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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입춘 무렵
-가 보지 않은 해변-
김 광 욱
1
세태 풍속이 변했다. 엠피스리의 등장으로 음반 업계가 사양길로 접어들고, 일반 대중과 음악 애호가들이 즐겨 찾던 레코드 점포, 매장들이 줄줄이 폐업했다.
거리에서 레코드점의 간판을 볼 수 없게 되고 가수들의 얼굴이 그려진 멋진 신보 재킷을 쇼윈도에서 볼 수 없으며 장윤정의 독집 테입을 구하기도 어렵다. 독집 음반(테입도 포함된다)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독집 신보는 팔리지 않아서 생산이 중단된 지 오래이고, 새 유행가를 들으려면 노점상 수레판이나 시내 몇 군데 있는 음반 가게에서 파는 불법 복제 시디나 여러 가수의 노래가 혼합된 종합 앨범이란 걸 신곡으로 구해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테입도 머지않게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지금 팔리는 정품 시디나 테입도 오래전에 생산된 재고품들이고 그 희소가치 때문에 값이 만만하지 않다.
음반 시장의 퇴조는 오디오 생산업체의 폐업, 도산과 직결되고 한때 황금기였던 최고의 오디오 시대를 몰락하게 만들었다. 그 주범은 반도체 산업의 대명사인 컴퓨터이고 그 컴퓨터의 소산물인 엠피스리와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필수품처럼 들고 다니는 엠피스리와 스마트폰으로는 어떤 음악이든지 들을 수 있지만, 그 음악에는 소리만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소리의 실체가 없다. 빛과 전기의 무형적 느낌일 뿐이다.
레코드판에 대해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레코드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레코드판이 턴테이블에서 돌아갈 때 만들어내는 신비한 음악을 듣고 그 소유감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을 할 때 상대방을 쓰다듬고 어루만져야 소유의 쾌감을 느끼듯, 인간의 속성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느낌을 통해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확인하는 게 아닌가 한다.
오디오 업계의 터줏대감이라고 자처했던 구영필 씨도 레코드에 미쳐 전축을 만지작거리다가 전축 시장이란 걸 알게 되었고, 오디오 기기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해서도 꽤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다.
생김새는 투박스럽고 잔정도 없는 사람이지만 어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음악이 유행가가 됐건 가곡이 됐건 판소리가 됐건 몸을 흔들고 따라 흥얼거릴 만큼 낭만적인 사나이였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세계 안 가 본 나라 없이 두루 여행도 다녔지만 그에겐 꼭 있어야 할 것, 꼭 필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도 못해 본 사람이 있다면 곧이 듣지 않겠지만 구 사장은 나이 칠십이 가깝도록 결혼을 해 보지 않았다. 슬하에 자녀가 없을 건 당연하다.
그는 마흔 살 전후 해서 한 여자와 몇 달 간 동거 생활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지만 여자의 변심으로 파경을 맞고 다시는 그 어떤 여자와도 사귀지 않았다. 여자를 보면 옛날의 그 여자가 생각나서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했다.
나이 먹어서 슬하에 자녀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심신이 고단하고 몸이 아플 때, 이럴 때 옆에 있을 자식 하나라도 만들어 놓을 걸 그랬다고 인생이 후회스러웠다. 마음만 먹으면 자식을 만들 기회는 있었다.
그가 돈이 많다는 걸 알고 주위에서 꼬리치는 여자들이 있었다. 레코드 생산이 중단되고 시디(콤팩트디스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올 때, 구 사장은 시디 생산공장을 차려 대기업과 경쟁하려다가 평생 모은 돈을 다 날렸다. 그 사업은 계산 착오였다. 시디의 수명은 테입의 수명보다 더 짧았다. 유에스비(이동식디스크)란 것이 나와서 모든 음악과 기록물을 자그만 칩 하나에 저장하고 시디는 점점 그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시디 생산을 중단하고 유에스비로 생산업종을 바꾸기엔 시기가 너무 늦어 있었다. 사면팔방에 유에스비 생산업체들이 즐비해서 유에스비 단가가 뚝 떨어졌다. 삼만원하던 1기가베이스 유에스비 한 개의 값이 만원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계를 사들여 생산라인을 바꿀 여력도 없었다. 그는 적자 운영에 허덕이고 있었다. 공장을 팔아서 빚을 갚고 사원들 밀린 월급 주고 시골 부동산 팔아서 겨우겨우 은행 부채 갚고 빈털터리로 시디와 아듀했다.
게다가 구 사장에겐 속썩히는 조카 아이가 하나 있었다. 조실부모하고 맡길 데가 없어 구 사장이 오디오 사장할 때부터 키운 칠촌 조카였다. 구 사장은 그 아이를 기저귀 찰 때부터 키웠다. 사실은 그 아이 때문에 옛날의 여자와 헤어졌던 것이다.
구 사장에겐 없어도 좋을, 차라리 맡지 말았어야 할 말썽꾸러기 고통껀지 자식이었다. 유일한 살붙이임엔 틀림없지만, 자식이라면 자식이고 아니라면 아닌, 타지부지 남보다도 못한 불효자가 한 명 구 사장의 주민등록표 상에 가족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아이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걸핏하면 경찰서에 불려가고, 교도소에 면회를 가야 하는 서글픈 인생을 살아 왔다. 그 아이만 아니라면 사업에 망하건 빈털터리 걸인이 되건 마음은 편했을 게다.
조카아이의 탈선, 비행은 구 영필 씨가 원대한 사업의 꿈을 허공으로 날린 것보다 더 가슴 아프고 인생 무일푼이 된 것보다 더 괴로웠다. 지금도 그런 심경이다.
한밤중에 찢어질 듯한 폭음을 내고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폭주족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구영필 씨의 하나 있는 조카가 폭주족 우두머리였다.
2
구영필 씨가 전자상가 한쪽 구석데기에 차려 놓고 장사하는 중고 오디오 점포엔 오후부터 손님들이 심심찮게 밀려들었다. 밀려들었단 말은 과장이 아니고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다. 구 사장은 이 시간이 되면 가장 신이 났다.
구 사장은 오디오 수리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 일류 엔지니어지만 오디오 수리보다도 더 짭짤한 수입이 디브이디 음반 장사이다. 업체나 개인이 갖고 있는 오디오가 고장나서 수리를 부탁받는 경우는 드물고, 주로 그가 매입해서 팔고 있는 중고 오디오 기기를 손보는 게 주업이고 주요 일과지만, 주요 일과가 부수입이 되고 주수입이 컴퓨터에서 음악과 영상을 다운받아 공시디에 복제해서 파는 음악 녹음이었다.
그걸 부탁하는 사람은 오, 육십대의 노인층이고 그들은 돈이 아까운 줄 모른다. 칠백 메가베이스짜리 공시디에 20여 곡의 노래를 복제해 주고 받는 값이 만원, 2만원이었다. 비품은 만원이고 정품은 2만원 받는다. 정품은 정식으로 더빙 요금을 지불하고 다운받는 유명회사의 제품을 말한다.
하루종일 지켜봐도, 이 가게엔 젊은이는 거의 오지 않고 구 사장 나이 또래의 늙은 고객들만 찾아온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든 오디오의 생산이 중단되고 그 옛날의 향수 때문에 중고 오디오를 찾는 손님들이 생기면서 이런 중고품 매장이 생겨나고, 중고품만 팔아서는 운영이 안 되니까 더불어서 디브이디 녹음도 해서 파는 것이다.
가게엔 사면팔방 까맣고 노란 오디오와 비디오 기기들로 꽉 차 있어 한겨울인데도 무덥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단일 제품을, 어떤 것은 세트로 된 모양 있는 제품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여기저기 늘어놓고 쌓아 둬서 말 그대로 중고품 일색이지만 그것들이 다 만만치 않은 값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손님은 안다.
모처럼 사십대 중반의 젊은 손님이 와서 신장개업한 가게에 설치할 오디오 세트의 가격을 물어 보고는 너무 비싸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러면 주인이 더 싼 것을 권유하고, 싸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라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생산년도가 더 오래된 것은 개당 가격이 이삼만원 쌌다.
"이것도 인켈사의 명품이지만 미니콤퍼넌트라 쩌렁쩌렁 울리지는 않을 게요. 그래서 미니콤포넌트는 권유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 가격이 높아도 매장에선 이렇게 큰 걸 써야……"
"그건 얼맙니까?"
"한번 고장나서 수리한 거라 본체의 가격은 작은 것과 큰 차이 없고 스피커가 좀 비싸죠. 이 정도는 써야 가게에 어울릴 겁니다."
"스피커까지 모두 얼마죠?"
"한 삼십만원 잡으면 될 겁니다. 새것일 때는 노래방 기기까지 해서 이백만원짜립니다. 노래방 기기 대신 일반 시디플레이어를 드립니다. 라디오 나오는 고급 앰프와 시디플레이어, 이퀄라이저(음향조절기)까지 드리죠."
그것은 다른 가게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다. 구 사장은 고친 것은 고쳤다고 말하고 오래된 것은 오래됐다고 분명히 알려준다. 그래야 뒷말이 없다. 손님은 살 마음이 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치도 해 줍니까?"
"설치는 못해 드려요. 제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나는 기계에 대해서 통 모르는데, 기술자가 설치를 해 줘야 기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겠어요?"
"여기서 다 연결해 드릴 테니 갖고 가셔서 스피커만 연결하십시오."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게에서 나갔다. 의자에 앉아서 디브이디 영상 음악을 감상하고 있던 늙은 남자가 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구 같기도 하고 손님 같기도 했다.
"가서 설치해 주고 웃돈을 받지 그랬어? 설치를 안해 준다니까 살까 말까 망설이던 것 같던데."
"설치해 주고 몇푼을 받겠나? 신품 장사도 아닌데. 왔다 갔다 걸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야. 그 사이에 손님이 몇 명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디브이디 녹음 손님?"
"그렇지."
"그 말도 맞다. 옛날에 종업원을 열 명씩 두고 두 개의 오디오 대리점 할 때가 그립겠구먼. 자네 가게 옆집이 레코드점이었는데 음악을 녹음해 달라고 젊은이들이 줄을 섰지. 녹음 주문이 며칠씩 밀리기도 했어. 그때가 생각난다."
"자네가 바로 그 레코드점 주인 아닌가?"
구 사장은 친구 말에 응수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오전에 주문 받은 녹음을 다운받는 일을 했다. 손님이 바빠서 기다리지 않고 맡기고 간 녹음이었다. 그걸 녹음하고 2만원 받는다. 정품 신곡이니까.
두 늙은 손님이 들어와서 소형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살 의향이 있는 듯 이것저것 묻고 시간을 끌었다. 친구는 그냥 놀러온 게 아니고 시디를 복제하러 온 사람이었다.
3
구 사장이 돈을 안 받겠다고 해도 친구는 2만원을 기어이 컴퓨터 탁자 위에 놓아 두고 내일 또 보자고 하며 가게에서 나갔다. 구 사장이 두 늙은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수룩하게 생긴 깡마른 사내가 인사하며 들어와서 텔레비전 옆 의자에 걸타앉았다. 텔레비전에선 아직도 그 여자 가수가 간드러지게 열창을 하고 있었다. 여자 가수의 갈라진 치마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허벅지가 퍽 요염해 보였다. 팬티까지 보일락말락한 게. 그러나 노래 실력은 별로였다. 부족한 노래 실력을 미모로 커버했다.
"나도 저 노래를 녹음해 주쇼."
귀에다 보청기를 낀 남자가 주인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소형 디브이디 플레이어에 대해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는 품이 그 물건을 사기로 결정한 듯했다. 보청기 낀 남자는 귀가 어두워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함께 온 친구가 통역을 해 줘야 했다.
"난 건망증이 심해서 금방 잊어 버리니까 종이에다가 좀 써 주쇼. 사용법이 복잡해서 내 머리로는 다 기억을 못하겠다니까."
"내 머리에다 기억해 둘 테니 걱정 말게. "
함께 온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보청기 친구는 친구 말에 안도한 듯 디브이디의 가격을 물었다. 칠만원이라고 하자 값에 불만이 없는 듯 저 가수의 노래를 녹음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아까 말한 건 장난이고 지금 말한 건 사실 같았다. 주인은 얼른 컴퓨터 앞으로 가서 그 노래를 공시디에 더빙했다. 텔레비전 화면의 여자 가수의 노래는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통해서 고성능 앰프에서 쩌렁쩌렁 멋있게 흘러나왔다.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앰프나 텔레비전 잭에 꽂고 재생 버튼을 켜야 연주가 된다고 주인이 두 번 설명해 주었다. 보청기 사내에겐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등산하면서 갖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디브이디가 필요하다고 해서, 주인은 진열대에서 야구공처럼 깜찍하게 생긴 기기를 꺼내어 보여 주고 켜 주었다. 소형 디브이디 플레이어도 휴대용 디브이디도 모두 신품이었다. 구색을 맞추려고 신품도 판매한다.
"요즘은 카세트 녹음기나 워크맨(이어폰 카세트)를 안 쓰고 이걸 많이 쓰는데 이 속에 노래가 7백곡이 저장돼 있어요. 건전지를 넣고 버튼만 누르면 가수 이름과 곡목이 나오지요. 시디 대신 유에스비 메모리가 들어 있어 가볍고 간편하지요."
휴대용 디브이디를 켜자 인기 가수 김용임의 노래가 또랑하게 가게 안을 울렸다. 손님들의 표정은 그 음악처럼 밝았다.
"두 개 합해서 얼마요?"
"12만원에 시디 녹음비 만원, 해서 13만원인데 주차비 오천원 빼 드리겠습니다."
"녹음은 공짜가 아니군."
"저 노래는 정품이지만 만원만 받고, 비품으로 천 이백 곡을 소형 디브이디 유에스비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음질은 정품과 똑같습니다. 버튼만 누르면 숫자와 가수 이름이 나오고 곡목을 선택할 수 있어요."
보청기 낀 남자는 두 말 않고 13만원을 지갑에서 꺼내어 계산했다. 주인은 주차비 하라고 오천원 한 장을 손님에게 주고. 거래가 끝났다.
두 손님이 나간 뒤, 의자에 앉아 있던 깡마른 사내와 그 뒤를 이어 방금 전에 들어온 약간 덜 늙은 손님이 무슨 이야긴가 주고 받았다. 그들은 경로원 동기생이었다. 깡마른 사내는 구 사장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덜 늙은 사내는 주인과 초면이었다. 구 사장이 생김새와 달리 친절하고 양심적이라고 해서 부러 이 가게로 찾아온 것이었다.
깡마른 사내는 침을 흘리며 텔레비전의 여자 가수 치마 밑만 쳐다보고, 그 뒤에 들어온 사내는 중고 시디 플레이어가 필요하다고 진열품들을 기웃거렸다.
"시디 플레이어는 생산이 중단되어 오래된 중고품밖에 없습니다만 가격이 싸지 않아요. 희소가치 때문입죠. 시디 플레이어보다 다양한 효능을 가진 중고 디브이디 플레이어로도 시디 음악을 감상할 수 있지만 중고 디브이디 플레이어는 2만원 더 비쌉니다. 그 가격이면 차라리 이 신품 디브이디를 쓰시는 게 좋을 겝니다."
중고 디브이디 플레이어는 전문 오디오 업체에서 생산한 오디오 세트 기기이고, 신품은 단일제품으로 유명 가전사에서 근자에 출시한 것이었다. 일장일단이 있었다.
"신품은 얼마죠?"
"여기 두 회사에서 나온 게 있는데 8만원, 7만원 합니다. 작은 게 7만원입니다."
손님은 8만원짜리를 사겠다고 했다. 앰프와 연결하여 음악을 켜고 화면으로도 보여 주자 만족해했다. 오늘은 물건이 잘 팔리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주인의 표정은 흐린 날씨처럼 우중충했다. 조카 때문이었다. 조카만 생각하면 웃다가도 그 웃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난 아무 노래나 녹음해 줘요."
맨 늦게까지 기다렸던 깡마른 친구가 어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인은 그 친구에겐 돈을 안 받을 생각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다. 같은 아파트 동에 살면서 인사는 하고 지냈지만 손님으로 찾아온 것은 오늘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옛날 유행가와 요즘 유행가 섞어서 천 곡 넣어 드릴까요?"
"지금 나오는 저 노래도 넣어 줘요."
깡마른 친구는 그 여자 가수를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림의 떡을.
4
여우가 우짖는 듯한 카랑한 기침소리에 돌아보니 레코드 가게 조 사장이 와 있었다. 이 전자상가 건물 내의 같은 층에서 수십 년 전부터 장사한다는 조미라 씨는, 자기보다 칠팔 세 더 먹은 구 사장을 보면 허리 굽혀 인사하는 법이 없이 눈인사만 하고 쓱쓱 지나가는 거만한 여자였다.
눈인사란 인삿말 없이 형식적으로 고개만 약간 까딱거린다는 뜻이다. 구 사장도 물론 그 여자에게 허릴 굽혀 인사하지 않았다. 구 사장이 중고품 오디오가게를 차린 뒤로 한 일 년 간 그렇게 지내 왔다.
구석진 코너에 우중중한 중고품 오디오 기기들을 쌓아 놓고 처음엔 찾는 손님이 없이 파리 날리던 가게가 늙은 고객들로 차츰 인기를 얻게 되자 그걸 시기하고 얄미운 눈초리로 흘겨본 사람이 조미라 씨였다. 조미라 씨도 시디 음악을 녹음해 주고 그 수입으로 근근히 생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의 경쟁자가 아니면서 두 상인 모두 음악 관련 사업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불경기의 타개책으로 불법으로 만든 복제 음반을 판다는 점도 같았다.
"장사 재미가 짭짤하신가 봐. 사람이 와도 모르고 컴퓨터만 두들기시는 걸 보니, 그렇게 녹음 주문이 많은가요?"
구 사장은 묵묵히 컴퓨터 모니터만 주시하고 있었다. 음악 사이트에서 손님이 원하는 노래를 찾아내어 공시디에 20여 곡을 채워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2만원짜리 작업이었다.
데이터로 파일을 만들어 칩의 형태로 유에스비에 저장하면 수천 곡도 복제할 수 있지만, 공시디에 디브이디 음반으로 복제할 때는 20여 곡밖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시디 음반의 한계가 그것이다. 그래도 공시디 녹음을 원하는 이유는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통해 정품 음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아파트 동에 사는 깡마른 친구가 부탁한 유행가 노래를 성심껏 유에스비와 공시디에 녹음 편집하면서도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자신의 노력이 한심스러웠다. 생활보호대상자인 그 친구에게선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줘도 뿌리칠 것이다. 같은 아파트의 이웃사촌이니까.
조미라 씨는 구 사장의 번들거리는 대머리 아래 너풀거리는 긴 뒷머리와 한쪽으로 기운 넓적한 등판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말하는데 왜 대꾸를 안하실까?"하고 혼잣말같이 쫑알거렸다.
구 사장의 가게에 자주 찾아온 것도 아니고 이 가게 개업하고서 한두 번 찾아온 숙녀에게 어느 개가 먹다 둔 찬밥처럼 대접하니 섭섭하고 멋쩍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선 반 알몸의 여자 가수들이 나와서 흔들고 비틀고 섹슈얼한 스트립쇼를 연출하고 있었다. 노래는 양념으로 흥얼거리고 섹슈얼한 율동이 본업이었다.
늙으면 늙을수록 싱싱한 걸 좋아하고 노래보다 섹슈얼한 몸매에 더 관심이 있다. 이곳을 찾는 늙은 고객들은 생활에 여유가 있고 정서적으로 틘 사람들이다. 구 사장은 그 심리를 이용하여 돈도 벌고 재미도 제공하는데 조미라란 방해자가 나타나서 그의 자긍심을 깨뜨렸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예쁜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음반 복제는 불법이란 거 아시죠?"
여자가 시비를 걸 듯 퉁기는 어조로 등뒤에서 말했다.
"자기도 불법 하고 있으면서 그런다."
"우리 가게는 레코드점이예요. 음반 장사와 오디오 장사가 같은가요? 어디서 써금써금한 중고품들만 갖다 놓고 팔면서 월권도 유분수지……"
"자기도 중고 음반 팔면서……"
"중고는 왜 중고예요? 처음엔 새거였지만 세월이 흐르니 재고가 된 거지. 모두 새거였다고요. 수천 장의 레코드도 테입도 시디 음반도 엄연히 공장에서 막 나온 신곡, 신보를 구입해서 서울 장안에서 제일 큰 음반 가게였다우. 음반회사들이 절반값을 주고 회수해 갈 때도 난 팔지 않았어요. 내 프라이드니까요. 비록 장사지만 어떻게 수십 년 간 견지해 온 내 자존심을 팔아요. 그래서 지켰죠. 내 정조를 지키듯 레코드 장사를 계속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재고는 쌓이고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이 모양 이 꼴, 하류 인생으로 전락했어요."
"내가 보기에 조 사장은 하류 인생 아니오. 부자지."
"사람 놀리시는 거예요? 아니면 비꼬는 거예요? 그 진의가 뭐죠?"
"나도 조 사장처럼 왕년엔 한가닥 했수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가 무슨 소용이오? 한때 잘 나갔던 레코드점 사장의 프라이드는 내 인정하리다. 가게 에 산더미처럼 그득 쌓인 음반의 부자란 것도 인정해요. 그런다고 남 어렵게 일어서기 하는 걸 배아파해서야 숙녀라고 할 수 있겠냐 이 말이지. 그래서 조금 비꼬아 말했으니 너무 서운히 생각 마시오."
"이 양반이 외모보단 말씀도 잘하시네. 난 도통 말이 안 통하는 꽁생원인 줄 알았더니."
이때 여자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받는 조 사장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너 또 말썽 피웠구나. 갑자기 그런 거금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내가 방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으랬지. 그렇게 고생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
"정신 차리려고 했는데 이년들이 내게 욕을 하잖아? 저쪽은 네 명이고 난 혼자야. 한 년의 머리챌 잡고 밀어뜨린단 것이 항아리 위로 넘어져 깨지고 말았어. 오백만원짜리 도자기래. 그러니 어쩌우? 난 돈이 없으니까 엄마가 좀 변상해 줘요."
핸드폰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돈 없다. 남의 가게 기물을 부쉈으니 변상 못하면 콩밥을 먹어야지. 전화 끊어라."
조 사장은 속상한 표정으로 힘없이 오디오 가게에서 나갔다. 얼마 전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딸이 또 사고를 냈다. 술집에서 여자들 사이에 시비가 붙어 또 한탕 한 모양이다. 딸은 성미가 괴팍해서 누가 쳐다보면 시비를 걸었다. 괴상하고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니 시비거리는 늘 발생했다. 오늘도 그런 사고였다.
밖에는 비가 오는지 손님들 중에 우산을 든 사람이 있었다. 2월 늦겨울 비가 내리는가 보다. 비가 오면 마음이 울적해지고 옛날 생각이 났다. 구영필 씨의 2월은 그의 전재산을 바쳐 큰꿈을 안고 차렸던 시디음반 제작회사가 도산한 달.
음반회사의 도산은 예술의 도산이기도 했다. 구 사장은 오디오 엔지니어이면서 음악을 좋아했다. 음반회사를 차려 이름있는 가수를 키워 보는 게 그의 비전이었다.
문명의 급속한 변화로, 시대의 변화무쌍한 탈바꿈으로 컴퓨터 문화가 주류룰 이루고 레코드와 테입과 시디 음반의 시대가 음악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때 다른 모든 예술도 더불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게 가슴 아프다. 구영필 사장은 그가 피땀 흘려 이룩했던 성공을 하루 아침에 겨울 빗속에 매장하고 긴 좌절과 방황 끝에 다시 재기하려고 중고 오디오가게를 차렸다.
이 나이에, 이런 상황에서 다시 옛날처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뭔가 세상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만은 붙들고 살아야겠다. 그것마저 놓치면 갈 곳은 공동묘지밖에 없다. 자신의 주검을 공동묘지에 묻어 줄 사람을 생각해 본다. 말썽꾸러기 조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이 떠오르면 얼른 지워 버렸다. 생각하면 또 괴로우니까.
보면 미웁고 안 보면 걱정되는 게 혈육의 심정일까? 아비도 아니면서 그놈을 기저귀쩍부터 애간장 다 녹고 키워서 그런지 걱정을 하게 된다. 그놈 얼굴을 보지 못한 지가 서너 달 된 것 같다. 비가 오니까 그놈 얼굴이 살며시 보고 싶어진다.
조 사장이 돌아가고 가게에 손님이 뜸할 때 한 젊은이가 군인처럼 씩씩하게 오디오 가게로 향해 걸어왔다. 귀창을 찢는 오토바이 폭음소리가 들렸을 텐데 전자상가의 소음에 가려 못 들었을까? 그 청년은 구 사장을 속썩히는 말썽꾸러기 조카아이, 윤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