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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색(色)
색(色)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색을 볼 수가 없다. 모든 물체는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감각으로는 어둠과 함께 색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에서도 '색'을 형태가 있는 것, 대상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것, 넓게는 대상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하여 색을 공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궁극의 본질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색(色)은 감각적인 것으로, 시각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색은 관습보다는 색채감각으로 파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색채를 사용할 때, 그 색채가 우리의 감각에 와 닿는 감정이나 감각에 순수하고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지식화되고 관념화된 색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머리에 하얀 리본을 달았다고 하자. 이때 아무런 선입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만을 본다면 사람에 따라서 '깨끗하다', '청순하다' 등의 느낌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습과 사회규범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상(喪)을 당한 모양이다' 또는 '머리에 흰 것을 꽂다니 청승맞고 불길하다'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순수한 감각, 즉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시작된 색감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사회를 이루어감에 따라 이차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색에 대한 연상적 가치가 발전하여 어떤 통념을 형성하게 되면 특정한 빛깔에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부여는 개인적인 색감이나 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에서, 그 사회에서, 그리고 그 민족 속에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영위되고 인식되는 색감과 의식이다. 즉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관념화된 보편성'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색채감정은 문화적 특성을 나타내 는 독특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색'에 대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우리 민족의 색채 사용에 있어서 모든 결론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귀결되어지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 물론 음양오행사상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사상, 사고방식, 생활양식 등의 밑바탕을 이루어 왔으며,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음양오행의 설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문의 출발은, 색이야말로 원시사회에서부터 인간이 태양, 하늘, 나무, 꽃 등의 자연을 접하면서 가장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미지라는 점이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사고체계가 정립되기 훨씬 이전에도, 인간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여 왔다. 색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태양숭배사상과 영혼불멸사상에서 새를 신성시하였듯이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의 색깔에 대하여 무심할리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붉은색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느낌과 생각이 음양오행사상을 형성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의식주 전반에 걸친 생활과 의식 및 제도적인 측면에서 음양오행에 따라 색채가 다루어진 부분이 매우 많으나, 그것을 반드시 음양오행이라는 틀에 맞추어진 시각으로 일축해 버린다는 것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민족 특유의 정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의 색채 전체를 가두고 있는 음양오행이라는 틀을 의식하지 않고, 보다 민속적인 차원에서 대다수의 옛 선조들이, 그리고 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이 (음양오행과의 관련을 포함하여) 각각의 색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떻게 사용하기를 즐겨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민족의 색: 흰색
최근에 어느 방송단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색채의식 조사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성을 상징할 만한 색과 우리 선조들의 민족성을 잘 나타내는 색으로 단연 흰색을 꼽았다고 한다.
흰색에 대한 느낌은 민족에 관계없이 순결, 깨끗함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며, 종교적인 복장이나 천사의 상징, 혼례 때의 신부복 등과 같이 성스럽고 순결한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만큼 흰색을 숭상하고 생활화한 민족은 드물 것이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위지〉동이전 등의 고대 중국문헌에 보면 부여나 변한, 진한 때부터 한민족이 흰옷을 일상복으로 입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백의 풍습은 유사 이전으로 소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흰옷의 비경제성 때문에 고려 건국 초 우리나라는 동방에 속하니 오행에 따라 동방색인 청색옷을 입어야 한다고 금령을 내렸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 국법 개혁에 가장 과감하였던 조선의 태종도 '흰옷에만은 내가졌다'고 손을 들었다.
이와 같이 흰옷에 잠재된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민족의 사상적 밑바탕을 이루어 온 오행사상에서도 동방은 청이며 서방은 백이라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동방인 우리나라의 민족은 청색옷을 입어야 하는데, 오행사상을 역행하면서까지 흰옷을 고집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이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흰옷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무언의 항거,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백의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골 장터의 입구 마다 검정물을 담은 커다란 가마솥을 설치해 놓고, 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흰옷에 검정물을 끼얹었다.
떡 팔러 장에 갔다
베옷에 먹물 탕이라.
옷이야 검었지만
배알까지 검길쏘냐.
일제 때 번진 남도아리랑 가운데 한 대목이다. 검정물 세례를 받은 한 떡장수가 배알, 곧 심지나 정조까지야 검게 할 수는 없다고 민족감정을 토로한 아리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백의에의 집념은 억세고 끈질기게 계속되어 왔다.
우리 민족이 흰색, 특히 흰옷을 선호하고 상용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되어 왔다. 흰색을 숭상하고 선호하였던 이면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부분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그 이유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밝’ 사상에 근거한 것
우리 민족은 고대인의 특성 중 하나인 태양숭배와 경천사상에 따라, 고유한 ‘밝’사상을 형성하였다. 부여, 예맥 등 고대의 부족국가는 자신들의 부족이 ‘밝족’ 또는 ‘씨족’이라 자처하였다. '부여'라는 말은 밝음을 뜻하며, 예맥족은 본래부터 동쪽과 밝음의 부족으로 자칭하였다. 이는 하늘의 태양으로 인하여 밝음과 광명이 생겨나며, 그 태양은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쪽에서 떠오르므로 '동-명', 즉 동방의 밝은 곳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밝은 곧 백을 뜻하며, 흰색을 신성한 색으로 다루게 되었다. 흰빛은 모든 빛깔 가운데 가장 밝은 색으로, 흰빛을 백이라 함은 밝다는 뜻이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형성된 음양오행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동방은 청색'이 되지만, 이 ‘밝’사상은 어느 한순간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 되어 수천 년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상에 있는 동물 가운데 가장 빠르고 활달한 말을 움직이는 태양과 관련지었다. 특히 흰색 말인 백마를 태양, 천제의 사자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늘에 맹세를 할 때는 백마를 희생시켜 그 피를 나누어 마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렸을 때 신라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의 왕족이며 웅진도독인 부여융, 이 세 명은 지금의 공주 북쪽에 있는 취리산에 올라가 신단 앞에서 백마를 죽여 강화의 맹세를 하였다.
신 앞에서 신의 천사인 백마를 희생시켜 피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그 약속을 절대화시킨 것이다.
2) 우리 민족의 기질, 심성과 관련된 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청렴결백한 선비상을 꼽고 있다. 권력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 없이 맑고 곧은 마음으로 자신을 닦고 수련하는 선비상, 이들의 이미지는 흰색과 청색이다. 흔히 선비는 학에 비유되며 그들이 입은 도포를 학창의라 하였다. 또한 선비들의 지조와 기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백과 청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의미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즉 탈 감각으로써 높은 인격에 이른다는 한국인 특유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감각이나 감정을 멀리 하고 인격과 규범 등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색은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관직에 있는 문무 관리들도 대궐에서는 품계에 따라 그에 맞는 색의 옷을 입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흰옷을 입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는 감정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우리 민족의 기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백자와 청자에 나타나고 있는 우아함과 신비로움도, 이러한 오랜 민족의 정신과 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금욕적인 인격완성의 의미 외에, 자연에 동화하고 자연에 귀의하는 심성과도 깊이 관련 되어 있다.
흰색은 물감을 들인 색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원색이다. 이런 의미에서 흰색은 곧 무색이며,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간직한 색이다. 무색, 있는 그대로의 색은 곧 자연 그 자체이다. 그들은 자 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동화하며 순리대로 사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 믿었다. 따라서 있는 그 대로의 무색에 굳이 염색을 하거나 칠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궐이나 사찰 등을 제외한 일반 민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기둥이며 벽이며 마루며, 방안의 가구에 이르기까지 자연 그대로의 색이라는 데에 예외가 없다. 국기를 보아도 그렇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 중 흰 바탕의 여백을 남기고 있는 국기로는 태극기와 일본국기 등 몇 나라에 불과하다. 이규태 선생은 태극기가 백지를 본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색채감각의 표현으로, 색에 물들지 않은 태초의 천진 그대로를 숭상하는 정서의 표현이라 보았다.
영어권에서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다. 구미 문화권에서는 흰색을 미개하고 미속한 것으로 비가치화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우리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오히려 흰 것을 오염시키는 빛깔을 악덕시하고 비가치화한 것이다.
민속에서 쓰는 길조어에서도 흰색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흰 사슴이 나타나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
.흰 꿩이 나타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
.아침에 흰 말을 보면 그 날 돈이 생긴다.
.꿈에 백발이 되면 그 해에 근심 없이 생활한다.
.흰 옷을 입으면 남의 초대를 받는다.
.손톱에 흰 점이 생기면 재수가 좋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을 그대로 투영하여 담고 있는 색이 바로 흰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상복의 영향
우리 민족이 백의를 숭상한 것이 애초에는 거의가 경제적 요건에 지배되었겠으나 나중에는 의식복장으로서 상복의 영향으로 습성화되었다고 하였다.
먼저 상복을 백색으로 하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복은 상중에 입는 예복이다. 상복이 반드시 흰색이어야 하는 데 담겨진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주로서의 예를 갖추기 위함이다.
상주가 색채 있는 옷을 입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슬픈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사자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인간생활사에서 상사는 가장 슬픈 일이므로 우리 민족은 상주를 죄인이라 간주하였고, 상주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여 부끄럽게 여겼다. 따라서 사자와 친분이 깊을수록 거친 천에 바느질이 험하고 투박한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밝은 색인 흰색으로 사자의 저승길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상주가 흰색의 상복을 입음으로써 사자의 영혼이 좋은 세계에서 영생하기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믿음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복의 흰색에는 상중에 채색된 옷을 입지 않는다는 예로서의 의미가 선행된 다음, 저승길을 밝혀 좋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기원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유교의 영향으로 관혼상제의 예를 중요시하였고, 특히 상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국상과 친족의 범위가 넓어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 기간이 길었다. 상복을 입을 기회가 많았다는 것은 흰옷을 입을 기회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며, 이는 한민족의 백의상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4) 금색으로 인한 영향
동서고급을 막론하고 유채색은 화려, 장엄, 사치, 권위의 상징으로 권력층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오행사상에 따라 권력이나 품계를 표시하는 특별한 색의 옷은 일반인이 입지 못하였다. 즉 신분이 낮은 천민(예를 들면, 무당, 기생 등)의 표시로서 사용하게 한 것과 같은 특수한 경우 외에는 극도로 채색된 옷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고려 때 회색옷 때문에 왕씨가 망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대로 맞았다 하여 회색을 상서롭지 못한 색으로 여겨 회색 옷을 금하였다. 세종은 명나라 천자가 입은 복색이라 하여 노랑색, 보라색, 회색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금색으로 인하여 색채 옷의 선택 폭이 줄어든 데다 복색으로 존비를 나타냈기 때문에 백성들은 흰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5) 물감이 희귀하고 염료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
지초나 잇꽃, 남과 같은 염료가 우리나라에는 희귀하여 주로 외제품을 써야 했다. 따라서 베 한 필을 물들이는 데 물감값이 베 한 필 값만큼 들었다고 한다. 자연히 서민들은 있는 그대로의 색으로 옷을 해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백의습속으로 이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흰색 및 흰옷 선호에 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논자마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밝 사상과 우리 민족의 기질, 심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싶다.
왜냐하면 상복으로 인한 영향은 상중에 흰옷을 입는 두 가지 이유 자체가 ‘밝’사상과 우리 민족의 기질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채색된 옷을 입는 것은 상주로서의 예가 아니라는 생각은 우리 민족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고, 흰색의 저승길을 밝혀 준다는 생각은 '하늘과 밝음'이라는 의미로 ‘밝’사상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금색과 염료부족의 영향은 실제로 무색인 흰옷을 입게 하는데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색'이라는 제도 자체가 세계적으로 공통됨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흰색과 깊이 관련된 백의민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 타민족과는 다른 문화적, 사상적 특수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염료 부족 역시 일부분의 요인은 될 수 있으나 전체적인 것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 우리들의 선조, 또 그들 선조들이 지닌 마음, 심성과 기질, 그것과 깊이 연관된 밝 사상…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우리 민족이면 누구든 공감하고 더 많은 비중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20세기의 후반을 사는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 민족과 민족성의 상징색으로 서슴없이 흰색을 꼽았으리라.
2. 벽사의 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은 사되고 나쁜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앞일을 알 수 없고, 가진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는 삶의 과정 자체가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사고체계 가 정립되지 않은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생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크고 강력한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바람이 각종 원시신앙과 주술적인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도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이나 무의식적인 생각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과 연관된 어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든가 아침에 만나는 작은 곤충에게서도 그날의 운세와 연관시켜 보고자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과 능력을 설정해 놓고 이를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邪)된 것을 물리치고 행복과 안락함, 즉 복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사(邪)된 것을 물리치는 힘, 그것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색과 관련된 측면에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음을 물리치는 양의 색
귀신이나 악하고 나쁜 것은 어둡고 드러나지 않은 깊숙한 곳에 있다. 밝음이나 개방된 곳은 이들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밝고 원기와 생명력이 충만한 것을 양, 무겁고 어두우며 숨어있는 것을 음이라고 본 음양사상에 따라 동양에서는 귀신을 음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필원잡기〉에 따르면, 귀신은 음성인 까닭에 양성인 남자보다는 여자에 부착되는 수가 많고 빛이 드는 양지나 튀어나온 곳보다는 음습한 동굴, 오래된 우물, 깊은 계곡 등의 들어간 곳과 고사찰, 폐옥, 고목 등에 운집하여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음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강자, 즉 양 이 요구된다.
음양오행사상에 의하면, 우주생성의 근본원리에 해당하는 기본색으로 백색, 청색, 적색, 흑색, 황색의 5색이 있으며, 이 중 청색과 적색이 양에 해당된다. 청색은 방위로 볼 때 태양이 솟는 동방에 해당하여 창조, 신생, 생식 등을 상징하는 양기가 강한 곳이다. 적색은 남방에 해당하여 온난하고 만물이 무성하므로 또한 양기가 왕성한 곳이다. 이에 반하여 서방의 백색과 북방의 흑색은 음에 해당된다. 음양사상에 따르지 않더라도 백색과 흑색은 생명력이나 왕성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과 사고체계를 규격화시키는 제도적인 것의 일종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에 있어서 음양오행은 우주의 이치를 지켜본 다음에 이를 종합하여 정리한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음양오행사상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인 고대사회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사고와 믿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원시사회에서 가장 큰 숭배의 대상인 태양과 불의 적색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상징'을 느낄 수 있었고, 왕성한 식물과 경배의 대상인 하늘의 푸른색에서 생명력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적색과 청색은 힘과 생명의 상징색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사되고 악한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할 때 적색 또는 청색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관습은 현재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의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적색과 청색은 모두 생명력과 힘이 충만한 양의 색이지만, 실제 벽사의 용도로 사용된 것은 적색이 압도적이다. 이는 적색이 태양, 불, 피와 같은 원시신앙의 주요한 대상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주술적인 위력을 지닌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이 사용한 벽사(사된 기운을 물리침)의 색으로 대표적인 적색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2) 적색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대인들은 그들이 신성시하고 숭배한 태양과 불의 색이 붉은색임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또한 자신의 몸속에서 고동치며 흐르는 붉은 피는 곧 생명과 직결되는 생명력의 상징임을 알았다. 이처럼 태양, 불, 피가 있는 곳에는 항상 생존이 가능하고 강력한 힘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태양, 불, 피가 가지고 있는 붉은색을 생명과 힘의 표식으로 삼고 이를 숭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귀신과 질병, 재앙 등과 같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사자로서 강력한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이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원시적 사고체계가 실생활에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재앙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에서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는 면을 중요시하여, 홍, 주, 황 등과 같은 유사한 색을 적색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언급하게 될 이러한 유사 적색은, 그 색 자체로서가 아니라 붉은색에 준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임을 알 필 요가 있다.
(1) 부적
벽사진경의 가장 강력한 의지표현의 하나인 부적에는 적색으로 글씨와 그림을 그려 악귀를 쫓는다. 문헌상 최초로 부적이 사용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문왕 6년 2월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처용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색의 명칭을 명확하게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길흉요찰(길흉을 조정하는 나무 조각)과 벽사진경의 처용상이 모두 붉은 글씨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통설이다.
조선시대 때 임금이 위독하면 액정서에서 보의를 설치하였는데, 보의란 붉은 비단에 도끼를 그려 넣은 병풍을 말한다.
또한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관상감에서는 주사로 쓴 부적을 만들어 단오에 대궐 안으로 올리며, 대궐에서는 이를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았다고 하였다. 이때 부적에 쓴 벽사문은 귀신 귀자를 가운데에 두고 붉은 적자 12자로 주위를 두른 것도 있고, '적구절석사백사병일시소멸'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관습은 대궐뿐만 아니라 일반 민가에서도 널리 행하여 집집마다 붉은 부적이 붙어 있지 않은 집이 드물 정도였다.
(2) 복식
복식에 있어서 이러한 예는 더욱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흉귀를 쫓는 의식인 계동난의 때에는 동자 48명이 가면을 쓰고 적색 의상을 입었고, 공인 20명이 적건과 적색 의상을 착용하였다.
정월 대보름은 귀신과 재액을 물리치는 갖가지 벽사행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날이다. 따라서 붉은색이 가장 많이 동원되기 때문에 이날을 단일(丹日)이라고도 한다. 이날 궁중의 내시원에서는 옥추단이라는 붉은 선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며, 이를 오색실에 꿰어 임금을 비롯한 시종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민간에서는 부녀자들이 아궁이에 불을 떼다가 불똥이 튀어 치마에 구멍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붉은 헝겊으로 구멍을 꿰매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음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전염병이나 괴질이 유행할 때 이를 쫓기 위하여 붉은 옷을 입었으며, 부락 입구에는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붉은 두루마기를 걸어놓았다. 시체를 넣는 관에도 옻칠을 하고 붉은 비단을 관속의 사방에 붙여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부의 얼굴에 바르는 연지 곤지도 시집가는 여인을 투정하는 음귀에 대한 축출의 의미에 서 사용되었다. 부락제의 신주들은 대개 남자인데도 빨간 연지를 칠했으며, 궁중에서 베푸는 기우제 등의 천제 때 주가를 부르는 천동들도 빨간 연지칠을 하였다. 상날에 직업적으로 울음을 파는 곡비의 손톱에는 빨간 물을 들이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니, 여름날 백반을 섞어 예쁘게 들인 빨간 봉숭아물도 귀신에게는 두렵고 근접할 수 없는 징표로 여겨졌을 것이다.
(3) 음식
벽사의 의미로 사용된 붉은색의 매개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붉은 고추를 들 수 있다. 아들을 낳았을 때 붉은 고추를 다는 것이 고추의 생김새가 사내아이들의 성기를 닮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된 기운의 근접을 막고자 하는 붉은빛의 벽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귀신의 장난이 심한 것으로 여겼던 간장 항아리에도 붉은 고추를 끼운 금줄을 두르고, 집을 상량할 때나 샘을 새로 팠을 때 치는 금줄에도 붉은 고추를 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생명의 탄생과 집의 신축, 샘의 신설 등과 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 사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붉은색'으로 이를 막은 것이다.
이러한 습속이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분야는 식생활에서이다. 이사를 하거나 굿 을 할 때 팥죽을 끓여 나누어 먹는데, 이는 팥의 붉은색을 이용하여 부정한 것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나 연말의 동짓날에도 팥죽을 끓여 먹는다. 〈동국세시기〉에도 동짓날 팥죽을 끓여먹는 풍속을 적고, 팥죽을 대문이나 문설주 등에 뿌려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아 버리는 민속을 소개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은 팥, 수수, 대추 등의 붉은 곡식이 주를 이루고 있고 또한 붉은 약식을 해 먹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에도 팥죽으로 열병을 예방하고자 하였고, 고춧가루를 넣은 개장국과 육개장을 뻘겋게 끓여 이열치열의 원리와 함께 더위병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한편, 유둣날 민간에서는 밀의 누룩을 구슬처럼 만들어 붉은 물을 들인 다음 허리에 차고 다니거나 문설주에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식생활에서 붉은색을 이용한 벽사의 풍습은 절식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 주생활
주생활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건축재료로써 붉은빛이 나는 황토를 즐겨 사용하였다. 흙에도 갖가지 색깔로 된 여러 종류의 흙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붉은빛에 가까운 색을 골라 벽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서울 종로의 흙이 붉은빛의 황토였는데, 이 종로의 황토를 파다가 집 문 앞에 깔면 병귀가 들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파가는 바람에 이를 막는 '금토방'을 붙여야만 하였다. 동신을 모신 사당과 그 동신제의 제주가 사는 집 사이에는 붉은 황토를 깔아 사귀를 막았다. 또한 각 고을에 수령이 새로 부임하는 날에는 마을 밖 오리정에서부터 관가에 이르는 길까지 붉은 황토를 깔았다고 한다. 이에 동원되는 부역을 '황토부역'이라 하였다.
정약용은 〈다산필담〉에서 이러한 황토를 까는 풍습이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전 제한 뒤, 태양이 가는 길인 황도를 흉내 내어 귀하게 받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붉은 황토의 살포 풍습 역시 새로운 사람에게 잘 붙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벽사색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벽사의 용도로 사용된 적색은, 직접 붉은색을 칠하는 적극적인 행위에서부터 시작하여 붉은 옷, 연지, 봉숭아물, 고추, 팥, 대추, 붉은 황토 등 생활주변의 다양한 매개체를 통하여 그 의미를 전달하여 왔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에도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험 보러 가는 아들·딸의 옷속과 환자의 이불, 베갯잇 속에 붉은색의 부적을 넣어놓는다든가, 이사를 했을 때 팥죽, 시루떡 등을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는 등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독특한 적색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일상생활에서의 불행이나 질병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악귀의 소치로 여겨 그 악귀가 두려워하는 붉은색을 상징적인 힘으로 사용함으로써 방대한 '붉은 기속'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3. 음양오행과 색
음양오행사상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문화권에서 우주인식과 사상체계의 중심이 되어 온 원 리이다. 먼저 아무런 형체가 없던 무극에서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다섯 가지 원소를 생산하였는데, 이것이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이다. 따라서 오행의 하나하나에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음양오행사상에서는 우주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이 이러한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청, 적, 황, 백, 흑을 오행의 각 기운과 직결된 다섯 가지 기본색이라 하여 오색 또는 오채라 불렀다. 음양오행적 우주관에 의하면 동서남북 및 중앙의 오방이 주된 골격을 이루고 있고, 각 방위에 해당하는 오색을 다음의 그림과 같이 배치하였다.
또한 오색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계절, 오미, 오상, 오장, 오관, 오음 등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1) 오색
오색은 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으로 정색이라 부르며 모두 양에 해당된다. 또한 오행 중 상충하는 각 방위의 중간에는 간색이 오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음에 해당된다. 즉 서방과 동방의 사이에는 벽색, 동방과 중앙사이에는 녹색, 남방과 서방 사이에는 홍색, 남방과 북방사이에는 자색, 북방과 중앙사이에는 유황색이 오게 된다. 따라서 오정색과 오간색은 우리 문화의 기본색으로서, 우리 민족은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색을 생활에 사용하였다.
이상의 오색을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청색
청색은 방위로는 동쪽에, 계절로는 봄에 해당한다. 오행(五行) 중 목(木)으로, 하늘과 무성한 식물 등을 상징하는 색이다. 해가 떠오르는 동방에 해당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인 까닭에, 청색은 청정한 생명을 상징하며 양기가 왕성한 색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적색과 함께 사(邪)된 것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벽사기복의 색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성과로는 발생에 속하며 인간의 선함을 관장하는 색이다. 각각 간장, 눈, 신맛과 연결되어 있다.
(2) 적색
적색은 방위로는 남쪽에, 계절로는 여름에 해당된다. 오행 중 화(火)로서, 태양, 불, 피 등을 상징하는 색이다. 온화하고 만물이 무성한 남방에 해당되고 태양, 불, 피 등과 같이 생명력이 충만한 색 이므로 가장 강력한 양의 색으로 인식되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적색은 벽사의 가장 대표적인 색으로, 흰색 다음으로 우리 민족과 매우 밀접한 색이라 할 수 있다. 성과로는 성장에 속하며 인간의 예를 관장한다. 인체의 심장, 오관의 혀, 맛의 쓴맛에 각각 해당된다.
(3) 황색
황색은 오색의 중심색이다. 방위로는 중앙에 해당하며 4계절 모두에 연관되어 있다. 우주의 중심에 해당하므로 오색 중 가장 고귀한 색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천하의 통치권자인 천자를 상징하는 색으로 다루어져,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임금만이 황색옷을 입을 수 있었다. 오행 중 토(土)이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땅을 상징한다. 인간의 믿음을 관장하고 조화를 대표하며 오장의 비장, 오관의 몸, 맛의 단맛에 해당한다.
(4) 백색
백색, 즉 흰색은 서쪽과 가을에 해당한다. 흰색은 빛을 상징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색을 신성하게 여겼다. 또한 흰색은 순결, 청렴 등을 상징하며 우리 민족의 심성과 기질에 부합 되어 한 민족의 대표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오행 중 금(金)에 해당하며 성과는 수확에 속한다. 인간의 의리를 관정하고 각각 폐장, 코, 매운맛에 해당된다.
(5) 흑색
흑색은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에 속한다. 오행 중 수(水)로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고 스며들기를 좋아하는 물과 같이 음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성과로는 저장에 속하고, 인간의 지혜를 관장하며 은밀하고 현묘함을 좋아한다. 인체의 신장, 오관의 귀, 맛의 짠맛에 해당한다.
2) 음양오행에 따른 색
이상에서 살펴본 오색은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어, 색의 사용에 있어서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관념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관혼상제 및 생활 전반에 걸쳐 음양오행에 따른 색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특히 의례나 제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색 자체가 의식화, 제도화되어 법이나 관습의 일부분으로 정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크게 변화되지 않는 채 우리의 고유문화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사용된 색은 그 유형이나 표현양상에 있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크게 공간개념과 관련된 측면, 색의 사용과 가장 밀접한 분야인 복식에 나타난 측면, 기와에 기타 건축, 식생활 등에 관한 측면의 세 가지로 나누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공간개념에 나타난 색
우리 문화에 나타나고 있는 공간개념은, 동서남북과 중앙, 오방위의 수평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대인들은 우주를 다스리는 제왕과 그 밑에 사방을 수호하는 신수를 설정하였는데, 이 신령한 동물들을 그들이 수호하는 방위에 해당하는 색으로 되어 있다. 즉 동방에는 청룡, 서방에는 백호, 남방에는 붉은빛을 띤 주작, 북방에는 흑색의 현무로서, 풍수지리설에서는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이라 하여 가장 중요한 방위 설정의 개념으로 삼고 있다. 이는 예로부터 왕도를 정할 때 기본적인 요건이 되어 왔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상을 모시는 묏자리 설정의 기준이 되 고 있다.
나라에서 지내는 다섯 가지 의례인 오례의 의식에서도 모두 이러한 음양오행적 이치에 따랐다.
군례의 예를 보면, 진영의 각 위치에 따라 군기로서 대오방기를 사용하였다. 동쪽에는 청룡기 또 는 청색기, 서쪽에는 백호기 또는 백색기, 중앙에는 황색기, 남쪽에는 주작기 또는 적색기, 북쪽에 는 현무기 또는 흑색기를 세워 방위신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나라의 경사스런 예식인 가례 때에도 중앙에 황룡기(황색 바탕에 황룡을 그린 그림)를 비롯하여 오른쪽에 백호기(흰 바탕에 흰 호랑이 그림)와 현무기(흑색 바탕에 현무 그림), 왼쪽에 청룡기(청색 바탕에 청룡 그림)와 주작기(적색 바탕에 주작 그림) 그리고 홍문대기(적색 바탕에 청룡 그림)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공간개념에 따른 색채 사용은 음양오행적 이치에 따라 적용되어 왔으며, 특히 국가적인 의례나 의식 때에는 이를 철저히 지켜 국가의 번창과 나라의 평안을 희구하였다.
(2) 복식에 나타난 색
복식분야는 그 시대의 색채문화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 민족이 평상복으로 흰옷을 즐겨 입으며 백의민적으로 대표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바 있다. 그러나 혼례 등의 의식이 있을 때나 왕실복, 관복, 사대부가의 의복, 기타 특수 작업(기생·무당 등)에 종사하는 이들의 복식에서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갖추어 입었다.
먼저 색의 기본인 오색 자체를 모두 사용한 경우가 많이 있다. 청, 적, 황, 백, 흑의 오색 천을 이어 붙여서 만든 색동저고리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주로 돌이나 명절 때 어린아이에게 만들어 입힌다. 또한 까치두루마기라 하여 섣달 그믐날 어린아이에게 오색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히는데, 이때도 양팔을 색동으로 하였다. 이처럼 색동은 오행사상에 따른 오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이것이 제대로 시켜지는 예가 거의 드물다. 색도 3색에서 7색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색깔도 검은색을 빼고 자유롭게 쓰고 있다.
원래 색동을 사용한 의미는 음양오행에 따른 다섯 가지 색을 사용함으로써, 오행을 두루 갖추어 사된 기운을 막고 어린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오색의 배치에 있어서도 오행을 상생하는 방향으로 나열하여 무궁한 발전을 기구해 왔다. 색동처럼 오색을 계속 반복 시키면서 이어 붙이는 것 외에도 오색을 이용한 복식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주머니는 복을 받아들이고 간직한다고 하여 오색을 갖추어 만드는 것이 상례이다. 이 주머니를 '오방낭자'라 하는데, 청, 적, 황, 백, 흑의 다섯 가지 색 비단조각으로 만들어 만사평안을 비는 뜻을 담았다. 정초가 되면 첫 해일에 오방낭자를 만들어 왕비가 직접 재상가의 어린이들에게 사송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악공과 무인의 의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악공들은 붉은 비단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소매가 큰 황색 옷에 붉은 비단 띠를 둘렀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끈을 맸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무복에서도 음양오행설이 바탕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궁중무용에 이르기까지 오행사상과 결부된 형식을 고수하였다. 조선시대 궁중무용인 정재무의 복식 역시 오색을 음양과 상생의 원리에 맞게 사용하여, 무용예술에 고유의 사상을 내포시켜 시각적인 조화와 나라의 무사평안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라의 처용무에 적용된 오행사상은 조선시대 궁중무용의 창작 또는 개작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연희에 있어서 오광대놀이의 오방신장부 등은 오행사상에 의하여 개작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봉산가면극의 팔먹 중 이옷도 오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작품에 오색을 모두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복식에서는 갖추어 입는 옷, 장신구 등을 상호간의 음양오행 원리에 적합하게 배치하거나, 입는 사람의 위치나 입장에 따라 적절히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왕복, 왕비복, 관복, 부인복, 아동복 등과 같이 누가 입게 되는가에 따른 대상별 종류와 혼례복, 평상복, 상복, 무복 등과 같이 언제 입게 되는가에 따른 목적별 종류 등으로 그 범위와 대상이 매우 방대해진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복식에 있어서 음양오행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개관하는 정도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 예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의 선조들은 음양의 원리에 따라 몸의 상반신은 양이고 하반신은 음이라는 양상 음하의 원칙을 복색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의정색 상간색'이라 하여 상의는 양에 해당하는 정색을, 하의는 음에 해당하는 간색을 즐겨 입었다.
또한 길례, 빈례, 가례와 같은 의식에서는 주로 정색 가운데서도 양의 기운이 강한 적색과 청색 이 사용되었으며, 흉례 때에는 북현서백의 음이 주가 되므로 백색과 흑색을 주로 사용하고 황색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남자는 관례 때 청포를 입고, 혼례 때의 신부는 녹의홍상을 입었다. 반면, 문무관이 종묘 제례 때 입는 흑단령은 검은색이며 상례 때에는 백도포, 소복, 소혜(흰 신발)를 착용하였다.
이처럼 그 목적에 따라 음양오행의 이치에 합당하게 의복을 갖추어 입었다. 또한 연령에 따라 오행설을 적용하여 그에 따른 적절한 색의 옷을 입도록 하였다. 즉 자라나는 어린이는 생기와 번성을 상징하는 녹색 계통의 옷을 입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고, 청장년층은 화기의 상징인 홍색 계통을 주로 입었으며, 노인층은 토기인 황색 계통과 금기인 백색 계통의 옷을 입었다.
왕실과 조정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관리들이 복색을 품계에 따라 달리 정하여 전체적으로 조화와 위계를 뚜렷이 하였다. 고려시대의 예를 보면 문관 4품 이상의 복색은 자색, 상참 6품 이상은 비색, 9품 이상은 녹색으로 정하였다. 이때 자색은 화기의 간색이고 비색은 목기의 간색이며 녹색은 수기의 간색이다. 이것은 수생목, 목생화로 하급관리가 차례로 상급관리를 도와주는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특히 유채색 중에서 신분이 높고 낮음을 표시하는 가장 큰 구별은 정색과 간색의 사용으로 나타냈다. 중국에서는 최고통치자를 황제라 하여 천자의 색인 황색 곤룡포를 입을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왕은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황색 곤룡포를 입을 수 없었다. 황색은 특히 신라시대부터 황제의 색이라 하였는데, 조선 태조 5년에는 황색옷을 입지 못한다는 금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황색과 비슷한 색인 홍, 토홍, 황할색 등도 금액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황제가 하례를 할 때 입는 예복인 강사포는 붉은 비단 바탕에 봉황의 황금색 무늬가 그려 진 도포이다. 이 때 왕은 도포의 색이 주홍색인 점이 다르다. 치성하는 화덕을 본받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천자가 정색을 쓰는 반면 왕은 간색을 사용하여 차이점을 표시한 것이다.
한편, 혼례 때 신부복이자 부인들의 가례복인 녹의홍상은 모두 오행의 상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녹색은 동방 목기에 속하며 붉은색은 남방 화기에 속하므로 목과 화가 상생이 되며 장수하고 부귀가 충만하도록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3) 단청과 식생활에 나타난 색
이외에도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색을 선택, 사용한 예는 생활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색과 무늬로 채색 장식을 하는 '단청'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가 장 오래된 단청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로 추정되고 있다. 단청의 목적은 건물의 보존과 장식은 물론 외부를 가꾸어 창업의 표현으로 시각적 효과를 얻는데 있다. 대궐이나 사찰 등에서 채문하여 건물을 돋보이게 하고 장엄한 장식을 베풀어 화려하고 엄숙한 권위를 상징하게 된다. 이때 (오채:오색)를 기본으로 하여 장식하였다.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화려한 진채와 화식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은 건축물에도 상승계급에서만 진채와 화식을 사용하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진골의 사가 이상의 건물에 오채를 베풀었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와서는 일반 서민주택의 단청을 엄격하게 규제하여 왕궁과 사찰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식생활에서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사된 것을 물리치는 양의 색, 즉 벽사의 색으로 붉은색을 사용한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때 벽사의 의미로 사용되는 재료로는 고추, 팥, 대추, 수수 등이 사용된다. 또한 잔칫상에 오르는 국수는 대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 국수 위에 오색으로 된 고명을 얹어 오행에 순응하는 기복의 의미를 더하였다.
여기에서 고명에 사용되는 다섯 가지 색의 재료를 살펴보면, 청색에는 미나리, 실파, 쑥갓, 오이 등이, 적색에는 실고추, 다호고추, 당근이, 황색에는 달걀 노른자, 흰색에는 달걀흰자, 흑색에는 표고버섯, 목이버섯, 쇠고기 등이 해당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색을 사용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음양오행에 따른 관념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정과 사대부가, 그리고 민간인들에 있어서도 관혼상제 등과 같이 의례나 제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음양의 조화 와 오행의 상생에 적합한 색 사용이 제도화, 관례화되어 있다.
색채 사용에 있어 보다 시각적인 이미지에 충실하게 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옛 선조들이 이러한 관념적인 색채를 추구하게 된 의미를 되새겨 보고 거기에 담겨진 소망과 염원을 간직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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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빗새님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
시간 날때마다 복습을 해야겠습니다.
명절 가족한 풍요롭게 맞으세요.
고맙습니다.
더 좋은 자료를 올려 놓을 수 있도록 저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