우리가 앞에서 배울 때 여래현상품에서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고 배운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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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허공(譬如虛空)이 : 마치 비유컨대 허공이
위일체물소의(爲一切物所依)로대 : 허공이 일체 물건의 의지처가 되지만, 하늘에 이름 있는 별은 몇 개 안되고 이름 없는 저 많은 별들도 전부 다 허공에 포함이 된다.
이허공(而虛空)은 : 그러나 허공은
무소의(無所依)인달하야 : 무소의라. 허공은 더이상 어디 기댈 데가 없다. 다른 생각은 전부 다 무념에서 일어났을 수 있지만 무념은 더 이상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가 종착역이다. 그것을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고 한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생각이 완전히 끊어져서 염도염궁무념처 하면 즉득아미타불(卽得阿彌陀佛)이 계신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이냐? 아미타불이 어디에 계시느냐?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다. 허공의 자리다.
허공은 더이상 기댈 데가 없다. 이래서 원효스님께서 해석하시기를 생멸과 불생불멸이 서로 화합하는 것을 아뢰야식이라고 하고, 이것을 마음의 심체라고 하고, 우리 인생, 삶, 마음의 심의식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생멸이 불생불멸에 갖다 붙었다 해야 되지, 불생불멸이 생멸에 갖다 붙었다 하면 안 된다’고 해 놓았다. 그러니까 중생이 부처님한테 갖다 붙어야지, 부처님이 중생한테 갖다 붙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어른과 아이가 같이 합쳐 있다고 해서, 아이가 어른한테 달라붙어 있어야지, 어른이 아이한테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거꾸로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에 생각이 달라붙었다고 해야한다.
자석에 쇳가루가 붙었다 해야지, 쇳가루에 자석이 붙었다면 거꾸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도 그런 뜻이 되겠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원효스님께서 거듭거듭 설한다.
허공과 우리가 같이 있으니까, 허공도 나한테 속해 있다고, 같이 맞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심이 무엇인지, 본심에서 삐져나온 생각이 무엇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뿌리에서 가지가 나온 것이다. 가지하고 뿌리 하고 같이 붙어 있다고 해서, 잎사귀에 뿌리가 붙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원효스님이 그렇게 강조하셨다.
‘기신론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뿌리를 끊어서 가지에 붙이기도 하고, 옷깃을 잘라서 소매에 붙이기도 하는 엉터리 해석을 할 것이다. 마음과 생각이 도대체 구분이 안 된다. 똑똑히 봐라’라고 하였다.
저는 원효스님보다 기신론을 더 많이 봤다.
원효스님은 만 번을 안 읽었는데 저는 만 번을 읽었다.
원효스님은 한 번 읽고 알고 저는 만 번을 읽어도 모른다.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한 열 번만 읽어도 모르면 억울하지 않을텐데 원효스님의 몇 배로 읽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6조 혜능스님은 행자생활을 할 때 이미 다 해 마쳐버렸는데, 신수스님은 일생을 바쳐도 안됐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이 ‘너하고 나하고 똑같다’ 할 수 없고, 훌륭한 분들은 훌륭한 대로 존경을 하고 대접을 한다.
저는 원효스님 때문에 영락공원도 몇 번 갔다 왔다. 혹시 해골바가지 옆에 가면 뭐 얻을 게 있는가 싶어서, 영락공원은 장례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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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지혜(如來智慧)도 : 여래의 지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한 그와 같아서 허공 같아서
위일체세간출세간지소의(爲一切世間出世間智所依)로대 :모든 세간지혜나 출세간 지혜가 의지가 된다.
정각에서 나온 것, 본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본각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만법(萬法)은 귀일(歸一)하지만 하나는 어디로 가느냐? 하나는 갈 데가 없다.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가 가길 어디로 가는가? 갈 데가 없으니까 하나다.
일상(一相)도 무상(無相)이라.
여래의 지혜는 의지할 데가 없나니라.
이런 말들을 육조스님께서는 간단하게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렇게 해 놓았다.
이여래지(而如來智)는 : 여래지는
무소의(無所依)니라 : 무소의다. 더이상 갈 데가 없다.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무소의(無所依)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을 화엄경을 통해서 오늘 다시 한번 다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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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심제일상(是爲如來心第一相)이니 :시위(是爲) 이것이 무엇무엇이다. 여래심(如來心), 부처님 마음의 제일 첫 번째 모양이니, 허공같은 모양인데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출현품 중에 우리가 잘 외우는 게송이 무엇인가?
약인욕식불경계(若人慾識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화엄경 법문에는 약인욕식이 아니다.
약유욕지불경계(若有欲知佛境界)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 싶으냐?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너의 생각을 저 허공과 같이 비워라.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모든 망상 군더더기 다 덜어내고
영심소향개무득(令心所向皆無得) 마음으로 하여금 아무것에도 장애, 걸림이 없게 한번 해봐라. 이런 뜻으로 해놓았다. 허공처럼 텅텅 비워라.
그래서 우리가 영가 고혼청(孤魂請) 할 때 그런다.
영가를 부를 때, 영가시식할 때 부를 때마다 제가 한 번씩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생멸법은 한 번도 얘기를 안 하고 불생불멸법만 이야기한다.
실상이명(實相離名) 법신무적(法身無跡) 전부 다 불생불멸법만 이야기한다. 이런 화엄경을 충분히 읽고 난 뒤에 그런 의식집을 다 만드신 것 같다.
나. 法界와 三乘의 解脫
復次佛子야 譬如法界가 常出一切聲聞獨覺菩薩解脫호대 而法界는 無增減인달하야 如來智慧도 亦復如是하야 恒出一切世間出世間種種智慧호대 而如來智는 無增減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心第二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법계에서 온갖 성문과 독각과 보살의 해탈을 항상 내지마는 법계는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지혜도 또한 그와 같아서 온갖 세간과 출세간의 갖가지 지혜를 항상 내지마는 여래의 지혜는 더하고 덜함이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마음의 둘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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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法界)와 삼승(三乘)의 해탈(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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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여
비여법계(譬如法界)가 : 비유하자면 법계에서
상출일체성문독각보살해탈(常出一切聲聞獨覺菩薩解脫)호대 :항상 나온다. 역부여시 상설법하듯이 상출한다. 무엇이 상출이냐? 일체 성문과 독각과 보살의 해탈을 항상 내지만 많이 나오면 줄어들고, 많이 들어가면 불어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
능엄경에서는 오온을 설명하는데 손바닥을 확 비볐다가 ‘열 이 났는데 열이 어디 갔노?’ 이러기도 하고, 이렇게 손으로 허공을 뭉쳤다가 옮기면서 ‘허공이 얼마만큼 옮겨졌노?’ 라고도 한다.
열나는 것도 본래 없던 것이고, 허공을 옮긴 데도 허공은 옮겨진 바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 진심의 자리를 이야기 한다.
망심은 자꾸 솜사탕처럼 불어나고 구름처럼 불어나는 게 망상이라면, 허공처럼 불어나는 것은 본심이다.
이법계(而法界)는 :그런 걸 갖다가 허공에다 아무리 보태고 빼봐도 안 되니까
무증감(無增減)인달하야 :부증불감을 무증감이라고 했다.
유명한 반야심경의 육불(六不)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구(不垢) 부정(不淨) 부증(不增) 불감(不減)이다. 허공에 꿀을 바른들 꿀이 발라질 것도 아니고, 허공에 똥칠을 한다고 똥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구부정이다. 부증불감 불구부정 본래 없다는 것을 다 똑같이 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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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지혜(如來智慧)도 : 여래 지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그와 같아서
항출일체세간출세간종종지혜(恒出一切世間出世間種種智慧)호대 : 항출 항상 낸다. 앞에서는 상출이라고 나왔었다.
경전은 이렇게 자비롭게 해놓았다. 항출이나 상출이나, 단어를 살짝살짝 바꿔가면서, 일체 세간, 출세간에 갖가지 지혜를 내지만
이여래지(而如來智)는 : 여래의 지혜는
무증감(無增減)이니라 : 더하고 덜함이 없다. 무증무감이라.
부증불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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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시위여래심제이상(是爲如來心第二相)이니 :이것이 여래심의 제 두 번째 모습이니, 본래 없다는 말이다. 진공 완전히 없다.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응당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다. 大海의 水流
復次佛子야 譬如大海가 其水潛流四天下地와 及八十億諸小洲中하야 有穿鑿者가 無不得水나 而彼大海는 不作分別호대 我出於水인달하야 佛智海水도 亦復如是하야 流入一切衆生心中일새 若諸衆生이 觀察境界하야 修習法門하면 則得智慧가 淸淨明了호대 而如來智는 平等無二하며 無有分別이요 但隨衆生의 心行異故로 所得智慧가 各各不同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心第三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큰 바다의 물이 사천하의 땅과 80억 작은 섬 속으로 흘러서 땅을 파면 다 물을 얻지마는 저 큰 바다는 내가 물을 낸다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부처님 지혜의 바닷물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므로 만약 중생들이 경계를 관찰하거나 법문을 닦으면 지혜가 청정하고 분명하게 되거니와, 여래의 지혜는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분별이 없으면서도 다만 중생의 마음과 행이 다르므로 얻은 지혜도 각각 같지 아니하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마음의 셋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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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大海)의 수류(水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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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여
비여대해(譬如大海)가 : 비유하면
기수잠류사천하지(其水潛流四天下地)와 : 큰 바다의 물이 사천하의 땅과
급팔십억제소주중(及八十億諸小洲中)하야 : 팔십억 개의 작은 섬 속으로 흘러서
유천착자(有穿鑿者)가 : 그 구멍을 뚫는 자, 천착자가 있어서, 어떤 천착자가 땅을 파면
무부득수(無不得水)나 : 무불(無不) 뭐뭐하지 아니함이 없다. 득수(得水), 물을 다 얻지 아니함이 없지만
이피대해(而彼大海)는 : 그러나 저 큰 바다는 ‘내가 했다’ 소리를 안한다.
부작분별(不作分別)호대 : 분별을 짓지 아니하되, 분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출어수(我出於水)인달하야 : 아출어수라. 내가 그 모든 물을 냈다고는 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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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해수(佛智海水)도 : 부처님의 지혜 바다의 물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한 그와 같아서
유입일체중생심중(流入一切衆生心中)일새 : 일체중생의 마음가운데 부처님 지혜의 물이 다 흘러들어오지만
약제중생(若諸衆生)이 :만약에 모든 중생이
관찰경계(觀察境界)하야 :경계를 관찰하거나
수습법문(修習法門)하면 : 법문을 수습하면 경계를 비파사나를 하고 수습해서 법문을 닦고 하다 보면
즉득지혜(則得智慧)가 : 즉득해탈이라. 언젠가는 얻은 지혜가
청정명료(淸淨明了)호대 : 맑아져서 청정하고 명료해서
이여래지(而如來智)는 : 부처님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하며 : 동급 비슷하게 돼서, 부처님 불법대로 닦다 보니까 여래의 지혜를 얻었지만, 그러나 여래의 지혜는 평등무이하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다.
촛불 하나에 불을 붙였는데, 촛불이 다른 촛불에 불을 붙여주면 그것으로 그만 끝나버린 것이지, ‘저 촛불 내가 붙여줬다’라고 하면 골치 아프다. 제 촛불 제가 타는 것이다.
전부 다 각자의 역량이고 각자가 평등무이고
무유분별(無有分別)이요 :무유분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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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중생(但隨衆生)의 : 다만 중생의
심행이고(心行異故)로 : 마음과 행이 심행이 다른 까닭으로
소득지혜(所得智慧)가 : 그 얻은 바 지혜가
각각부동(各各不同)이니라 : 각각 부동이니라.
똑같은 나무에 달렸는데도 큰 사과가 있고 작은 사과 있고 맛있는 사과가 있고 맛없는 사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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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심제삼상(是爲如來心第三相)이니 : 이것이 여래 마음의 세 번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응당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라. 大海의 四寶珠
復次佛子야 譬如大海에 有四寶珠가 具無量德하야 能生海內一切珍寶하나니 若大海中에 無此寶珠면 乃至一寶도 亦不可得이니라 何等이 爲四오 一은 名積集寶요 二는 名無盡藏이요 三은 名遠離熾然이요 四는 名具足莊嚴이라 佛子야 此四寶珠는 一切凡夫諸龍神等이 悉不得見이니 何以故오 娑竭龍王이 以此寶珠端嚴方正으로 置於宮中深密處故인달하야 佛子야 如來應正等覺大智慧海도 亦復如是하야 於中에 有四大智寶珠가 具足無量福智功德하야 由此能生一切衆生과 聲聞獨覺學無學位와 及諸菩薩智慧之寶하나니 何等이 爲四오 所謂無染着巧方便大智慧寶와 善分別有爲無爲法大智慧寶와 分別說無量法호대 而不壞法性大智慧寶와 知時非時하야 未曾誤失大智慧寶니라
若諸如來大智海中에 無此四寶면 有一衆生도 得入大乘이 終無是處니라 此四智寶는 薄福衆生의 所不能見이니 何以故오 置於如來深密藏故니 此四智寶가 平均正直하고 端潔妙好하야 普能利益諸菩薩衆하야 令其悉得智慧光明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心第四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큰 바다에 보배 구슬이 넷이 있어 한량없는 덕을 갖추고서 바닷속의 일체 보배를 내느니라. 만일 큰 바다에 이 보배 구슬이 없다면 한 가지 보배도 또한 있을 수 없느니라.
무엇이 넷인가. 하나는 모아 쌓는 보배요, 둘은 무진장이요, 셋은 치성함을 멀리 여읨이요, 넷은 장엄을 구족함이니라.
불자여, 이 네 보배 구슬을 모든 범부나 용과 귀신들은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사갈라용왕이 이 보배구슬이 단정하고 장엄하고 반듯하므로 궁중의 깊고 비밀한 곳에 간직한 까닭이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의 큰 지혜 바다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가운데 네 가지 큰 보배 구슬이 있어 한량없는 복과 지혜와 공덕을 갖추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일체 중생과 성문과 독각과 배우는 이와 배울 것이 없는 이와 보살들의 지혜 보배를 내느니라.
무엇이 넷인가. 이른바 물들지 않는 교묘한 방편인 큰 지혜 보배와, 함이 있고 함이 없는 법을 잘 분별하는 큰 지혜 보배와, 한량없는 법을 분별하여 연설하여도 법의 성품을 깨뜨리지 않는 큰 지혜 보배와, 때와 때 아님을 알아서 그르치지 않는 큰 지혜 보배이니라.
만약 모든 여래의 큰 지혜 바다에 이 네 가지 보배가 없다면 한 중생도 대승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네 가지 보배를 박복한 중생은 보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여래의 비밀한 창고에 둔 까닭이니라. 이 네 가지 지혜 보배는 평균하고 정직하고 단정하고 조촐하고 아름다워서 모든 보살 대중을 두루 이익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지혜의 광명을 얻게 하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마음의 넷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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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경전을 읽든지 법회에 참석하면 누구든지 감동을 한다. 오늘도 상강례를 하다 보니 ‘야 이 소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흘러나왔는가’ 아까 잠시 말씀드리려고 하다가 놓아 버렸던 것이 보현행원품을 해석하시면서 청량국사께서 ‘약부독화엄경(若不讀華嚴經)이면 만약에 화엄경을 읽지 않으면 부지불부귀(不知佛富貴)라 부처님의 부귀함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오늘 여래출현품을 보면서 더욱 더 많이 느낀다.
제가 어디 다른 데 가서 한 1년 강의를 해야되는데 “스님 무슨 과목을 할까요?” 하니까 어른스님께서 “여래출현품이 좋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느 날 보니까 스님께서 이세간품을 당신께서 제일 좋아하신다고 했다. 스님 말씀을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저도 이세간품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굉장히 흡족했다.
또 제가 ‘보리심’ 이런 것을 여러 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같이 공부하면서 유인물로 많이 나눠주었는데 ‘진여’와 ‘보리심’ 에 대해서도 어른 스님께서도 똑같이 감동하고 계셨다. 곁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스님께서 그렇게 증명을 해 주시니 정말 좋다. 또 우리가 같이 공부하는 문수강당이 있어서 좋기도 하다.
제가 조그만 토굴에 있으면서 법회라든지 이런 것은 거의 없고 법문을 한 5분 10분 하고 혼자서 책 보는 것밖에 없다.
백중날은 사람이 조금 모여서 법회를 하긴 하는데 올해는 시식만 하고 말아야겠다, 이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백중이 되어 염불을 하다가 이제까지 중노릇 한 30년 40년 하면서 늘 아는 염불인데도 가슴을 팍 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흔히 아는 ‘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 그 구절이 가슴을 쳤다.
‘늘 있는 말이겠지’ 하다가 ‘여기도 첫 구절로 화엄경을 또 이렇게 얘기하고 있네’ 하였다.
각안기소(各安其所) 각기 편안하다. 그 기소 자기 자리에서,이것을 세주묘엄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각득기소(各得其所) 큰놈은 큰놈대로 작은 건 작은 것대로 얻는다. 오늘 여기도 여래출현품을 읽다보니 그랬다.
부처님은 본래 없지만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라,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다. 자기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부처님 그릇이 작다고 하고, 자기 그릇이 빨간 사람들은 부처님 그릇이 빨갛다고 하는데, 각안기소(各安其所) 국왕지은(國王之恩)이라.
‘내가 오늘날에 화엄경을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스님들뿐만 아니라 위국절사(爲國節士) 충의장졸(忠義將卒) 덕분이다’
우리 선현들이 이 땅을 지킨다고 얼마나 애를 쓰셨는가.
우리가 북한에 태어났으면 쫄딱 망했을 것 아니겠는가? ‘어버이 수령님께’ 이러고 살았을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각안기소 국왕지은이라, 정말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런 분들의 그 은혜가 막중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 장엄 염불할 때 그런 염불을 우리가 떼먹고 잘 안 한다. 석가여래 팔상성도(釋迦如來八相成道) 이런 것도 빨리 하려고 얍삽하게 떼먹고 잘 안 한다. 대충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하다가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하고 그냥 마무리 짓고 만다.
잘 안 하는 대목이기도 하고 소홀했던 대목이 ‘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인데 ‘아 그렇지, 나라 지켜주는 사람들이 쫄병부터 대장부터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순신 장군부터 있었겠는가? 이 땅에서 피비린내 나도록’ 부모님도 얍삽하게 우리가 출가를 했지만 너무 고맙기도 하고, 유통정법(流通正法) 사장지은(師長之恩)이다.
역대 전등 제대 조사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화엄경이라고 금생에 가사 입고 우리끼리 모여서 이렇게 공부하겠는가.
도반들도 그렇고 신도님들도 그렇게 탁마상성(琢磨相成) 붕우지은(朋友之恩)이다.
도반들이나 신도님들이라고 하는 것이 바깥의 분들에게는 동업자나 직원들을 말할 것이다.
제가 그 대목에서 꽂힌 것은 아니다.
제가 꽂힌 구절은 그 다섯 구절이 아니고, ‘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 첫 구절하고 마지막에 ‘뚱’치는 것이 ‘당가위보 유차염불(當可爲報 唯此念佛)’ 거기에서 가슴이 흔들렸다.
그래서 백중날에 ‘이 법문을 해 드려야 되겠다’ 싶어서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백중날 영가들이, 우리 조상들이 천도되게 하려면 지금까지 의 효심으로는 안 된다. 심청이 임당수에 빠져봤자 심봉사는 계속 눈 못 뜨고 있었고, 잔치를 해서 눈을 떴다.
목련존자의 신통력이 아무리 있어도 엄마를 구할 수도 없고 스님들한테 만발공양 잔치를 해서 눈을 떴다.
화엄경의 사상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럼 우리는 잔치할 돈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가위보(當可爲報) 마땅히 보답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유(唯) 오직, 차(此) 염불이라. 오직 이 염불만이 오종대은(五種大恩)에 대해서 갚을 수가 있다. 당가위보 유차염불(當可爲報 唯此念佛)이다.
이대목이 하도 감동스러워서 어른스님께 올라가서 말씀드렸다.
“스님 당가위보 유차염불 제가 30년 40년 중노릇하고 절에 와서 살면서 불교하고 인연이 됐는데 염불에 대해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염불을 정성껏 해야 되겠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도 그렇고 수행할 때도 그렇고, 당가위보 유차염불 오직 이 염불뿐이다. 그 염불이 어떤 것이냐? 방금 여기 나오듯 여래가 출연하려면 어떻게 해야될 것이냐?
악한 사람이 못되게 굴면 우리는 그 사람 다시는 안 본다. 전화번호도 차단해 버리고 ‘꼴보기 싫다’ ‘다시 금생에는 니 볼 일 없다’ 하면서 우리가 살아간다.
경전에는 악한 사람이 나에게 못되게 하더라도 어쨌든지 그 사람을 싫어하거나 염증을 내지 말아야 된다고 하였다.
제가 어제 서울에서 법문을 하면서 ‘야 이거 책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악한 사람 멀리해야지 악한 사람을 용서하고 같이 살라니, 내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고 책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하였다.
여기서 오늘 주제가 그것이다.
제가 소화 안 된다고 해서 화엄경이 틀렸을 수는 없다.
전에는 그랬다.
‘책이 틀리면 틀렸지 내가 왜 틀리는가?’ 이 생각을 가졌었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내 염불이 지극하지 못하고, 염불이라도 나를 위해서 나라를 지켜주고 불법을 전해주고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 걸고 당가위보 유차염불(當可爲報 唯此念佛)을 내가 해본 적이나 있나? ‘내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열반하신 우리 은사 스님께서 늘 ‘인연 공덕을 모르면 그것은 중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었다.
생멸이 아무리 부질없다 하더라도 이 생멸에 대해서 인연공덕을 모르면 안 된다.
그래서 저는 그 뒤로 강의하면서 정리해 놓았다.
‘온전한 생멸이 바로 그대로 불생불멸이다.’
우리가 실수투성이고 시행착오도 많지만 야무지고 온전하게 생멸을 치열하게 양심껏 살아내면 그것이 불생불멸이지 불생불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둘째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선배스님들 계신데 조금 어줍잖고 미안한 말씀이지만 제 다짐을 그렇게 한번 해보는 것이다.
당가위보 유차염불(當可爲報 唯此念佛)
오직 이 염불 뿐이다.
그걸 저는 이제사 알았다. 이제도 잘 모르지만, 유차염불 그렇게 절절한 마음으로 우리 의식집에 써 놓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사 저의 감동스러운 마음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린다. 그런 마음으로 화엄경을 우리가 좀 더 공부하는 것이 어른스님에 대한 보답이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보답이지 않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몸과 목숨을 그야말로 바쳤는가? 설산동자 뿐만 아니라 바깥에 속가도 그렇고 여기 출가도 그렇고 안팎으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화엄경을 읽기까지, 그분들의 은혜를 우리가 갚을 길은 당가위보 유차염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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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大海)의 사보주(四寶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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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불자야
비여대해(譬如大海)에 : 비유하면 큰 바다에
유사보주(有四寶珠)가 : 보배 구슬이 네 개가 있는데, 네 개의 보배가
구무량덕(具無量德)하야 : 각각이 전부 다 한량없는 무량한 덕을 갖추고 있다.
능생해내일체진보(能生海內一切珍寶)하나니 : 하나는 바닷속의 모든 보배를 낸다. 보배가 보배를 새끼 치는 모양이다. 사람도 보배 같은 사람이 너무 많다.
약대해중(若大海中)에 : 만약에 바다 중에
무차보주(無此寶珠)면 : 보배 구슬이 없다면, 사바에 화엄경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나?
내지일보(乃至一寶)도 : 내지 한 가지 보배도
역불가득(亦不可得)이니라 : 있을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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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사(爲四)오 : 네 가지냐
일(一)은 : 첫째는
명적집보(名積集寶)요 : 모아 쌓는 보배요
이(二)는 : 두 번째는
명무진장(名無盡藏)이요 : 무진장이요. 다함이 없는, 베풀어 주고 베풀어 줘도 끝없이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이고
삼(三)은 : 세번째는
명원리치연(名遠離熾然)이요 : 번뇌가, 탐진치가 치근덕거리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사(四)는 : 네 번째는
명구족장엄(名具足莊嚴)이라 : 너무너무 아름답게 명품으로 장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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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사보주(此四寶珠)는 :이 네 개 보주는 미안하게도 해당되는 사람이 있고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일체범미제용신등(一切凡夫諸龍神等)이 : 일체범부나 조금 속되게 사는 사람들이나 제용신들이나 축생들이나 귀신들은
실불득견(悉不得見)이니: 그것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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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어찌한 까닭이냐, 왜냐하면
사갈용왕(娑竭龍王)이 : 사갈라 용왕이
이차보주단엄방정(以此寶珠端嚴方正)으로 : 이 보배 구슬이 단정하고 장엄하다고, 단엄방정 아주 반듯하고 ‘이럴 수가 있나’ 너무 귀하게 생각해서
치어궁중심밀처고(置於宮中深密處故)인달하야 : 치(置),어디에 두었다, 어궁중(於宮中)에, 저 용궁 속에, 심밀처(深密處) 깊고도 은밀한 장소에 숨겨놓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잘 볼 수가 없다.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엄경도 해당되는 사람이 있고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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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여래응정등각대지혜해(如來應正等覺大智慧海)도 :여래 응공 정등각의 큰 지혜바다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한 이와 같아서
어중(於中)에 : 그 가운데에
유사대지보주(有四大智寶珠)가 : 대지혜의 보배 큰 구슬이 있어서
구족무량복지공덕(具足無量福智功德)하야 : 갖추고 있다. 무엇을 갖추고 있느냐? 무량한 복과 지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것을 이엄지극과(二嚴之極果)라고 한다. 부처님은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복과 지혜를 갖추었다.
유차능생일체중생(由此能生一切衆生)과 : 이로 말미암아서 그 무량한 복과 지혜의 공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능히 일체중생과
성문독각학무학위(聲聞獨覺學無學位)와 : 성문과 독각과 학과 무학과, 성문 독각, 성문도 거의 다 학이지만, 학(學)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무학(無學)은 아라한이다.
학과 무학위와 모든 보살 지혜의 보배를 능히 낸다.
급제보살지혜지보(及諸菩薩智慧之寶)하나니 : 일체 중생과, 조금 모자란 사람부터 해서 거룩하고 현명한 잘난 사람들까지, 보살들이 지혜 보배를, 능히 큰 보배 구슬이 다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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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사(爲四)오 : 네 가지냐
소위무염착교방편대지혜보(所謂無染着巧方便大智慧寶)와 : 소위 무염착 물들지 않는 교방편 이것을 능엄경에서는 묘정(妙淨)이라고 이야기한다.묘할 묘(妙)자 깨끗할 정(淨)자.
진흙탕에 있으면서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을 묘정이라 하고, 허공처럼 대상 없이 맑은 것은 흔히 청정이라고 한다. 능엄경 같은 데서는 묘정을 한 수 위로 본다. 여기가 바로 그런 데에 해당되겠다.
염착되지 않는 교(巧) 아주 솜씨 좋은 방편 대지혜의 보배와
선분별유위무위법대지혜보(善分別有爲無爲法大智慧寶)와 : 선 분별 잘 분별한다. 유위법 무위법, 유위법 무위법을 묶어서 일체제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유식에서는 유위94법 무위6법 해서 오위백법(五位百法)으로 나눈다. 구사론에서는 오위칠십오법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유위나 무위나 그것을 잘 분별하는 대지혜 보배와, 그것을 분별해서 설한다.
분별설무량법(分別說無量法)호대 : 무량법을 분별 설하되,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다.
여기서의 분별은 좋은 분별인 근상분별을 이야기한다.
망상분별은 잡념이 많은 것이고, 여기서는 아주 마음을 써서 또렷또렷하게 간을 보고 요량하는 것이다. 무량법을 잘 분별하여 연설해도
이불괴법성대지혜보(而不壞法性大智慧寶)와 : 그러나 법의 성품을 깨뜨리지 않는 불괴법성대지혜보라. 대지혜 보배와
지시비시(知時非時)하야 : 때와 때 아닌 것을 잘 알아서
미증오실대지혜보(未曾誤失大智慧寶)니라: 미증오실이라. 그르치지 않는 잘못됐고 잃어버리지 않는, 일찍이 한번도 실수를 범하지 않는, 착각하지 않는 큰 지혜보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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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목은 글자를 없앴으면 좋겠다.
약제여래대지해중(若諸如來大智海中)에 :만약에 모든 여래대지혜 바다 가운데에
무차사보(無此四寶)면 :이 네 가지 보배 구슬이 없다면
유일중생(有一衆生)도 : 그 어떤 한 중생도
득입대승(得入大乘)이 : 대승에
종무시처(終無是處)니라 : 종무시처니라. 그 들어갈 자리가 없다. 득입할 수 없다. 대승에 들어가는 것이 마침내, 끝내 옳지 못하다. 무시처라고 하는 것, 들어갈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은 그런 말이다.
차사지보(此四智寶)는 : 이 네 가지 지혜 보배를 누구는 못 보느냐?
박복중생(薄福衆生)의 : 박복중생은
소불능견(所不能見)이니 : 소불능견이라. 이런 얘기들이 화엄경 입법계품 근본법회 같은 데는 부처님이 사자빈신삼매를 보여주시고, 보조삼세법계문 방광을 보여도 부처님 십대제자를 비롯해서 모든 비구들은 볼 수가 없었다고 나온다.
보는 사람은 오직 보살 대중들이 보았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박복중생은 볼 수가 없다.
우리 역시 사람을 뻔히 만나고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자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걸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고 한다.
계금취견의 가장 대표적인 분을 자장율사로 본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하고 굉장히 친한데 문수보살을 한번 또 친견하려고 있다가 죽은 개를 지게에 지고 온 노인을 쫓아내버렸다. ‘여기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신성하게 기도하는 도량에 아침부터 재수 없이 죽은 개를 들고 왔다’고 쫓아버렸더니, 노인이 개를 부리는 순간 개는 청사자가 되고 노인은 청사자를 타고 갔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제가 볼 때는 아마 자장스님이 안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자장스님이 그랬는데 느그는 오죽 하겠나?’ 우리 때문에 대표적으로 자장스님이 구정물을 덮어쓰는 것이다.
아난존자도 구정물을 덮어썼지 않은가.
아난존자가 탁발을 나갔다가 마등가한테 걸려서 구정물을 덮어쓰고 사비가라(娑毗迦羅)의 선범천주(先梵天呪)에 걸려서 쫄딱 망해 있다가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를 문수보살이 가져와서 구조해 왔다. 그렇지만 아난존자가 빨가벗겨서 술집에 가서 형편없이 헤맸겠는가?
아난존자는 다문만 했다.
보살문명품에 나온다. 많이 읽고 다문(多聞) 많이 배우는 것은 좋은데 어법(於法)에 불수행(不修行)하면 법에 수행하는 것이 없으면 다문(多聞)도 역여시(亦如是)라.
지식적으로 아무리 박사가 천 개 되고 만 개 되고 똑똑한 척 해봤자 사마타 수행을 닦지 아니하면 자빠진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제일 많이 공부한 사람을 아난존자로 보고 ‘아난존자가 모르면 다 모른다’ 라고 아난존자를 대표로 띄운다. 여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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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치어여래심밀장고(置於如來深密藏故)니 : 여래의 비밀 창고에 둔 연고이니라.
차사지보(此四智寶)가: 이 네 가지 지혜 보배는
평균정직(平均正直)하고 : 평균 정직하다.
중심 자리는 누가 오든지 간에, 저울이 미운 놈 오면 더 무겁고 가벼운 놈이 오면 가볍고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런 걸 갖다가 금강경 오가해에는 이렇게 해 놓았다. 한래한현(漢來漢現)이오 호래호현(胡來胡現)이다. 검은 사람이 오면 검은 대로 비춰주고 흰 사람에는 흰 대로 비춰준다.
이 네 가지 지혜 보배는 평균스럽고 균형이 있고 좌우로 아래위로 치우치는 것이 없다.
이런 것을 팽장석정강심수라고도 이야기한다.
백초임중일미신(百草林中一味新)
팽장석정강심수(烹將石鼎江心水)
강의 중심, 중심 중의 중심 물을 떠서 아무 사심 없이 차를 한 잔 끓여 올리니, 이 차 잘 마시고 영가야 중심 좀 잘 잡아라, 하는 말씀이다. 평균 정직 원사망영헐고륜(願使亡靈歇苦輪) 이런 것, 평균 중심점을 잡고 정직하고
단결묘호(端潔妙好)하야 : 아주 단정하고 깨끗하고 묘호라. 너무너무 아름답다. 화장을 안 해도 아름다운 것이 묘호일 것이다.
보능이익제보살중(普能利益諸菩薩衆)하야 : 모든 보살 대중들을 두루 이익되게 하야
영기실득지혜광명(令其悉得智慧光明)이니라 : 모두 지혜 광명을 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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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시위여래심제사상(是爲如來心第四相)이니 : 이것이 여래 마음의 제 네 번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응당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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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이가슴???
개금취견???
고맙습니다
@연기의 도리와 인생을 알고자 감사합니다^^ 계금취견이네요.
고맙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