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신종 코로나(COVID 19) 백신 스푸트니크V·스푸트니크 라이트(이하 스푸트니크 백신)의 위탁생산(CMO)를 추진해온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사업 전망이 완전히 꺾일 우려가 높아서다.
국내에서 '스푸트니크 백신'의 CMO에 나선 곳은 한국코러스 컨소시엄(이수앱지스와 큐라티스, 보령바이오파마, 제테마 등)과 휴온스 컨소시엄(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와 휴메딕스 등)에 속한 10개 안팎의 기업이다. 그중 몇 곳은 이미 컨소시엄에서 떨어져 나갔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주시해온 휴온스 컨소시엄은 10일자로 CMO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 따른 제반 여건을 감안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CMO 참여 발표와 마찬가지로 아주 전격적이다. 일단 재빠른 '손절매'로 평가되지만, 그만큼 아직 스푸트니크 백신 생산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휴온스 컨소시엄은 충북 오송에 있는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 공장에서 '스푸트니크V' 백신의 시제품 생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시제품에 대한 러시아측의 평가 등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러나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 측은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컨소시엄 사업 중단 통보를 받았다"며 "러시아측과 직접 계약한 적이 없고, 컨소시엄 참여 사업은 여러 백신 사업 중 하나"라고 선을 그었다. 사업 중단에 따른 모든 책임은 컨소시엄을 주도한 휴온스 글로벌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스푸트니크 백신 생산을 위해 준공한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의 백신센터/사진 출처: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측의 공지/캡처
휴온스글로벌의 관계사인 휴메딕스는 약 100억원을 투자해 '스푸트니크 백신'의 바이알(병입) 라인 증설을 마쳤다고 한다. 휴메딕스는 이 시설을 다른 의약품(주사제 등) 생산으로 돌릴 계획이어서 사업 중단에 따른 피해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컨소시엄 측의 사업 중단 설명은 전체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 7일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한" 것도, "앞으로 정치·외교·경제적으로 (비우호국가를 향해) 보복조치를 취할 전망"도 옳은 판단이다. "국제 사회의 대러시아 제재로 스푸트니크 백신의 수출 루트와 대금 수급 등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당연하다. 다만, 위탁생산의 계약 효력 유지에 관한 판단이 '상호 교감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진 만큼, 계약 위반 사항은 아닌지 궁금하다.
휴온스 컨소시엄과 달리, 한국코러스 컨소시엄은 생산한 '스푸트니크 백신'의 출하 시기만을 기다리다가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다. 출하 시기가 더욱 늦어지면서, 자칫하면 유효기간이 지난 백신은 폐기해야 할 수도 있다.
한국코러스가 생산한 백신 시제품을 러시아행 비행기에 적재하는 모습/사진출처:한국코러스
그러나 컨소시엄을 이끄는 한국코러스(GL라파의 자회사)는 '스푸트니크 백신' 위탁 사업을 계속할 방침이다. 한국코러스 측은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했다고 해서 자국(러시아) 백신 제품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각도로 해결 방안을 찾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렇더라도, '스푸트니크 백신' CMO 사업 전망은 전체적으로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을 계속하는 한, 스푸트니크V가 세계보건기구(WHO)의 긴급 사용 승인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늦어도 3월에는 WHO 대표단이 러시아에서 생산 시설 현장 실사를 할 것이라는 전망도 쑥 들어간 상태다. 스푸트니크 백신에 대한 WHO 승인이 늦어지는 사이, 코로나 백신 시장은 다른 승인 백신들에 의해 잠식될 것이다.
국내 업체가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한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가 미국 등 서방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는 점도 큰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한국코러스 측은 "RDIF와 한국코러스 컨소시엄 사이에는 중동 지역의 협력사가 있고, 백신은 서방측의 제재 대상도 아니다"고 하지만, 중동의 어떤 기업이 한국코러스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줄 지 궁금하다. 현재 국내에서는 RDIF 사이트(https://rdif.ru) 접속이 막혔다. 트위트 등 SNS 활동도 미미하다.
러시아 얀덱스에서 검색한 RDIF 사이트(위)와 클릭하면 나타나는 접근 불가 표시. RDIF가 RJIF로 나오는 건 또 뭐지?/캡처
국내 생산품의 주요 수출처로 알려진 중남미의 일부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 백신 보이콧'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측의 도움으로 백신을 정상적으로 생산하더라도 팔 곳이 줄어드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한국코러스 컨소시엄에 참여한 이수앱지스는 RDIF 측과 독자 협력을 통해 '스푸트니크 백신' 생산을 앞두고 있었으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올스톱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리스크는 이미 러시아 백신 관련주를 세게 강타한 상태다. 증시를 통한 투자 자금 확보도 쉽지 않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세번째 백신 '코비박'의 위탁생산을 추진해온 특수 법인 'MP코퍼레이션'(현재는 파마바이오텍 글로벌 PBTG) 측도 순조로운 사업 진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참여 기업들이 내부적으로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와중에 우크라이나 사태마저 터졌다. 불확실한(?) 러시아(추마코프 센터)로부터의 기술이전이 더욱 불투명해진 것은 아닐까? 제대로 진행한 것이 별로 없으니, 휴온스 컨소시엄과 같이 '사업 중단'을 전격적으로 발표할 지도 모른다.
지난해 상반기 국내의 제약 바이오업계에서 최고의 미래 사업으로 각광을 받았던 러시아 백신 CMO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고비로 완전히 한풀 꺾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