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움이 가르쳐 준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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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혼자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찍고 있었다. 좋은 사진을 얻으려고 구도를 바꾸고 초점을 맞추던 중,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외로움이 사라져 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쓸쓸한 감정이 사진에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날부터 외로움이 찾아오면 카메라를 들었다. 새벽에도 일어나 풀과 나무를 찍고, 작은 개미의 움직임까지 관찰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연을 바라보다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이 쌓이자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에 작품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해졌다. 더 좋은 사진을 찍고 싶어 촬영 기술을 익혔고, 주말이면 혼자 작은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세계적인 사진 공유 사이트 500px에서 사진을 평가하는 점수 체계를 발견했다. 자신 있게 몇 장을 올렸다. 적어도 60점은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30점이었다.
10년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했다.
그러나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기왕 시작한 일, 95점을 받아 보자.'
80점대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90점의 벽을 넘지 못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늘 익숙한 시간에 익숙한 풍경만 찍고 있었다. 사진 기술뿐 아니라 빛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져야 했다.
어느 10월의 토요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카메라를 챙겨 산속 운문댐으로 향했다. 해가 떠오를 무렵 물안개가 피어나는 풍경을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운문호수에서 안개가 걷히는 순간을 우연히 만났다.
그 사진들이 94점과 95점을 받았다.
드디어 목표를 이루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집 앞에 피어난 작은 꽃을 접사로 촬영했는데 그 사진이 무려 99점을 받은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좋은 사진은 반드시 멋진 풍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대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 깨달음은 사진 밖의 세상으로도 이어졌다.
좋은 사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어 영상 편집을 배웠다. 영상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자 피아노까지 배우려 했다. 그러다 인공지능 음악을 만났고, 이제는 사진과 영상에 어울리는 음악도 직접 기획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보고 기뻐하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사진이 99점을 받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야호!" 하고 소리쳤다. 반면 누군가 내가 만든 영상을 보고 행복해할 때는 그런 탄성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쁨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렇게 나의 기쁨은 조금씩 다른 사람을 향해 넓어졌다.
물론 그 과정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정성을 다해 만든 선물에 별다른 반응이 없으면 서운했다. 나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한 친구가 자취하는 다른 친구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는 의아했다. 나에게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그 모습을 통해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친구가 보여 준 작은 배려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네던 그 친구는 자신의 작은 행동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성경을 묵상하면서 좋은 땅과 소금과 빛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땅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씨앗을 품고 열매를 맺는다.
소금은 자신의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음식 속에 녹아들어 맛을 더한다.
빛은 아무 말 없이 어둠을 밝힌다.
이것은 성경의 비유를 내 삶에 비추어 풀어 본 작은 묵상이다.
나는 오랫동안 좋은 점수를 받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내가 만든 작품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조금씩 다른 자유를 배우고 있다.
점수에 마음을 묶어 두지 않으면 점수에서 자유로워진다. 상대방의 반응을 움켜쥐지 않으면 그 반응에서도 자유로워진다.
그보다 더 깊은 자유는 문장의 주어가 바뀔 때 찾아온다.
'내가 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나의 수고와 성취,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가 마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하셨다.'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하니 마음의 무게가 달라졌다.
재능도 기회도 은혜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내가 할 일은 정성을 다하는 것뿐임을 배웠다. 결과까지 내 공로로 붙들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 고백이 늘 흔들림 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운함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말씀을 묵상한다.
세월이 흐른다고 경험이 저절로 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이며, 말씀 앞에서 마음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야고보서에는 시련을 견디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돌아보면 외로움은 내게 카메라를 들게 했고, 카메라는 자연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 주었다. 그 눈은 마침내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했다.
외로움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까.
그 질문에는 아직도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외로웠던 세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세월을 해석하는 문장의 주어는 달라졌다.
처음에는 '내가 외로움을 견뎠다'고 생각했다. '내가 카메라를 들었고, 내가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고백한다.
'주님이 외로운 시간에도 나를 놓지 않으셨다.'
'주님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하셨다.'
'주님이 평범한 것들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셨다.'
외로움은 여전히 내 삶의 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의 주어는 더 이상 외로움도, 나 자신도 아니다.
이제 나는 내가 발견한 작은 아름다움이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소금처럼, 빛처럼.
내 이름이 남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했다는 문장을 내려놓고, 주님이 하셨다는 문장 안에 머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도,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조금씩 알게 된다.
문장의 주어가 바뀌자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때, 외로움으로 시작된 나의 이야기는 은혜의 이야기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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