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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묵상글 들 ( 믿음 안에 의로운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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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 안에 의로운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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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성 요셉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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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즉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씩 실천하고 그 말씀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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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아름다운
봄꽃의 설레는
계절이다.
우리 모두
배려가 필요한
소중한
사람들이다.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성 요셉의
기쁜
축일이다.
소중한 마음은
언제나
소중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요셉의
참된 사랑은
평생에 걸쳐
나자렛
성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평범한 일상을
돋보이게 하는
참된 사랑이다.
힘든 삶의
고비마다
진실하게
기도하고
겸손되이
받아들였던
성 요셉의
삶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삶을
끝까지 신뢰하고
존중한 경청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삶의
여정에서
성급함은
금물이다.
완벽한 가정
완벽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가족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했다.
예수님과
함께한 역사
마리아와
함께한 여정이
행복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하는가?
사랑과 믿음
보살핌과 도움은
성 요셉의 삶을
잘 표현해 주고있다.
사랑이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따듯이
잡아주는 것이다.
꽉 잡아준
도움의 손길이
가장 행복한
요셉이 되게
하였다.
행복은
함께하는
시간이다.
성 요셉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인
요셉 성인이시다.
성 요셉이시여
참된 사랑을
잃어버린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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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의 믿음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1)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잉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요셉에게 바로 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잉태 사실만 말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들과
자신이 기꺼이 응답한 일을(루카 1,26-38) 모두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성령 잉태 사실을 전할 때 마리아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라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요셉에게 성령 잉태 사실을 전할 때에도
똑같은 태도와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 이 말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믿고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은,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고,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 잉태’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단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면,
마리아를 전적으로 믿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고,
‘성령 잉태’ 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들었을 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마리아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령 잉태 사실을 요셉에게 전할 때에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따로 맹세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유대교에서 원래 이 말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인지를 아직은 알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를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애썼음을 나타냅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잉태했음을 요셉이 믿은 것은,
아기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요셉은
자기는 감히 아기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서 아버지의 위치에서
스스로 물러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파혼을 ‘남모르게’ 하려고 한 것도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한 다음의 일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파혼 사실을 감추려면 부부 행세를 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해서 많이 망설였을 것이고,
그래서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3)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됩니다.
또는 마리아가 예수님 잉태와 탄생 예고를 들은 것과 같은 일,
즉 요셉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사가 한 말을 상황에 맞게, “마리아의 잉태는 마리아가 말한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네가 아기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은
요셉에게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니’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일을 요셉에게만 떠맡기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켜 주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위로와 격려의 뜻이 들어 있는 말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4)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예수’(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아기의 아버지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내린 계시를 믿었고, 그 계시가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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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습니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함께 가자며 손을 잡아 주었고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하였던 환희의 순간에도, 아프고 힘들었던 고통의 순간에도, 어떤 것을 선택할지 갈등하고 고민하였던 결정의 순간에도 그 친구와 함께하였습니다. 서로 비슷한 점은 없지만 언제나 무엇이든 이해해 주고 자신의 의견보다 친구의 생각을 더 잘 알고 전달해 주는 사이, ‘벗’이라며 같은 길을 걸어가 주는 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우리를 부부 같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동반자, 반려자라 부릅니다. ‘함께 의지하며 짝을 이루고 같이 걸어가는 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라고 이야기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꽃길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어려운 가시밭길도 함께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 성인을 경축합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의 힘들고 어려운 여정에 언제나 함께하였기에 성인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라 합니다. 성인은 상대의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약혼자의 몸가짐을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고, 믿어 주고 참아 주며 끝까지 함께 걸어갔습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들을 참아 내며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픔과 역경을 함께 이겨 냅니다. 그래서 소년 예수님께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사랑과 호의를 삶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따르시는 고난의 길에 요셉 성인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배필이신 마리아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걸어 주고 짝이 되어 주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이해해 주고 안아 주고 울어 주고 고민해 주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동반자의 손을 잡고 오늘도 한 걸음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 최종훈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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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새벽을 열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빠다킹 신부님.
옛날 어느 왕이 세자빈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여러 심사를 통해 3명의 규수를 마지막 후보로 선발하고서 소량의 쌀을 나눠주면서 숙제를 주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으로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
성인이 아껴먹어도 한 달 살기는 너무나 부족한 양의 쌀을 주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자빈이 되기 위해 이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만 했습니다.
한 달 뒤, 두 처녀는 너무나 말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처녀는 이전보다도 더 좋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한 시루 머리에 이고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왕이 “적은 쌀로 한 달을 먹고, 떡까지 해올 수 있었느냐?”라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 쌀로 떡을 만들어 장터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남은 쌀로 떡을 해서 이렇게 임금님께 바칩니다.”
어떤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을까요? 당연히 쌀로 떡을 만들어온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인가라도 해서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길 원하실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성인은 아직 혼인하기 전에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사실 주님 탄생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 신비는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이 자제를 배우고 위로를 받도록, 그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 그가 느낀 것, 두려워한 것, 하고자 마음먹은 일을 그에게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천사는 또 요셉에게 구원자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베풀었으며, 아이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도록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중에 마리아를 당신 제자에게 맡기시듯이, 지금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요셉에게, 아버지로서 아들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도 주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을 요셉은 받아들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된 것을 보면, 그가 성모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바로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에 그대로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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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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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우리는 종종 광고를 보게 됩니다. 식당 광고, 물건을 파는 광고, 관광지와 영화, 공연 광고 등등 참으로 많은 광고가 있습니다.
이 광고를 왜 할까요? 사람들이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식당을 이용하면 저희가 부자 됩니다.’, ‘이 영화를 많이 봐야 저희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면서 광고할까요? 아닙니다. 대부분 돈을 써도 절대로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광고합니다. 그리고 자기 돈을 쓰고라도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단순히 헌금만 내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생명과 구원, 나눔과 기쁨을 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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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성 요셉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간추림
복자 비오 9세께서 1870년 12월 8일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시고 150년이 지난 지금,
저는 우리 저마다의 인간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이 특별한 인물, 요셉 성인에 대하여 제 개인적인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저의 열망은 전염병이 온 세상에 퍼져 유행하고 있는 지난 한 해 동안 더욱 커졌습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전염병 확산 위기 속에서 우리는, 평범하지만 종종 잊어버리고 지내는 이웃들과 함께
우리네 삶이 엮여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과 또 크고 작은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무수한 요셉들 안에서,
우리 저마다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의 중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 현대판 요셉들이
구원 역사에서 비할 데가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들의 공로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요셉 성인께서는 사랑받는 아버지이셨고, 온유한 아버지이셨습니다.
순종하는 아버지이셨을 뿐만 아니라 수용하는 아버지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창의적 용기를 발휘하신 아버지이셨고, 노동하는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림자로 존재하신 아버지이셨습니다.
1. 사랑받는 아버지
요셉 성인의 위대함은 그가 마리아의 배필이었고 예수님의 아버지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요셉은 강생의 신비와 구속의 사명을 위하여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부성(父性)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구원 역사 안에서 자신의 역할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아버지입니다.
요셉은, 나탄 예언자의 약속대로(참조: 2사무 7장) 그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나신
다윗의 후손(참조: 마태 1,16-20)으로, 그리고 마리아의 배필로 신약과 구약을 연결해 주는 요체입니다.
2. 온유한 아버지
요셉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예수님의 모습을 날마다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에게서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느님께 온유한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두려움, 약점,
나약함 안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으로 온유하셨던 요셉은, 우리네 삶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이끄시도록 우리네 삶을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3. 순종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로 요셉이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꿈에 나타난 천사가
그 잉태의 신비를 알려 주었으므로 요셉은 천사의 권고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헤로데의 칼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할 때에도, 다시 헤로데가 죽은 후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할 때에도
천사는 번번이 꿈에 나타나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고, 요셉은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밖에도 요셉은 아기의 할례식, 산모의 정결례식, 아기의 봉헌식 등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루카 22,42)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참조: 탈출 20,12)
부모에게 순종하도록(참조: 루카 2,51) 가르쳤습니다.
감추어진 나자렛 생활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4. 수용하는 아버지
요셉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마리아를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해 주는 말을 믿었습니다.
요셉이 우리를 위하여 걸어간 영적인 길은,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용하고 화해할 때만 우리는 더 큰 역사와 더 깊은 의미를 엿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분명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 있게 굳건한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요셉 성인은 손쉬운 방법을 찾지 않으셨고,
열린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시고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을 직접 짊어졌습니다.
요셉의 수용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예외 없이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약한 이들에게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권유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와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참조) 비유에 관한 영감을 요셉 성인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5. 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창의적 용기를 믿으시고 활동하셨습니다.
요셉은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마리아가 해산할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외양간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곳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장소로 바꾸었습니다(참조: 루카 2,6-7).
헤로데가 그 아기를 죽이려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요셉은 꿈에서 아기를 보호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밤중에 일어나 이집트로 떠날 채비를 하였습니다(참조: 마태 2,13-14).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어려움을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나자렛의 목수와 같은
창의적 용기를 보여 준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성가정은, 모든 다른 가정들처럼, 역경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많은 이민처럼,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요셉 성인이 전쟁, 증오, 박해, 빈곤 때문에
본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많은 이들을 위한 특별한 수호자라고 믿습니다.
6. 노동하는 아버지
첫 사회 회칙인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때부터 강조되었던 요셉 성인의 특징은
노동자라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목공 노동자로 정직하게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양식을 얻는다는 것의 가치, 고귀함, 기쁨을 요셉에게서 배우셨습니다.
취업이 다시 한 번 뜨거운 사회문제가 되고, 수십 년간 번영을 누렸던 국가에서조차 실업이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는 이 시대에, 노동의 모범적 수호자이신 요셉 성인의 삶에 비추어, 고귀한 노동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노동하는 이들은 하느님과 협력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위기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발견하라는 요청일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의 노동은, 몸소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노동을
업신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7. 그림자 속에 있는 아버지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요셉은 하느님 아버지의 지상의 그림자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보호하며 예수님께서 혼자 길을 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들은 그냥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돌보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특별한 자유로써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희생을 하되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자기를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행복을 찾고자 했고,
그렇게 해서 마리아와 예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그림자로서 보여준 요셉의 이런 성숙함이 오랜 침묵으로 나타났는데,
이 역시도 좌절과 불평이 아니라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서막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이런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모든 참된 성소는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곧 성숙한 희생의 결과로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숙함은 사제직과 축성 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소가 혼인이든지 독신이든지 동정이든지 상관없이 어설픈 희생에서 그친다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희생을 하다 보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고 하는 것이, 사랑의 아름다움과
기쁨의 표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슬픔과 좌절을 보여 주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성자를 따라가는 그림자입니다.
요컨대 이 교황 교서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아버지요, 믿음으로 온유한 아버지이셨으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아버지이셨는가 하면, 어려움을 수용하는 아버지이셨으며, 창의적 용기를 발휘하여
성가정을 보호하신 아버지이셨는가 하면, 성실하게 노동하는 아버지이셨으며, 하느님의 그림자로 존재하신
아버지이셨던, 이 위대한 성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그분의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덕행과 열정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 은총들 가운데 은총,
곧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께 이렇게 기도드립시다.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교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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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웃 본당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중에 장례미사가 4번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침미사를 대신하겠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고마워하였습니다. 아침미사를 하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요셉형제님 부부가 매주 부르클린 성당까지 운전해 주십니다. 덕분에 6개월 넘게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달부터는 6주 동안 부르클린 성당에서 롱아일랜드 성당까지 저를 데려다 주십니다. 덕분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주일 미사를 2번 할 수 있었습니다. 롱아일랜드 성당 미사가 끝나면 요한형제님 부부가 신문사까지 데려다 주십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입니다. 연극 반에서 3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주인공은 거의 하지 못했고, 단역을 하거나, 뒤에서 도와주는 일을 했습니다. 연극에 필요한 의상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고, 효과음에 필요한 소리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한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뒤에서 도와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준비해야 합니다. 연습하는 동료들을 위해서 간식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데미안, 결혼, 크리스티나 여왕’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기위해서는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 올리는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멋진 그림이 전시되기 위해서는 벽에 못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뿌리와 같은 분이 있습니다. 그림을 빛내주는 못과 같은 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성인은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못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드러날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만 살아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운전을 한다면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이해 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셉 성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그분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 건강,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여인의 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 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 어떤 성별로 살았는지,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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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크고 깊고 고요한 분; 성 요셉
- 정주, 경청, 순종 -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해마다 광야의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성 요셉 대축일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참 좋은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불암산 배경이 자랑스럽습니다. 흡사 불암산의 두 봉우리가 우리 수도원의 두 수호성인인 성 요셉과 성 베네딕도 배경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마치 성 요셉이 형님같고 성 베네딕도가 아우같습니다. 아주 예전 어스름한 저녁에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참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얼마전 쓴 글중 서두말이 생각납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서는 고전이다. 규칙서의 저자인 성 베네딕도 역시 고전같은 분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고전같은 분이다.” 어찌 성 베네딕도뿐이겠습니까! 성 요셉 역시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고전같은 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레 3월21일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입니다만 주일이라 다음 월요일인 3월22일로 이동하여 축일로 지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 요셉에 대한 애모愛慕의 정은 참 각별합니다. 아니 성 요셉의 부성을 흠모했던 역대 교황님들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교황님은 성 요셉의 보편교회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맞아 지난해 12월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부터 올해 12월8일 까지 성 요셉의 해로 정해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라는 교황 교서의 내용이 참 풍부하고 깊고 아름다워 참 좋은 영적 묵상 자료가 됩니다. 여기에서 밝힌 성 요셉의 인품이 정말 매력적이요 닮고 싶은 의욕이 샘솟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을 대변합니다.
“1.사랑받는 아버지, 2.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 3.순종하는 아버지, 4.수용하는 아버지, 5.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6.노동하는 아버지, 7.그림자 속에 있는 배경같은 아버지”
일곱의 특성으로 요약한 성 요셉의 고전같은 인품입니다. 또 어제 교황님께서 사제학생들에게 주신 메시지도 깊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목자들의 모델인 성 요셉은 ‘환영하는 아버지’, ‘보호자 아버지’, ‘꿈꾸는 사람’이었다.”로 요약했습니다. 주목되는 말마디가 ‘꿈꾸는 사람(Dreamer)’,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창세기의 꿈쟁이 요셉이 연상되었고, 평생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던 꿈의 사람,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 예수님이 연상되었습니다.
분명 양부인 아버지 성 요셉의 꿈도 보고 배운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히 하느님을.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영원한 청춘에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고전같은 삶이겠습니다. 흡사 강론이 성 요셉 예찬禮讚처럼 되었습니다. 성 요셉의 특징을 셋으로 나눠 살펴 봅니다. 성 베네딕도에게도 그대로 해당되겠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정주定住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은, 진실함은 정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정주의 산처럼, 그러나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사셨던 정주의 사람이자 신망애信望愛중 ‘신信의 사람’, 진선미眞善美중 ‘진眞의 사람’, 참 큰 산같은 성 요셉이었습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의 ‘산숭해심(山崇海深)’의 성 요셉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싶지 않았으므로, 남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배려와 존중, 연민의 사랑이 정주의 큰 산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정주의 모범, 신信의 모범, 진眞의 모범이되는 큰 산 같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성 요셉은 ‘경청(傾聽, 敬聽)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귀기울여 듣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의 사람이었습니다. 대화와 기도의 기초가 되는 경청의 자세입니다. 잘 경청하기 위한 침묵이요, 잘 경청해야 겸손과 순종의 덕도 뒤따릅니다. 보십시오. 경청의 사람 요셉에게 하느님은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시며 요셉과 꿈중에 소통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던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불암산처럼 깊은 경청의 사람 성 요셉은 진선미중 두 번째 참 좋은 ‘선善의 사람’이자, 신망애중 두 번 째 ‘망望의 사람’ 즉 희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좋은, 희망의 사람만이 경청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청과 희망의 참 좋은 모습은 그대로 제2독서의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흡사 성 요셉의 영원한 멘토 아브라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하느님을 믿었던 요셉이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듯이
하느님께서는 분명 깊고 깊은 경청의 사람,
성 요셉의 믿음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을 것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할 때 산같은 내적 고요입니다.
침묵, 경청, 겸손은 마침내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 사랑과 신뢰의 순종입니다.
이런 순종은 그대로 영성의 잣대가 됩니다.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까!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을 간명하게 요약합니다.
참으로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자 신망애중 애의 사람, 진선미중 미의 사람,
즉 사랑과 아름다움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사랑하면 아름다워지기 마련입니다.
흡사 제1독서 사무엘하권의 예언이
성 요셉과 예수님은 물론
주님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결론은 분명합니다.
불암산처럼 우리의 참 좋은 배경이 되어 주시는
크고 깊고 고요한 의롭기 한이 없는 성 요셉은
정주의 사람, 경청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고,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저절로 참 좋은 선물인 성 요셉을 우리 교회에,
우리 수도원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 성 요셉의 덕을 사랑하고 공부하며 닮도록 도와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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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성 요셉!
읍내로 물건을 사러갔다가 인상 좋으시고 연세 지긋한 사장님을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안그럴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느릿느릿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데,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발소를 들렀는데, 말 잔치는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번에도 대충 들은 것 같았는데, 길고도 긴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사를 고스란히 들어야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결코 만만치 않은 분이 또 한분 기다리고 계십니다. ㅋㅋㅋ
연세 조금 드시면서 갑작스레 말씀이 많아진 영감님들 케어하며 사시는 자매님들, 참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영감님은 어디 안 계실까? 생각해봅니다.
입은 꼭 다무는 대신 얼굴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신 영감님, 너무 아무 말 없으면 답답하니, 가끔씩, 백만번도 더한 아재 개그가 아닌, 신선하고 재미있는 아재 개그 구사하는 영감님, 너무 자주는 말고 하루에 세번 정도 뭐 필요하냐? 뭐 도와줄까? 물어봐주는 영감님,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설거지며 집안 청소며, 기쁜 얼굴로 척척 해내는 영감님...
아마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 성인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과묵한 의인, 침묵의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던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헀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없이 첫삽을 뜰수 있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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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전삼용 요셉 신부님.[성 요셉 대축일]
요셉 성인이 알려주시는 ‘적극적 고독의 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표현합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때 생깁니다.
노아의 벗은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린 아들 ‘함’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덕분으로 살아남은 사실을 잊고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셈과 야펫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고 뒤로 들어와 아버지의 겉옷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은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모르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여 성모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모님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러면 아기 예수님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의인 성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여 잉태시키고 이젠 싫어지니까 파혼하고 버려버리는 파렴치한이 됩니다.
마리아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기 위해 마리아와 그 가족, 또 자신의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의롭게 만들려면 자신은 십자가와 고독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마 사순절에 요셉 성월이나, 성인의 축일이 겹친 이유도 이러한 섭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음도 함께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도 의로워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이 힘은 바로 의로워짐으로써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적극적 고독’에서 나옵니다.
적극적 고독은 내가 세상과 나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고 미움을 받을 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골방’과 같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면 힘들기는 하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런 고독을 느껴보았습니다.
형제는 물론이요, 부모님도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고향이 아닌 먼 곳으로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 타지에서 그래도 역시 타지로 다니는 한 친구와 친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로부터 그 아이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저 혼자 나서서 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수원역에서 그 친구가 깡패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이미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누구도 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모인 학생들의 집단이지 가족과 같은 끈끈한 우애를 발견하기는
힘든 곳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세상에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외롭다, 외롭다.’라고 느낄 때 한 개신교 다니는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외로워?”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는 학교에 등하교하기 위해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때 시원한 바람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느낌과 함께 그분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외로움이라는 것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친구들이 엄청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니까 친구가 없었던 것이고, 고독한 나만의 방이 생기니까 친구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타지에 갔다가 임신하고 돌아왔을 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만약 요셉 성인에게 고독의 골방이 없었다면 용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사실 외로운 사람이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미워하면서라도 그 사람을 자기 머리에 잡아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 골방이 있다는 이유로 미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 골방 안에서 운이 좋으면 절대자가 보낸 천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무작정 혼자 일주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고독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재수가 좋으면 천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는 고독을 즐길 줄 알 때 시작되고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된다면 굳이 미움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내 안에 잡아놓을 필요까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사순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요셉 성인의 선물일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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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4주 금요일-시험과 시련과 단련
사순 4주 금요일-2017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독서 지혜서는 역시 지혜서답게
사람 됨됨이를 식별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Test입니다.
시험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이 드러나듯
사람을 시험해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드러나고,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드러나며 속셈이나 속내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평범한 시험, 다시 말해서 어렵지 않은 시험은 변별력辨別力,
곧 뭣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지기에
어려운 시험, 난해한 시험일수록 변별력이 좋습니다.
오늘 지혜서에서 하느님의 적대자들은 사사건건 자기들을 반대하는 의인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인지 시험해보자고 하고
특히 그가 얼마나 온유하고 인내력이 있는지 시험해보자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임 드러나도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을 때는 누구나 좋은 사람 같고,
좋은 위치에 있을 때는 내 주위의 사람도 좋은 사람들 같지만
안 좋은 상황이 될 때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도 밑천이 드러나고 내 이웃도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자기가 만족스러워할 때에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이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만족스럽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때에 지니고 있는 만큼의
인내와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과 모욕은 어떤 사람인지,
곧 온유와 인내의 사람인지 아닌지 식별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유와 인내도 이 고통과 모욕의 단련을 받아야만 생깁니다.
시험이 바로 시련이고 단련이고 정련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이유는 평가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시험을 쳐야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잖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온유(친절)하다고 하였는데
이 온유한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해지려면 자기의 성깔이 다 죽어야 하는데
성깔이라는 것이 저절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10년 전만 해도 저는 아이들이 막 떠들면 못 견뎠고
지금도 강의 때 시끄럽거나 어수선하면 예민해져서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애를 키워보지 않았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이를 키우고 시끄러운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자기 성깔이 다 죽어
웬만하면 다 그러려니 하고 온유하게 되고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혜서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의 아들의 온유와 인내는
세파에 시달려 성깔이 죽고 겸손해진 그런 온유와 인내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온유와 인내는 사랑 때문에 온유하고 인내하는 그런 것,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에 의해 온유하고 인내하며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온유하고 인내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온유하지만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 그래서 이웃에게 불의한 것에는
결코 온유하지도 참지도 않으며 그래서 죽음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하느님 뜻에는 온순하지만 악에는 타협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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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요셉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시대의 표현을 사용하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부모님 밑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부정으로 태어났다고 간주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요즘에는 사랑하는 사이이면 번개 같이 혼인을 하고 같은 둥지에서 혼인생활을 하는 게 가능한 사회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약혼을 하고 어느 일정 기간 후에 신부를 맞아들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이 일 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마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겁니다. 앞으로 사랑하는 자신의 처랑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아내가 될 마리아 역시 그랬을 겁니다. 어쩌면 남의 부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결혼 생활이 어떨지 걱정도 되기고 했을 겁니다. 아무튼 한 가정의 아내가 되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도 하고 했을 겁니다. 근데 생각지도 않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자를 모르는 몸인데 자신의 몸에 아이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겁니다. 이건 과학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성령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잘 받아들이셨는지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요셉 성인에게 알려야 할 상황이 되어 알리게 되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고민이 따를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요셉 성인이 과연 이런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결과는 요셉 성인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요셉 성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 그런 사정이었을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복음에 나오지 않지만 그 행간의 의미를 나름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당시의 율법에 따라 법대로 하자면서 법의 심판에 맡기고 법대로 했다면 오늘날 복음에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 요셉 성인을 복음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했는가를 한번 묵상하는 게 오늘 성인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에서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사회 법이나 법규를 잘 준수하는 걸로는 부족할 겁니다. 이런 건 기본일 겁니다. 법은 최소한의 규제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사정입니다. 법은 때로 냉정하게 따져야 하지만 법이라는 것도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상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런 냉정함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비정한 현실만 남길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성인의 입장에서는 분노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귀중한 생명이 잃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혼한 부인이 한 일을 보면 그 소행은 화가 나지만 그것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 몸 처신만 잘하면 정혼한 아내의 치부를 덮을 수가 있고 또 그 치부를 무덤까지 혼자만 가지고 가려 했을 겁니다. 이런 정도의 마음을 먹어야 의롭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고 복음에서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 성인의 인품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랬기 때문에 남몰래 파혼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천사가 등장해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알려주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모든 걸 요셉 성인이 떠맡게 됩니다. 자신이 양부가 되어 줍니다. 법적인 부모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늘과 성모님, 요셉 성인만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천사의 개입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진짜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적당히 사랑해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때 묻지 않은 사랑을 했고 진심으로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요셉 성인의 삶을 보면서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그렇고 그 당시 기준으로 봐도 아내의 말 못할 사정을 넓은 가슴으로 품을 수 있었다는 게 인간적으로 멋져 보입니다. 더 위대한 것은 이런 사실을 죽을 때까지 자기 가슴에만 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팔 계명을 잘 지킨 훌륭하고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마라는 말에는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지 않는 것도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니 오늘 성인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런 면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많이 하느님의 일을 하고 봉사를 해도 만약 이런 것을 소홀하게 하면 봉사를 많이 하는 것과 의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도 요셉 성인의 이런 의로움은 닮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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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복음묵상. 김 로마노 형제님.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2사무7,4-5ㄴ.12-14ㄱ.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16)
다윗 왕조와 그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며 그 왕좌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는 사무엘 2권 7장 16절의 선언은 다윗 언약(약속)의 절정이다.
여기서 '굳건해지고'로 번역된 '네으만'(nehman)은 '신실하다', '지탱하다'라는 뜻의 '아만'(aman)동사의 수동형으로서 '진실되다', '지속되다', '확립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는 '진리'라는 뜻의 '에멘'(emen)이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진실로'라는 뜻으로 기도나 찬양 뒤에 쓰이는 '아멘'(amen)이라는 형용사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것을 볼 때 하느님의 언약(약속)안에 있는 왕조와 나라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그 기초를 두고 세워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너의 집안과 나라'로 번역된 '뻬테카 우마믈라크테카' (betheka umamllaktheka; your house and your kingdom)는 중언법(重言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번역하면 '너의 나라의 집(왕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네 앞에서 영원히'로 번역된 '아드 올람 레파네카'(ad ollam lephaneka; forever before you)는 직역하면 '네 얼굴 앞에서 오랜 시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네 얼굴 앞에서'라는 말은 다윗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에 이어질 다윗의 후손들을 암시하며, '오랜 시간까지'라는 말은 궁극적인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때까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영원성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진 긴 시간은 결국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굳건해지고'에 해당하는 동사 '네으만'(nehman)이 미완료형이 아니고 완료형이다. 이것은 '확신의 완료형'으로서 그 일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강조한다.
한편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왕조는 점차 다윗에 대한 언약(약속)에서 멀어져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 언약의 말씀은 성취를 향해 이어져 가기보다는 오히려 상실될 위기를 맞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다윗 왕조는 남부 유다의 제20대 임금인 치드키야 시대에 바빌론에 의해 B.C.586년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무엘 2권 7장 16절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단 말인가?
남부 유다는 비록 사람의 매와 인간의 채찍이라고(2사무7,14) 할 수 있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했지만, 포로 귀환으로 회복되었을(즈카1,1~4)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메시아 왕국의 영원한 임금이 되셨다.
따라서 다르게 생각하면, 이처럼 남부 유다의 임금들에게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궁극적인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더 기대하는 기초가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약속의 말씀은 남부 유다 임금들의 실패 가운데서 더 굳건하게 세워졌으며,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에 사무엘 2권 7장 4~16절 사이의 말씀을 봉독하고 묵상하는 것은,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천주 성자께서 메시아로 탄생하시기 위한 터전이며 인류 구원사업의 기초를 놓으실 분이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다윗의 자손이신 요셉이 사무엘 2권 7장 4~16절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한 통로요 도구로서 간택되었기 때문이다(마태1,20; 루카1,27; 2,4참조).
성 요셉 대축일 복음(마태1,16.18~21.24ㄱ)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9)
마태오 복음 1장 19절의 '의로운 사람'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dikaios; a righteous man; a just man)는 '의로운', '정직한, '하느님과 인간의 법률을 준수하는' 등의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이것은 요셉이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율법을 쫓아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 이라는 것과 부정한 것은 용납하지 않는, 곧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접하고는 혼외관계로 인해서 잉태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녀와의 정혼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율법대로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며 처벌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아마도 마리아를 향한 그의 사랑이 깊었기 때문이며, 그의 성품 자체가 온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메'(me; not)는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 부사이며, '텔론'(thelon; willing)은 '자발적으로 ~할 의향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텔로'(thelo)의 능동태 현재 분사형이다.
따라서 '싶지 않았으므로'로 번역된 '메 텔론'(me thelon)은 마리아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고, 요셉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그녀의 임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 '마리아의 일을'로 번역된 '아우텐'(auten)은 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 '아우토스'(autos)의 여성형 목적격 단수이므로 '그녀를'(her)이라는 뜻이다.
즉 원문으로 볼 때, 요셉은 혼외 임신이라는 잘못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엄청난 일을 범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아에 관심을 두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드러내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데이그마티사이'(deigmatisai; to make a public example)는 원형 '데이그마티죠'(deigmatizo)의 부정사형인데, '데이그마티조'(deigmatizo)는 '본보기'(an example), 특히 '경고의 의미에서의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본보기를 만들어 앞에 내놓다', 또는 '공적으로 불명예를 주기 위해 폭로하다'는 의미이다.
본문은 요셉이 하느님의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임을 소개하며, 자기가 정혼한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마리아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한 일이 없음으로 인해 마리아의 임신을 혼외 관계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그가 얼마나 상심하며 고민했을지를 엿보게 한다.
결국 고민끝에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지만, 마리아를 깊이 아끼고 사랑한 까닭에, 당시 그런 죄목이라면 마리아의 부정을 공개적으로 폭로하여 모욕을 주고 돌에 맞아 죽게 하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심을 했던 것이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여기서 '마리아와'로 번역된 '아우텐'(auten)은 '그녀를'이라는 목적격 인칭 대명사이다. 그리고 '남모르게'로 번역된 '라트라'(lathra; privily; quietly)는 '비밀히'(secretly)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로서,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처리하기로 한 요셉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한편 '파혼하기로'로 번역된 '에불레테 ~ 아폴뤼사이'(ebulethe ~apolysai; had in mind to divorce)에서 '에불레테'(ebulethe)는 소원하고 바라는 것, 즉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주어의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는 동사 '불로마이'(bulomai)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여기서는 '불로마이'(bulomai)가 수동이 아닌 능동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아폴뤼사이'(apolysai)는 원형 '아폴뤼오'(apolyo)의 부정사 부정 과거 능동태형인데, '아폴뤼오'(apolyo)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 죄인 등 구속된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 보내는 것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대부분 이런 의미로 쓰였으며, 그 외 모임을 해산하거나, 선교사를 파견하거나, 사람을 떠나 보내거나,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하는 것 등의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는 이혼, 즉 정혼 상태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므로, '에불레테 ~ 아폴뤼사이'는 '파혼하여 떠나 보낼 것을 결심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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