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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용수보살의 [인연심론송]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요? 성철스님 [백일법문] 책에 보면 부처님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봄은 옳지 않다고 하시던데요. 삼세양중인과로 보는 것은 부파불교시대에 [가전연]이란 스님이 부처님의 진여, 법계연기를 오해한 나머지 [발지론]에서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한 것을 다시 그 이후 큰 비구 오백명이 모여 [발지론]에 대해 자세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 지어서 거기서도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그것이 소승불교의 중요한 논장의 하나로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이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시던데 ... (실제로 최근 초기불교를 주장하시는 ㄱ스님 등 적지 않은 분들은 강력하게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하시고 계시던데요.) 그런데 어느 분 강의 동영상을 보니 용수보살도 인연심론송에서 삼세양중인과를 주장하신다고 하니 이에 대해 의문이 생겨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성철선사는 부처님이 설하신 십이연기에 결코 시간적 순서의 개념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하시던데요. 그리고 진여연기,법계연기를 강조하시며 무명과 행, 행과 식, 식과 명색 등은 서로 서로의 [상의성相依性]을 띠며 동시성을 가진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던데 ...
답변입니다.
질문이 많기에 하나하나 인용하면서 답하겠습니다.
용수보살의 [인연심론송]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요?
네 그렇습니다. 용수 스님께서는 십이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적 해석 역시 수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리면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은 '분위(分位)연기, 찰나연기, 연박(連縛)연기, 원속(遠續)연기'의 4가지가 있는데, 이 4가지 해석은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십이연기에 대한 4가지 방식의 조망일 뿐입니다. 질문에서 말씀하신 십이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적 해석'은 이들 4가지 해석 가운데 '분위연기'의 해석입니다.
먼저 십이연기의 각 지분에 번호를 붙여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① | ② | ③ | ④ | ⑤ | ⑥ | ⑦ | ⑧ | ⑨ | ⑩ | ⑪ | ⑫ | |||||||||||
무명 | → | 행 | → | 식 | ↔ | 명색 | → | 육입 | → | 촉 | → | 수 | → | 애 | → | 취 | → | 유 | → | 생 | → | 노사 |
無明 | → | 行 | → | 識 | ↔ | 名色 | → | 六入 | → | 觸 | → | 受 | → | 愛 | → | 取 | → | 有 | → | 生 | → | 老死 |
질문에서 거론하신 <인연심론송>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제가 괄호 속에 십이연기 해당 지분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인연심론송(因緣心論頌, pratītyasamutpāda-hṛdaya-kārikā)>
12종류의 지분은 연기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모니(牟尼)에 의해 설시(說示)되었지만 그것들은 번뇌(惑)와 업(業)과 고(苦)의 세 가지에 의해 남김없이 포섭된다(제1송).
첫째(무명)와 여덟째(애)와 아홉째(취)는 번뇌이다. 둘째(행)와 열째(유)가 업이다. 나머지 일곱(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이 고이다. 열두 가지는 오직 이 셋에 포섭된다(제2송).
셋(무명, 애, 취)에서 둘(행, 유)이 생긴다. 둘에서 일곱(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이 생긴다. 일곱(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에서 다시 셋(무명, 애, 취)이 생긴다. 이같이 참으로 생존의 바퀴는 다음에서 다음으로 굴러간다(제3송).
세계는 모두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놈(중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공(空)한 법(法, dharma)에서 공한 법이 생기는데 불과하다(제4송).
암송, 등불, 거울, 도장, 태양석, 종자, 신 맛, 소리[와 같은 방식]에 의해 오온이 모여 상속하는 것이지 [어떤 미세한 주체가 있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제5송).
지극히 미세한 사물에서도 단멸이 있다고 망상하는 자는 연기적 발생의 의미를 보는 것이 아니다(제6송).
이 세상에는 배제될 것도 없고 안립될 것도 없다. 진실을 진실되게 보아야 하고 진실을 보면 해탈한다(제7송).
이상에서 보듯이 '... 혹 → 업 → 고 → 혹 → 업 → 고 ...'의 방식으로 무한 순환하는 십이연기적 윤회의 모습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저술이 <인연심론송>입니다.
그리고 용수 스님의 '<중론> 제26장 관십이인연품'에서도 십이연기에 대해서 삼세양중인과적으로 설명합니다. 제26장의 게송 전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구마라습의 한역문과 산스끄리뜨 원문에 및 각각에 대한 번역을 함께 소개합니다.
제26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 9게) 십이연기에 대한 관찰
dvādaśāṅgaparīkṣā nāma ṣaḍviṃśatitamaṃ prakaraṇam 십이지(十二支)의 검토라는 이름의 제26장(12게)
1) 衆生癡所覆 爲後起三行 以起是行故 隨行墮六趣
중생들은 어리석음에 덮여 나중을 위해 세 가지 행을 지어낸다. 그런 행을 짓기에 그 행에 따라 육취(六趣)에 떨어진다.
1) punarbhavāya saṃskārānavidyānivṛtastridhā/
abhisaṃskurute yāṃstairgatiṃ gacchati karmabhiḥ//
무명에 덮인 자는 나중의 생존을 위해 세 가지 형성작용[行]을 지어낸다. 그런 행위[業]에 의해 취(趣)로 간다.
2) 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著故 增長於名色
제행(諸行)을 인연으로 식(識)이 육도(六道)의 몸을 받는다. 식의 집착이 있기에 명색을 키운다.
2) vijñānaṃ saṃniviśate saṃskārapratyayaṃ gatau/
saṃniviṣṭe ’tha vijñāne nāmarūpaṃ niṣicyate//
형성작용들을 연(緣)으로 하는 식이 취에 들어간다. 그래서 들어간 식에서 명색이 나타난다.
3) 名色增長故 因而生六入 情塵識和合 而生於六觸
명색이 자라나기에 그것을 인하여 육입(六入)이 생긴다. 육정(六情)[= 六根]과 육진(六塵)[= 六境]과 육식(六識)이 화합하여 육촉(六觸)을 생한다.
3) niṣikte nāmarūpe tu ṣaḍāyatanasaṃbhavaḥ/
ṣaḍāyatanamāgamya saṃsparśaḥ saṃpravartate//
명색이 나타날 때에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발생한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의존하여 접촉이 출현한다.
4) cakṣuḥ pratītya rūpaṃ ca samanvāhārameva ca/
nāmarūpaṃ pratītyaivaṃ vijñānaṃ saṃpravartate//
눈이 형상(色)과 주의력을 연(緣)하여, 그렇게 명색(名色)을 연하여 식(識)이 출현한다.
4) 因於六觸故 卽生於三受 以因三受故 而生於渴愛
육촉을 인(因)하기 때문에 세 가지 수(受)가 발생한다. 세 가지 수를 인하기 때문에 갈애가 발생한다.
5) saṃnipātastrayāṇāṃ yo rūpavijñānacakṣuṣāṃ/
sparśaḥ sa tasmātsparśācca vedanā saṃpravartate//
형상[色]과 인식과 눈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 그것이 접촉이다. 그 접촉으로부터 감수작용이 출현한다.
5) 因愛有四取 因取故有有 若取者不取 卽解脫無有
애(愛)로 인하여 네 가지 취(取)가 존재한다. 취를 인하여 유(有)가 존재한다. 만일 취하는 자가 취하지 않으면 바로 해탈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6) vedanāpratyayā tṛṣṇā vedanārthaṃ hi tṛṣyate/
tṛṣyamāṇa upādānamupādatte caturvidhaṃ//
감수작용에 연(緣)하여 욕망[= 갈애]이 있다. 왜냐하면, 감수된 대상을 욕구하기 때문이다. 욕구하는 중인 것이 네 가지 종류의 취함을 취득한다.
7) upādāne sati bhava upādātuḥ pravartate/
syāddhi yadyanupādāno mucyeta na bhavedbhavaḥ//
취함이 존재할 때에 취하는 자에게서 생존[有]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만일 취함이 없다면 해탈할 것이며 생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 從有而有生 從生有老死 從老死故有 憂悲諸苦惱
유(有)로부터 생(生)이 존재한다. 생으로부터 노사(老死)가 존재한다. 노사로부터 우(憂)와 비(悲) 및 모든 고뇌가 존재한다.
8) pañca skandhāḥ sa ca bhavo bhavājjātiḥ pravartate/
jarāmaraṇaduhkhādi śokāḥ saparidevanāḥ//
그리고 그 생존[有]은 오온이다. 생존에서 생[태어남]이 발생한다. 노사와 고(苦) 등, 비애와 비탄을 가진 것들이 [발생한다].
7) 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
이런 모든 일들은 다 생으로부터 존재한다. 단지 이런 까닭으로 막대한 고(苦)의 온(蘊)이 모인다.
9) daurmanasyamupāyāsā jāteretatpravartate/
kevalasyaivametasya duḥkhaskandhasya saṃbhavaḥ//
낙담과 초조, 이것들은 생[태어남]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오직 고(苦)뿐인 집합체[蘊]가 발생한다.
8) 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明者所造 智者所不爲
이것을 생사하는 제행의 근본이라고 한다. 무명한 자가 짓는 것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리 하지 않는다.
10) saṃsāramūlān saṃskārānavidvān saṃskarotyataḥ/
avidvān kārakastasmānna vidvāṃstattvadarśanāt//
그래서 무지한 자는 윤회의 뿌리인 형성작용들[諸行]을 짓는다. 그러므로 무지한 자는 [그런 것들을] 짓는 자이다. 지자(知者)는 진실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11) avidyāyāṃ niruddhāyāṃ saṃskārāṇāmasaṃbhavaḥ/
avidyāyā nirodhastu jñānenāsyaiva bhāvanāt//
무명이 사라질 때에 형성작용들[諸行]은 발생하지 않는다. 무명의 소멸은 이 [十二緣起의] 지혜를 수습[念想]함에 의한다.
9) 以是事滅故 是事則不生 但是苦陰聚 如是而正滅
이것이 사라지므로 이것이 생하지 않는다. 오직 고(苦)뿐인 이 음(陰)의 덩어리가 그렇게 하여 제대로 사라진다.
12) tasya tasya nirodhena tattannābhipravartate/
duḥkhaskandhaḥ kevala ’yamevaṃ samyagnirudhyate//
이것, 저것[= 십이지의 前支]이 소멸함에 의해 이것, 저것이[= 後支]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오직 고(苦)뿐인 이 집합체[蘊]가 올바르게 사라진다.
위의 제1게송 밑줄 친 부분에서 "그런 행위[業]에 의해 취(趣)로 간다."라고 하듯이 용수 스님께서는 육도(육취) 윤회와 연관시켜서 십이연기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제2게송 산스끄리뜨 원문에서 밑줄 친 niṣicyate는에 대해서, <중론 개정본> p.436의 주석 8에서 제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ni√sic> ni(아래로) + √sic: ‘임신되게끔 정자(精子)를 수용한다.’는 뜻도 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gandhabba, 모태의 배란기, 부모의 성교라는 세 가지 인연으로 名色의 싹이 틀 수 있는데 이때 gandhabba는 바로 vijnana(識)이기 때문이다. <잡아함경>(대정1, p.61b) 및 Mahā-nidāna-suttanta(D.N.Ⅲ, 62.f) 참조.
이상에서 보듯이 <중론> 제26장에서도 용수 스님께서는 십이연기에 대해 삼세양중인과적, 태생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질문에서 "성철스님 [백일법문] 책에 보면 부처님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봄은 옳지 않다고 하시던데요. 삼세양중인과로 보는 것은 부파불교시대에 [가전연]이란 스님이 부처님의 진여, 법계연기를 오해한 나머지 [발지론]에서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한 것을 다시 그 이후 큰 비구 오백명이 모여 [발지론]에 대해 자세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 지어서 거기서도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하던데요."라고 쓰셨는데, 이는 성철스님 당신께서 직접 해석하신 게 아니라, 우이하쿠쥬(宇井伯壽) 등 일본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이를 단순하게 소개하신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불교교학과 관련하여 성철스님께서는 일본불교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많이 참조하시고 신뢰하셨습니다)
또 십이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적 해석이나 태생학적 해석을 부정하는 일부 현대 불교학자들의 해석은 그 뿌리가 서구의 불교학자들에게 있으며, 이는 옳지 않습니다.
질문에서 거론하신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십이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⑴분위(分位)연기 - 12가지 지분이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적으로 일어나는 것
⑵찰나(刹那)연기 - 12가지 지분들이 모두 한 찰나에 중첩되어 있는 것
⑶원속(遠續)연기 - 12연기의 인과관계가 전후의 인접한 생이 아니라 먼 전생이나 먼 내생과 관계하는 것
⑷연박(連縛)연기 - 12연기의 지분 각각이 1찰나에 걸쳐 발생하는 것
이들 4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옳은 것도 아니고, 이들 4가지 해석이 상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 4가지 해석 모두 옳습니다. 즉, 십이연기에 대한 4가지 측면의 조망입니다.
질문에서 " [가전연]이란 스님이 부처님의 진여, 법계연기를 오해한 나머지 [발지론]에서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한 것을 다시 그 이후 큰 비구 오백명이 모여 [발지론]에 대해 자세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 지어서 거기서도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라고 쓰셨는데, 삼세양중인과적인 해석은 위에 열거한 4가지 해석 가운데, '⑴분위(分位)연기'의 해석에 해당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명, 행, 식 ... 애, 취, 유, 행, 노사'의 12지분을 전생, 현행, 내생에 걸쳐 펼쳐놓으면 ⑴분위(分位)연기가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쌓아 놓으면 ⑵찰나(刹那)연기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무명'이 있고, 전생에 지었던 업인 '행'과 그 업이 영근 씨앗인 '식'이 잠재되어 있고, 어머니 자궁 속에 자리잡았던 DNA의 수정란과 식이 결합한 '명색'이 지금의 이 몸으로 자라나 있으며, 임신 5주 정도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눈, 귀, 코 등의 육입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붙어 있습니다. .....
여기서 보듯이 분위연기는 십이연기 각 지분의 발생 시점에 대한 설명이고, 찰나연기는 그렇게 발생한 각 지분이 쌓여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펼치면 분위연기, 쌓으면 찰나연기인 것이지 분위연기와 찰나연기가 상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에서 "성철선사는 부처님이 설하신 십이연기에 결코 시간적 순서의 개념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하시던데요."라고 쓰셨는데, 이는 성철스님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그분께서 숙독하신 일본 불교학자들의 책에 실린 설명을 소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성철 스님은 대 선사이시지만, 불교 교학의 문제는 '지식'과 관련되기에 다른 연구자들의 '지식'에 의지해야 하고 여러 연구자들의 관점에 따라 잘못된 이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초기불전 가운데 <중아함경>에 실린 십이연기에 대한 설명에도 삼세양중과설의 단편이 보입니다. 이를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는 식과 명색이 쌍조건 관계인 이유를 설명하는 경문인데,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십이연기를 임신 과정과 연관시켜서 철저하게 태생학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부처님: 누군가가 명색(名色)의 조건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식(識)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소위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가령 식이 모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명색이 지금의 이런 몸으로 성장했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만일 식이 태(胎)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나가버린다면 명색이 정자(精子)와 만날 수 있었겠느냐?
아난: 만나지 못합니다.
부처님: 아난아 가령 어린아이의 식이 애초에 파괴되어 없어졌는데도 명색이 자라나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아난아, 그러므로 이 명색의 인(因)이 되고 집(集)이 되며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식(識)이니라. 왜 그런가?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누군가가 식에도 조건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식도 조건을 갖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만일 누군가가 식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명색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이른바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식이 명색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말해 식이 명색을 세우거나 명색에 의지하지도 않았는데 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겪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아난아 그러므로 이런 식의 인이 되고 집이 되며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명색이니라. 왜 그런가?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
아난아 이것이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하고,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음”의 의미이니라.
若有問者 名色有何緣 當如是答 緣識也 當知所謂緣識有名色 阿難 若識不入母胎者 有名色成此身耶 答曰 無也 阿難 若識入胎卽出者 名色會精耶 答曰 不會 阿難 若幼童男童女識初斷壞不有者 名色轉增長耶 答曰 不也 阿難 是故當知是名色因․名色習․名色本․名色緣者 謂此識也 所以者何 緣識故則有名色 阿難 若有問者 識有緣耶 當如是答 識亦有緣 若有問者 識有何緣 當如是答 緣名色也 當知所謂緣名色有識 阿難 若識不得名色 若識不立․不倚名色者 識寧有生․有老․有病․有死․有苦耶 答曰 無也 阿難 是故當知是識因․識習․識本․識緣者 謂此名色也 所以者何 緣名色故則有識 阿難 是爲緣名色有識 緣識亦有名色: <中阿含經>, 대정장1, pp.579c~580a.
그리고 본 카페 왼쪽의 메뉴에서 보이는 <십이연기 3강> 게시판에 올린 십이연기에 대한 강의영상(코로나19기간 동안 비대면으로 진행햇던 경주 동국대 불교학부 강의 녹화)이 있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게시판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UuUA
또, 본 게시판에서 십이연기에 대해서 몇 차례 설명한 적이 있는데, 아래에 링크 소개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196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345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58
그리고 "진여연기,법계연기를 강조하시며 무명과 행, 행과 식, 식과 명색 등은 서로 서로의 [상의성相依性]을 띠며 동시성을 가진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연기의 핵심은 '의존성'이며 연기를 적용하는 대상이 동시적(俱起的, 구기적) 사건이나 사태면 '상의성의 연기(相依相待, 상의상대)'가 되고, 계기적(繼起的) 사건이나 사태면 '시간적 인과의 연기(彼緣生果, 피연생과: 저것을 연하여 과가 생한다)'가 됩니다.
'긴 것 짧은 것'의 연기관계, '큰 방 작은 방'의 연기 관계, "눈과 시각대상이 만나서 안식이 생긴다."는 연기관계는 상의상대의 연기(구기적 연기)이고, 십이연기의 ⑴분위(分位)연기적 해석은 '시간적 인과의 연기(계기적 연기, 피연생과)'입니다.
즉 연기법을 적용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상의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계기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상의성의 연기는 [소위, 所謂] 대승의 법공(法空)과 관계되고, 계기적 연기는 [소위] 소승의 아공(我空)과 관계됩니다.
성철 스님께서 강조하셨다는 "진여연기, 법계연기"는 법공의 연기이고,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 가운데 "⑵찰나(刹那)연기" 역시 법공의 연기입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그리고 전에도 공지한 바 있지만, 다른 분이 올리신 질문에 대한 제 답변이 올라오면, 그 후 하루 이상 지난 다음에 질문을 올리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의 답변을 달려면 힘에 부칩니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이론적인 것 까지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타 학자들의 이론을 참조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성철선사께서도 우정박사 이야기를 몇 번 하시더군요.
하지만 당신이 우정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제8아뢰야식을 부정하는 그의 이론에는 동의치 않으심을 분명히 하시더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또 질문드리겠습니다. ()()
ps: 조현 기자님과의 인터뷰 영상을 아주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위 질문이 궁금해서 검색하던 중 위 답변 중 일부가 검색되어 오늘
가입하고 질문드렸습니다. 한국불교에 교수님 같으신 분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명불허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