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명발원지
인류의 문명 발원지는 4곳이라 한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나일강 문명, 인도 인더스강 문명, 중국 황하문명,
초기 인류의 문명은 모두 강을 중심지로 하여 발달하였다.
그런데,
그 4대강 문명 중에서 황하문명이 다른 3곳의 문명에 비해 시대적으로 뒤처진다.
약 천년 가까이 뒤진다.
천년의 차이라면 발상지라기보다는 타곳으로부터 문명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영토가 광활하니 그걸 고려하여, 역사학자들이 문명 발상지로 끼워 넣어준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 중국인들 특히 정치가나 역사학자들은 자존심이 상한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의 선사시기 문명이 다른 곳보다 오히려 늦다니….
‘중국’. 中國
청 淸이 망하자,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쑨원 孫文이 작명한 국호가 중화민국 中華民國. 중국 中國이다.
역사나 모든 것이 최고 最古라고 자랑하는 중화사상 中華思想이 저들의 자랑이다.
그러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선사시대 유적지나 유물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맞지 않는다.
유서 깊은 고대도시인 장안과 낙양은 물론, 황하의 상류부터 하류까지 주변을 샅샅이 다 뒤져봐도 시대를 앞당길만한 고대 유적은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사학자는 이제 포기상태다.
그래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그들 중 몇몇은 한 곳을 유심히 응시하고 있다.
황하의 중류 하남성의 삼문협 지역이다.
인류문명은 대부분 강줄기가 합쳐지는 곳에서 발생하였다.
세 개의 큰 강물이 합쳐지는 지점.
1957년, 거대한 하남의 삼문협댐 기공식에 역사학자들이 속속 나타난다.
정치인과 건설업계 관계자들이 관여하는 토목건설 현장에 역사학자들이라니,
그들은 넓고 깊게 파는 댐의 기초공사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고대사학자들이 모인 것이다.
그러나 터파기 공사에서 석기시대 유물은 다수 출토되었으나 그토록 넓은 하천 주변 그 어디에도 그들이 바라던 고대 문명을 증명할 유적은 없었다.
황하의 삼문협 지역에 건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또 한 곳에 기대를 걸어본다.
장강의 삼협댐이다.
1992년 기공식 때 또 많은 사학자가 참여한다.
그러나 곳곳을 다 뒤져도 유물이나 유적의 생성 시기가 황하 지역보다도 훨씬 늦다.
이제 중국인들의 자존심 만리장성, 하화족의 근거지인 만리장성 남쪽 관중이나 중원에는 그 어디에도 인류의 3대 문명 발상지에 버금갈 만한 시대적인 고대 유물이나 유적지는 없었다.
자존심이 사용하고 버려진 휴지처럼 구겨진다.
중국의 정치인과 고대사학자들은 이제는 4대 문명 발상지에서 황하문명을 제외시키지 않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서기 西紀 20세기 끝자락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만리장성 저 너머 미개한 오랑캐 족이라고 천시하던, 동이족의 고유 固有 영역 곳곳에서 고대 문명이 존재하였다는 증거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80년대 들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니 수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요하 상류와 대릉하 상류를 중심으로 하여,
*신석기 시대
1) 소하서 小河西문화 (기원전 7,000년~기원전 6,500년)
2) 흥륭와 興隆漥문화 (기원전 6,200년~기원전 5,200년)
3) 사해 査海 문화 (기원전 5,600년~ ? )
4) 부하 富河 문화 (기원전 5,200년~기원전 5,000년)
5) 조보구 趙寶溝문화 (기원전 5,000년~기원전 4,400년)
*신석기 청동기 병용 시대
6) 홍산 紅山 문화 (기원전 4,700년~기원전 2,900년)
7) 소하연 小河沿문화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0년)
*청동기 시대
8) 하가점하층 夏家店下層문화(기원전 2,000년~기원전1,500년)
등에서 계속 발굴이 되었다.
서기 2,000년대 초기에는 고대 유물 遺物들이 대충 정리되었다.
그런데, 이 고대 유물들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문화라고 자랑은 하면서도, 그 시원 始原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의문점들을 상당수 풀어준다.
옥 룡과 초기 용 형태의 돌무지 모양, 초기 봉황의 모양과 옥으로 만든 누에,(玉簪, 누에를 귀하게 여겼다면 당시에 벌써 비단을 짜서 생산할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복점술 卜占術에 사용되었던 ‘복골 卜骨’ 유물들, 그 복골에는 갑골문 甲骨文의 초기 문자까지 새겨져 있다.
엄청난 고대 문명의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다.
유물 중에는 정교하게 다듬은 옥기류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옥기시대“ 玉器時代라는 신 단어가 나올 정도로 정밀 가공된 수준 높은 다양한 옥 제품들이 다량 多量으로 발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곧바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석기시대 -> 옥기시대 -> 청동기 시대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다양한 옥기 제품들이 무더기로 발굴된 것이다.
그것도 조잡스런 제품들이 아니라 현대 기술로도 가공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예술성과 기술력을 뽐내고 있다.
*. 그림 - 홍산 문화 발굴지
더 중요한 것은 문명 발생의 시기다.
기원전 6,200년부터 기원전 7,000년까지 고대 古代로 죽~ 올라 가버린 것이다.
황하문명보다 최소한 3,000년 이상 앞서는 고대 문명 발상지였다.
최초의 인류문명의 발생지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같은 시기다.
중국의 고대 역사학자들은 선사시대의 문명 발상지를 발굴한 것이 반갑기는 한데,
문제는 유물이 발견된 발굴지역과 공산 당국의 정책이다.
학술은 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타당하나, 정치가 개입을 한다.
중국에서는 ‘황하 이남의 관중이나 중원에서 인류문명이 발생하여 그 주변으로 문명이 전파되었고, 주위의 야만족들을 계도 啓導 하였다’라고 유사이래 有史以來 부단히 주장하고 있었는데,
홍산 주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들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유사이래 有事以來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만리장성 萬里長城이 문화와 야만의 경계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리장성은 하화 족들의 자존감이었다.
지나 족들은 “만리장성을 능가하는 규모의 인공적인 구조물은 지구상에 없다”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고의 자랑거리인 만리장성.
그 장성 너머 야만족의 영역에서 고대 문명이 발생하여, 중원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발굴된 유물로 증명되어버린 것이다.
한자 漢字의 원형인 초기 갑골문자까지 홍산 문화권에서 출토되니, 문자마저 동이족이 창제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의 고유문자인 한자 漢字마저 동이족이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하화족이 이를 빌려 쓴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왈가왈부 曰可曰否할 여지가 없다.
이제는 한자 漢字가 한족 漢族의 글자가 아니라 동이자 東夷字로 바꿔 불러야 할 판국이다.
인정하기가 어렵다.
만약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중화사상 中華思想의 근원이 흔들린다.
그럼 지금까지 모든 방면에서 선진국이며, 최고 最古라 자랑해왔던 중화 문명은 어찌 되나?
자존심이 상한다.
역사 패권주의 覇權主義가 깊이 상처 받는다.
애국심 강한 정치인과 시류 時流에 편승하는 사학자들이 비밀모임을 갖는다.
그들은 별수 없이 비전 祕傳의 보도 寶刀를 꺼내 든다.
선조들이 애용하던 춘추필법이 등장한다.
일단 모든 유적 발굴지에 동이족들은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한국인들은 남한, 북한의 역사학자를 가리지 않고, 개인 관광객들조차 출입 봉쇄시켰다.
그리고, 과감하게 동북공정 東北工程을 감행한다.
먼저,
동이족의 영웅 치우천황을 황제 헌원 옆에 세우고는 자신들의 시조 始祖라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중국 입장에선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홍산 문명을 끌어안고 가야만,
세계 4대 문명발생지 중에서도 중국이 최초(最初), 최고(最古)의 앞선 문명발생지였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동이족을 아우르고, 이를 중화화(中華化) 시켜야만 역사적으로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또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영토분쟁을 잠재우고, 나아가서는 적절한 시기에는 영토를 더 넓힐 수도 있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축적할 수도 있다는 치밀한 계산하에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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