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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神 - , 스페인어: La Mano de Dios)은 ,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경기 도중, 디에고 마라도나가 터뜨린 골을 말한다. 마라도나가 골키퍼와 헤딩 경합하면서 손으로 공을 건드리는 반칙을 했으나 주심은 이를 득점으로 인정했다. 이 골은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축구 팀 사이의 라이벌 관계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6월 22일은 마라도나교의 오순절이다.
2001년 6월 22일 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 호세 카레라스등 ‘세계 3대 테너’가 모였다. 1990년 7월 7일 로마 월드컵 결승전 전야제에서 시작된 ‘쓰리테너 콘서트’가 한국에까지 건너온 것이었다. 약 5만여 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세계의 목소리들이 마지막 불꽃으로 타오를 때 사람들은 음악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1990년 로마 월드컵 전야제에서 시작, 엄청난 성공을 거둔 '쓰리테너 콘서트'
카레라스, 도밍고, 파바로티 순으로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먼저 관객들을 <토스카> <아를르의 여인> 등 오페라의 세계로 안내했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세 명이 함께 부른 ‘로망스 메들리’, ‘세계민요 메들리’, ‘할리우드 메들리’ 등 메들리 시리즈였다. 전성기가 지난 파바로티 같은 경우는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우리들은 세계적인 스타들의 인기에 마음껏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연을 관람한 시인 김정환은 “천민자본주의의 환호와 비명소리에 뒤범벅이 된 채로 통일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을까?”라며 아이러니한 평가를 내렸다.
'쓰리테너'서울 콘서트 중. 왼쪽부터 도밍고, 카레라스, 파바로티
서울공연으로 19회를 채운 ‘쓰리테너 콘서트’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만큼 거센 비판의 목소리도 들어야 했다. <빅 파바로티>의 저자 알베르토 마티올리는 쓰리테너 콘서트가 세 성악가의 경력에서 “가장 저속하고 우아하지 못한 쇼로 기억될 것이다”라며, “그들의 공연은 클래식 콘서트의 장르에 속하지 않았고, 아마 콘서트 자체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공연에는 오페라 팝, 마케팅, 텔레비전 이벤트 등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무대 앞의 관객이 아니라 차라리 집에 있는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냉정하게 꼬집었다. 어쨌든 이런 이벤트가 가능했던 것은 세 성악가가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이다. 음악사적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1990년 로마에서의 공연실황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70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니 쓰리테너의 콘서트가 올린 상업적인 성공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셈이었다.
특히 파바로티의 인기는 신화적이었다. 그는 성악가로는 가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20세기 초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엔리코 카루소 가 있었지만, 카루소는 대중매체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파바로티의 최고 라이벌인 도밍고의 경우도 파바로티의 대중적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영화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가 “파바로티가 센트럴파크에서 노래를 부르면 꾀꼬리나 쥐도 와서 들었다”라고 말했겠는가. 서울 공연에서 자신의 뚱뚱한 몸매는 가급적 화면에 내보내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그는 비만이었으나, 전성기 때만 해도 서양인들에게 자신들과 비슷한 몸매의 파바로티는 오히려 친근감을 더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참으로 행운아이기도 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태생적으로 성악가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페르난도는 빵 굽는 일을 했지만 뛰어난 테너 가수였다.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만 페르난도는 무대 체질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직업적인 성악가의 길을 가지는 못했다. 파바로티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베니아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조반니 마르티넬리, 엔리코 카루소 같은 성악가들의 음반도 매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담배 제조공장의 노동자였기 때문에 루치아노는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고 유모에게 의지해야 했다. 루치아노의 노래 솜씨는 아버지를 닮고 활달하고 대담한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으니, 그야말로 성악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다. 게다가 유모의 젖을 함께 나눈 다른 젖먹이는 공교롭게도 미래에 유명한 소프라노가 되어 루치아노와 함께 노래 부르게 되는 미렐라 프레니 였다.
파바로티는 타고난 건강체질이었는데, 어쩌면 열두 살 때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심각한 병에 걸렸다가 기사회생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로 인해 그는 늘 건강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했으며, 그것이 40년 이상을 현역에서 뛰는 경이로운 활동기간을 보장해주었다. 어린 시절에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것과 장년에 비행기 사고 경험은 파바로티에게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게 했다. 파바로티는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에 앓은 큰 병이 준 교훈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맞닥뜨린 경험이 그 이후로 나를 삶에 대해 큰 가치를 두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한 내 인생을 풍성하게 살기를 원했다.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임을 안 것이다.”
공연 도중 특유의 하얀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내고 있는 파바로티
어린 시절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를 만난 것은 파바로티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1947년 이탈리아 최고의 성악가였던 질리는 로시니 합창단의 기획에 따라 파바로티의 고향 모데나의 시립극장에서 <라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부르게 되었다. 음반을 통해 질리의 노래를 들었던 파바로티는 경애하는 예술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극장으로 달려가 질리가 연습하는 것을 구경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거장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던 파바로티는 노래가 끝나자 벅찬 가슴을 안고 그에게 가서 말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은 테너 가수가 되겠어요.” 질리는 어린 파바로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해주었다. “좋아, 좋아, 멋진 친구! 열심히 해야 한다, 알겠지?” 파바로티는 물었다. “성악 공부를 얼마나 오래 하셨어요?” 질리의 대답은 파바로티에게 평생의 교훈이 되었다. “너는 지금 내가 성악 공부하는 걸 본 거야. 난 항상 공부하고 있단다. 지금도 말이야.” 아무리 출중한 음악가일지라도 공부를 한시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어린 성악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진 교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두 길을 다 갈 수 없으니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상황이 파바로티에게 재현되었다. 첫 번째 길은 공부를 계속하거나 운동을 하여 교사가 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길은 자신의 소질을 십분 발휘하여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파바로티는 수학을 잘하여 평생 수학을 가르치고 싶기도 했고, 축구 선수로 뛰다가 체육교사가 될 수도 있었다. 교사가 되는 길이 당시 파바로티의 실력으로는 실패 확률이 별로 없는 길이었다면, 성악가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극소수만이 성공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남다른 의지와 노력, 건강과 행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극력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호의적이었다. 어머니는 늘 “너의 목소리는 나를 크게 감동시킨단다. 한번 더 불러봐라”라며 격려하곤 했다. 어머니의 격려로 용기를 얻은 파바로티는 부모에게 30세가 되어도 성악가가 되지 못하면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하고 험난한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파바로티의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끝났다. 파바로티는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보조교사 일도 하고 보험 영업 일에도 뛰어든다. 그러나 보험을 권유하기 위해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성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다. 음악의 길에 들어선 파바로티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대중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실력자이자 좋은 음악선생인 아리고 폴라, 에토레 캄포갈리아니와의 만남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물론 이런 스승들과의 만남보다도 더 중요한 파바로티의 성공 비결은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항상 밝게 생활하는 낙천적인 성격과 꾸준한 노력이었다.
1955년 6월 30일, 19세의 파바로티는 폴라 앞에서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 중 <자유의 몸이 되어 떠났다고>를 불렀고, 폴라는 그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폴라는 훌륭한 제자를 거장으로 만들 수 있는 스승이었다. 폴라는 훗날 파바로티와의 첫 만남에 대해 “난 파바로티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오늘날과 같은 매우 훌륭한 테너 가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목소리가 훌륭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일에 대해 남달리 노력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1995년 12월 폴라의 음악경력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파바로티는 이렇게 말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저는 완벽한 발성을 하려면 아직도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합니다. 혹시라도 그걸 잊어버리면 바로 문제가 생기죠. 처음 2년 동안 선생님의 레슨은 무료였습니다. ‘파사지오’(중간 음역에서 높은 음역으로 바뀌는 지점)가 좀처럼 잘 되지 않아 선생님께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해낼 수 있을 거야. 교양인인 나도 했으니 아직 짐승인 너는 당연히 해낼 수 있지.’ 저는 폴라 선생님께 배우면서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한 말은 언제나 옳았죠. 노래를 하기 위해서 6개월 동안 모음 창법을 공부했습니다. 지겨웠지만 역시나 선생님의 방법이 맞았어요.”
2005년 중국 투어 콘서트에서 캐주얼한 의상으로 무대에 오른 파바로티
폴라가 완벽한 발성을 가능하게 한 스승이었다면 캄포갈리아니는 오페라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승이었다. 캄포갈리아니는 작품의 정신세계에 대한 암시와 가수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곡 해석에 관한 세련된 조언을 해주었다. 가령 <그대의 찬 손>에 대해 캄포갈리아니는 이렇게 조언했다. “감동에 젖어야만 해. 마치 로돌포가 처음으로 미미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그 밖의 것을 생각해선 안 돼. 그러면 목소리가 너에게 가장 옳은 방법으로 응답해줄 거야.”
폴라에게 2년 반 동안, 캄포갈리아니에게 4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20대 중반의 파바로티에게 직업적인 성악가가 되는 것은 막막한 일이었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는 판이었다. 초조해지기도 했지만 파바로티는 결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탄탄한 실력을 쌓은 파바로티는 몇 번의 뼈아픈 실패를 딛고 1961년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열린 ‘아킬레 페리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여 오페라 출연 계약을 하게 된다. 4월 29일 레조 에밀리아 극장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 파바로티의 음악 인생은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다. 서른 살까지 성악가로서 자리를 잡으리란 계획은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타고난 목소리를 생각하면 다소 늦은 나이의 데뷔였지만, 데뷔 이후 파바로티의 길은 대체로 탄탄대로였다. 레조 에밀리아에서 공연한 파바로티의 <라 보엠>은 이후에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라 보엠>의 정석이 되었다. 로돌프 역할을 맡은 파바로티의 기량은 갈수록 완벽해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프레니, 로란도 파네라이, 니콜라이 기아우로프와 함께 녹음한 <라 보엠>은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
파바로티가 크게 성공한 것은 또한 자유로운 상상력,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 탁월한 홍보력 덕분이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이 항상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다. 파바로티는 즉흥적인 것, 예상치 못한 것을 분출시키는 스타일이어서, 너무 정확하고 교과서적인 지휘자를 만나면 몹시 힘들어했다. 에토레 그라치스, 프란체스코 몰리나리 프라델리가 그런 종류의 대표적인 지휘자였는데, 그러나 그들과의 마찰로 인해 파바로티의 음악은 더욱 성숙해졌다. 그는 드디어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 미국 무대에 데뷔했고, 1968년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데뷔하여 1971년부터는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후 파바로티는 국내외에서 오페라 공연뿐만 아니라 개인 콘서트와 음반을 통해, 그리고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를 통해 열정적인 팬들을 광범위하게 확보했다. 특히 1990년에 시작한 쓰리테너 콘서트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수많은 대중스타와 함께한 대형 자선 공연 ‘파바로티와 친구들’도 파바로티를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오페라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파바로티의 배역으로는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 역, <청교도>의 아르투로 역,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외에도 수많은 역을 소화하여 파바로티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는 파바로티에게 ‘하이 C의 제왕’(King of the high C's)이라는 영광의 별명을 안겨주었다. ‘하이 C’는 달리 ‘가슴에서 나오는 가장 높은 도’ 음이라 불린다. 그것은 정상적으로는,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음이었다. 전성기의 파바로티는 이 음을 탁월하게 소화할 수 있었고, 토니오 역을 맡은 파바로티의 노래에 대해 언론은 ‘가슴에서 나오는 도’에서 더 나아가 ‘레로 가는 음’이라고 극찬했다.
일과 더불어 파바로티는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겼다. 그가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했으리란 것은 몸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먹는 것 못지않게 그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축구는 어린 시절부터 열정적으로 즐기는 운동이었고, 테니스도 좋아했으며, 승마도 즐기는 스포츠였다. 그림 그리는 것도 매우 좋아해서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몇 년 전 밤에 잠이 오지 않았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물감과 붓을 집어 들고 형언할 수 없는 열망과 알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혀 아홉 시간이나 연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기에 그는 인생을 즐길 수 있었으며, 그것 또한 그의 성공에 기여한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2003년 12월,파바로티는 개인비서였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서른다섯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이어서 두사람은 딸 앨리스를 낳았다.
파바로티야말로 못 말리는 호색한이었다. 남녀간의 사랑과 욕망을 주로 다룬 오페라의 가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까? 1961년 9월 30일 결혼한 아두아 베로니는 파바로티와 35년을 함께한 오랜 동반자였다. 부부 사이에는 세 딸이 생겼다. 1962년에 로렌초가, 1964년에 크리스티나가, 1967년에는 막내 줄리아나가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현명하여, 어차피 남편의 바람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편 옆에 있는 비서들을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파바로티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니콜레타 만토바니와의 관계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아두아는 이혼했다. 아두아는 파바로티의 호색 기질을 이렇게 말했다.
“루치아노의 인생을 통틀어 그의 사랑과 자신감은 여성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성에 강하게 끌린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겠죠. 당연히 그도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는 ‘모든 여자’에게 너무나 강렬하게 반응했다는 점입니다. 한 여자를 취하고 나면 그는 완전히 바뀌죠. 생기가 넘쳐요. 그 여자가 젊든 늙었든 말랐든 뚱뚱하든 예쁘든 못생겼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녀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거죠. 그 여자를 안고서 고양이처럼 비벼댔어요.”
1980년대 소프라노 메들린 르네와의 관계가 특히 깊었지만, 니콜레타와의 만남이야말로 전세계를 달군 뜨거운 스캔들이었다. 1993년 니콜레타를 만날 때 파바로티는 58세였다. 니콜레타는 모범적인 대학생으로 용돈을 벌기 위해 ‘파바로티 인터내셔널 호스 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젊은 여성이 나이가 35살이나 많은 늙고 뚱뚱한 파바로티에게 반한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니콜레타는 오페라를 열렬히 좋아하는 음악팬도 아니었다. 첫 만남에서 니콜레타가 거장 파바로티에게 인사했으나 그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사실은 수줍음 많은 니콜레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녀는 분노했고, 파바로티가 친절하게 다가올 때 분노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파바로티에게는 여성에게 호감을 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니콜레타는 파바로티와의 사이에 남녀 쌍둥이를 임신했으나, 딸 앨리스만이 살아남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음악가로서 팔방미인은 아니었다. 팔방미인은 그의 라이벌 플라시도 도밍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파바로티는 연기를 잘하지 못했다. 주지하다시피 오페라에서 연기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나이 들어 뚱뚱해진 몸매의 그는 몸을 열심히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으며, 열심히 연기할 때도 어설펐다. 게다가 극본을 잘 외지 못했다. 악보를 읽을 줄 몰랐다는 것은 잘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이건 더 짧게’ ‘이건 더 길게’ ‘이곳에서는 날카롭게’ 등 각 음표를 설명하는 자기만의 기호를 사용해서 아리아의 가사와 함께 노트에 필기해두곤 했다. 세계적인 성악가로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 볼 수 있으나, 엔리코 카루소도 악보를 읽을 줄 몰랐다 한다.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던 카루소나 파바로티에게는 악보보다 자신들의 귀와 목소리가 더 정확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그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고 연기력도 부족한데도 파바로티는 누구보다도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했으며, 40년 이상을 현역 성악가로 활동했다. 다양한 레퍼토리는 파바로티의 실력을 말해주는 것이고 40년 이상의 활동기간은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를 말해주는 것인데, 그를 대중스타로 만든 것에는 또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 예를 들면 짙고 검은 수염과 눈썹과 머리카락, 목에 두르는 스카프, 그리고 검은 수염과 대비되는 흰 손수건은 파바로티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파바로티와 친구들’, ‘쓰리테너’ 이벤트는 클래식 음악을 대중음악만큼 친숙한 것으로 만들었다. 엄밀히 말해 그의 음악은 원칙적으로 대중을 위한 음악이었다. 그가 음악을 시작할 때 오페라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음악에 대한 접근방법이 굳이 대중음악과 달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통해 자신을 광고할 줄 알았으며, 그 일에 열정을 바쳤다. 파바로티의 스승 아리고 폴라는 이렇게 말했다. “파바로티는 본성이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나와 2년 동안 공부하면서 음역을 두 옥타브 확대시킬 정도로 쉬지 않는 도전자였어요. 게다가 파바로티는 완벽한 귀와 음악적 감각을 타고났어요.”
엄청난 부를 축적한 후 탈세 문제로 곤욕을 치렀으나 파바로티의 일생은 행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의 비대한 몸에 질병이 침투하기 시작하자 행운의 연속이었던 음악인생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6년 2월 10일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것이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2006년 7월 파바로티는 뉴욕에서 악성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종양은 한 곳에만 있지 않았다. 2007년 9월 6일 파바로티는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마감했다. 파바로티의 마지막 말은 평범했지만 감동적이었다. “음악을 위한 삶은 환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인생을 음악에 바쳤다.”
알베르토 마티올리의 <빅 파바로티> 는 아주 재미있는 평전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육체에 근간을 둔 장르이기 때문에, 예술가의 생애는 대체로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육체를 통해 영혼의 도약까지를 꿈꿈으로써 때로 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술가의 육체까지 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오페라의 주제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과 질투, 분노를 담고 있다.파바로티의 생애 또한 그가 자주 부른 오페라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파바로티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가였으며, 그로 인해 대중들에게 친숙한 존재이면서 추앙 받는 존재였다. 이 평전은 파바로티의 인간적인 면모를 때로는 예리하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전하고 있다. 위인의 업적뿐만 아니라 부족한 점에 대한 비판도 듣고 싶은 독자들에게 적당한 책이다.
레오네 마제라의 <루치아노 파바로티 발성과 테크닉> 이야말로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레오네 마제라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젖을 나눠먹었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의 남편으로 파바로티와 오랫동안 음악활동을 함께했던 음악가이다. 바로 옆에서 파바로티의 음악인생을 함께 산 친구인 만큼 마제라는 파바로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위대한 성악가로 거듭났는지를 매우 생동감 있게 펼쳐 보여준다. 파바로티가 성악가로 데뷔한 후 25년이 되는 1985년까지의 삶과 음악세계를 정리하면서 저자는 성악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되는 교훈도 함께 전하고 있다. 성악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특히 유용하겠지만, 비전공자에게도 재미있게 읽힌다.
<나의 인생, 나의 노래>(이효림 옮김, 을지서적, 1993)는 파바로티가 그의 미국인 친구 윌리엄 라이트의 도움을 받아서 쓴 자서전이다. 파바로티의 성격처럼 시원시원하게 펼쳐지는 문장들은 그의 음악에 대한 생각과 인생관을 잘 보여준다. “내가 넘버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기쁘다. 왜냐하면 넘버원이라는 칭찬은 내가 의도했던 바를 이루었다고 느낄 수 있게 해주고, 내게 목소리를 부여한 신에 대해 내 본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게 해주며, 그리고 나의 목소리를 즐기는 대중들에 대해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게 해주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늘 아름답게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성악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보존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누구보다도 주의 깊고 사려 깊어야 한다. 파바로티는 “내가 성공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한다. 파바로티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그의 성공 비결이 이 책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