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머리안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경주 IC에서 삼릉으로 가는 경우에는 오릉 앞 사거리에서 35번 국도를 따라가다
포석정을 지나 1.5km 정도 가야 한다. 통일전으로 가는 경우에는 경주 IC에서 7번 국도따라 10분 정도 가야 함.
대중교통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하차하여 통일전 방향으로는 11번 버스, 삼릉 방향으로는 500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samna]
+++++++++++++++++++++++++++++++++++++++++++++++++++++++++++++++++++++++++++++++++++++++++++
#참고 사이트 : 남 산 [경상북도]
남 산 [경주시]
# 참고 산행기 [뽀대]
들머리 :삼릉(9/~50)~석불 좌상(10/07)~선각여래좌상(10/25)~마애석가여래좌상(10/50)
상사바위(11/00)~금오산(11/13)~도깨비 바위(11/35)~식사~삼층석탑(12/30)
봉화대 능선(1/20)~신선암(1/35)~칠불암(1/40)~고위산(2/40)~
날머리 :용장골(4/10)
94년부터 3여년을 경주에 터를 잡고 있으면서도 남산 그처도 가보지 못한곳이라 늘 마음 한구석에
한번 들러 보고 싶음이 간절 했지만 기회가 오질 않아서 차일 피일 하는사이에 훌적 발거름을 돌려
보물 찾기에 나섰다 ...
신라의 향기는 온 들판과 산속 깊은 골까지 넓고, 진한 향내가 배여있어 역시 남산도 발길 닿는 곳
마다 마다에 천년의 숨결과 자취가 물씬 풍기는 보물 같은 산....
경주ic를 나와 35번 도로를 타고 울산 방향으로 조금만가면 삼릉이 있는대 이곳어서 주로 산행이
시작된다
삼릉
삼릉의연혁(유래)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
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
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 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7,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석불좌상
삼릉을 지나 수백년은 족히 지났을 빽빽한 송림을 지나등산로는 산님들이 너무 애용해 주셔서 비단
길을 걷는 느낌으로 오르던중 첫 불상이 반겨 주는대 아뿔사...ㅉㅉㅉ 누가,왜,우째서 보기가
민망하여 얼릉 ...ㅋㅋ
선각 육존불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세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올
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
(菩薩像)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
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法堂)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삼릉계곡석불좌상
이 불상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나발)을 붙였고 정수리부분에는 상투(육계)가 있다. 얼굴은 풍만
한 모습으로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한쪽 어깨에 옷을 걸쳤으며, 원래 불신(佛身)과 불상 받
침과 불상 뒤의 원광인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지금은 얼굴이 크게 손상되었다.
석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비롯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등로의 구조 표지판이 역시 문화 유적지의 본 고장다운 발상이 돋보이는...
짝짝짝~~~
여기서 부터는 암반 지대도 나오고 꽤나 호흡이 거칠어 짐을 느끼는 등로
벌써 이마와 등즐기엔 땀이 베어나와 진정 산행의 묘미를 즐길쯤 목탁소리와 독경소리의
친근함이 느껴지고, 새소리와 나무를 가르는 바람소리 또한 산행의 동반자...
상선암의 풍경 소리를 뒤로하고 조금오르니 좌측에 거대한 또하나의 보물이 반겨준다
선각보살상
상사바위
피리소녀의 사랑이야기가 깃든 상사바위
경주 동남산 어느 마을에 할아버지가 외로이 살면서 이웃집의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 했다.
어느덧 피리는 꽃다운 처녀가 되었지만 피리가 이사를 가게되자 할아버지는 몹시 쓸쓸해 했다. 그 후
어느 날 피리처녀가 할아버지의 방문을 열며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피리야!"
하고 외쳤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안돼! 안될 일이지"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저으며 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꿈속에까지 피리소녀를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는 피리를 잊으려고 무척 애를 쓰며 고민하다가
끝내 남산의 어느 골짜기 나무에 목을 매 죽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혼은 골짜기 위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
가 사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부터 피리는 큰 뱀이 몸을 휘감고 덤벼드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루는 피리의 꿈속에서 뱀이 할아버지
로 변해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너를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구나.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
피리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죽음을 헤아리고 무척 슬퍼했다.
"할아버지! 이제 나이를 먹지 않는 바위가 되어 소원을 풀어드리겠어요."
피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기로 작정하고 바위에 올라 뛰어 내렸다. 피리소녀의 영혼은 작은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바위 곁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다. 상사바위는 동남산
국사골 정상에 우뚝 솟아있다.
금오산(468)
상사바위에서 10여분 열심히 오르니 사야가 뻥~~~
그리 높진 않은 산이지만 이곳 저곳 등로을 이탈하며
보물 찾기를 하는동안 사간이 많이 지체된듯하다
정상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안내도를 보니
인근에 도깨비바위(?),삼형제바위가 있다하여 찾아 본 바
도깨비 바위(추정)...
도깨비 같아 보여요?^ㅇ^...ㅋㅋㅋ
삼형제바위(추정) 바위 세개 있는곳은 여기 밖에 없어요...
수년전에 큰 산불이 ...
온통 산이 벌거 벗은 형태로 군데군데 타다만 나무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네 한 순간에 천년의 세월을 날려버리다니....
여기서 식사를 하고 다음 행선지로, 불러온 배를 부여잡고 식식거리며 출발
용장사삼층석탑
이 塔(탑)은 下層基壇(하층기단)을 생략하고 岩石(암석)에 높이 6m의 괴임 1段(단)을 직접 마련하여
三層基壇(삼층기단) 中石(중석)을 받게 하였다. 中石(중석)의 一面(일면)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다른 三面(삼면)은 두개의 돌로 되어있으며, 각면에서는 모서리기둥과 撑柱(당주) 한 개씩을 模刻(모각)
하였다.
甲石(갑석)은 二段(이단) 板石(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는 副緣(부록)이 있다. 甲石(갑석)의 上面
(상면)은 약간 頃斜(경사)져 있고, 그 上面(상면) 중앙에는 모가 난 2단의 塔身(탑신)받침이 마련되었다.
塔身部(탑신부)의 각층 塔身(탑신)과 屋蓋石(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初層塔身(초층탑신)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네 귀에 모서리기둥이 있을 뿐이고,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 屋蓋石(옥개석)은 받침이 각층 4단이고 추녀는 直線(직선)이나 轉角(전각) 上面(상면)에는 경쾌
한 反轉(반전)을 보인다. 옥개석은 상면에는 1단의 괴임이 있어 각각 塔身石(탑신석)을 받게 된 점은 일반
석탑에서와 다름없다.
上輪部(상륜부)는 전부 없어져 그 원래의 상태를 알수 없고 다만 3층 屋蓋石(옥개석) 頂部(정부)에 撑柱孔
(당주공)만이 남아 있다. 각 부의 調和(조화)가 아름답고 경쾌하며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리어 壯觀(장관)
을 이루는 手法(수법) 樣式(양식)에서 新羅下代(신라하대)에 속하는 代表的(대표적)인 石塔(석탑)의 한 예
라 할 수 있다.
* 연혁(유래)
용장사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
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용장사(茸長寺)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
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 밖에 되지 않
지만, 하늘에 맞닿은듯이 높게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바위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
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용장사삼륜대좌불
용장사 법당터 위쪽에 있는 용장사곡(茸長寺谷)에는 두리새김한 불상과 암벽에 돋을새김한 불상이 있다.
자연석 위에 3층으로 둥글 넓적하게 만든 대좌를 얹고 그 위에 안치한 석불 좌상은 머리부분은 없어졌으
나 옷자락이 길게 내려온 점이 특이하다. 마애불은 얼굴이 풍만하며 어깨와 무릅이 넓어 당당하면서 안정
감이 있다. 조각 솜씨로 보아 두 불상은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용장사마애여래좌상
이 磨崖如來坐像(마애여래좌상)은 8세기 후반에 製作(제작)된 우수한 작품으로 石佛坐像(석불좌상)의
뒤편 岩壁(암벽)에 造成(조성)하였으며 蓮華臺(연화대)위에 결가부좌한 자세에 二重(이중)으로 刻出
(각출)한 頭·身光을 갖추고 있다. 머리는 螺髮(나발)에 육계가 뚜렷하고 얼굴은 원만, 온화하다. 양쪽의
귀는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三道(삼도)가 뚜렷하다.
法衣(법의)는 通肩(통견)이면서 平行線(평행선)이 세밀한 옷무늬로 처리한 것은 印度佛像(인도불상)을
연상케한다. 양손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특히 여래좌상의 신광 왼쪽에는 造像銘(조상
명)으로 보이는 銘文(명문)이 세줄로 10여자 새겨 있으나 現在(현재) 判讀(판독)은 어렵다.
가야할 봉화대 방향의 능선
양지꽃
이영재 표지판
봉화대 능선의 기암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보물199호)
南面(남면)의 바위를 깍아 菩薩像(보살상)을 彫刻(조각)하였는데 木造前室(목조전실)이 있었던 흔적
이 남아있다. 머리에는 三面寶冠(삼면보관)을 높이 쓰고 있으며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있다.
體軀(체구)가 풍만하고 몸의 굴곡도 如實(여실)하다. 오른손은 한가지의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
에 들고 있다. 다리는 半跏趺座(결가부좌)인데 꽃을 잡고 있는 것과 함께 이 佛像(불상)이 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立證(입증)한다.
天衣(천의)는 얇게 彫刻(조각)되었으며 옷자락이 유려하게 늘어지면서 臺座(대좌)를 덮고 있다. 光背
(광배)는 舟形擧身光(주형거신광)에 三條線(삼조선)으로 頭光(두광)과 身光(신광)을 表現(표현)하였을
뿐이며 光背(광배)자체가 龕室(감실)을 만들었다. 발아래는 구름무늬가 용트림하였으며 구름위에 둥실
떠가는 自有自在(자유자재)한 菩薩(보살)을 잘 묘사하고 있다.
* 연혁(유래)
이 불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의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
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菩薩像)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
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臺座)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遊戱坐)*를 표현하였음은 드문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
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유희좌(遊戱坐)
결가부좌의 자세에서 한쪽다리를 풀어 대좌 밑으로 내린 자세
칠불암마애석불(보물제200호)
칠불암마애석불(보물 제200호)
이 磨崖佛(마애불)은 東側(동측)에 있는데 兩別(양별)되어서 암벽의 三尊巨像(삼존거상)과 그 앞의
方柱(방주)에 새긴 四方佛(사방불)을 볼 수 있다. 이들 바위에는 架溝(가구) 흔적이 남아있을 뿐 아
니라 瓦片(와편)들이 많이 늘려 있어 木造(목조)의 前室(전실)을 구축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三尊(삼존)가운데의 本尊(본존)은 素髮(소발)의 머리에 육계(상투)가 높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豊麗
(풍려)하다. 당당한 체구에 힘에 넘쳐 있다. 法衣(법의)는 偏袒右肩(편단우견)에 階段式衣紋(계단식
의문)이 생동하고 있으며 옷은 얇게 밀착되어 있다. 仰蓮(앙련)과 伏蓮(복련) 위 二段(이단) 蓮花臺
座(연화대좌)이며 光背(광배)는 頭光(두광)만 表現(표현)된 寶珠形(보주형)이다. 兩脇侍菩薩(양협시
보살)은 本尊(본존)과 흡사한 手法(수법)이다.
左脇侍菩薩像(좌협시보살상)은 右手(우수)에 淨甁(정병)을 잡고 있으며 右脇侍菩薩(우협시보살)은
右手(우수)를 어깨까지 올려서 蓮花(연화)를 잡고 있다. 「方柱四面像(방주사면상)」은 모두 同一
(동일)한 手法(수법)과 樣式(양식)으로 닮았다. 東面像(동면상)의 法衣(법의)는 다소 무겁게 처리된
감이 있으나 육체의 굴곡은 뚜렷이 表現(표현)되었다.
光背(광배)는 頭光(두광)만 나타내고 있고 臺座(대좌)는 仰(앙)·伏蓮(복련)을 생기있게 彫刻(조각)
하였다. 右手(우수)에 藥盒(약합)을 들고 있어 藥師如來(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南面像(남면상)
은 東面像(동면상)과 모든 점에서 흡사하지만 裙衣(군의)의 띠 매듭은 새로운 形式的(형식적) 스타
일이며 짧막한 常縣座(상현좌)의 形式的(형식적) 衣褶(의습)은 圖式化(도식화)되어 있다.
* 연혁(유래)
이 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
석불'이라 불린다. 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
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菩薩像)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 산
남산 소나무옆
두리 뭉실한 바위가 잡자기 부처가 되고
흐르던 시간이 소리없이 멎어서
신라로 돌아간다
천년! 부처는 그렇게 앉아 게시고
천년! 부처는 그렇게 서 계실 것이다
부처는 바위, 바위는 부처
우르러 보는 사람도 부처
모두 피가 통하는 한마음 한 몸이다
푸른하늘,흰구름
구름 그대로,바위 그대로 그저 그대로다.
천년이 왔다 가는 그저 그대로다.
( 유적지 답사 안내도에서 ) 자료 경주시청 문화재관리과
흰 동백꽃
두릅
양지꽃
민들래
진달래
고사리
신선암,칠불사 갈림 길에서 380m좌측으로 내려서니,
신선암에 마애보살좌상이 벼랑 끝의바위에 선명하게 버티고
천년을 의연하게 엷은 미소로, 모든 이들의 마음의 안식이 되었고,
아득히 저밑엔 칠불암의 일곱 불상 또한 ,
넉넉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믿음직한 아버지의 형상으로,긴세월 보듬에 주었고
지나온 세월 많큼이나 앞으로도 풍요함을 항상 주리라...
칠불암을 들러보고 다시 되돌아 갈림길까지 올라가 마지막 봉우리인 고위산(494)을 향해...
고위능선은 남산 대부분의 길 처럼 평탄한 길의 연속 막바지 오름길이라 조금은 힘이드네요
고위봉에서 물 한모금의 여유를...내려갈 열반재,용장골의 행로가 심상치 않음을 예고
그럼 그렇치 그리 쉽게 넘어갈 산이 아닌대....
고위산 정상석
가야할 능선
천길(?) 낭떨어지...ㅋㅋㅋ
지나온 산들...
허걱 ^^뒤로 빽
고위산에서 한 시간 여를 거의 암반지대를 스릴을 즐기며 내려온길,
이런 산행길이 기억에 오래가고
젬나는 산길이다.
구석구석 기암과의 조우도, 이제 시작되는 연달래의 화사함도,
갖가지 나무마다 솟아 오르는 앙증 맞은 새순의 부드러움.
보이는 모든 사물이 정겹게 느껴진다
계곡에 물이 조금씩 흐를쯤, 독경소리와 그윽한 풍경 소리는
하산 완료가 임박함을 알려주고,
시선 저멀리 하나 둘 민가의 모습이 들어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