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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에 보석 상인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보석을 수집하여 소장하기도 하고, 이윤을 남기고 파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이 사람이 평소와는 다른 행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변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수집해 왔던 보석을 다 팔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집도 그 동안 장만했던 논과 밭까지 부동산 시장에 내어놓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수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변했어 … 집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어… 아니야 먼 나라로 이사를 할 모양이야 … 아니야 혹시 딴 도시에 현지처를 둔 것은 아닐까??? 야반도주할지도 몰라 등등…. 동네 사람은 보석 상인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보석 상인은 예전에 보이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보석이라면 껌벅 죽던 사람이 보석을 내다팔고 있습니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집과 논밭까지도 팔아 치우며 현금을 모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천국 비유 말씀입니다. 이 보석 상인이 사람들의 오해를 받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것을 내다파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마 13:46).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값진 진주를 사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소비해도 자기가 발견한 값진 진주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아깝지가 않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보석을 소유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현해 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출신 배경을 보면, 베냐민 지파에 출생하여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으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율법의 정통을 다 지키고 행하는 흠 없는 사람으로 교회까지 핍박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사회의 금수저로서 사회적 명예와 권위를 다 지니고,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해로 여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긴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쓰레기처럼 여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그토록 자부심을 가지게 했던 것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들,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것들을 본인 스스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하면서 애지중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지난 설교 시간에 나누었습니다. 가치관과 삶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의 가치관과 삶을 달라지게 한 것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8절에 말하기를 “내 주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이 바울의 삶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과 가치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게 했을까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집 첫째 하림이가 아주 어릴 적에 한국에서 목욕탕에 데리고 갔습니다. 어릴 적에 아주 소심했습니다. 욕조에 들어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한 번은 제가 ‘괜찮다’고 하면서 맥반석 계란도 사준다고 하면서 물 속으로 하림이를 안고 들어갔습니다. 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저에게 꽉 안겨왔습니다. 그리고는 조금씩 조금씩 표정이 바뀌고, 안심해 하면서 욕조 안에서 놀았습니다.
하림이는 제 품 안에 안기면서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아버지가 ‘이 욕조 안에서 나를 책임져 주실 것이야’라고 아버지인 저를 신뢰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누구인지 알기에 믿었습니다. 안겨왔고, 맡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격적인 만남이요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보니,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애 달아하며, 목 매달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놓으시며, 살 찢고 피 흘려 나를 구원해 주신 고마우신 분이시기에, 그의 가치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섬겼던 교회의 장로님께서 구역모임 때에 자신의 모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라면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인이 불신가정에서 전도를 받아 교회 출석을 시작했습니다. 한 번 나오고, 두 번 나오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믿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교회에 다니는 사실을 눈치챈 남편은 아내에게 교회에 가지 말라고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주일 아침에 아내에게 ‘앞으로 교회에 가지 말라.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을 줄 알아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남편의 지시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남편의 말을 안 듣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남편이 볼 일차 나간 사이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남편은 마당에 거적을 깔고, 그 위에 작두를 올려 놓았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편은 아내를 단숨에 쓰러뜨리고, 아내를 목을 작두 안에 쳐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 죽을래, 아니면 내 말을 듣고, 교회에 안 다니래”라고 협박했습니다.
이때에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내야,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천당에 가겠지만, 당신은 아내가 예수 믿는다고 아내를 죽인 살인자로 평생 살아야 한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물을 보면서 마음이 수그러져서 아내를 놓아주었습니다. 그 이후에 남편도 아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귀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고, 쓰레기처럼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둘째로,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아주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감동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재산, 명예, 건강, 아름다움 등등 ….. 가지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소원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만을 원할 뿐입니다.(I want nothing but Christ)”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 어디나 하늘나라”(495장)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와 동행하게 되면 …. 그리스도로 내 마음에 충만하게 되면, 여러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려고 한다면 세상에 좋다고 하는 것도 쓰레기처럼 여기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가 자주 보는 한국 프로 가운데 [자연인]이라는 프로입니다. 이 프로에 나오는 자연인의 대부분은 도시 속에서 바쁘게 살면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다가 문득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는 물음 가운데 ‘내 남은 인생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반성과 함께 산속에 들어와 자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쫓아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에 목매달고서 연연하면서 희비를 교차하고 있습니까? 지금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행복하겠습니까? 만족하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이란 밑도 끝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삶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시렵니까? 제가 장담하는데, 결단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려 놓으십시오. 지금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쫓아가는 것에 잠시 멈추어 서서 과연 내가 바르게 하고 있나? 이것이 맞는 것인가? 질문해 보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내려놓으십시오. 배설물로 여겨보십시오. 그리고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보고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소유했던, 추구했던, 누렸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한결같이 그의 삶의 목적을 그리스도께 맞추었습니다. 최고의 보배로 여기고 추구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9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9)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율법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였으며, 또 율법의 선생인 가르치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에 충실하므로 흠 없는 자로 자타가 공인을 받았습니다. 그 열심이 투철하여 율법의 이단자인 기독교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를 이루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믿었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난 후로는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는 것입니다.
‘의’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한 점의 흠도 없으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연인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속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가령, 십계명 가운데 하나라도 온전히 지킨 사람이 있을까요?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의 경우를 보십시다. 사람을 죽였습니까? 우리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6계명을 지켰습니다. 율법학자는 그렇게 가르쳤고, 그러면 의를 세운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제정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릅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한 자는 살인한 자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 예수님의 본뜻에서 6계명의 온전한 의를 이루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인이요, 우리 인간의 의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가 우리에게 부어진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죄값을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희생인 그리스도로 인한 의가 우리에게 부은 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를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최고의 보배입니다. 내 생애의 전부의 전부가 됨을 인정하십시요. 그러하시므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의 하나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슬픔 마음 있는 사람(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