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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호 목사(영암교회)
한 부인이 갑자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자 간절한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40년을 더 살 것이라는 응답을 주셨고 하나님의 응답대로 금방 회복되자 신이 난 부인은 퇴원도 미루고 성형외과에 찾아가서 얼굴을 전부 고쳤는데 퇴원하는 날 부인은 그만 병원 앞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숨지고 말았습니다.너무 황당한 부인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항변합니다.“하나님,제게 40년의 삶을 더 주시지 않았습니까?”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아이고,얘야.네 얼굴이 완전히 바뀌는 바람에 내가 너를 몰라봤다.”물론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속담에 “프라이팬에서 뛰어나와 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변화를 했더니 더 나빠졌다는 의미입니다.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인준을 받으며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대하여 피로감과 염증을 느끼면 변화를 원하게 됩니다.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원하기 때문에,억압된 삶에서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삭막한 사회에서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부정과 불의한 세계에서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기 때문에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변화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께서는 부름 받은 우리 성도들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고 고난당할 때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고,우리 앞에 변화의 역사를 이룩하여 주셨으나 이런 변화는 매우 천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단번에 우리가 기대한 대로 완전하게 자유나 사랑이나 평화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게 되며,하나의 변화를 거치면서 또 다른 변화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데이렇게 우리는 작은 변화를 거치면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변화를 거치면서 성장함 없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오늘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나 자신과 세계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노력함 없이 저절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끊임없이 자신의 거듭남과 사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할 때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나는 변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서 예언은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시므로 이룩될 변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 할 것입니다.
1절‘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입니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입니다.’
7절‘사막이 변하여 강물이 흐르는 기름진 평야가 된다’는 것은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죽음이 지배하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변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자연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사람에게서 일어날 변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입니다.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말을 못하던 사람들이 보고 듣고 노래하게 될 것이며 다리를 절던 사람이 뛰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인간의 온전치 못함이 극복되어 온전하게 될 것을 뜻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퇴화되었던 영적인 감각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뵈오며 그 음성을 듣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이런 모든 변화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이 기적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사막이 변하여 기름진 평야가 된다는 것은 극에서 극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가 아닙니다.물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순간적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우리 인간들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점진적인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거기에 적응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마침내는 사막이 기름진 평야가 되게 하시겠지만,우리와 더불어 천천히 기적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변화의 방향입니다.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막과 같은 환경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기름진 땅으로 변화를 시키기고 죽음이 지배하는 땅을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우리 인간의 삶은 낡아지는 삶이며 소비하고 파괴하는 삶인데 반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망가뜨린 세계를 새롭게 하시며 온전케 하십니다.
우리는 기름진 땅을 사막으로 만들어 가는데 반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막을 기름진 땅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환경뿐 아니라 정신세계나 영의 세계까지도 사막화시킨다는 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습니다.도덕적 황폐함은 세계를 거짓과 불의로 가득 채우며,무자비한 전쟁을 통하여 살육(殺戮)을 밥먹듯 저지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飢餓)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려 하지 않을 만큼 우리 세계는 정신적으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우리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며 그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지만,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고,그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그것은 사람들의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웠기 때문입니다.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어 달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눈 먼 자들과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며,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한낱 말장난에 그치는 약속이 아님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병 고치는 기적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 이루실 미래의 큰 역사를 조금 보여주신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오실 당시 유대 땅에 살던 몇몇 병자만 고쳐주시기 위해서 그가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 감각이 퇴화된 인간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그 눈과 귀가 멀어 이 역사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과 욕망을 좇아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뜻을 받들어 변화를 간구하며 기다리면 사막화된 역사를 조금씩 변화시켜서 백합화가 피는 동산,강물이 흐르는 기름진 평야가 되게 하십니다.비록 더디고 힘들더라도 인내로 기다리면 마침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길
하나님께서 사막과 같은 이 땅에 임재하시면 그것이 변하여 꽃동산이 될 뿐 아니라 거기에'거룩한 길'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큰 길이 생길 것이니,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거룩한 길'이란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의 역사를 이루신 궁극적인 목적은 이 세계를 모두 그에게로 이끌어 그의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기에 '거룩한 길'을 만드시고 그 길로 만물들이 그에게로 나오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거룩한 길'생명의 길을 놓으셔서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막혔던 것들을 모두 없애고 거기에 거룩한 길을 뚫으셨습니다.예수께서 만드신 거룩한 길이란 생명의 길,진리의 길,사랑의 길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있는 곳,사랑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리며 길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9절)
거룩한 길에는 사자나 사나운 짐승들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사나운 짐승들은 곧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발동되면 우리는 정말 사나운 짐승처럼 돌변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증오와 적개심,불의와 거짓,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이 묻혀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거룩한 길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한 길은 바로 내 마음 속에 만들어지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적개심을 버리고 사랑을 품으면 너와 나 사이에 막혔던 길이 열리게 됩니다.내가 불의한 마음을 버리고 정직함을 품으면 거기에 거룩한 길이 생겨나고 그 길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깨끗하지 못한 자나 악한 자나 어리석은 자가 그 거룩한 길로 다닐 수 없는 것은 그들 속에 죄의 지뢰가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거듭남으로 그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죄악을 없애버릴 때 비로소 사막은 점차 꽃동산으로 변하고 거기에 사랑과 정의,진리와 평화가 자리 잡으면서 거룩한 길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곳곳에 무서운 증오와 불신의 지뢰가 깔려있다는 사실입니다.지역 갈등을 부추기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기 정치적 입지를 세우려는 정치인들 때문에 이 조그만 땅이 동서로 나뉘어 서로 불신하고 증오하였습니다.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체화되었고,성령께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도 이 말씀대로 역사가 발전하며 변화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밝아진 눈과 귀로 이 역사의 진행을 올바로 분별하면서 사막을 꽃이 피는 동산으로 변화시켜 가야 하겠습니다.
희망/예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막 4:31).
가장 작은 씨가 땅에 묻혀 큰 나무로 성장하여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합니다는 비유입다.모든 씨 중에 가장 작다는 열등감,땅속에 묻히는 괴로움,햇볕에 타고 바람에 시달리며 때로는 차가운 눈속에 덮이지만 겨자씨의 희망은 큰 나무로 성장하는 데 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사는 크리스찬들은 이 작은 겨자씨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희망속에서 기쁨으로 변하고,그들의 괴로움은 이 소망 속에서 감사로 변합니다.이 희망이야말로 우리 생애를 맡겨 볼만한 위대한 결정입니다.뜻하지 않은 변화,생각지 못했던 사건,대인관계나 혹은 살아가는 환경과 역사에 나타나는 큰 변화와 혹은 고통스러운 체험은 역풍처럼 우리를 덮치지만 우리는 그 역풍 중에 걸어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예수께서 역풍과 심한 풍랑 속에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기적 이야기라기보다는 더 깊이 있는 신앙의 해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막 6:47-48).
성경은 무척 인상적인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풍 속에 나타난 시간이 새벽 4시였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뚜렷하게 밝혔을까요?새벽 4시라고 하는 시간에 대한 명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새벽 4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아침이 밝아오는 소망의 시간이고 흑암의 밤중과 광명의 아침의 경계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실제로 역풍 속에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모습을 보이신 새벽 4시는 희망의 시간이었고 구원의 시간이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새벽 4시까지 미루어졌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파도와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 자신도 인내로써 새벽 4시까지 기다리셨고 믿음의 인내를 제자들에게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밤이 어둡고 너무 길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새벽 4시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기에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슬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희망이란 두 자가 위대한 것은 당신의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산소 공급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데 허무와 무의미라는 정신적 마비를 가져오기에 희망의 공급만이 행복을 향하여 새 출발하게 합니다.희망은 사랑에 의해 생기고 사랑은 희망에 의해 키워집니다.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이 움트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더 사랑하게 됩니다.사랑하는 자의 그 빛난 얼굴은 희망의 샘이 솟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희망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그러지지 않고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고후 4:8-9)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지금 당신 속에 계십니다.그러니 용기와 희망을 가지십시오.
한 해는 봄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루는 아침으로부터 시작하며 아침은 7시로부터 시작합니다.
앞날에 대한 강한 희망만큼 인간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없는데 기운이 없고 좌절한 인간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소망의 농도가 엷은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낙관적인 인생관을 갖는 것인데 비관적인 문턱을 넘어 복이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높은 신조를 갖는 것입니다.
욕심의 철학이 아니라 꿈의 철학을 갖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돌파구를 찾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의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거짓의 일시적인 성공을 보고도 허무해지지 않도록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 위에 확고히 서는 것입니다.
자기의 할 사명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희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큰 것을 보는 것이고 큰 목적을 위하여 작은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며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넘어진 것이 잘못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기 못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고 폭풍은 폭풍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의 흥쇠를 내부적인 원인으로 분석하였다.세계 문명 21개 중 19개의 쇠망이 내부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즉 전쟁과 같은 외부적인 파괴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 등의 타락상에 의해 문명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특히 한 문명이 쇠퇴하기 시작할 때는 사람들의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는 정신적 쇠퇴가 선행했다고 합니다.
희망을 잃게 되면 가정도 사회도 문명까지도 기울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너그러움이 곧 기다림이라면 우리도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하나님의 시간,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때를 인내로써 기다리는 것이 소위 성경이 말하는 신앙인의 소망입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사람만이 그 산을 오르는 어려움과 기쁨과 요령과 방법을 알게 됩니다.
산 밑에서 갑론을박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유익이 안 되고 공동체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기쁨을 주는 사람/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 주어야지,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데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사랑을 받습니다.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먼저 찌푸린 얼굴을 거두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값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의 언어-생명의 언어
1939년 9월 1일,아돌프 히틀러는 폴란드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는데 히틀러의 이 한마디는 온 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에 몰아넣으며 제 2차 대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이후로 수천만 명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인류는 유사 이래 최대의 공포를 맛봐야만 했습니다.
성경에“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 10:11) 했습니다.사람의 입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샘이 되기도 하고,죽음과 파괴와 신음소리를 만드는 독을 내어놓기도 합니다.죽음의 언어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파괴시켜 고통과 절망을 주는 말이요,생명의 언어는 기쁨과 소망과 행복을 주는 말입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복잡한 가정 사정 때문에 통 공부에 몰입할 수가 없었는데그러다가 6학년 새 학기가 되어 새로 맡은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오신 선생님은 어머니와 친구들이 서있는 마당에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이놈이,참 똑똑합니다.”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6학년이 되면서 중학진학 문제도 있고 해서 이제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선생님의 이 말씀 한마디가 여름날 다 시들어가던 상추밭에 소낙비가 쏟아진 것처럼 그에게 공부할 수 있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사회나 국어 같은 과목은 통째로 외우고,산수 문제를 풀기 위해 여름밤 뜨거운 백열전등 밑에서 밤12시까지 공부하니성적이 단숨에 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50-60점하던 점수가 80점,90점,100점으로뛰어오르기 시작했고,30-40등 하던 등수가 10등 안쪽으로 옮겨갔고 일류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그때 담임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내게 놀라운 에너지를 준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20여 년을 공부하면서 다른 선생님들의 이름은 거의 다 잊었지만 그분의 이름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언어는 이처럼 메마른 대지에 쏟아지는 소낙비와도 같습니다.
위대한 성공 뒤에 숨은 생명의 언어가 있습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인출신 대통령입니다.그가 군에 있을 때 그의 동료들은 중령으로,대령으로 진급하는데 10년째 소령에서 진급이 되지 않았습니다.10년째 소령에 머물러 있으니 보통 고통이 아니었습니다.가족 보기도 민망하고 정말 살맛이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남편을 둔 대부분의 부인들은,“당신은 도대체 왜 진급을 못해요?다른 사람들은 다 진급하는데.”라고 하기 십상입니다.설령 그런 말은 하지 않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남편을 대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그의 부인도 그런 식으로 남편을 대했더라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아이젠하워의 부인 매미 여사는 언제나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여보 전 당신을 믿어요.진급은 생각하지 말고 교육의 일인자가 되세요.반드시 당신에게 기회가 올 거예요.”아이젠하워는 교육장교였습니다.그는 아내의 말에 힘을 얻어 군사교육을 연구하는데 전념했고 마침내 군에서 인정받는 교육의 일인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고속 승진이 시작되었습니다.중령,대령을 거쳐 별을 달고,해군사령관,미합중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언어는 이같이 위대한 성공을 만들어 냅니다.<행복한 순간, 불행한 순간>인생을 살아오면서 불행했던 순간과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초등학교시절에 본 영화 ‘에덴의 동쪽’의 주인공 제임스 딘처럼 어머니가 사는 곳을 찾아다니던 일이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내 나이 7살 때 헤어지는 바람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된 나는 어머니를 찾아 종종 집을 나섰습니다.어머니는 어느 날 먼 도시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나는 영화 속의 제임스 딘처럼 열차난간에 매달려서 먼 도시로 어머니를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만나면 제일 먼저“밥 먹었나?” 하고 걱정스럽게 물으며 정성껏 밥을 지어주시던 생각이 지금도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방학 때 시골 할머니 집에 가서“할머니!” 하고 부르면, 할머니가 뛰쳐나오며 “우리 아가! 왔나?” 하고 반기던 순간,그리고 딸아이가 어버이날에 선물한 “아빠,사랑해요”라는 메시지가 적힌 작은쪽지는 지금도 성경책 속에 소중히 끼워져서 아빠에게 종종 행복을 선물해주고 항상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의 고백은 목회자의 인생에 또 하나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이다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누가 나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기 때문에 행복한 것보다도 주님의 말씀,주님의 음성이 더욱 나를 행복하게 하고 감격스럽게 만들어줍니다.행복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행복을 만들어준 말이 있습니다.그 말 속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말로 받은 상처의 고통 다윗은 시편 64편 3절에서“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여 독한 말로 겨누었다”며 자기를 향한 독한 말들을 괴로워했습니다.
욥도 욥기 8장 2절에서 자기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친구를 향해“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 같겠는가”라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신음했습니다.다윗은 왕이 되지 못하고 쫓겨 다니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욥도 집을 잃고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은 것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았고 친구들의 비난과 사람들의 정죄 때문에 고통하고 신음했던 것입니다.죽음의 언어는 고통과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모로코 속담에,“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더 깊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하면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기쁨도 말에서 온다/
기쁨도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옵니다.
성경에 보면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그 위로의 말을 기뻐하더라”(행 15:23-31)고 했으며,“사람은그 입의 대답(말)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잠 15:23),“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잠 18: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 만족을 얻고 평안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얻는 기쁨보다 사람들의 말로 인해 얻는 기쁨이 더 큰 기쁨입니다.
마음의 병도 말에서 옵니다.
현대사회는 내적 치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모든 사람의 마음이 상처받고 병들어 내적 치유가 필요한 세상입니다.이 마음의 병도 바로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에서 옵니다.우리는 말 때문에 마음이 병드는 것이지 가난해서 병들지는 않습니다.사람의 마음이 병들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병리 현상들이 나타납니다.두려움,불안,초조,분노,우울,절망,신경과민,자기비하,부끄러움,열등감,자기방어,불신,죄책감,결벽증,거짓말,방탕,자포자기,교만,파괴 심리,책임전가,피해의식,부정적 자아상,무기력증 등등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증후군들이 나타납니다.
무슨 말 때문에 이런 병든 마음이 생길까요?
바로 죽음의 언어가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You 메시지’,사실언어,입술언어,폐쇄적 언어,직접언어 등 이런 죽음의 언어 때문입니다.
특히 서구사람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언어를 많이 듣고 살아가기 때문에 더욱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20세기 최고의 경영자로 제너럴 일렉트릭 CEO 잭웰치 회장이 있는데 이 분은제너럴 일렉트리 CEO를 21년 역임을 했고 20세기 최고의 경영자로 포춘 잡지에 소개 되었는데이 분은 어릴 때 말을 아주 잘 더듬어서 친구들에게 언제나 놀림을 받았지지만 그를 이렇게 유대한 인물로 변화시킨 것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은 대중연설을 잘 하지만 어렸을 때는 말을 많이 더듬었었고 저의 의견을 잘 표현할 수 없어서 곤란한 일을 종종 당했어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야단치지 않고 너무 너무 똑똑해서 말을 더듬는 거란다.너처럼 똑똑한 아이는.혀가 머리를 미처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지요.너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란다"라고 찬하듯 위로하며 격려해 주었어요.게으름을 피울 때면 지름길은 없단다.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라는 지혜로 스스로 할 수 있게 하였어요.
보세요.어머니의 격려의 말""믿음을 심어주는 말"이 그 자녀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너는 너무 똑똑해서,머리가 너무 앞서니까 말이 못 따라 오는거야.사실 안 그렇거든요.머리가 시키는 대로 말이 하게 되어있지 머리가 너무 앞질러서 말이 못 따라가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까어린 잭 웰치는 아,그렇구나.내가 너무 똑똑해서 그렇구나.그래서 말더듬는 것을 넘어 섰고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실 때 참된 행복과 성공은 나의 삶에 축복의 말씀으로"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아십니까?.
고슴도치 부부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깊게 포옹을 하였는데 그순간 두 고슴도치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다시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외로워서 지난날의 상처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다시 만났는데 역시 서로의 날카로운 침이 상대의 여리고 부드러운 맨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고 둘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서로 감싸주며 사랑하며 존중하는 가운데 행복한 공동에를 만들도록 행복하게 지으셨는데 사람들이 타락하면서 갖가지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우리가 입은 마음의 상처들은 두 가지로 기능합니다.그것은 자신에게 아주 나약하고 여리고 건드리기만 하면 고통스러운 부분들을 만들어 냅니다.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취약한 부분이 많아져서 조금만 건드려도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고 우리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날카로운 침이 되어서 만나는 사람들을 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하셨으나 타락한 인간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고슴도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위에 부부가 고슴도치 부부가 된 이유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입은 상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상처 입은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의 상처를 치료하기는커녕 서로의 상처를 더 깊게 더 깊게 만들고 있으니 어떻게 그들 부부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행복이 찾아올 수 있을까요?상처들은 자기의 법대로 움직입니다.
마음의 상처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일단 상처가 생겨나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자율성을 가집니다.그 상처들은 사람들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의 법대로 움직이기에 사람들이 그 상처를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상처를 없이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상처들이 자기의 법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상처의 법을 먼저 알아야 그 상처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상처의 법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상처는 한 번 받으면 그것이 치유되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고 우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상처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라나다가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나오면서 그 때마다 그 상처는 자라납니다.속에 숨겨진 마음의 상처들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와서 그들 부부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는 점점 커져갑니다.
☛2)상처는 우리에게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 가버린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맞아서 그것을 즐기려고 할 때마다 우리 속에 숨어 있던 상처들은 틈새를 비집고 나타나서 오늘의 행복을 빼앗아 가버리고 즐거움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3)상처는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상처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침을 만들어 준다.그 침이 상대방과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고 아픔을 만들어 버린다.상처 입은 마음은 불안과 열등감,자존감의 상처,두려움과 자기방어의 벽,자신감의 상실,불신과 혼란등을 만들어 낸다. 런 감정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들며,두려워하게 만들며,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고,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주 피상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은 상처 입기 쉬운 취약한 점들이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조금만 건드려도 참지 못하고 아파하고 폭발하고 괴로워합니다.
☛4)마음의 상처는 마음에만 남아 있지 않고 우리의 몸에 영향을 주며,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에게도 영향을 주며,심지어는 가정과 후손들에게까지 흘러가고 그 사람의 전 인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어떤 결단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그래서 상처의 사람은 술 취한 사람이 술의 지배를 받듯이 상처에 지배를 받아서 상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그에게 아무리 천하를 뒤덮을 만한 지식이 있고 사려 깊은 인격이 있다고 할지라도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 때문에 자기의 진정성 있는 인격은 숨어 버리고 상처의 인격이 그를 지배합니다.그래서 그의 신체적인 생활이나 영적인 생활이나 인간관계나 또는 가정생활이 상처의 흔적을 가지게 되며 이것은 가족 식구들에게 뿐 아니라 후손에게도 유전됩니다.
☛5)마음 한 구석에 생긴 상처는 우리의 마음판 전체를 깨뜨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깨어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 전체가 깨어진 것 같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상처가 생기면 우리의 마음은 그곳으로 집중이 되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잡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나와 너와 세상을 는데 그러면 나도 너도 세상도 깨어진 세상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들 생에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타인을 기쁘게 해줄 때 내 자신은 기쁘고,타인을 괴롭게 하면내 자신도 괴롭습니다.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고 감정은 인간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안에 자란다고 합니다.내 자신이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배려하고 베풀어야 합니다.나누고 베풀고 아낀다면 그 사람 무덤의 비석에는 ‘한세상 즐겁고 재미있게 살다가다’ 라고 하지 않으까요?진정한 사랑이란 하나를 주었을때 몇 개가 돌아올까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베풀 수 있는 진정한 부자란 많이 가진 사람보다 많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의 부자라고 생각합니다.항상 사랑하고 감사하며 칭찬하하면 내 마음이 행복하고 편안함이 옵니다.
긍정적인 사고가 바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고
칭찬하는 사람은 나부터 즐겁고 신이 난다.칭찬도 습관과 불만도 습관 어느 것이 쉬울까.칭찬하면 내 마음이 즐겁고 불평하면 내부터 더 더 마음이 불안하고 불행해집니다.우선 우리칭찬이 훨씬 쉽지 않을까?미움도 사랑으로 다 덮고 감쌀 수 있기를 노력해야겠습니다.
뛰어봤자 벼룩!
벼룩을 연구하던 박사님이 벼룩 한 마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더니 벼룩이 갑자기 튀어 올랐습니다.벼룩은 자신의 키보다 수백 배나 점프를 하여 거의 3m를 튀는 것이었습니다.이번에는 여러 마리의 벼룩을 30cm 의 투명 유리관 안에 넣고 뒤집었습니다.탁!벼룩들이 튀어 올라 유리관에 머리 부디치는 소리가 마치 콩 볶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벼룩들은 변함없이 튀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벼룩들이 안 것이지요.더 튀어 오르다간 머리가 깨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딱 29cm 만 점프를 하는 것입니다.박사님이 유리관을 치웠는데도 벼룩들은 29cm 이상은 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벼룩들은 3미터 이상 총알처럼 튀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자리에서 톡톡거리고 있었습니다.정말 튀어봤자 벼룩입니다.박사님이 벼룩들을 모아다가 알콜램프로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 위에 내려놓았습니다.그랬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톡톡거리던 벼룩들이 "아이고매! 벼룩이 디지네 "하면서 순식간에 다시 3미터 점프를 해서 다 도망쳐버리는 것이었습니다.벼룩들은 불에 타 죽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통이 깨지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은 뭘 해도 안 된다며 보이지 않는 유리관 높이 만큼 밖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뜨거운 맛(?)보기 전에 얼른 깨달아야 합니다.머리통이 깨지더라도 더 힘껏 뛰어 보십시오
/.사랑이란 상대방의 좋은 면을 보는 것/
우리는 사랑을 좋아함이나 낭만적인 느낌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시선을 바꾸는 능력입니다.더 나아가서 사랑이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능력입니다.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합니다.장점만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또한 허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장점 때문에 좋아하지만 우리는 단점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언 17:9)
아름다움도 자란다.
아름다움도 자라는데 스스로 가꾸어야자라납니다.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진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혼탁한 도시 공기 속에서도 자기 아름다움을 하루하루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은,본인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큰기쁨과 행복이 됩니다.자란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고 그 안에 생명력이 있음을 뜻합니다.죽거나 병들어 있으면 자라지 못합니다.아름다움이 자라나면 당연히,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됩니다.자기만의 향기,너그러움과 따뜻함,지성,겸손,인내,절제,용기,넉넉함.아름다움이 자라나 맺는 열매들입니다.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거듭한다.긍정적으로도 바뀌고 부정적으로도 바뀐다.그래서 한 사람을 고정된 시선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편협한 일입니다.학창시절에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친구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기도 하고,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친구가 조기에 몰락해 버리는 일도 흔합니다.사람은 그렇게 바뀔 수 있는데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소명을 받은 이후 초기에 제대로 사역을 감당치 못했습니다.웃시야의 몰락기에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지도력 부재의 사람이었으나 훗날에는 국가를 몰락의 위기에서 건져내는 탁월한 지도력의 선지자로 탈바꿈했는데무엇이 그를 바뀌게 한 것일까요?막연한 세월이나 자리,지위가 그를 변화시킨 것은 결코 아니고 실망과 혼돈의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진귀한 은혜를 경험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눈을 감고 오직 눈을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욥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미국의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Longfellow)가 휴지에 시를 썼더니, 이것이 6,000 달러에 팔렸습니다.휴지에 문학성이 가미(加味)된 결과입니다.한국 정부의 도장이 종이조각에 찍히는 순간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1만원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종이조각에 정부 보증이 가미된 결과입니다.마찬가지로,아무런 가치가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엄청난 가치를 가진 자로 돌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황홀하다.
다하라 요네꼬라고 하는 일본 여성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난 그녀는 고등학교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혼자서 살아가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두 다리와 왼팔이 잘리고, 오른팔만 남게 되었는데,그것도 손가락 두 개는 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비참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이제는 그 불편한 몸으로 죽음마저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극도의 절망감속에서 몸부림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학생이 병원으로 병문안을 왔는데 여러 번에 걸쳐서 요네꼬를 위하여 기도하였고,그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요네꼬 사모가 “산다는 것은 황홀하다”는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두 다리가 없고,한쪽 팔도 없고,남은 한 손마저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는 여인이,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장애인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정말이지 그녀의 이러한 고백은 우리 멀쩡한 사람들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지 모릅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건강한 육신과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감사할 줄도 모르고,또 늘 주님의 보호하심과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이제 남은 세월 희망과 행복을 노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