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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명화 가운데, “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 당시 독일의 화가인 “알브레이트 듀러”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 친구와 함께 도시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주경야독의 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듀러에게 “내가 일을 해서 자네를 도울테니, 자네는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하게. 훗날, 자네가 성공을 하거든 그 때가서 내가 그림을 그릴 테니, 나를 도와줘”라며, 제안했습니다. 그리고는, 노동현장에 나가 열심으로 일을 하며, 듀러를 도왔습니다. 이윽고, 듀러가 화가 수업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손은 험한 노동으로 인하여, 이미 손이 굳은 뒤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듀러에게, “이미 내 손은 노동으로 굳어졌으니, 이제부터는 자네를 위해 기도하겠네”라며, 밤마다 듀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험한 노동으로 인하여 굳은 친구의 손을 보고 가슴이 아렸던 듀러는, 친구의 손을 모델로 “기도하는 손”을 그렸습니다. 이 후로 이 그림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명화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는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여러분, 마라톤을 하는 마라토너는 처음부터 혼자 달리지 않습니다. 그의 곁에는 일정 구간동안 “페이스 메이커”가 함께 하며, 마라토너가 결승점에 달하도록 돕습니다. 이를 보면, 인생은 혼자서 살아가고 이루는 독불장군의 삶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상부상조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나 혼자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신앙이 굳건해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곁에서 돕는 협력자가 있습니다. 그 협력자 가운데 최고의 협력자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전쟁이지만, 성도인 우리가 치루는 전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주관자가 되려는 어둠의 영과의 전쟁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벧전 5: 8에서 이르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손으로, 호전적이고, 광야에서 약탈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의 뒤를 따라오며,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약탈하며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된 우리를 괴롭히는 환경이나 무리들을 가리켜, “아말렉”이라고도 하고, “어두운 영적 세력”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본성 속에 있는 욕심으로 인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 2: 1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생각을 앞세운 그릇된 욕망으로 인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았고, 사울 왕은 그릇된 욕망으로 인하여, 아말렉을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이들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욕망을 떨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와 같은 자가 될 수 있음을, 경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아말렉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을 할 때, 높은 산 꼭대기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본 모세는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그의 두 손을 양 옆에서 아론과 훌이 도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말렉과의 전쟁의 승리는 곧 모세의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이제 본문에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용된 손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여호와 닛시의 승리를 이루는 손으로 우리의 손이 사용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매일 그리고 평생에 여호와 닛시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겨우 탈출한 이스라엘은 광야의 경험이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 잔뼈가 굵은 아말렉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룬 경험도 전무하고, 그들이 행한 것은 오직, 애굽에서의 종살이 뿐이었으며, 무기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반면, 아말렉은 당시의 강력한 무기였던 철기 문화를 이루었기에, 철병거로 중무장한 자들로, 빠른 기동력을 가졌기에, 옛날 만주 벌판의 화적이나 마적 떼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들과 이스라엘은 전쟁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백성 가운데서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들을 뽑아 군대를 만들어 전쟁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당시의 형편을 앞세우지 않고, 모세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우리의 현실이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끝없이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모두 수장시킨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기억들을 되살려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군사는 하나님이었고,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높은 산 꼭대기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할 때, 모세의 기도를 듣고, 이스라엘을 도와 친히 아말렉과 전쟁을 하셨습니다. 현 시대를 가리켜, 황금만능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인 우리는 시대를 떠나 기도만능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 만능은 현 시대 뿐 아니라, 영적 시대에서도 만능입니다. 모세가 산 꼭대기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함으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여리고성을 침묵으로 일곱바퀴 돌고 함성을 지름으로, 성벽이 와르르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또, 사무엘 선지자의 말에 따라 미스바 광장에 모여 기도할 때, 무장한 블레셋이 공격을 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친 사건과도 같습니다.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끝없이 의존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심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기도보다 앞서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올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여호와 닛시의 삶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한 한 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가 합력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침략자인 아말렉과의 전쟁에 있어서, 여호수아를 총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출전시킨 모세는 장막에 있지만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의 흐름을 보기 위해 높은 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전쟁의 승리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를 위해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세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인지라 언제까지 두 손을 들고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높이 올린 두 손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져서,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자, 이스라엘이 아말렉에게 졌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다시 힘을 내어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도하며,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것을 곁에서 지켜본 아론과 훌은 주변에서 돌을 가져와 그 위에서 모세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 역시,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 혼자 사역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바나바가 있어서, 그를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힘들어 사역을 중지 할 때는, 바나바가 옆에서 힘을 주었습니다. 다윗 역시, 요나단이 있었기에, 왕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성도된 우리의 협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보며, 우리 곁에 있는 가족을 비롯하여,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나라와 세계를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타인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 역시, 타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받들어 준 것처럼, 나 역시, 주변 사람들의 팔을 받들어 주어야 합니다. 전 4: 12을 보시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지상사역을 하실 때,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은 사람들처럼, 그리고,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서 치료해 주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로마의 백부장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나라와 세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이 방법, 저 방법을 찾기에 말이 많지만, 기도하는 성도는 모든 말을 하나님 앞에 하기에, 사람들 앞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기도를 듣고, 행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중보하시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기도로 인한 승리는, 모세의 자랑이 될 수 없었고, 모세의 교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곁에서 그를 돕는 아론과 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 2024년에는 우리가 아론과 훌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도움으로 모두가 합력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 - 16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언급된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승리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본문 14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역사는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선조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없는 민족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할 때,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날조했고, 민족정신의 핵심은 역사에서 삭제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배우는 역사관을 가리켜, “식민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역사 날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빼앗았던 겁니다. 이제는, 식민사관의 역사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식민사관은 사라지고 “민족사관”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움으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라고 하심으로, 이스라엘 대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을 우리는 기록함으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두고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열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 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역을 하며, 놀라운 일들을 행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겁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얼마나 기억하고 계십니까? 혹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거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만, “하나님 땡큐”라고 하고는 뒤 돌아서서는 잊어버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불평만 늘어놓지는 않습니까? 올 2024년에는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해마다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신대륙을 개척한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이끌고, 자신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초막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낼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모든 것을 기록한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바로 이러한 초막절의 전통을 이스라엘은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집집마다 또, 호텔이나 숙박 시설에서는 공간에 초막을 짓고,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와 같이, 올 2024년에는 성도된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여호와 닛시”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