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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들판으로 차가운 바람은 불고
애국지사의 땅인 홍성읍을 벗어나 금마면 화양리로 가는 도중에 금북정맥길에 만날 수 있는 용(龍)의 형상에 봉황( 鳳凰)을 닮았다는 용봉산과 그 뒤로 규봉처럼 보이는 가야산이 고개를 살짝 내민다.
가야산 앞뒤로 열개의 고을이 있다고 해서 내포(內浦)라 부르는데 홍성,(결성),,태안,서산(해미),당진,덕산,예산,아산을 뜻하는듯 하다
길을 거다가 손에 잡힐듯 보이는 수 많은산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 들다가
한줄기 바람에도 꺾이니...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끔 지는 해를 바라보거나
일출이 떠오를 때 드는 생각인데
한쪽 구석에 있으면서 "내가 센터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지금이 꼭 그럴 때다
태양이 내 중심 앞에 있는 건지 아니면 한쪽 구석에 서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찌보면 내가 가운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날이 어두워지니 별별 생각이 다든다
화양삼거리에서 우측길은 21번 국도 따라 예산으로 곧바로 가는 길이다
잠시 들러야 할 성삼문 선생 유허지가 있는 홍성군 홍복읍 노은리 마을인데
끼니까지 거르며 부지런히 걸었지만 시간이 지체되어 성삼문 선생 유허지에 도착하면 어두워질 것 같다.
성삼문 선생 유허비
성삼문 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으로 그분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곳이며 선생의 이곳 노은리 외갓집에서 태어나셨다
성삼문 선생은 본관은 창녕이며 대대로 명문가 집안이었으며 부친은 성승이며 할아버지는 성달생이다
계유정난 때 하루아침에 남자는 모두 처형되고 여자들은 노비로 팔려 갔으니 한순간 멸문지화를 당하셨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로 세종 때 집현전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셨으며 단종 폐위 때 굳은 절개를 지켜 거열형으로 죽임을 당했다
성삼문 선생은 계유정난 때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노량진에서 5마리의 소를 이용해서 찢어 죽이는 거열형으로 처형되셨고 생육신중 한분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위험을 무릅쓰고 야간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현재의 노량진에 사육신을 묻었다,
그리고 충남 논산시 양촌리에도 성삼문 선생의 다리하나가 묻혀있다
*아마도 시신 일부를 전국 팔도로 조림돌림 당한 가운데 논산에 묻은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이니 딴지는 걸지 마시고
착한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나쁜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선생의 신주(神主) 혹은 목패가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된 사실과 신주를 이곳으로 옮기는 과정, 사육신의 신주 봉안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정에서 토지를 내려주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비(碑)다
유허비 뒤로 올라가면 노은단 입구에 성삼문 선생이 지은 단심가 비석이 있는데"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시비(詩碑)가 자리한다.
참고로 단심가는 두 개의 단심가가 있는데 하나는 성삼문선생의 단종에 대한 충성을 적은 시(詩)와
고려 말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보낸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임 향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나라에 대한 충성의 단심가가 있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면 노은단이란 붉은색의 태극삼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니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작은 무덤이 있다.
숙종 때 노은서원이 있어서 매년 제사를 지냈지만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지방의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땅에 묻고 노은단을 세웠다 (마치 무덤처럼 보이나 무덤은 아니다)
사육신들께서 노량진에서 사형을 앞에 두고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나머지 분들은 사지가 찢겨 죽음을 당한 분들을 보면서 영혼까지 겁먹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백번 천 번도 부족하지만 거짓을 말할 때는 한 번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쉬다가 성삼문 선생께서 태어나신 집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어디로든 가야겠다
다시 홍성방향으로 나갈 수는 없고 예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을 유추해 보니 대인리의 남산고개를 넘어 지금의 21번 국도로 가는 길일 것 같다.
노은리에서 남산고개를 지나 인휴원 마을회관 방향으로 가는 도중에
이제 홍성땅을 벗어나 예산땅에 도착하는데
충북 충주시의 가로수가 사과나무인데 예산군도 가로수가 사과나무인 만큼 사과가 특산품이다.
그 외 충북 영동을 지나면 감나무가 가로수인 경우도 있고, 경북 김천에는 일부구간이지만 포도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기도 하다.
응봉면 노화사거리를 지나며
바로 앞은 예산이며 무한천을 건너
무한천은 삽교천의 제1지류이나 길이 면에서는 오서산 자락의 금북정맥길에 자리하는 삽교천 발원지 보다 더 길며
조선 12대 강 중에서 한강, 예성강 다음으로 대진*아산만(무한천, 진위천)으로 기록될 이름 있는 하천이다
예당평야를 만들어 놓은 무한천과 삽교천에 만나는 곳 인근으로는 남한 10대 평야가 자리하니 보이는 건 들판뿐인데
지금은 흐르는 물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예산역에 도착하고 조금 늦었더니 식당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인근 주막에서 하룻밤 보내고 새벽에 다시 출발한다.
새벽 3시 무렵에 밖에 나와 정월 대보름 전날이라 달이 밝고 바람은 차갑다
온천으로 유명한 아산으로 향하는 21번 국도에는 새벽부터 차들이 질주하고 있으며 갓길이 다소 위험해 보이고
무엇보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마치 귀신을 보는듯할 것 같아 관모산 아래 벚꽃길을 따른다.
건양교차로에서
사과를 이고 있는 충절의 고장 예산
윤봉길의사를 상징하는 글귀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
"중국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 축하 행사 때 폭탄을 투척하여
파견된 대장을 폭사시킨 애국열사죠"
이곳 사거리에서 차량들은 대부분 32번 국도 경유하여 익산-평택 고속도로를 이용하는지 차량 이동이 뜸하다
도고 온천역을 지나고
날이 밝을 무렵에 아산시 신창면에 들어와
신창초등학교 안으로 들어와 신창 향교를 찾아본다.
마침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그런지 학교 문은 열려있으나 세상이 흉흉하니 아이들이 개학하면
향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운동장 가운데로 들어와 향교에 문이 열려있어 들어오니 향교 규모는 생각보다 단출하니 아담하다
내삼문으로 들어오면 공자의 위패를 모신 맞배지붕의 대성전이 있고
양쪽에 모두 문이 있어 어느 쪽으로든 들어올 수 있는데
정면에는 공부하던 명륜당이고 양쪽에는 유생들이 거주하던 동재와 서재가 자리한다
명륜당 글씨는 신안 주희께서 쓰신 현판이다
왔던 길로 다시 나가서 뒤돌아 본 신안 초등학교와 향교가 보이고
인근에 역사 공원이 있었지만 어디 가서 컵라면 국물이라도 마신다며 돌아다니다가 놓치고
온천대로 따라 아산시로 이동한다.
참고로 과거객이나 보부상들은 이곳 신창에서 곡교천을 건너지 않고 배를 타고 한양으로 빠르게 올라갔을것 같다.
아산시에서 음봉면으로 가야 하는데 곡교천을 건너야 하고
곡교천 건너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현충사로 발길을 옮겨간다.
곡교천은 천안시 광덕면 국사봉 인근에서 발원하여 세종시 소정면, 아산시, 아산시 선장면에서 삽교천에 합류하는 56km의 하천인데 물이 조금만 더 깨끗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은행나무 가로수길
차가운 날씨에 몸은 움츠려 들고 방화산 아래 현충사로 가는 발걸음은 빨라진다.
현충사에 들어와
이순신 장군의 영정 사진이 보이시고
잠시 예의를 갖춰 묵념하며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일체의 설명은 제하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말아먹은 원균과 라이벌인가?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장군의 입장에서는 원균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으셨지만
원균은 늘 이순신을 인생 최대의 라이벌로 생각한 것 같다.
"원균은 "내가 가는 길이 나쁠 수도 있지만 나쁜 길로 가는 나는 진짜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며 했을 것 같고
그래서 그런지 오죽하셨으면 장군께서 난중일기에 원균에 대해서 40번 정도 언급하셨다.
장군께서 태어나신 외갓집
1597년 4월 5일 맑음
해가 뜰 때 길에 오라 곧바로 선산에 이르렀다
나무들이 두 차례 들불로 불타고 시들어 차마 볼 수 없다
산소 앞에서 절하고 통곡했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외가로 내려와 사당에 절했다.
이어 조카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했고,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셨음을 들었다.
저물어서야 우리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의 신위 앞에서 절했다
바로 작은 형님(요신)과 여필(우신) 제수의 사당에 다녀온 뒤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난중일기에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군과 싸우시던 장군과 포를 쏘거나 화살을 날리던 많은 군사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 갑판아래서 노 젓는 사람들을 그려본다
포 터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에 아마도 온몸의 장기가 소리를 지르는 상황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
이렇듯 쓸때없는 생각이 많아지지만 이 길을 걸어서 영광이었고 다시 한번 더 올 수 있으면 하고 바래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인 이 면(李葂)의 묘소
21살의 나이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셨는데
어찌 보면 장군의 아픈 손가락이라 해도 될 것 같은 분이다.
현충사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손바닥 만한 논들이 층층이 이어지는 골짜기로 들어와
염치읍 송곡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올라온다
짧은 오르막길이라 장군께서도 한양으로 올라가셨을 때 이 길을 지나셨을 것 같다.
송곡마을로 내려오니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이라는 이정표가 서있어 평택인근까지 길 찾을 걱정 없이 이 길을 따르면 될 것 같아 눈 아프게 지도를 볼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장군의 백의종군길은 선조는 최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늘 이순신을 불신하였고
그 곁에 있던 간신배 같던 윤두수는 이순신 장군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균의 손을 들어준 인물이다.
이에 장군은 선조의 출정 명령을 듣지 않았다고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한 뒤 의금부로 압송되어
압슬형의 고문과 함께 극형의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 이때 판부사 "약포 정탁" 선생의 신구차 상소문(이순신이 죄가 없음을 알리는 것)을 써서
석방된 뒤 백의종군을 위해 한양-아산에 들른 뒤 논산-삼례-전주 임실-남원, 구례, 순천을 거쳐 경남 합천 초계의 권률 장군 진영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셨던 640km의 경로를 말한다.
염치읍 방현리
이곳에서 백의종군길은 둔포 운선교 방향으로 가는데
과거길은 아산에서 이어지는 45번 국도인 충무로를 따른다.
잠시 도로 따라가다 보니 다시 백의종군길과 만나고
평택 21km 지점
45번 국도와 백의종군길이 나란하게 이어지고
아산시 음봉면 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
음봉면 삼거리에서 이순신 장군 묘소가 있는 곳까지 700m 정도이며
금북정맥에서 성거산 이후에 분기하는 영인지맥길에 만나는 어르목 위 북사봉에서 남쪽으로 한줄기 가지 치는 어라산 자락에
장군의 묘가 자리한다.
묘소로 올라가기전에 만날 수 있는 충무공 신도비
이순신의 외손자 홍우기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육에게 청하여 비문을 지어 만든 것으로 숙종 때 세워졌다.
비문을 적은 김육은 "임진왜란 때 권율과 함께 이순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라를 구하지 못했을 것인데 도원수 무덤에는
큰 비석이 있지만 통제사 무덤에는 아직도 사적을 기리는 비문이 없어 여러 선비들이 유감으로 여긴다". 이런 내용이다.
튼튼한 거북의 몸에 비석이 올려져 있다.
모든 소나무는 장군의 묘소로 고개를 숙인 모습이며
이순신장군 묘소
부인 상주방씨와 합장묘이며 호석을 두른 봉분과 그 앞으로 여러 석물이 서 있다
장군께서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시고 유해는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완도 고금도 잠시 모셔졌다가
12월 중순에 다시 아산 본가로 운구된다
사정에 의해 임시로 관을 두었다가 이듬해 지금의 묘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금성산 중턱에 안장하셨는데
명나라 장수의 진린의 참모인 두사충이 묫자리를 잡았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16년 뒤 광해군 때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셨다
평일이라 그런지 찾는 참배객들도 얼마 없었지만 대부분 고개 한번 숙이지 않고 둘러보고 지나간다.
책으로 그리고 영화로 보던 영웅의 곁에 서니 고개는 절로 숙여지고...
떨어지지 않은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음봉면으로 나온다.
곡교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영인지맥길에 만나는 어르목 고개
아산시 음봉면에서 원남리 마을로 가기 위해서 넘던 고개다
지금이야 편하게 넘는 고개이지만 조선시대 때는 호랭이가 출몰하던 고개여서
음봉면 음봉마을 주막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고개 넘어 요로원(요남리)으로 갔다고 한다.
조선전기 때 주막이 없었으니 천하를 호령하던 배짱 좋은 사람들만 쉽게 넘었을 터
조선 후기 들어 주막이 생겼을 무렵 주막집 온돌방에 여러 사람의 체취가 풍기는 돗자리 깔린 방에서
과거객이나 보부상, 그리고 고개 넘어사는 산골 주민과 나무꾼들이 모여 도토리 묵에 술 한잔 하며
고개를 지키는 무서운 호랭이 이야기로 밤을 새웠을 것 같다
눈 오는 날이라면 눈을 툭툭 털며 주막집에 들어오는 나그네들이 전하는 충청 서쪽의 여러 소문들이
지금의 뉴스처럼 구수하게 들렸을 것 같고
산골마을의 주막집 풍경은 곳곳에 숨어 양민을 괴롭히던 산적이나 호랭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겼을 테니
담뱃대에서 연신 스멀스멀 나오는 연기처럼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호랭이도 깊은 산속으로 물러갔을 무렵 이고개를 넘어
요로원으로 지났을 터이다
고개 넘어오면 만나는 요로원
조선시대 충청수영길인 보령 오천항에서 평택까지로 이어지는 남-북 그리고 천안에서 아산 인주 인근으로 이어지는 동-서로 연결되는 곳에 자리하는 중요 교차지점인 마을이다.
한때는 세종대왕, 현종,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지나 온양온천으로 지나셨으며 성삼문 선생과 이순신 장군께서도 이 길을 지나셨으니 왕의 길이라 해도 될듯한 명품길이며
영인지맥길의 어르목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곳에도 초가 주막이 있었을 걸로 보이는데 세월이 지나고 안내판만이 이곳이 요로원 임을 알린다.
참고로 원(院)이란 현재의 역(驛)이나 여관과 비슷한데 세종시의 조치원은 김천에서 천안으로 갈 때 거치는 곳이고
충주시 신니면 요로원은 영남대로길에 만날 수 있으며, 경북 의성의 도리원은 지금의 5번 국도인데 대구. 안동, 안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고, 서울에는 이태원, 광혜원, 등이 있겠다
그 외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에 관원들의 숙식제공으로 이용하던 537개의 역이 있었다고 한다
행정구역상 아산시 둔포면으로 들어와
아산시 둔포면 행정복지센터
이제 아산땅은 끝나고 평택땅에 들어서며 옛 45번 국도를 따른다.
평택시 팽성읍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팽성읍 마당에 조선시대 옛 관아터 자리가 있는데
조선시대 때 평택현 객사리에 마을을 두고 팽성읍 대부분을 관할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동헌에서 죄인들 엉덩이에 곤장 치던 모습을 그려보며 한번 웃어보고
우람하게 서 있었으면 더 좋았을 관아는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 때 사라졌다
팽성읍 객사
조선시대 관원들의 객사로 쓰였으며
고을 수령이 정무를 보던 정청은 때로는 멀리 있는 임금이 계시는 궁궐을 향해 절하던(망궐례) 곳이기도 했고
성종 때 지어졌으나 일제 강점기 때 양조장으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주택으로 바뀌었는데 1994년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 건물은 맞배지붕이나 그 옆에 부속 건물의 처마 끝은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만 같다.
가까이 가서 기둥이라도 만져보면 좋았을 테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해서 카메라만 겨우 넣어 한 장 담아본다
팽성읍 객사 모습
팽성읍을 나와 안성천을 건너는 원평 나루까지 45번 국도와 그 옆에 자리하는 임도길을 따른다.
이제 해는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바람은 차갑게 느껴지고 하루종일 걸으며 컵라면 국물만 먹은 게 전부다 보니
허기가 몰려온다.
그렇다고 어디 주막집에 가서 국밥이라도 먹고 가기도 그렇고
안성천
우리나라 도시 지명을 강(江)에 붙인 곳을 찾아보면 북한강 지류인 홍천의 홍천강과 한강의 지류인 평창군의 평창강이 있으며
이곳 안성천 역시 지명을 사용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성천 발원지를 찾다 보니 발원지에 관한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안성천 최장 발원지는 용인시 시궁산(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묘지를 지나 천주교인들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운구하면서 눈물로 넘어왔던 만나는 애덕고개가 있는 산)에서 발원한 물이 아산만까지 74KM를 이어 가지만,
안성땅과 무관하게 용인시와 평택시를 거처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두 번째 용인시 처인구 한남정맥 문수봉 남쪽 계곡에서 흐르는 한천은 안성시 대덕면 환경사업소까지 32KM 흘러와
안성천과 만나 합류하지만 문수봉 남쪽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10km 구간을 흐르는 동안 용인시 땅이며,
이후로는 안성시 보개면 치재마을부터 22km 구간만 안성땅으로 흐른다
세 번째 국토지리원 지도를 보면 안성천이란 지명답게 안성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찾다 보니 한남정맥길의 뒷산이 가장
유력한데 안성천이 안성땅을 벗어나기까지 37KM를 흐르며 나머지 평택땅을 지나는데 거리가 대략 30KM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평나루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뱃놀이하며 강 건널 수 없으니 다리 위에서 허공에 뜬것처럼 지날 수 있다.
평택역
지난날 걸었던 땅끝에서 혹은 통영에서 올라오는 과거길인 삼남길과 만나니 나머지 경복궁까지 79km 길은 큰 의미가 없어 보따리를 내려놓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배는 고픈데 밥 숟가락 한번 들시간도 없어 기차 출발 시간이 다되어 간다며 방송이 흘러나와
가차에 오른다.
이번길은 다른 여러 과거길과 다르게 짧지만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신 땅에서 많이 배울 수 있어 좋았다고 할 수 있으며
다음 갈길은 또 어디로 갈지 정확한 건 아니지만 울진에서 낙동정맥-봉화-영주-백두대간 죽령-단양-월악나루-충주 살미로 이어지는 길일 것 같다.
첫댓글 매죽헌 성상문, 매헌 윤봉길, 충무공 이순신,
모두가 한결 같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분들이시죠.
엄청 기가 센길, 영광된 길을 다녀 오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기 많이 받으시고 아프지 마시고 행복한 길 계속 걸으시길 바랍니다.
역사학자 이신것도 같고
지리학자 이신것도 같고ᆢㅎ
덕분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
할머니께서 덕수이씨 이신지라
내 어릴때 온양현충사에 꼭 데리고가서 구경시켜주신다 했었는데 ᆢ
평택역이 1층 지붕이었었는데
이렇게 변했군요 ᆢㅋㅋ
지난번 진위천 탕방하실때도
정도전 후예들이 모여사는마을 입구 사진을 보고 넘 행복했었는데 ᆢ ㅎ
봉화정씨들이 모여사는 마을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해서ᆢㅋ
구독자가 되었네요ᆢ
늘 건강하시고 늘 안전한길 되시길 바랍니다 ᆢ
자신의 한 목숨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을 바로
우리는 감히 '신'이라 부를만 하겠지요.
어떤 마음으로 살면 그렇게 살신성인할 수 있는지...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고 미래가 희망적입니다.
경건한 이번 충청수영 걸음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장님 이번 후기 보니...
홍성 천안 아산 이쪽으로는 언제고 한번 걸음해 보고 싶어집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백번 천번도 부족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은 한번도 힘들겠다..
보통사람인 저는
거짓을 말하는 것은 백번 천번도 수월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은 한번도 어려울 것 같은데
방장님의 곧은 마음과 생각에 절로 부끄러워집니다.
길지만 재미있고,
길과 역사에 대한 담담한 서술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방장님 가는길 모퉁이에
스윽
주막을 차려둘까 싶네요
시절을 불러 내어서 라도.....
지고 ,뜨는 해를 보며
내가 센터에 서 있다는 생각
성장보다는 성숙으로 봐야 할테지요
누구보다 의연한 주인공입니다
묵묵히 걷고 있는 길
그림자도 익어가는 세월이 있을테지요
즐감했습니다 ~♡
모든 소나무가 장군의 묘소로 고개를 숙인 모습인가요
장군의 묘소 하고
지명을 사용해 붙여진 안성천 모습과 전해지는 사연도 잘봤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어찌 이리 하염없이 걷고 계신지요
응봉 예산 아산 현충사 곡교천...
고향이 아산인 까닭에 낯 익은 지명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 반갑습니다
추분날
걸음하느랴
고생과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