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세에 총각대통령이 된 GC는 2년 후 49세 때인 1886년 느닷없이 결혼한다고 발표한다. 신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통령은 결혼 5일 전에야 신부의 정체를 밝혔다.
신부는 놀랍게도 21세의 후랜씨스 훨썸(Frances Folsom). 28년 연하, 그것도 옛날 변호사 시절 동업자였던 친구의 딸이었다. 결혼 전 그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신부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걸 농담으로만 생각했었으나 실제로 그는 친구의 어린 딸을 미래의 아내로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후랭크(후랜씨스의 애칭)는 코흘리게 시절부터 GC가 무척 귀여워했다. 그녀가 11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마차 경주대회에서 전복)로 사망하자, 평소에 “앙클 클리브”라고 따르던 GC가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 그녀 교육을 책임졌다. 9년이 지나 GC는 대통령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20세 대학 졸업생이 되어있었다. 그녀가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한 GC는 그녀에게 편지로 청혼, yes 대답을 받는다. 결혼식은 백악관에서 조촐하게 치루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당시 사진과 그림을 보면 신부는 미인이었다. 역사상 최연소 First Lady가 된 후랭크는 미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다. 80년 후의 재클린 케네디 같은 인기인이 되었다. 노총각 신랑은 5휘트 11인치(180cm)의 보통 키에 체중 250파운드(113kg)의 거구였다.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 같았다.
행복한 신혼 2년이 금방 지나가고 또 대통령 선거 때가 되었다. 당연히 GC는 재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투표에서는 49% 대 48%로 앞섰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233대 168로 져서 재선에 실패했다. 1889년 3월(당시는 1월이 아니고 3월이 교체시점이었다) 백악관에서 떠날 때 부인 후랭크는 백악관 주방장에게 "4년 후 우리는 꼭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쓰던 그릇에는 손대지 말라"고 일렀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1892년 대선에서 다시 당선된 클리블랜드는 24대 대통령으로 재취임했다. 연속 8년 재임 대통령은 많이 있었지만 4년을 쉬고 다시 당선된 대통령은 그가 처음이었다. 현직 대통령 오바마는 44대 대통령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미국 대통령이 현재까지 모두 44명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43명이다. 22대와 24대 대통령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2기 재임기간에 극심한 불경기가 휩쓸었다. 뾰족한 경기회복 정책을 내놓지 못한 그의 인기는 1기 때보다 못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미국 사회의 부정부패를 상당히 많이 척결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대기업과 유착하는 것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한 것, 그리고 시카고 등 대도시 강성노조들을 공권력으로 약화시킨 것은 큰 공로로 인정 받고있다.
역사학자들이 높히 평가하는 대통령 클리블랜드
역사학자들은 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의회 특히 상원의 횡포에 맞서 행정부의 권한을 증대시킨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 413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나 일부 대기업 이익만을 위해 통과시킨 법안은 전부 veto했다. 그의 거부권행사 건수는 그 전 대통령 21명의 거부권행사 건수를 다 합친 것 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그는 Veto President라는 별명을 얻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또 장관이나 고위공무원을 임명할 때는 정당소속이나 자신과의 친소관계를 떠나 오직 본인의 자질과 능력을 기준으로 선택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점 또한 박근혜 대통령이 본받아야할 대목이다.
한편 클리블랜드 부부는 28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좋았고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하버드를 나와 변호사가 되어 정치에도 뛰어들었으나 거물은 되지 못했다. 둘째 아들은 하버드에서 연극을 전공했으나 역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GC가 자기 아들로 인정한 사생아는 생모가 정신이상이 되는 바람에 부유한 집에 입양되어가 후에 의사가 되었다. 장녀는 어려서 병으로 죽고 나머지 두 딸은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1908년 71세로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 자택에서 심장마미로 별세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항상 바른 일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였다. 당시 43세에 불과했던 부인은 5년 후 48세 때 프린스턴 대학 고고학 교수와 재혼해 살다가 1947년 83세에 타계했다. 그녀의 유해는 프린스턴 시에 있는 클리블랜드 대통령 묘 옆에 묻혔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