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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 선생님께 (사량좌 어록 구절 이해 및 주희와 여조검의 문답 비판)
2026년 8월 24일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큰 뜻을 세우시고 열심히 공부하신다니
좋은 결과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박학다식하다고 칭찬하셨는데 과찬이십니다.
8월 19일(수) 오전에 보내주신 글을 보고 낮에 번역하고 간단히 설명을 올려드렸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더러 빠진 곳이 있어서 다시 글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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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 한문과 중국 고문 및 백화를 함께 배우셔야 합니다.
2. 사량좌 어록 구절의 상세한 이해 네 가지
3. 주희의 승심(勝心) 비판
1. 한국 한문과 중국 고문 및 백화를 함께 배우셔야 합니다.
제가 한국 한문과 중국 고문을 배웠던 경험을 잠깐 올리니 거북하게 여기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1970년대 후반에 학부 다닐 때 한문이 아주 큰 문제였기에 여러 선생님을 찾아 배우고 민족문화추진회에도 1년 다녔습니다. 나중에 대만대학에서 청초 고증학자 고염무를 연구하고 다시 중국 양명학을 공부하면서 송대 성리학자들의 문헌을 자주 보았습니다. 대만대학 석박사 과정에서 자료를 찾아 읽고 주지(主旨)를 생각하고 레포트를 써서 백화로 설명하고 토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여야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학자들이 중국 학자를 만나 필담하였듯이 필담한다면 의사소통과 토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현재 국제회의에서 동시통역을 쓰거나 번역기를 돌려가며 소통합니다. 그렇다고 국제회의에서 현장 참여자들에게 내 견해(resolutions of understanding)를 설명하고 또 내 주장(argument)을 지키려고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외국어를 배우려면 먼저 말하고 생각하고 쓰는 세 과정을 겪어보라고 이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 신문이나 저녁 신문(中國時報, 聯合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때로는 현대 어문체 논문의 문체(文體)가 괜찮으면 논문 1편을 모두 외울 정도로 읽고 기억하고 써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읽는 독해(讀解)와 쓰는 작문(作文)이 많이 늘었습니다. 한국 한문에 토를 달아 읽고 이해하거나 한 글자씩 축자 해석하겠다는 오해와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조선 시기의 문집들이 많더라도 어떻게 읽어도 평생에 다 읽겠지만 중국 역대 많은 문헌을 언제 어떻게 빨리 읽어 줄거리(맥락)를 이해하고 중국 학자들과 경쟁할 수 있는 연구논문을 쓰고 토론하겠습니까?
위사 선생님께서도 현대 중국어를 배우시고 또 백화 신문을 많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한국 한문뿐만 아니라 중국 고문을 읽으실 때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퇴계 선생께서도 양송(兩宋) 시기 문헌을 읽으시려고 역관에게 백화를 배우셨다고 전해옵니다. 명나라 시기의 백화와 양송 시기의 백화는 어투가 많이 다르거늘 명나라 백화를 익힌 역관이 송나라 백화를 읽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결론은 퇴계 선생께서 북송 시기 어록들을 충분히 이해하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 연암 박지원 선생이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소설류를 많이 읽으셨다고 전해오는데 연암 선생의 문집을 읽어보면 단어 선정과 작문 어투가 상당히 어색합니다. 시문 표현력은 얼마 전까지 유행하던 등려군 노래 가사만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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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량좌 어록 구절의 상세한 이해 네 가지
사량좌는 북송시기 성리학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학자입니다. 번역을 부탁하신 사량좌 어록의 몇 구절을 상세하게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선생님께서 번역을 부탁하신 구절(“祖考精神, 便是自家精神”)은 북송과 남송, 금나라 지역, 원나라 시기, 명나라 시기 및 청나라 시기에 널리 인용되고 성리학의 인식론, 수양 공부론, 조상님 제사, 조상님 묘지 고르기 등 여러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계승되었습니다. 사량좌가 말한 구절(祖考精神, 便是自家精神)은 사실상 정명도 선생의 말뜻을 잘 이해하고 계승하였습니다.
사량좌는 “정명도 선생의 생각(意思, 의미)이 특별하신데 사흘 동안 마음을 깨끗이 하시고 닷새 동안 앞일을 걱정하지 않으시면서(洗心曰齋,防患曰戒也) 오로지 해와 달, 동서남북 사방,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조상의 귀신을 찾으셨습니다.(사량좌 어록:是他意思別,三日齋五日戒,求諸陰陽四方上下。蓋是要集自家精神,所以“格有廟(降有廟)” 다시 말해 정명도는 8일 제계하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조상님 귀신의 정신을 감응하기를 기다렸다가 제사를 지냈다고 묘사하였습니다. 물론 빨리 감응하거나 늦게 감응하겠으나 아무튼지 감응한 뒤에 제사를 올렸다고 제사에 관한 종교적 감응을 설명하였습니다. 정명도의 조상신 감응 사례는 북송 이후 성리학자들이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의식(儀式, ritual)이 되었습니다.
정이천의 말(葬說)이라고 전해오는 구절 “돌아가신 조상님들과 살아있는 자손들은 기운(氣)이 같으니까(同氣) 조상님 묘지를 좋은 곳에 잘 쓰면 자손들이 평안하고 조상님 묘지를 위태로운 곳에 쓰면 자손들도 위태롭다.(呂祖謙撰,呂祖儉編,『東萊集』,卷三︰父祖子孫同氣,彼安則此安,彼危則此危,亦其理也。)”는 음택(陰宅) 주장은 사량좌의 구절도 함께 송원명청 시기에 널리 유행하였고 심지어 조선에서도 조상님 묫자리를 놓고 소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1960년대에도 먼 집안사람들이 찾아오거나 형제자매가 만나면 서로 “동기간(同氣間)”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냈습니다.
정이천은 조상과 후손의 동기(同氣)를 강조하여 말하였고 사량좌는 정신(精神)이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하여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에 속하고 정신(精神, soul)은 『중용』에서 말하는 “귀신지덕(鬼神之德)”이며 형이상(形而上)에 속하여 서로 귀속이 다릅니다. 여조겸의 아우 여조검(呂祖儉)은 북송시기에 정명도와 정이천이 대충 요점만 이해하라고 말하였던 『논어』 “敬而遠之, 知也)” 구절에서 지(知)와 『중용』 “鬼神之德, 體物而不遺” 구절의 德을 통합하여 이해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敬은 가까이 잘 이해하라는 뜻이고 遠은 멀리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정(二程)은 귀신의 유무(有無)를 가르지 말고 약유약무(若有若無)라는 어정쩡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뒤에 주희는 장재의 견해에 따라 『중용』 “鬼神之德”을 음양 기운의 상호작용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정명도의 동기 주장(同氣論)도 반영하여 주석에 병기하였답니다. 왜냐하면 주희는 정신(精神, 魂魄)이 언젠가는 소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량좌처럼 영혼(soul, 神 또는 精神)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불교의 윤회론이라고 배척하였으며 결국 사량좌의 정신(精神) 주장을 싫어하였습니다. 주희의 이런 견해와 입장은 사량좌와 여조검이 유가(儒家) 관점에서 종교적 영혼(soul)의 멸불멸(滅不滅)을 이해하려는 의도를 무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희는 불교를 싫어하였고 영혼이 언젠가는 산멸(散滅)한다고 보았습니다(卷四十七,「答吕子約」(七)︰雖未必皆即時消散,要必終歸於消散也。).
둘째, 사량좌와 정명도의 문답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량좌의 제자 증염(曾恬)이 사량좌 선생께 “정명도 선생께서는 귀신(조상님 귀신)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어떠하셨습니까?(先生祭享鬼神則甚?〔朱熹, 刪訂 三卷本〕)”라고 여쭈었습니다. 사량좌가 대답하길 “정명도 선생께서는 3일 5일 재계(齋戒)하시는 동안에 하늘과 땅의 변화(陰陽), 동서남북 사방과 하늘과 땅(上下) 육합(六合)의 우주에서 조상님의 신(神)을 찾으셨다(求諸陰陽四方上下)고 눈으로 본 대로 말하였습니다. 정명도 선생은 자신의 정신(精神 : 精은 魄이고 神은 魂입니다)을 집중하여 『주역』 췌(萃)괘와 환(渙)괘에서 ”조상의 신이 사당으로 내려오신다(降有廟)“고 말한 것처럼 나의 정신과 조상님 정신이 서로 감응하길 기다린 뒤에 제사를 올리셨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사량좌가 진술한 이 구절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보면 “선생(先生)” 또는 “명도(明道)” 또는 “선왕(先王)” 셋이 나옵니다. 금나라와 명나라 및 청나라 시기 문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선왕(先王)이라고 보면 주나라 문왕과 무왕 또는 주공이 그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희가 산정한 3권 판본에서는 분명히 “선생(先生)”이라고 적었습니다.
오히려 “선생(先生)”이라고 보는 편이 사량좌 말뜻에 가깝습니다. 사량좌는 바로 뒤에서 “귀신이 허공 우주에 빽빽이 가득 차 있어 우리 눈이 보는 대로 모두가 천지자연의 묘용(妙用)이다”고 부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또 그는 불교와 도교를 믿었습니다. 여기에서 귀신이 우주에 가득한 것은 정명도의 뜻이고 천지자연의 묘용이라는 말은 장재(張載, 自號 橫渠)의 말입니다. 사량좌는 정명도와 장재의 말을 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또 “횡거(橫渠)” 또는 “장재(張載)”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습니다. “횡거(橫渠)”라고 부를 사람은 정명도가 마땅하고 사량좌는 한참 후배 학자로서 어찌 “횡거(橫渠)”라고 대놓고 부르겠습니까? 물론 말한 사례도 있습니다.
셋째, 曰과 云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당나라 시기와 북송 시기에는 직접 말하는 것이 曰이고 말하다가 인용하는 문장이 있으면 云이라고 말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주희가 산정한 3권 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謝子曰︰“余當時亦曹問明道先生。明道曰︰‘待向你道無來,你怎生信得;及待向你道有來,你但去尋討看。’”謝曰︰“此便是答厎語。”又曰︰“橫渠說得來別,這箇便是天地間妙用。”
사량좌는 먼저 정명도의 말을 인용하여 “明道曰”이라고 기록하고 또 “謝曰” 뒤에 “又曰”이 나와 사량좌가 張載(橫渠)의 말까지 인용하여 말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송이 멸망한 뒤 북쪽 지역 금나라에서 활동한 이순보(李純甫, 1177-1223)는 북송 학자들의 어록을 수집하여 채록하고 평론한 『명도집설(鳴道集說)』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주희와 이순보 모두 사량좌의 문인 증염(曾恬)이 기록한 필사본을 보았는데 서로 구절들이 달랐다고 전합니다. 주희가 산정한 3권 판본에는 증염이 기록한 다른 판본의 구절도 병기하였습니다.
上蔡曰:“人死時氣盡也。予嘗問明道:‘有鬼神否?’明道曰:‘道無,你怎生信?道有,你但去尋討看。横渠云:“這个是天地間妙用。”這裏有妙理,於若有若無之間,須斷直得去。’”
사량좌가 정명도(程明道) 선생께 여쭈었더니 정명도 선생께서 말씀하셨고 또 횡거(張載)의 말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뒤에 장재의 “묘용(妙用)” 말뜻은 “귀신이 있는 듯 없는 듯(若有若無)이 이해하여야 한다.”고 설명해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희가 산정한 판본은 사량좌가 정명도의 말을 인용하고 사량좌가 다시 장재 말까지 인용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순보의 채록은 정명도가 먼저 말하고 정명도가 다시 장재의 말을 인용하고 부연 설명까지 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장재의 말을 정명도가 인용하였는지 또는 사량좌가 인용하였는지를 구분하여야 합니다.
이순보 채록에는 “묘리를 약유약무(若有若無)에 반드시(斷) 놓아야(置) 한다.(裏有妙理,於若有若無之間,須斷直得去。)” “直”은 “置”의 통용자입니다. 주희 산정본에는 “這裏有妙理,於若有若無之間,須斷置得去始得。”입니다.
여기에서 이순보가 보았다는 증염(曾恬)의 필사본에 근거하면 주희가 산정한 판본에서 “又曰︰‘橫渠說得來別,這箇便是天地間妙用。’” 구두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순보 채록에 따라 주희 3권 판본의 구절을 번역하면 “정명도 선생이 또 말씀하시길 ‘장재가 말한 것(橫渠說得來)은 내가 말한 것(這箇)과 다른데 바로 천지간의 묘용(便是天地間妙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구두점은 “又曰︰‘橫渠說得來別這箇,便是天地間妙用。’”입니다.
여기에서 “天地間妙用” 뜻은 그냥 天地의 妙用이 아닙니다. “間”의 특별한 의미를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천지자연의 묘용”이라고 쉽게 번역하였습니다.
장재(張載)는 1077년 양력 12월 6일에 세상을 떠났고 소옹(邵雍)은 1077년 양력 7월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재가 개봉으로 가서 취직하는 길에 개봉에 사는 소옹이 몹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소옹을 찾아가서 위로하였습니다. 장재는 자신도 몇 달 뒤에 곧 죽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소옹이 죽을까 봐서 걱정하고 위로하였답니다. 두 사람이 만나 위로하는 동안에도 서로 내가 『주역』을 더 잘 안다고 자랑하였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도사(道士)에게 『주역』을 배워 앞날의 점(占)도 잘 쳤으며 서로 경쟁하고 호응하며 농담을 할 만큼 가깝게 지냈습니다.
장재의 학술사상에서도 소옹의 말뜻을 넣어서 이해할 부분도 있고 소옹의 학술에서도 장재의 말뜻을 넣어 이해하여야 합니다. 물론 정명도는 장재가 말한 “天地間妙用”의 속뜻 맥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명도는 장재와 소옹의 학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여 존경하였는데 오히려 이정(二程) 문인들이 이정을 높이려고 장재와 소옹을 헐뜯는 말을 많이 남겼습니다.
“間”은 소옹의 아들 소백온(邵伯溫, 1055-1134)이 아버지 소옹의 『황극경세서』를 해설하며 강조하였듯이 사실상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초이레까지 7일 동안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곤(坤)괘 음효(陰爻)에서 양(陽)이 점점 성장하여 온전한 일양(一陽)의 양효(陽爻)가 되어 복(復)괘 초효(初爻)가 되는 7일 동안입니다. 그래서 복괘 초효에서 “七日復來”라고 말합니다.
섣달 그믐날은 정말로 온 세상이 곧 멸망하려는 듯이 춥고 아득하고 깜깜한 곤괘이며 곤괘에서는 양기(陽氣)가 모두 죽어 없는 듯하다가 정월 초하루 자정 0시부터 다시 양기(陽氣)가 되살아납니다. 가을에 만물을 숙살(肅殺)하더니 겨울에는 생명현상이 모두 사라져 숨어 동장(冬藏)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적막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던 곤괘에서도 세상 만물을 되살리려고 합니다. 만물을 되살리려는 거룩한 뜻(妙用, 天理, 太極)은 얼마나 위대하고 장엄합니까! 이것이 만물을 되살리려는(生生) “天地之心”입니다. 다시 말해 “간(間)”은 깜깜한 곤괘에서도 하늘과 땅(사실상 太極)이 만물을 되살리려고 양기가 저절로 자라서 일양(一陽)이 되는 7일 동안을 말하며 하늘과 땅의 거룩한 마음이 “天地之心”이며 장재가 말한 “妙用”입니다. 정명도가 “천리(天理) 두 글자는 내가 공부하여 밝힌 것이다.”고 자랑하였으나 실제로는 당시 도사(道士)를 비롯하여 소옹과 장재도 자세히 이해하였던 뜻입니다. 정명도가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기 “七日復來”에서 七日이 정확하게 며칠 몇 분(分)인지 논란이 많습니다. 아무튼지 전국시기부터 한무제 원봉(元封) 6년(기원전 105년) 11월 갑자일 자정(甲子朔)에 일어난 천문 현상(日月合璧과 五星連珠)을 등평(鄧平) 팀이 계산하여 태초력(太初曆)으로 개정하기 이전까지 사용하고 또 사마천이 대대로 계승하였다는 역법은 4분력(四分曆)입니다. 1年 365일과 1/4일에서 곧 1461/4일에서 분모 4를 두고 사분력이라고 말합니다. 태초력은 사실상 음률(音律)에서 1옥타브 진동수를 계산하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따라 3의 4승 곧 81을 분모로 삼아서 81분력이라고 말합니다. 서한 시기에 경방(京房)은 금문파(今文派) 맹희(孟喜)와 초연수(焦延壽)의 상수역(象數易)을 배워 재이(災異)를 제시하면서 괘치(卦值)가 7日이 아니고 6日7分이라고 주장하여 사분력을 버렸습니다. 물론 7日의 시간 길이에 관하여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사량좌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 정명도 선생을 찾아가 배우면서 유가 경전의 글귀를 줄줄이 외워 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명도 선생이 사량좌에게 “너는 지금 공부를 하는 것이냐? 아니면 장난치고 헛지랄하냐?(玩物喪志)”고 꾸중하였습니다. 이때 사량좌가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지고 등에 땀이 났다고 실토하였습니다. 사량좌는 이때부터 정명도 문하에 입문하여 학술을 배우고 이해하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량좌는 구법당 당파에 속합니다.
넷째, 주희가 젊었을 때 이동(李侗, 1093-1163) 선생을 한두 번 찾아가 이것저것을 여쭈었으나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량좌 어록을 읽고 이해하면서 성리학을 자수(自修)하였습니다. 그런데 주희가 북송 성리학 문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후대 학술을 위한다는 취지에서 불교와 도교에 관한 언설(言說 : 어록과 주장)을 대량 삭제하고 수정하였습니다. 주희가 이렇게 삭제하고 수정한 결과는 북송시기 성리학 형성 시기의 많은 학자의 학술을 대체로 거의 모두 왜곡되거나 무지 상태에 빠뜨렸습니다. 다시 말해 북송 시기에 학자들이 유가 경전을 연구하면서 불교와 도교를 수용하였다는 많은 기록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순보가 북송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에서 배운 것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현재 중국 철학 연구자들도 북송 시기 성리학 사실과 내용을 밝히지 못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남송시기 주희조차도 북송시기 어록을 읽으면서 어투(語氣)와 특정 의미를 주의하지 못하고 건너뛴 오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조검이 기억하여 읊으며 인용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卷四十七,「答吕子約」(九)︰“明道答上蔡語謂:‘向你道有來,又恐賢問某討;向你道無來,你又恁生信得及?’” 여기에서 여조검이 “去” 한 글자를 빼놓고 말하였는데 주희도 건너뛰고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待向你道無來,你怎生信得及?待向你道有來,你但去尋討看”에서 두 사람 모두 “但去”를 그냥 지나쳐서 읽었습니다. 이 구절을 다른 여러 서적에서 찾아보아도 그렇습니다.
현재 중국 철학 연구자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여 쓴 논문들을 보면 백 퍼센트 모두 “怎生”에 주의하지 않고 “無”에만 주목하고 “怎生”을 “怎能”처럼 조동사로 보고 본동사 “믿겠느냐(信得及)?”를 이해합니다. 또 “但去”도 “但”을 부사라고 보고 “只要去” 조동사, “尋討看” 본동사로 보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及” 글자를 뒤에 붙여서 구두점을 찍었습니다. 모두 틀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문에서 『程氏遺書』 “死者,不可謂有知,不可謂無知。(사람이 죽은 뒤에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에 주목하여 “生”과 “去” 두 글자를 번역해 드렸습니다.
실제로 소리 내서 읽어보면 “怎生”과 “但去”에서 숨을 잠깐 쉬고 나서(一口氣) “信得及?”과 “尋討看!” 구절을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待向道”는 “너를 상대하여 말하다(對你說)”입니다. “怎生”은 “네가 어떻게 생을(怎麽把生)” “이해하여 믿겠느냐?(信得及?)”고 반문하듯이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但去”도 但보다는 오히려 把처럼 목적어를 동사 앞에 놓아 도치할 때 쓰는 말투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어서 간 곳 “去”를 찾아서(尋討) 사실 증거를 확인하여야(看) 한다고 보는 것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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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희의 승심(勝心) 비판
잠깐 주자가 후배 학자와 후학을 상대하면서 나타냈던 못된 습성을 비판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주자 『문집』 권47-48에 실린 여조검(呂祖儉, 字子約)과 주고받은 서신 수십 통을 읽어보면 주희가 이 구절(你怎生信得及?你但去尋討看!)에서 生과 去 두 글자를 무시하듯이 건너뛰었습니다. 주희는 20대에 사량좌 어록을 깊이 읽으면서 북송 성리학에 입문하였고 30살에 3편을 정리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주희 일생에서 가장 이른 최초의 출판물입니다. 주희는 나중에 다시 교정하여 3권을 출판하였습니다. 주희가 이 구절을 건너뛰고 소홀히 여겼다는 것은 주희도 북송 시기 어록을 읽는 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희는 사량좌가 넓은 인품을 갖고 후학을 너그럽게 가르쳐주어 계발(啓發)하는 태도를 배우지도 닮지도 못하였습니다. 사량좌는 북송 말기 휘종 연간(建中靖國)에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이 격화하였을 때 구법당(사마광, 소식, 정이천) 편에 서서 휘종 황제에게 신법을 반대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평민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사량좌는 갑자기 평민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희가 61살(1191)에 쓴 「사량좌 사당기(「德安府應城縣上蔡謝先生祠記」)」에서 “사량좌 선생은 마음을 넓게 갖고 조금도 꺾이지 않으셨다.(處之浩然,未嘗少挫)”고 찬양하였습니다. 주희가 늙어서야 사량좌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사량좌를 계승하겠다는 학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뒤에는 계승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요.
주희는 사량좌 어록을 공부하여 성리학에 입문하였으나 이정(二程) 문인들이 불교와 도교에 빠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정이천처럼 불교를 몹시 싫어하고 배척하는 강력한 입장을 가졌습니다. 정이천 문인들은 소동파(蘇軾, 1037-1101)가 1084년(元豐 七年)에 좌천되어 지방 균주(筠州)로 갔을 때부터 불교에 빠졌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균주로 좌천된 사람은 소동파 아우 소철(蘇轍, 1039-1112)이고 소동파가 이 해에 아우를 만나러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이천을 계승하려던 주희는 남송 초기에 붐이 일어 크게 유행하였던 소학(蘇學)을 배척하였습니다. 주희가 불교를 배척한 태도를 보면 요즘 말로 “나는 무엇무엇이 그냥 싫어요!”와 같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정명도를 계승하였다는 사량좌 학술을 더욱 배척하였고 나아가 여조겸(呂祖謙)과 장식(張栻)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들 문집마저 갖다가 주희 마음대로 교정하고 육상산은 아예 내다 버렸습니다. 이렇다 보니 주희가 여조검을 어떻게 상대하였는지는 뻔합니다.
주희 문집 48권(丁未年)에 실린 여조검과 주희 두 사람의 서신 20통과 47권에 실린 28통 서신을 읽어보면 여조검(1146-1200,1198)이 먼저 어떤 견해를 주장하면 주희(1130-1200)가 겉으로는 동의하고 칭찬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의 표현에서 작은 꼬투리와 트집을 잡아 기어코 후배 학자 여조검을 꺾었습니다. 다시 말해 1187년(丁未年, 주희 58살, 여조검 41살)에 주희가 여조검 견해를 보고 당황하다가 꼬투리를 잡은 뒤에 자신의 생각을 조금 넣어 설명하거나 반대하였습니다. 주희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지 않고 사량좌의 견해는 불교의 주장이라고 억지로 몰아붙인 곳(卷四十七,「答吕子約」(九)︰“溺於釋氏處多”)이 많습니다. 이것은 요즘 연예계에서 돌아다니는 “줏어 먹는다”는 말에 어울립니다. 물론 모든 학자가 반드시 새로운 견해를 창조하여야 하고 남들의 견해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조검도 주희의 강압적인 설명과 설득을 듣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주희에게 반발하고 주희가 오히려 여조겸을 모른다고 비난하였습니다.(卷四十八,「答吕子約」(六)(丁未十一月二七日)︰“子約頗訝熹書中語太峻。”“又有‘權術’及‘伯恭〔呂祖謙〕心迹未明’等語。”) 따라서 여조검도 주희에게 더 이상 묻거나 어떤 견해를 건의하는 서신을 보내지 않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주희는 여조검이 계승하려는 사량좌와 정명도의 어록을 들어 공부는 이렇게 하여야 하느니 마느니(一箇大頭腦 ; 只於此静坐處尋討) 온갖 어록을 들어 화를 내면서 여조검을 쥐잡듯이 잡아 끝내 여름의 벌레(하루살이) 또는 우물 안에 개구리(夏蟲井蛙)라고 욕하여 굴복시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희는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요즘 말로 주희가 사량좌와 정명도의 어록을 들어 여조검을 돌려쳐서 넘어뜨렸습니다. 여조검이 아직 젊어서(41살) 말발이 딸리고 학술 이해의 범위도 주희보다 좁은 까닭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배 학자로서 주희는 여조검이 마음에서는 말하고 싶은데 입이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속의 뜻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고 설득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晦庵先生朱文公文集』,卷四十八,「答吕子約」(八)︰
若只於此静坐處尋討,卻恐不免正心助長之病,或又失之,則一蹴而墮於釋子之見矣,亦可戒也。
此又是一種功夫,直是要人虛心平氣,本文之下,打疊交空蕩蕩地,不要留一字。
先儒舊說,莫問他是何人所說,所尊所親,所憎所惡,一切莫問,而唯本文本意是求,則聖賢之指得矣。
若於此處先有私主,便爲所蔽而不得其正,此夏蟲井蛙所以卒見笑於大方之家也。
卷四十八,「答吕子約」(九)︰
(呂祖儉曰︰)(朱熹)誨諭“工夫,且要得見一箇大頭腦,便於操舍間有用力處。
(呂祖儉曰︰)(朱熹)誨諭謂“只於静坐處尋討,卻恐不免助長之病,或又失之,則一蹴而墮於釋氏之見”。
某(呂祖儉)自顧渙散之久,近稍收拾,粗有静養工夫。然工夫淺薄,客慮猶多,雖未至便有此病,然亦豈敢不常自警省也。
兼亦自覺未墮釋氏之見者,蓋釋氏是從空處求,吾儒是自實處見。
(朱熹答︰)
此正如明道所說扶醉人語,不溺於虛無空寂,即淪於紛擾支離矣。
사실상 주희는 처음부터 여조검의 견해와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하였습니다. 결과는 비록 주희 자신도 60살 이후 또는 70살 가까이에는 자신의 일생 공부가 틀렸다고 한탄하였답니다. 그러나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상대방 학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입니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주희가 만년에 그토록 후회하였다면 자신이 편집하여 출판한 서적들을 불태워 세상에 남기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출판 업자들이 출판하여 널리 보급된 뒤인데 불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명나라 여러 학자가 주희의 만년 정론(晩年 定論)이 무엇이라고 고증하였겠습니까?
주희가 1187년(丁未年, 주희 58살, 여조검 41살)에 여조검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권48)에서는 욕하고 저주하는데 뒤 끝이 작열하였습니다. “너는 앞뒤를 재느라고(정명도 사량좌 두 학자의 견해와 정이천 견해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다, 여조검이 실제로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잡념이 아주 많다. 그래서 이런 사심과 잡념이 우거진 숲처럼 네 마음을 꽉 막았고 덩굴처럼 칭칭 감았다.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도 속 시원하게(明快)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결론 영역에 들어가서(直截) 본체를 깨달을 수 없다(.瞻前顧後,頭緒太多,所以胸次爲此等叢雜壅塞𦆑繞,不能得明快直截)”고 저주하고 “처음 입학하여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를 외우고 믿는 신입생만도 못 하다(反不得如新學後生)”고 욕하였습니다.
서신에서 뒤로 갈수록 폭탄을 퍼붓듯이 저주하였습니다. “수많은 욕심과 잡념이 너를 괴롭히니 학문의 길에서 낭패(狼狽) 짐승처럼 이 사람 저 사람(사량좌 또는 정이천) 눈치만 보다가(狼狽道途) 늙은 40대 나이(여조검 41살)에 들어섰는데(日暮程遙) 결국에는 너의 큰 형님 여조겸(1137-1181, 44살 사망)처럼 아무런 결론(歸宿)도 얻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亦且免得如此支離紛擾,狼狽道途,日暮程遙,無所歸宿也)”고 퍼부었습니다. 60살 환갑을 바라보는 주희는 40살 갓 넘긴 젊은 학자가 열심히 강학하면서 얻은 견해를 여쭈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저주하고 욕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말로 말하면 정말로 꼰대입니다. 주희도 70살 세상을 떠날 때는 늙은이가 젊은 며느리를 건드렸네 마네 하는 험담도 나왔고, 주희도 세상이 나를 욕하겠다면 나도 대꾸하지 않고 아무런 변명도 늘어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는지 많은 비난을 그냥 놔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희의 못된 성질은 남송 초기에도 이어진 신법당과 구법당의 극심한 당쟁 또 주전파와 주화파의 당쟁이 격렬하였다는 시대 상황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희가 조금만 일찍 너그럽게 생각하여 후배 학자들에게 따듯하게 말하고 후학을 가르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더구나 사량좌 학생들이 주희에게 靜坐하여 大頭腦를 깨달으시라고 여러 차례 진지하게 건의하였건만 모두 불교의 주장이라고 물리쳤습니다. 나중에는 주희 학술이 본체에서 멀리 떨어져서 지리(支離)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주희의 수많은 제자는 모두 고만고만하고 큰 학자는 나오지 못하였답니다. 아쉽습니다. 조선시기 성리학자들 가운데 양송(兩宋) 시기의 당쟁을 배웠는지 온갖 사화(士禍)를 일으켜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학술이거나 공부이거나 내가 누구를 이겨서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과 몸에 있는 병(病)을 고치고 여유로우면 남의 병도 고쳐주어야겠지요. 주자학을 배우되 결코 주희의 못된 성질까지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길게 쓰고 과격한 곳도 있습니다.
시간이 나시는 대로 천천히 보시거나 중간부터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한국 한문학을 넘어 중국 고문(古文)과 백화(白話)를 익히셔서 한중 전통학술에 관한 학문이 넓고 깊고 높아지시길 바랍니다.
이경룡 올림

첫댓글 선생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먼저 백화체를 해득하지 못해 '주자어류총람'을 부여안고 씨름하는 저에게 중국어와 백화신문을 자주접하라는 충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상채선생어록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네 가지 조언은 저에게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비단 상채선생 어록 뿐만아니라, 이정으로부터 상채, 남전, 주자에 이르기 까지 당시 학자들간의 대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이 가운데'先生祭享鬼神則甚'라는 이 문구는 현재 제가 읽고 있는'중용혹문'에서는 '先王祭享鬼神則甚'으로 되어 있는데. 제생각에 이는 이 '중용혹문'이 주자의 작품일뿐만 아니라, 조선중기 규장각에서 편찬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미세하나마 연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무튼 자세한 선생님의 설명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저에 매우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성두 올림
*앞서 소개드린 위사라는 이름은 저의 자입니다. 무뢰합을 해량바랍니다.*
학자와도인의차이
대장경이학자
이성두 선생님께
저희 몇몇 사람들이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강화읍 숭조회관 2층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시간 내셔서 연락 주시고 오시면
저녁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경룡 올림
kllee95@hanmail.net
고맙습니다.
저는 너무 먼 곳에 있어 참석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경남 양산입니다.
이성두 선생님 안녕하세요^ ^
선생님께서 글을 주신 덕분에
제가 며칠 동안 여러 글을 열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올여름 양산이 무척 덥다고 뉴스에서 봤습니다.
건강하시고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부산과 대구에는 유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또 유식 불교를 연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들과 함께하셔서 좋은 성취 이루시길 바랍니다.
송대 이정(二程) 선생께서 당쟁의 곡절을 겪으시면서 공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주자(朱子)께서도 부지런하시고 꼼꼼하시고 세상을 걱정하시면서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조선에서는 퇴계 선생님과 율곡 선생님 두 분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 선생과 일제 이항 선생 두 분께서도 열심히 공부하시고 세상을 걱정하셨습니다.
학술의 시비와 득실을 의론하면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겠으나
옛날 어르신들께서 살아가신 행실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집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량좌 선생은 중요한 학자입니다.
홍콩과 대만 또 중국의 철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진 것을 몇십 년 되지 않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모습이 많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경룡 올림
감사합니다. 자주 좋은 말씀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성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