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2. 주일예배설교
히브리서 11장 8~10절
지루하지 않은 삶으로 바꾸는 법
■ 한 엄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엄마 딴에는 아들도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가는데?” 아들은 여행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루했지만, 엄마를 봐준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지루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는 곳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늘 가자고만 할 뿐,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아들은 늘 지루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엄마는 아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때로는 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의 지루함은 사라졌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습니다.
인생을 여행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자신을 ‘하늘 나그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행으로서의 여러분의 인생이 지루하십니까, 아니면 기대에 차 있으십니까? 과연 어떤 모습이 신앙적일까요?
■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어느 날 난데없이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입니다. 가족이나 친족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는 다짜고짜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난데없이 나타나신 하나님이시고, 사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이니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마 “뭐지, 이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라함의 순종 사이에 어떤 심경이 있었는지 한 줄의 묘사도 없습니다. 그러니 추측만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부르심과 순종 사이의 갈등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험도 안면도 없는 분의 갑작스런 제안이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브라함은 결단을 내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약속을 주셨습니다. 물론 부르심을 받음과 동시에 약속을 주셨는지, 갈등의 과정에서 약속을 주셨는지, 아니면 결단과 동시에 약속을 주셨는지, 그 전후 사정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 약속은 창세기 12장 1~3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였습니다. 한 마디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의 통로’가 되게 해주시는 과정에 붙은 명령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였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머물고 있던 땅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명령이지만,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이 땅을 떠나면, 약속의 땅을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기에, 명령이자 약속이었고, 약속이자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에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내용입니다.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주도 내시고, 복도 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아브라함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은 자신을 통해 복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를 내는 것은 해당이 없고, 오직 주님의 복이 흘러가도록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확인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리시는 이 명령과 약속이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하는 명령이자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가거라!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거라! 거기서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는 약속이 여러분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기에, 가라고 지시하시는 곳이 분명하지 않아 보일 것입니다. 몇 번지라고 명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라고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이처럼 분명한 목적지는 없습니다.
물론 이곳은 공간이 아니니 몇 번지가 없습니다. 공간 너머 실재이니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물리적 공간 개념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당황할 목적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물리적 공간이 아니기에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로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공간 너머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한계 안에 있는 물리적 공간 개념을 한시라도 빨리 믿음의 공간 개념으로 바꿔야 하는 과제입니다. 만사를 물질적이고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영적 이해를 확장하고 깊이를 더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물질의 노예화에서 벗어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물질적 버림과 물리적 벗어남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의 세계로 더욱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바로 이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기 전까지 모아 놓은 재산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재산이라는 것이 유형의 재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형의 재산도 있습니다. 고향, 친척, 친구 등과 같은 것은 무형의 가치이고 재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시간부터 이 유무형의 재산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포기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두고 ‘믿음’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물질적 버림과 물리적 벗어남을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세계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향 메소포타미아에서 포기한 것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에 다다라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백, 수만 배로 보상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의 약속대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이것을 물질적 보상으로만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무엇입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과가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통칭하여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갑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갑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의 알파와 오메가는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가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기대로 가득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이 기대감이 아닌 지루함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다면,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은, 사랑하며 살기에도 바쁘니 지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는 곳이 명확하니, 신나고 밝아야 합니다. 가는 이유도 명확하니, 당당하고 자부심 넘쳐야 합니다. 가는 방법도 명확하니, 안정하고 안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삶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여행자요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서 끝을 보거나 끝을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보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의 끝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복락이 복락의 끝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즐기는 즐거움이 즐거움의 끝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의 끝, 복락의 끝, 그리고 즐거움의 끝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끝이고, 모든 것의 최고가 오직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이 땅에서 누리고 못 누리는 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여기서 차마 못 누린 것들은 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최고라고 누린 것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잘것없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누리고 못 누리는 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누리는 것, 소유하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기대감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천국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