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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교수 '붓다의 철학'(10-11) /bbs]
우리들은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의 종교" - 깨달음이라는 말만 있지 내용은 없어
목적지도 분명하게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길을 가는 격..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나? 연기를 깨달으셨다.
가장 현실적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부처님 답: 팔정도
반야바라밀 = 통찰을 통해서 진실을 깨달아 가는 것
함부로 "깨달았다"고 하면 안 됨 (아라한은 많았지만 붓다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알게된 것이고 (스스로 자력으로 깨달은 것은 부처님뿐)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 12연기 ===
반야바라밀 = 통찰을 통해서 진실을 깨달아가는 것
부처님은 통찰로 12연기를 보신 것이다. (이론이 아님)
*노사,우비뇌고 - '근심,슬픔,심란한 것,고통'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김
모든 괴로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 그래서 모든 고(苦)는 사실 老死의 문제
*생
*유 - 자기존재. 문제가 되는 '늙고죽음,괴로움'은 "나"의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유(有)의 산스크리트어는 bhava(브하바, 영어 동명사being)
Be는 점 같은 것. 점이 계속되면 선(being,有)이 되고, 그러면 양끝이 생겨난다(生,老死)
그래서 有→生→老死
*취 - 우빠다나(upadana 연료).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불이 유지되려면 연료가 계속 공급되어야 하듯, 우리는 음식을 통하여 계속 존재.. 네 가지 음식
- ①단식(덩어리 음식. 인도에선 손으로 동글동글 덩어리로 만들어 먹어 - 色身 유지. '삭신'은 여기서 온 말),
②촉식 ③의사식 ④식식 ... 사식(四食)과 취(取)는 같은 말
우리 몸과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계속 변해 왔는데,
그 무상한 것을 취해 가지고 '내 몸, 내 마음'라고 붙들고 있는 것.
이미 지나가고 없는 것을 '나'라고 계속 붙들고 있으니까 집(集)=취(取)
'나'라는 존재성은 계속해서 取하고, 取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나'=과거 경험이 쌓인 형태 = 集(싸무다야 samudaya)
(色: 물질이 아니고 몸. 부처님은 물질에 대한 관심 없어, 오직 괴로움)
방하착(放下着)은 이 取를 끊어 버리는 것
*애 - 集을 모이게 하는 것, 갈애, 욕망
*수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갈망한다
즐거움을 느끼면 그 즐거움을 또 느끼고 싶어 하는데..
그걸 하고 있는 '나'가 있는 것 - 공간적으로는 피부를 경계로 그 부피만큼 '나'가 있고,
시간적으로는, 갈망에 의해서 계속 取해지고 있으면서 '나'라는 존재가 시간적으로 구성된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존재하는 존재가 된다)
有에는 ①욕유, ②색유, ③무색유가 있다
①욕망의 주체로서의 나 (욕심이 일어날 때 '나'가 나온다)
②지각된 나 (거울을 보고 '나(色身)'로 인식. 자신의 모습을 유지,보존,재현하려고 한다)
③의식이나 생각을 '나'라고 잡고 있다
有의 구체적 구조 = 오취온
살면서 어떤 느낌.. 즐거움은 유지하고 또 느끼고 싶어 하고, 괴로움은 피하려고 하면서
고락의 감정에 의해서 자기가 취해지고 바깥세상의 좋은 것, 나쁜 것이 분별되기 시작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 촉
*촉
지금까지 불교를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촉(觸)을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내 안에 식이 눈을 통해서 밖의 대상을 만나는 게 촉이다, 이 삼사화합이 촉이다'
'내 안의 마음(식)이 눈을 통해서 밖의 세상을 본다.'
- 부처님이 그걸 촉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눈으로 대상을 보면 식이 생기고, 그 식이 생겨가지고.. 어떤 대상을 볼 때 촉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식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촉을 할 수 없다
촉은 굉장히 애매한 단어인데 요즘 쓰는 말로 하면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에 처음부터 컵이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컵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어야만 컵을 보게 된다
촉이라는 것은 자기 의식 속에 있을 때 촉이다
- 우리 속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자라가 어떤 존재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마다 다르다
자라에게 물려본 사람 - 무서워하는 의식 - 경기(촉) -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느낌(受)
용봉탕을 맛있게 먹어본 사람 - 안 놀라(무서운 놈이 아니라 맛있는 놈) 군침 흘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 이상한 사람? 아니다. 왜? 모두 식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니라 그의 과거를 볼 수 있다 - 연기법
http://cafe.daum.net/santam/IQZL/377
*육입
육입이 '안이비설신의'라면, 눈이 어떻게 무명에서 연기하며, 부처님은 눈 없어졌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보는 놈'이 있다고 생각 (보는 놈이 있어야만 보게 돼)
부처님 "육입처는 내가 깨달은 법이다." (눈귀코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알게 되었다?)
육입의 바른 이해 없이 수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육근은 육입이 아니다)
육입 = 인지활동 속에 자아가 들어있다
*명색 - 육체와 정신? 아니다
명(名)=나마(nama)=이름, 색(色)=루빠(rupa)=형색(형태적인 모습)
(명색의 명(名) = 이름,개념,언어)
우리가 보는 모든 존재는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에 의존해서 저렇게 이름과 형태가 드러나 있을까?
*식
부처님 "분별의식(識)이 있는 곳에 이름과 형색(명색)이 있다.
분별의식에 의존하여 이름과 형색이 있다.
이름과 형색이 있는 곳에 분별의식이 있다.
이름과 형색에 의존하여 분별의식이 있다." (상호의존관계)
맛 - 우리 마음에 알고 있는 맛의 종류만 지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맛 존재 (짠 것도 아니고 단 것도 아니고 묘한 맛 등)
부처님 "분별의식은 되돌아가서 이름과 형색에서 더 이상 가지 못 한다.
늙거나 태어나거나 죽거나 소멸하거나 생긴다면 그것은 바로
이름과 형색에 의존하고 있는 분별의식일 따름이다."
즉, 내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
다 분별의식(識)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씀.
'이름과 형태'로 분별하니까, 그런 '대상'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
부처님 "분별의식에 의존하여 이름과 형색이 있고,
이름과 형색에 의존하여 6입처가 있고, 6입처에 의존하여 대상접촉이 있고..
생에 의존하여 노사와 근심, 슬픔, 고통, 우울, 고뇌가 함께 있다.
이와 같이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의 모여 나타남이 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식과 명색에 의존하는 여러가지 망상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때 집(集)이라는 표현을 쓴다 -- 집성제 발견
(집성제 이해하려면 연기에 대한 통찰과 이해 필수)
부처님 "모여 나타남(集)이다! 모여 나타남(集)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와 같이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法)들에 대하여
안목이 생기고, 앎이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오." (---> 깨달음)
이어서 역순으로 관하심 "... 이름과 형색이 없는 곳에는 분별의식이 없다.
이름과 형색이 그쳐 사라지면 분별의식이 그쳐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오.
'참으로 나는 깨달음의 길을 이해했다' (아직 깨달은 게 아니라 이해 = 見道, 진리의 인식)
이름과 형색이 그쳐 사라지면 분별의식이 그쳐 사라지고,
분별의식이 그쳐 사라지면.. 생이 그쳐 사라지면 노사와
근심, 슬픔, 고통, 우울, 고뇌가 그쳐 사라진다.
이와 같이 순전한 괴로움덩어리의 그쳐 사라짐이 있다. (12연기 통찰을 통한 사성제의 깨달음)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그 옛길, 옛날의 정각을 성취한 분들이 따라간 오래된 지름길인가?
.. 나는 그 길을 따라갔다오. 그 길을 따라가서
노사를 체험적으로 깨달았고, 노사의 모여 나타남을 체험적으로 깨달았고
노사의 그쳐 사라짐을 체험적으로 깨달았고,
노사의 그쳐 사라지는 길을 체험적으로 깨달았다오."
직접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12연기의 모든 것들이 고,집,멸,도를 체험 = 수행
수행=8정도 = 정견을 가지고 연기를 통찰해 가면서 삶이 변하고 의식이 변한다
12연기를 머리로 이해해도 삶의 변화 없어, 왜? 集이 있으니까.
그 集을 해체하고 멸해야 변화가 온다 -- 끊임없는 수행 필요
*행
흥미로운 사실은, 실천을 하다보니까 行이 나온다
부처님이 명상을 통해서 통찰할 때는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를 깨달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체험적으로 실천해 보니까 행과 무명 완성
행(行) -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들..
*무명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행할 때와 알고 행할 때의 차이 때문에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행이 있으니 식이 있다는 12연기 완성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삶에서는 끊임없이 명색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알고 명색(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을 멀리 하고, 지우고
체험적으로 수행을 통하여 통찰해 갈 때.. 12연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
12연기는 불교대학 1,2년 다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단어 12개 ㅎㅎ) 부처님 "이 법은 심심미묘하다."
아난다가 "참 심오하긴 한데 제가 보기에 별로 어려운 것 같진 않습니다"라고 했다가
부처님께 아주 혼났다. "연기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는 고통 속에 빠져 있었다.
이걸 알아야만 인류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12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 = 인류를 구원할 빛
우리는 세상을 있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예: 부시맨은 콜라병을 신이 내려보낸 것으로..)
유위 - 行에 의해서 조작된 것
12연기 각 항목은 모두 集하여 있는 것인데..
'老死가 集한다' = 생물학적으로 늙고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의식 속에 '늙고 죽는다'는 생각들이 계속해서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쌓여있는 망상 덩어리들을 깨뜨리고 소멸시켜 가는 것이 수행이다.
명색이 모여 있는 것이 곧 식이 모여 있는 상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식이 형성되고, 그 식에 의해서 세상이 드러난다
(이것을 가리켜 "모든 것은 업보"라고 하는 것이다)
삶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것 (=자신이 조물주)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서 '나'를 등장시켜 = 육입
육입에 의해서 접촉하는데, 의식의 내용을 접촉
팔정도는 곧 환멸문 (무명을 멸하면.. = 정견으로 살면..)
구차제정을 통찰하는 과정에서 연기가 관하여진다
부처님이 그냥 머리속으로 연기를 논리적인 사유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에 '있다,없다'는 생각들이 다 망상이라는 것을,
行에 의해서 조작된 識에 의해서 드러난 세상임을 깨닫다 = 멸진
깨달음을 통해서 모든 識(분별)을 버린다 = 멸진(滅盡)
분별이, 어떤 것들이 버려지나 하면 상과 수가 버려져서 = 상수멸정(想受滅定)
부처님 "나는 이런 식으로 진리를 인식하였다"
불교는 진리를 이렇게 인식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영국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광야를 방황하다가 알게된.. 옛 선인들의 훌륭한 마을 http://cafe.daum.net/santam/IaMf/458
덕생동자 유덕동녀 - '이 세상은 환상 같은 것' http://cafe.daum.net/santam/IaMf/496
(내 필름 내가 돌려) '여몽환포영' 해설 <종범스님> http://cafe.daum.net/santam/IQZL/530

첫댓글 큰 공부가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_(())_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