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물빛이 맑다. 춘삼월이 다시 왔나보다. 동 트는 이른 아침 창틀 프레임에 철새가 난다. 문득 젊은 날 입사 동기 H와 밤새 술을 마신 기억이 뿌옇게 살아난다. 그때는 ‘이 잔에 우리의 젊음을 채우자.’라며 호기를 부렸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술자리를 돌아보면 언제나 남는 건 둘뿐이었다. 그러나 한 잔의 소주에 울분을 토하고 젊음과 우정을 불사른 밤은 언제나 그윽했다.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듯 입사 동기 H와 둘은 그렇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으로 험한 바다를 건넜다. 간혹 인심 좋고 눈치 빠른 주모가 끓여주는 라면 국물에 타는 목마름을 쓸어내리곤 했었다. 여기저기서 서러운 이별을 알리는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면 우리의 젊음도 함께 울었다. 24시 술집에서 외국 선원들과 어울려 풀던 갈증은 밑도 끝도 없었다. 그러나 술을 깨면 목이 칼칼할 뿐 머리는 언제나 맑고 가벼웠다. 때로는 생맥주집에서 깐죽거리며 약을 올리던 선배의 머리에 바께쓰를 뒤집어씌우고 두들겨 팬 일도 있었다. 그런 밤이면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병사가 되어 더욱 험하고 어두운 밤바다를 헤쳐야 했다.
파도치고 거센 바람 몰아치는 밤바다. 초점 흐린 눈을 반쯤 내려 깐 H가 그 큰 체구로 헛기침을 하며 “최형, 우리 너구리 한 마리 잡읍시다. 아요”라고 보채며 한사코 팔을 끌던 일이 꼭 엊그제 밤 꿈만 같다. 술을 좋아해서 수습 때부터 ‘만CC’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안타깝게도 우리와 야구해설을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夭折(요절)이다. H는 우리의 젊음이자 고독한 길벗, 외로운 동지였다. 그는 끝내 우리와 유신체제를 남겨둔 채 그리움 저 편으로 떠나버렸다. 바오로 세례명으로 남천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뒤로 떠난 지 35년. 그 뒤로 너구리를 잡는 기회 드물었고 너구리라는 이름은 피안의 문풍지 소리로 겨울밤을 울렸다. ‘너구리 한 그릇’의 회상이 우리의 만남과 떠남을 젊은 날의 기억으로 남았다. 젊은 날의 갈증과 슬픔, 외로움과 어렴풋한 일상의 그리움이 새삼 사무친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기생충 효과를 타고 등장한 ‘짜파구리’가 늘그막에 되살아나 하염없는 생각으로 젊은 날을 자맥질한다.
‘짜파구리’는 농심에서 나온 봉지라면 짜파게티와 너구리의 합성어다. 농심의 ‘올리브 짜파게티’와 ‘얼큰한 너구리’를 함께 끓인 메뉴는 국물이 없는 짜장면 같은 진한 소스에 굵은 면발에 올리브유의 윤기가 촉촉하게 흘러 영롱하기까지 하다. 코로나19는 나를 집에 가두어 방콕하는 동안 외식 모임이 뜸해지자 ‘짜파구리’가 각광 받는 비상식량이 되었다. 지난 주말 아내를 따라 대형 마트에 갔었다. 마트 안은 마스크를 낀 주부들이 종종 걸음에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키만큼 쌓은 부대가 통로를 막아섰다. 카트에 얼른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담았다. 평소 라면을 즐겨 먹지 않지만 너구리를 보는 순간 문득 옛 추억을 조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감독상에 작품상까지 4관왕을 달성하며 한국 영화사와 아카데미 역사를 새로 쓴 일이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영화 속 조여정이 맛있게 먹던 ‘채끝살 짜파구리’가 <기생충>팬들의 눈과 식욕을 돋우며 팬들에게 ‘짜파구리’ 조리법이 화제가 되었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짜파구리’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몰리자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생산하는 농심에서 세계인을 향해 잽싸게 짜파구리 조리법을 11개 언어로 소개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Official CHAPAGURI Recipe’. 이 영상은 게재 당일 단숨에 수만 회의 접속을 기록했다. 나는 아내가 비켜 선 주방에서 나름의 레시피에 따라 우리가 젊은 날 먹던 너구리에 짜파게티를 넣어 끓였다. 쇠고기 대신 새해 들어 통영 창효 형이 보내준 싱그러운 생굴을 넣기 위해 설국에서 긴 겨울잠에 빠진 생굴을 꺼내 녹이면서 준비물을 차례로 챙겼다. 물 맑은 통영 앞바다의 향기를 품은 생굴이 싱크대 위에서 젊은 날 남해안을 누비던 스쿠바다이빙과 윈드서핑의 추억을 한껏 되살렸다.
가스테이블에 냄비를 올렸다. 4~5분 동안 끓인 물에 면을 한 차례 삶은 뒤 물을 면이 살짝 잠길 정도만 남기고 부어냈다. 그리고는 생굴, 양파, 마늘, 분말 소스 반 봉지를 넣고 면이 충분히 풀리도록 끓였다. 집안은 순식간에 너구리 분말과 생굴이 끓는 냄새가 가득 풍겼다. 입맛을 돋우는 카레라이스용 대접에 담아낸 ‘짜파구리’의 모습은 굵은 면발과 생굴의 모습이 어우러져 한껏 입맛을 돋우었다. 아내는 김과 계란 후라이를 고명으로 내놓고 백김치를 식탁에 올렸다. 이런 날은 아내가 좋아하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집안 가득 채운 채 우리의 옛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기생충>에서 보고 배운 ‘짜파구리’의 첫 조리는 그렇게 성공했다. 그날의 ‘짜파구리’는 맛도 분위기도 꿀맛이었다. 우리는 아내와 함께 ‘짜파구리’를 끓이며 젊은 날을 관통한 꿈의 추억을 되새겼다. 코로나19가 선사한 가택연금 속에서 아내와 더불어 오디세이아의 신화, 그 이야기를 나눈다.
첫댓글 침이 고이네요.... 건강 하세요..^^
다들 불타는 젊음을 가지셨겠지만 저는 트로이 전쟁을 치르고 처자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결혼 45주년 기념일이구요.^^*
결혼 45주년을 축하드립니다..늘 건필하시기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