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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주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선구자들
반 경 환
니체는 그의 {서광}에서 “사람은 어디에다 집을 세워야 하는가? 만약 그대가 고독할 때 위대하고 결실이 풍부하다고 생각한다면, 사교는 그대를 작게 만들고 황폐하게 할 것이다. 역도 참이다. 부친이 가지고 있는 힘찬 온화감----, 이 기분이 그대를 감동시키는 곳, 거기에다 그대의 집을 건설하라. 혼잡 속이든, 정적 속이든 간에, 내가 아버지인 곳, 거기에 조국을 건설하라!”라고 역설한 적이 있었다. ‘나’란 누구이며, ‘아버지’란 누구이란 말인가? 나는 너도 아니고, 수많은 당신들도 아니며, 오직, 단 한 사람 뿐인 나 자신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없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없는 오직, 단 한 사람 뿐인 나 자신일 뿐 것이다. 만일, 아버지 살해가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라면, 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홀로서기를 이룩한 사람이며, 자기 스스로 종족창시자가 된 아버지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아버지이며, 전제군주이고, 그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그 ‘나--아버지’가 사상의 신전을 지은 곳은 이상낙원이며, 언제, 어느 때나 젖과 꿀이 넘쳐 흐르고 있는 행복한 세계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하나의 양생술에 지나지 않으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는 모든 중생들의 때묻은 욕망을 정화시켜주고 그들을 그의 사상의 신전인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간 바가 있고, 예수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씻어주고 그들을 그의 신전인 천국의 세계로 인도해간 바가 있다. 부처, 예수, 살부와 근친상간을 범하고 테베사회를 구원해냈던 외디프스,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인 불을 발명하고 그 댓가로 카우카소스의 바윗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 먹혀야만 했던 프로메테우스, 칸트의 현상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현상학을 정립했던 헤겔, 헤겔의 유심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유물론을 역설했던 마르크스, 그의 스승인 헤겔의 절대정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염세주의를 정립했던 쇼펜하우어,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기도하고 마침내 신의 사망증명서를 발급해주었던 니체 등----.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독창적인 명명자이고,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며, 자기 자신들 스스로가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어갔던 문화적 영웅들(종족창시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위주의란 무엇인가? 전위란 본래 군사적 용어로, 최전방에 서서 돌진하는 부대를 말하지만, 이제는 혁명적인 예술운동을 지시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전위주의자란 시대정신의 선두에 서서 비록, 외롭고 고독하지만, 우매한 대중들을 이끌어 나가는 예술가들을 말하며, 그 예술가들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사상의 신전을 짓고,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문화적 영웅들을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났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 그리고 이밖에도 표현주의, 구성주의, 미래파, 포스트모던 예술운동이 그 시대의 모든 가치관들을 전복시키면서 온갖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방법----때로는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탕자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모든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해주고 있는 너무나도 인자하고 자비로운 의사(현자)의 모습으로----으로 새로운 시대 정신을 연출해 냈던 것이다. 전위주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 사상의 차원이 그 하나이며, 기법의 차원이 그 둘이다. 사상은 내용이 되고, 기법은 형식이 된다. 사상이 없는 기법은 맹목적이고, 기법----새로운 기법----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다. 사상이 없는 기법은 그것이 도로아미타불의 수고에 그칠 공산이 크고, 기법이 없는 사상은 ‘새술을 낡은 부대에 담은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어릿광대의 짓에 그칠 공산이 크다. 프란츠 카프카는 ‘소설(예술)이란 기법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지만, 그러나 그 기법 속에는 새로운 사상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요컨대, 새술은 새부대에 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상징주의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문예운동이며, 파르나스파의 고답주의(객관주의)와 에밀 졸라류의 자연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났던 문예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19세기는 자연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 ‘실증주의’가 ‘현대사상의 지주’로 올라섰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자연에 대한 기계적인 해석과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온갖 인식의 상대성들이 그 싹을 내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르나스파의 완고한 형식과 객관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자들의 인간세계의 추악상과 무책임한 잔인성의 폭로 등이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싸늘한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성과 서정이 그 고개를 들게 되고, 모든 대상들을 상징적이며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상징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김붕구, [보들레르와 상징주의], {문예사조}, 문학과지성사 참조).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고, 백색은 순결의 상징이 된다. 태양은 만물의 창조주인 아버지가 되고, 달은 언제, 어느 때나 인자하고 친절한 어머니가 된다. 상징주의란 실증주의의 정반대방향에서, 꿈과 이상을 중요시하는 사상이며, 그 상징을 통해서 이 세계와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찍이 보들레르가 그의 [相應]에서,
‘自然’은 하나의 寺院이니 거기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라고 역설했던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또한, 그가 [알바트로스]에서,
때때로 장난하느라 선원들은
커다란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게으른 여행 친구처럼 쓰디 쓴 심연으로
미끄러지는 배를 뒤따르는 알바트로스를
갑판 위에 놔두자마자
창천의 왕자는 어색하고 부끄러워
커다란 흰날개를 노 비슷하게
불쌍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여행자여, 그대는 얼마나 우습고 무기력한가!
전에는 그렇게 아름답던 게 이제는 우스꽝스럽고 추하고나
어떤 자는 파이프로 부리를 지지고
어떤 자는 절름거리며 예전에 날아다니던 그 새를 흉내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같다
태풍을 쫓아다니며 사냥꾼을 비웃는다
그러나 야유 투성이의 땅에 떨어지면
그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걷지도 못한다.
라고 역설했던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자연이 하나의 사원”이고, 우리 인간들이 그 “상징의 숲”에 사는 원주민들이라면, 시인이란 다름아닌 ‘번역자이며, 암호해독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상징의 숲을 떠나서는 그 거대한 날개 때문에 온갖 조롱과 냉소와 무한한 학대를 받는 알바트로스의 운명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군의 저주받은 시인들, 즉, 모든 전위주의자들의 운명이기도 했던 것이다. 상징주의는 그들이 처한 사회 역사적인 현실을 외면했다는 점----그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색채 때문에----에서는 그만큼의 한계를 지닌 사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상징주의자들의 사상과 그 기법은 인류의 역사가 종식되지 않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금자탑에 해당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고, 그 사원의 숲은 상징의 숲이다. 우리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원과 상징의 숲에서 자유 자재로운 알바트로스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상징주의가 파르나스파와 자연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와 현실주의의 반대방향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꿈과 이상을 가져다가 주는 사상이라면, 상징주의는 그 기법의 차원에서 상징과 함축, 은유와 암시를 통해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꿈과 이상의 세계, 즉, ‘상징의 숲’으로 우리 인간들을 인도해가고자 한다. ‘자연--사원--상징의 숲’이라는 상징과 함축과 은유와 암시의 세계가 그렇고, ‘하늘을 나는 새인 알바트로스-- 태풍을 쫓아다니며 온갖 사냥꾼들을 비웃는 알바트로스-- 뱃사람들에게 붙잡혀 온갖 야유와 수모를 당하는 알바트로스--구름의 왕자인 시인--타락한 현실에서 온갖 야유와 수모를 당하는 시인’의 세계가 그렇다. 이밖에도 상징주의자들은 자유연상과 유추 등의 연쇄기법을 매우 잘 활용했고, 보들레르는 전위주의자로서 상징주의와 퇴폐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베를렌느, 앙드레 브르통은 보들레르가 피워낸 새싹들에 지나지 않는다.
초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초현실주의란 현실을 초월한 세계를 추구하는 사상을 말하며, 1920년대 다다이즘에 이어서 프랑스의 시단에 등장한 문예운동을 말한다. 초현실주의가 탄생한 배경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의 위기와 몰락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인 혼란이며, 두 번째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非유클리드 기하학과 상대성 이론의 등장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분석학의 등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는 노동문제, 재정문제, 인권문제, 식민지문제 등----,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며, 非유클리드 기하학과 상대성 이론의 등장은 이제까지의 실증주의에 기반한 인식론들이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반증해주고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등장은 의식이란 무의식에 비하여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압도적으로 인식시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상들은 대부분이 애매모호한 내부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적인 것이지만, 초현실주의는 모든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모순의 융합을 시도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오생근, [초현실주의--꿈과 현실의 종합], {문예사조}, 문학과지성사 참조). 꿈과 현실,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등을 분리하지 않고 그 모순들을 융합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며, 따라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어떤 때는 비관주의자들이었다가 낙관주의자들이 되기도 했던 것이고, 또, 어떤 때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가 공산주의자들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가령, 예컨대, 사회적인 혁명이 없이는 진정한 인간해방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앙드레 브르통,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이 모두 공산당에 가입을 했었지만, 그러나 끝끝내는 개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과는 결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사상적, 내용적)으로는 급진주의자들이었지만, 문학적(형식적)으로는 완강한 보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는 무관심하고----비록, 그들이 급진적인 공산주의 사상에 일시적으로 동조를 표명하고 있었을지라도----, 문학적으로는 과감한 형식을 파괴하는 급진주의자들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튼 초현실주의는 꿈과 이상, 개인의 자유와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그 기법으로는 자유연상과 자동기술이라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채택한 전위주의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초현실주의자들은 끊임없이 현실에 예속되기를 거부했던 신성모독자들이며, 그들의 전위주의는 그 어떠한 선배와 스승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인 반항과 불복종운동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같이熱風이불드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恍惚한指紋골작이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쏘으리로다.나는내消化器管에묵직한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銃口를느낀다.그리드니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어배앝었드냐.
----이상, [烏瞰圖--詩第九號 銃口] 전문
주지하다시피 이상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위주의자이며, 그는 초현실주의라는 사상과 기법을 통하여 그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오감도--시제9호 총구]는 자유연상과 자동기술----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등을 포함하여----의 기법을 가장 잘 활용한 시이며, 그것을 산문적으로 풀이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1, 매일같이 큼직한 손으로 허리(가슴)를 쥐어짜듯 열이 나고;
2, 그러자 수많은 땀구멍에서 식은땀이 솟아나오듯이 구역질이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3, 이윽고 나는 나의 입(총구)으로 시뻘건 피를 토해내게 되었다;
이상의 시, [오감도--시제9호 총구]는 상호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미지들, 예컨대, ‘열풍, 큼직한 손, 황홀한 지문, 소화기관, 총구’ 등의 이미지들이, 그러나 그가 폐결핵 말기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는 너무나도 명료하게 이해가 되고, 그가 그의 객혈과정을 총기의 발사과정으로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희화화시켜 놓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줄글과 타인의 생각과 그 의사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속도감은 그가 자동기술과 자유연상의 기법을 매우 잘 활용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희화화란 어떤 대상이나 인물을 익살스럽게 묘사하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그가 자기 자신을 희화화시킨 이면에는 건강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상의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은 이밖에도 거꾸로 된 숫자, 화학방정식, 의학용어, 해괴한 실험도면까지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그는 그의 꿈과 이상, 개인의 자유와 인간해방을 위하여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 자재롭게 넘나드는 과감한 형태파괴의 시를 낳게 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 언제, 어느 때나 냉소적이며 조롱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건강함의 징후이며, 단 하나의 진리와 절대적인 모든 것은 병적인 어떤 것이다. 이상의 병은 건강함의 징후이며, 그는 그 건강함을 통하여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고 그 신성모독자(전위주의자)의 삶을 살다가 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도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痛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부분
▲ 일화 15만엔(45 만원) ▲ 5.75 캐럿 물방울다이어 1개(2천만원) ▲ 남자용파텍시계 1개(1천만원) ▲ 황금목걸이 5돈쭝 1개(30만원) ▲ 금장로렉스시계1개(1백만원) ▲ 5캐럿에머럴드반지 1개(5백만원) ▲ 비취나비형브로치 2개(1천만원) ▲ 진주목걸이꼰것 1개(3백만원) ▲ 라아카엠 5 카메라 1대(1백만원) ▲ 청자도자기 3점(싯가미상) ▲ 현금(2백 50만원)
너무 巨하여 귀퉁이가 안 보이는 灰의 왕궁에서 오늘도 송일환씨는 잘 살고 있다. 생명 하나는 보장되어 있다.
----황지우,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 부분
내 앞발에 박힌
이 깊숙한 가시를
핥다가 나는 이따금
부릅뜬 눈을 들어, 핥
야 이 개애새끼들아아
내 머리, 오 이 구름 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힌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
----박남철, 「獅子-- 모교의 교정에서」 전문
이성복과 황지우와 박남철은 이상의 후배 시인들로서, 그들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시인들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상 이후, 그 어느 시인들보다도 초현실주의의 사상과 기법을 받아들인 시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유연상과 자동기술의 기법은 물론, 그들의 풍자와 해학을 통한 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등은 개인의 자유와 인간해방을 간절하게 꿈꾸었던 1980년대의 시대정신과 맞물려서, 1980년대를 ‘시의 시대’로 이끌어 나갔던 장본인들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무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라는 것, 잔디밭 잡초를 뽑아내는 여인들이 자기 자신의 삶까지도 솎아낸다는 것,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자신의 하늘까지도 무너뜨린다는 것, 노인과 便痛의 다정함 속에 몇 건의 교통사고와 몇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모두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 [그날]의 가장 핵심적인 전언이라면, 이성복 시인의 자유연상과 자동기술의 속도감 속에는 한국사회 전체가 속속들이 병들었다는 가장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진단이 그의 풍자와 해학을 통한 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도 마찬가지이고, 박남철의 [사자--모교의 교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황지우와 박남철은 신문기사와 텔레비전 보도내용, 유행가의 가사와 시정의 잡배들의 온갖 욕설과 은어와 비어와 사투리까지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시인들이며, 그들 역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위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풍자는 사회적인 죄악상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을 말하고, 해학은 그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을 너무나도 유머러스하게 희화화시켜 놓는 어떤 것을 말한다. 풍자와 해학은 반드시 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등으로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그 주체자들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 자재롭게 넘나드는 것은 물론, 과감한 형태파괴적인 시들을 낳게 된다. 시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非시적인 것만이 있다. 아니, 非시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시적인 것만이 있다. 그들이 모두가 다같이 서투른 공산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주제와 소재, 또는 의식과 무의식의 측면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초현실주의자가 되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지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재빨리 발휘되는 재치를 뜻하고, 반어란 본뜻과는 반대되는 말을 함으로써 문장의 의미를 강화하는 방법을 말한다. 역설이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표현상이나 상식적으로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말을 뜻하고, 언어유희란 그야말로 말놀이와 말잔치를 뜻한다.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하루]에서의 대도둑의 절도품목들은 거꾸로 그 대도둑보다는 그러한 고가의 사치품들을 소유하고 있는 특수한 부유층들의 그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시적 화자는 일체의 사적인 감정을 숨기고 그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절도품목들을 제시해놓고 있지만,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치품목들은 대부분의 일상인들에게는 접근불가의 대상들이며, 따라서 그 특수한 부유층들의 부도덕성만이 드러나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위대한 ‘재(灰)의 왕국’이고, 이 땅의 소시민들은 매우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황지우의 시적 전언이기도 한 것이다. 박남철의 [사자--모교의 교정에서]라는 시는 ‘모교’라는 곳이 사자의 웅대한 기상과 그 화려한 꿈을 심어주기보다는 그 어린 사자의 앞발에 도저히 뽑아낼 수 없는 가시를 박아놓았다는 ‘분노’를 표현해보인 시라고 할 수가 있다. 학교는 백만 두뇌를 양성하는 곳도 아니고,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가르쳐 주는 곳도 아니다. 또한 학교는 진리를 탐구하는 곳도 아니고, 전인교육을 가르쳐 주는 곳도 아니다. 학교는 오직 값비싼 등록금이 자라나는 곳이고, 또한, 스승이라는 밀렵사냥꾼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곳이다. 학교는 선후배들의 一刀必殺의 劍法이 자라나는 곳이고, 또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양심의 뒷통수를 치는 厚顔無恥의 秘法이 자라나는 곳이다. 오늘날의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밀렵사냥꾼들의 사냥의 터전이라는 것이 박남철의 가장 날카롭고 충격적인 전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앞발에 박힌/ 이 깊숙한 가시를// 핥다가 나는 이따금/ 부릅뜬 눈을 들어, 핥/ 야 이 개애새끼들아아”라는 시구나, “내 머리, 오 이 구름 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힌/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라는 시구에서처럼, 그의 문장은 완성됨을 모르고, 그 완성되지 않은 파열음을 토해내며, 그 분노의 대명사인 그 거친 욕설들이, 마치,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상,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시인은 모든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현자(의사)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제일급의 시들은 때로는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탕자들을 등장시켜 놓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전위주의는 대한민국의 해체를 겨냥하는 한편, 또한, 자기 자신들의 생명의 해체까지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식의 파괴는 자기 자신의 파괴이며, 자기 자신의 파괴는 형식의 파괴이다. 아니, 형식의 파괴는 새로운 형식의 창조인 것이고, 자기 자신의 파괴는 또다른 ‘나’의 탄생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모든 전위주의는 사상과 기법의 차원에서 실천된다’는 명제 아래, 그 전위주의자들로서 상징주의자들과 초현실주의자들을 살펴보았지만, 이상과 이성복과 황지우와 박남철 등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위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은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어떠한 형식과 내용도 제대로 창출해낸 바가 없다. 사상(내용)도 없고, 그 사상을 담을 만한 그릇(형식)도 없다. 다만, 있다면, 서양이라는 타자의 사상과 형식 속에다가, 우리 한국인들의 단편적인 사유와 그 삶의 내용을 담아낸 단순 모조품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상도, 이성복도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에 값하는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내지 못했고, 황지우도, 박남철도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에 값하는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내지 못했다. 고은도, 신경림도, 김수영도, 황동규도, 정현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가 다같이 사상과 이론, 혹은 전위주의 앞에서는 말 못하는 벙어리, 눈 뜬 봉사, 두 발로 설 수 없는 앉은뱅이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나의 말은 사실 그대로의 가치평가의 말이지, 전혀 뜬금없는 욕설이나 비방의 말이 아닌 것이다. 부디, 당부하고, 또, 당부하지만, 독자 여러분들은 이 점에서 절대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의 가치평가의 말은 그 어떠한 가짜 권위도 무시한 채, “무사한 세상이 병원이고 꼭 치료를 기다리는 무병이 끝끝내 있었다”라는 이상의 [紙碑]와 “모두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의 [그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삼천리 금수강산 전체가 속속들이 부정부패로 병든 사회이고, 당신도, 당신도, 또, 그리고, 수많은 당신들도 그 병든 사회의 가짜 시인, 가짜 전위주의자들에 지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보들레르와 앙드레 브르통은 전위예술가의 대명사처럼 불려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보들레르와 앙드레 브르통이 이끌었던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전위예술가들이 있다. 보들레르 역시도 정치적 충동을 문학의 외피로 은폐하고 문학예술작품을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삼았던 급진주의적인 작가들----, 예컨대, 공산주의의 작가들을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바라본 바가 있지만,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전위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가 있다. 정치적 좌파들은 정치적 급진주의(공산주의 혁명)와 문학적 보수주의(낡디 낡은 서정시와 현실의 세부묘사)를 표방했고, 정치적 우파들은 정치적 무관심(무정부주의, 세계시민주의)과 문학적 급진주의(너무나도 과감한 형태파괴와 내면심리의 묘사, 그리고 새로운 형식의 창조 등)를 표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이란 언제, 어느 때나 전형적인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이란 인간의 내면의식을 묘사하는 것은 물론, 언제, 어느 때나 과감한 형태 파괴를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대 공산주의’, ‘초현실주의 대 공산주의’는 이처럼 서로서로 대립 갈등들을 불러일으키며, 상호간의 그 사상적 의의와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리얼리스트들과 모더니스트들, 또는 리얼리스트들과 포스트 모더니스트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전위주의란 그런 것이 아니다. 전위주의란 특정한 사상과 이론의 종속물도 아니며, 또한, 특정한 경향과 특정한 유파의 전유물도 아니다. 전위주의란 가치중립적인 용어이며, 마치, 비판이 모든 학문의 예비학인 것처럼, 모든 학문과 예술의 최고급의 천재들이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인 것이다. 전위주의자란 그가 무엇에 종사하고 있든지간에, 독창적인 명명자이고, 전제군주이며,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상과 이론의 정립이며, 그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전위주의자라고 해서 모두가 다같이 그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왔고, 어느 분야의 대가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언제, 어느 때나 전위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레오나르드 다 빈치는 비행기 발명자로서는 실패를 했기 때문이고, 또한, 이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실존주의의 창시자였던 사르트르는 구조주의의 열풍 속에서 이미 시대착오적인 보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위주의자란 삶과 죽음을 넘어서서, 그 어느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며, 그 결과, 자기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개념이란 최초의 대상에 대한 이해를 뜻하고, 이론이란 그 개념들을 더 큰 사회 역사적인 문맥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진리를 말하고, 사상이란 그 개념들과 이론들을 다 끌어안고 종합하여, 그것이 공산주의이든지, 염세주의이든지, 구조주의이든지, 실존주의이든지, 낙천주의이든지 간에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으로 꽃 피어난 어떤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전위주의자들(지식인들)에게 사상이란 최고의 목적이며, 그 모든 것이다. 사상은 돈이고, 명예이고, 권력이다. 사상의 신전만이 고귀하고 아름답고, 사상가만이 마치, 보들레르와 앙드레 브르통처럼, 또는 마르크스와 쇼펜하우어처럼, 모든 인간들을 자기 자신의 사상의 신전으로 인도하고, 그들과 함께, 인류의 역사가 종식되지 않는 한,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공산주의와 염세주의와 낙천주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상징주의와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왜냐하면 사상이란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이며, 행복에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전위주의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고, 전위주의란 사상과 기법의 차원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것을 역설한 바가 있다. 전위주의란 가치중립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상가와 예술가들, 또는 모든 창조적 천재들이 반드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통과의례과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들레르는 상징주의라는 사상과 기법의 차원에서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갔고,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라는 사상과 기법의 차원에서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갔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사상과 기법의 차원에서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갔고,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라는 사상과 기법의 차원에서 전위주의자의 길을 걸어갔다. 호머도,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랭보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아버지 살해’를 감행했던 신성모독자들이며, 그들은 또한, 모두가 다같이 그들의 사상과 이론을 통해서 너무나도 우매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냈던 문화적 영웅들(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전위주의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왜, 그처럼 고귀하고 위대한 전위주의자들, 즉, 진정한 문화적 영웅들을 배출해내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 한국인들은 오천 년의 역사가 부끄러울 정도로 새로운 사상도 정립하지 못했고, 그 어떠한 이론도 생산해내지 못했다(과연 그럴까? 독자 여러분들은 내가 15년만에 완성해낸 나의 {행복의 깊이} 1, 2, 3권을 정독해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학문의 꽃’인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고, 최고급의 교과과정인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연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문의 꽃’인 철학을 가르치지 않으면 어떠한 역사 철학적인 사유의 진전도 가능하지가 않고, 이 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인간이라는 광우병’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또한, 초, 중, 고등학교의 교과과정을 ‘사지선다형의 입시교육’이 아닌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그 학생들이 ‘입시지옥이라는 늪’에 빠져서----학문연구의 전당인 대학교에서----최고급의 사상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논문을 쓰기는 커녕, 남아메리카의 천민들처럼, ‘표절의 대가들’로 자라나게 된다. 빛나는 개성과 창의성의 결핍, 독창적인 명명의 힘의 부재----, 바로, 이러한 ‘인간 광우병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진정한 전위주의자가 될 수 없게 했던 것이고, 다른 한편, 서양이라는 타자의 사상과 이론 앞에서 노예적인 복종태도만을 낳게 했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위주의자는 언제, 어느 때나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 어떠한 싸움도 회피하지 않는 너무나도 호전적이고, 너무나도 전투적인 정신의 소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 예술가로서의 나는 이 세상의 삶을 향유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은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행복론으로 나타난 바가 있다. 따라서 나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절대 긍정을 위한 비판이다. 나는 가능하면 가장 어렵고 힘들고, 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것, 그러나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왔고, 그것으로 인하여 염세주의, 기독교, 불교, 공산주의, 현대 민주주의, 그리고 그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상반되는 길을 걸어왔던 셈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어중이 떠중이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자청하게 된 것이며, 단 한 명의 원군이나 우군도 없이 가장 강력한 적들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걸만큼 충분히 강하고, 생사의 문제를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처럼 가볍게 여길 줄도 알고 있다. 싸움은 인간을 비정하고 잔인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은 인간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싸움은 싸움의 목적을 분명하게 만들고, 그 싸움의 결과가 승리일 때는 최고의 희열을, 그렇지 않을 때는 목숨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비참한 상실감을 미리부터 맛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승리이며, 그 승리의 축배는 돈, 명예, 권력, 그밖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지만, 나는 나의 싸움에 관한 실천 원칙을 갖고 있다. 나의 싸움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며, 이제까지의 그 싸움이 만인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일인의 싸움에 불과했다면, 나는 그 ‘원한 맺힌 저주 감정’ 없이 만인들의 어리석음을 문제삼고,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나의 적이 될 수밖에 없도록 몰아 부쳤던 것이 그 특징적이다. 나의 욕망은 상승 욕망이며, 그 상승 욕망은 니체의 권력 욕망이나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을 하위 개념으로, 혹은 종속 개념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그 신적인 인간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내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즉, 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학자들은 신문과 대중매체, 넋 잃은 독자와 그 옹호자들에 둘러싸여 매우 보잘 것 없고 아주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기가 십상이지만, 나의 승리는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패배에 둘러싸여 그 승리의 의미도 퇴색해 버리고, 이내 그 몸 둘 곳을 몰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양상일 뿐, 그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는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게 될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높이 높이 날아오른 새가 잘 보이지 않듯이, 깊이 깊이 내면으로 스며든 나의 승리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낙천주의자의 신전의 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1권, 제5장 [포효하는 삶]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