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1 김제 금산사 답사
자유인 조동화는 김제 모악산에 위치한 금산사를 답사하였다.
금산사 사찰에 가는 이유는 잠시나마 속세의 온갖 망상을 잊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고 산사의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함이지.
옛말에 “인생70고래희”라는 말이 전해 오지만 70대에는 건강해야 하고 세월낚는법을 터득해야 즐거운 인생을 보낼수 있으리요.
금산사는 1400여년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유일하게 대웅전이 없고, 국내유일의 3층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미륵전이 중심인 미륵도량이다.
금산사 주차장에서 금산사 경내까지 약 1km 걸어서 가는 산책로 길에는 애기단풍이 별로 없고 큰 은행나무들이 있어 낙엽이 많이 떨어지고 은행열매가 길 바닥에 떨어져 있어 가을 경치 구경하는 재미는 별로 못 느꼈다.
금산사 경내로 들어와 보제루를 지나 좌측에 범종각이 있어 범종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범종각은 작은 사찰에는 범종만 비치하는데, 금산사는 큰 사찰로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의 4개의 사물(四物)이 봉안되여 있다.
사찰에 가면 대웅전등 전각에 한문으로 주련이 걸려 있는데 금산사에는 주련이 없고 편액만 걸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산사에는 절의 중심인 대웅전이 없기에 미륵전이 대웅전을 대신하고 있었다.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의 최대 사찰로 금산사의 창건주는 진표율사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계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온 대한불교조계종 17교구의 본사이다.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의 대표적인 승려 중 첫째로는 고려 문종 때의 혜덕왕사[1038~1095]이다.
불교를 믿지 않는 나는 1400년 시공을 뛰어넘는 금산사의 절간을 둘러보며 마음이 편안함을 체감할수 있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달래고 영원불멸의 삶을 살다간 수많은 스님들의 삶을 연상해보았다.
조동화의 벗님들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모악산금산사 현판이 걸려 있는데 금산사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 부른다. 이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부터 부산히 흩어진 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로 향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1975년에 세운 목조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현판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이다.
금산사 승용차 주차장부근에 나무아미타불 비석이 있어 찰깍했다.
나무 아미타불(南無 阿彌陀佛) : 『아미타불』에 귀이(南無)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은 범어인『Amitayus-buddha』의 음역(音譯)으로서 서방정토(西方淨土 : 부처님이 계시는 깨끗한 세계)의 극락세계에 있다는 부처의 이름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원(大願)을 품은 부처로서 모든 중생들이 이 부처를 念(념 : 생각)하면 사후(死後)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태어날 수 있다함.
개화문(開化門)
금산사(金山寺) 입구에는 금산사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성벽은 사라지고 성문만 남아 있다.
성문에는 개화문(開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견훤성문’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보제루(普濟樓)
절의 중심 영역의 문 역할을 하는 것이 보제루(普濟樓)이다.
보제는 널리 중생을 극락세계로 이끈다는 뜻이라고 한다.
보제루 안을 개산천사백주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금산사 범종각은 보제루 지나 좌측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반듯하게 정돈된 석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불전사물인 범종(梵鐘)ㆍ법고(法鼓)ㆍ목어(木魚)ㆍ운판(雲版) 등을 모두 봉안하고 있다. 범종은 1969년‚ 운판은 1986년에 조성되었고 법고와 목어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범종각은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의 네 범음구를 봉안한 전각이다.
범종각에서 울려나온 소리는 곧 우리들 일심의 작용이요,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인 것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 (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불교의식은 중생들을 착한 길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 주는데, 이런 의식에는 장엄한 절차가 따르며 뭇 중생들의 심금을 울리는 신묘한 운율이 따르기 마련이다. 종소리는 명부세계의 중생을, 북소리는 모든 축생들을, 목어소리는 물 속 생물을, 운판소리는 날짐승을 제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범종(梵鍾)
일명 대종, 경종이라고 하며 조석예불과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33번을, 저녁에는 28번을 울립니다. 범종을 울리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법고(法鼓)
법을 전하는 북입니다. 법고는 보통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합니다.
목어(木魚)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배부분을 파내어 두 개의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냅니다. 목어를 치는 이유는 수중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울린다고 하고, 물고기는 언제나 눈을 뜨고 살기 때문에 수행자는 늘 깨어 있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운판(雲板)
청동 또는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원래 중국의 선종사찰에서 부엌이나 재당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하나 차츰 불전사물로 바뀌었습니다.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합니다.
대적광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로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국보 제62호)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금산사 당간지주(보물 제28호)
깃발을 "당"이라 하고 깃발을 매는 긴 장대를 "간"이라 한다.
이러한 긴 장대를 지탱해주는 돌기둥이 "지주"역할을 하기 때문애 "당간지주"라한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신성한 영역을 나타내는 깃발을 걸 때 주로 사용한다.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습니다.766년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존상을 세우고 미륵전을 지어 점찰법과 미륵십선계로 민중을 교화하였습니다.1079년(고려 문종33) 혜덕왕사 소현 화상이 대사구와 봉천원구, 광교원구 등 총 88당 711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였고, 35부 353권의 불교전적을 판각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유가종찰과 미륵성지의 위상을 한층 격상시켰습니다. 1592년(조선 선조25)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뇌묵 처영대사는 천여명의 의승군과 함께 왜군을 격퇴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1635년(조선 인조13)수문대사가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 15명의 화상과 함께 35년간에 걸쳐 대적광전과 미륵전, 대장전 등 대사구역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금산사의 말사로 김제시의 귀신사·망해사·문수사·청룡사·학선암·흥복사, 무주군에 관음사·백련사·북고사·안국사·원통사, 완주군에 단암사·대원사·송광사·안수사·안심사·옥련암·원각사·원등사·위봉사·정수사·학림사·화암사, 진안군에 고림사·금당사·옥천암·천황사가 있다. 군산시에 불지사·상주사·은적사, 전주시에 극락암·금선암·남고사·법우사·서고사·자하원 포교당·진북사·천고사·칠성사·학소암, 남원시에 귀정사·대복사·덕음사·선국사·선원사·실상사, 익산시에 관음사·남원사·문수사·백운사·법성사·사자암·숭림사·심곡사·연국사·자명사, 장수군에 신광사·영월암·팔성사, 대전광역시에 죽림정사 등이 있다.
김제 금산사 일원은 2008년 12월 18일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었다. 금산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0점 등 총 11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국보로는 제62호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 있다. 보물로는 제22호 금산사 노주(金山寺露柱), 제23호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 제24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제25호 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제26호 금산사 석종(金山寺石鐘), 제27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제28호 금산사 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제29호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제828호 금산사 석등(金山寺石燈), 제827호 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 등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 비 보물24호===
-보물 제24호
-위치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금산사내
-생애 ; 1038~1096 59세 입적
금산사(金山寺)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慧德王師)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慧德)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諡號)를 '혜덕(慧德)', 탑명(塔名)을 진응'(眞應)’이라 내리었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비문(碑文)을 쓴 사람은 당대의 명필(名筆)인 정윤(鄭允)이라는 설이 있으며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예종 6년(1111)으로 혜덕(慧德)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