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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8:1-5 인자들아 : 칼빈
이 시편은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초에서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자기에게 퍼붓는 그 비방은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다음에 다윗은 오히려 자기는 성실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다윗은 악인들이 자기에게 입힌 심한 상처와 그들의 잔인함을 제시합니다.
또 다음에 다윗은 반역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다윗은 그 악인들이 마땅히 멸망을 받도록 기도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다윗의 믹담, 멸하지 마소서, 지휘자 를 따라 부른 노래 - 칼빈)
1. 본문 1절은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너희 회중들아 너희가 참으로 공의를 말하느뇨 너희 인생들아 너희 가 정직하게 판단하느뇨 - 칼빈)” 입니다.
도전을 하려고 자기의 원수들을 향하여 이 질문을 하면서 다윗은 양심의 결백으로부터 나오는 담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감동시키려 할 때 우리 주장에 대한 공정성은 확정적으로 분명해집니다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가질 만한 근거가 있을 때, 적이 증언하는 것을 도전하는 것만으로는 명확하지 못한 확신을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성실성 때문에 마음이 든든해져 솔직하게 나서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용하여 너무도 단순하여 자기들을 믿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품위를 더럽혔던 비열한 혐의들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치 ‘너희는 너희 자신들이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근거없는 비방을 하면서 나를 핍박하고 있다. 너희는 그러한 천하고 이유없는 억압적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느냐?’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먼저 다윗이 여기서 나무라는 자들이 누군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회중’ 또는 ‘인생들’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칼빈).
시편 58 편
‘회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אלם(엘렘)을 어떤 이들은 ‘공의’를 꾸미는 형용사로 보고 ‘말없는’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 시인이 말하려는 내용을 표명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주석가들은 ‘회중’이란 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에 관해 견해를 달리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공동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악한 계획들을 세우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그의 원수들이 갖는 모임을 비난하는 식으로 다윗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다윗이 여기서 사울의 모사들에게(비록 예의를 갖출 때만 그렇게 하지만) 붙여주는 흔히 쓰던 존칭을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택하고 싶습니다. 사울의 모사들은 말로는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논의하려고 모인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윗을 죽이려는 의도 외에는 다른 것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말을 ‘회중에서’라고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번역은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이 문장의 구조에 잘 맞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회중은 사울이 소집한 모임입니다.
겉은 합법한 목적으로 모이지만 실제는 죄 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인생들아’(칼빈)라는 말은 다윗이 즉시 그들을 향하여 다시 한 말입니다.
그런데 마치 방금 말한 예의를 갖춘 말을 취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성격을 멸시하여 한 말 같습니다.
그들은 공정한 판단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공공연한 강도들의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갖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씀에 있어서 다윗은 자기를 대항하는 -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악한 무리의 편을 들었었다 - 그 대적들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다윗은 여기서 그 원수 무리들을 향하여 도량이 넓은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온 세상이 대항하여 온다 할지라도 자신은 결백하다는 든든한 자신만 갖고 있다면 왕들과 그들의 모사들과 잡다한 사람들의 무리가 도전하더라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 세계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아 착한 양심의 증거와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해 호소함으로 충분히 안심해야 됩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만을 갖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이 구절에 이끌려 한 미묘한 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시편 58 편
‘사람들에 의한 판단은 일반적 원칙들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게 될 때 일반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사람들의 열정에 의한 맹목적이고 비뚤어진 영향을 받고 특별한 경우에다 이 일반적 원칙들을 적용시키게 되면 엄청난 실패를 하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칭찬할 만하고 그 자체는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이 지닌 의미를 완전히 곡해한 이론입니다.
2. 본문 2절은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 주는도다” 입니다.
앞 절에서 다윗은 그들이 그 행위 중에 보여준 심한 철면피를 원망스럽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그들이 생각중에 악을 즐기고 손으로 그것을 실행한다고 비난합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로 히브리어 불변화사 אף(압) 을 ‘오히려’ 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에 의한 비방을 우선 물리치고 난 후에 한걸음 더 나가서 그들이 몸소 범한 죄악을 책망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본 절의 하반절은 두가 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손으로 강포를 저울에 달고 있도다’ 혹은 ‘너희 손은 강포를 저울에 달고 있도다’ 인데 그 의미는 같기 때문에 신자가 어느 것을 택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저울에 단다’는 비유적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마치 다윗이 평화를 어지럽히고 왕에게 반역과 명을 어긴 죄를 지은 것처럼 구실삼아 다윗을 핍박한 그 거짓 공평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다윗의 원수들은 그럴듯한 구실로 자기들의 억압행위를 둘러댈 것입니다.
마치 위선자들이 숨기는 데는 결코 망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פלס(팔라스)는 ‘골격을 짜다’, ‘정돈하다’와 같이 그 의미가 넓습니다.
또 이 말은 그들이 첫째로 머릿속에서 궁리했던 죄악을 형상으로 만들어 냈음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악독이 거침없이 방자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악은 은밀하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습니다.
3. 본문 3절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기질과 환경이 나쁨을 설명하면서 그들은 최근에 범죄한 죄인들이 아니라 죄악을 범하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58 편
우리는 경박한 마음 때문에 나쁜 본을 보고 또는 욕정에 끌리거나 이와 비슷한 경우로 인하여 악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이 그 형편에 처하지만 않았다면 그들이 그토록 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모태로부터 악에 젖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그들의 반역과 잔인성은 선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로 더러워지고 아담의 후예로 본질적 부패 성질을 갖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선한 어떤 것을 실행하려는 의도를 갖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죄악 중에 끝없이 진행하는 행위를 억제해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절제력이 있습니다.
원죄의 오점은 예외 없이 온 인류 누구에게나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며 어떤 이들은 밖으로 보이는 품행이 겸양과 관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이들은 악하고 어떤 이들은 또한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을 만큼 그 기질이 부패되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다윗이 그의 원수들을 가리켜 말한 그들의 악은 바로 이 엄청난 악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패되어 있는데 부패된 그 인간들 중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심히 두드러진 악이 그들의 악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악의 괴수들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4. 본문 4-5절은 “(4)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같으니 (5)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입니다.
다윗은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적대행위처럼 그 사나움을 주장했어도 좋았겠지만 다윗은 다른 성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들은 원한에 찬 독을 지닌 본성을 가졌다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저희의 격노는’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여기서 그들이 뱀에 비교되고 있는 이 비유에는 맞지 않습니다.
‘열(熱)’이라는 말로부터 나온 이 말의 어원학에 근거하여 선택된 우리의 번역에 관하여 반대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독은 냉기(冷氣)를 일으켜 생명을 죽이고, 어떤 독은 뜨거운 열을 일으켜 생명체의 주요 부분을 태워버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구절에서 뱀에는 독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그의 원수들에게도 극심한 악의가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편 58 편
그들의 더할 나위없는 교활함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다윗은 그들을 술사의 소리에도 귀를 막아버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 뱀들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뱀은 보통 뱀이 아니라 간교하기로 이름난 종류이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온갖 술책에도 듣지 않으려고 경계하고 있는 뱀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술(方術)이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방술이란 것이 없고 우리는 다윗이 일반적으로 인정은 받으나 그런 것이 없는 그러한 견해를 들어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으로 비유를 만들어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하게 보일 것입니다.
다윗은 뱀들이 방술에 따라 마법에 걸릴 수 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도 아무 손해가 없다고 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태리의 마르시(Marsi)가 이 술법에 뛰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술법이 없었다면 그것들이 율법에 의하여 금지되고 정죄될 필요는 없지 않았겠는가?(신18:11).
우리는 매혹을 일으키는 실제적인 방법이나 기술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자기의 말씀과 영으로 깨달은 성도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믿음이 없고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행위만은 허락하시는데 이 술책은 단순히 사단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말한 적이 있는 그 견해를 택함으로서 그와 같은 기묘한 온갖 질문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당시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이 비유를 끌어내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뱀이라도 심지어(만일 그러한 종류가 있다면) 방술에 대항하여 자체를 지키는 뱀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원수들만큼 간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었습니다.
시편 58 편
시58:6-9 하나님이여
다윗은 극도로 불의한 지도자들의 죄악을 이 시편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그 지도자들도 사울의 수종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가 얼마나 불의하였던 사실이 1-6절에 묘사(描寫)되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장 천벌(天罰)을 받을만큼 극도에 달한 불의(不義)였던 것입니다(1-9).
그들의 죄악이 이렇게 극도에 달했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기다려 보실 필요조차도 없이, 곧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로서 그들의 멸망이 급격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6-9).
1. 본문 6-7절은 “(6)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 금니를 꺾어내시며
(7)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같게 하시며”입니다.
이 구절에서부터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화를 내시도록 기도합니다.
또 다윗은 압제를 없애고 죄없이 상처를 받은 자들을 옹호해 주시는 특이한 권한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수를 갚아주시도록 애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어떤 의도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자기의 정직함을 주장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에 찬 행위에 불만을 말합니다.
셋째로 다윗은 자기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후원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변호할 가치가 없는 사건을 맡으신다고 결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꺾어 그들의 격노와 폭력을 제지시키도록 기도합니다.
‘이’ 라는 말로 다윗은 그들이 그 압제를 당하는 자들을 찢고 파멸하고자 하는 욕망은 들짐승들을 닮았음을 암시합니다.
이 내용은 다윗이 그들을 ‘사자’에 비교한 하반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비교는 그들이 다윗을 멸망시키고자 애쓰는 그 격노를 의미합니다.
이후 몇 절에서 다윗은 적절한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동일한 의도를 진행시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들을 “물같이(재빨리) 사라지게” 해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 다윗의 믿음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58 편
다윗의 원수들은 병력과 무장을 갖추어 눈앞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세력이 깊이 뿌리를 박아 확고한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자기를 대적하고 있었고 자기 앞에 어찌할 수 없는 무서운 돌산의 장벽처럼 일어설 것 같았습니다.
견고하고 거대한 대적이 녹아 없어지게 기도한 것은 큰 다윗의 용기를 입증합니다.
이 기도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을 중간에 끼여든 온갖 장애물을 위로끌어올리기를 익힌 사람들에게만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곧이어 말하는 비유에서 다윗는 원수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도록 기도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활을 당길 때 살이 부러지듯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한 잔인성으로 충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계획을 혼란시키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다윗의 흔들림 없는 용기를 칭찬합니다.
다윗의 용기는 그의 원수들에 의한 대단한 준비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들의 세력 전부는 하나님의 발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기게 해주었습니다.
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다윗이 보여준 모범을 우리는 염두에 두도록 합시다.
우리는 우리 원수들의 화살이 시위에 메겨지고 멸망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더라도 기도를 중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본문 8절은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입니다.
본 절에 나타난 두 개의 비유는 처음 것과 같은 의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말없이 사라지고 본래의 성질을 따라 급히 소멸되는 것을 증명해 보였으면 하는 다윗의 소원을 표명합니다.
다윗은 그들을 달팽이에 비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은 가장 힘쎈 대적을 순식간에 손쉽게 분쇄하여 멸절시키신다고 인정하고 있음을 우리가 생각지 않으면 힘과 영향력에서 만만치 않은 사람들에 관해 말하면서 그처럼 보잘것없는 것을 비유로 들어 말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자기들의 계획을 먼 미래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들의 헛된 확신 속에 스스로 격려하는 그런 종류의 것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 잠깐만 지속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아마 악한 자들이 일어나 권세를 잡는데 신속함을 암시할 것입니다.
시편 58 편
또 그들의 멸망은 그만큼 신속하고 예상하지 않은 때에 임할 것을 그들이 생각하게 해서 그처럼 쉽고 형통하게 되므로 갖게 되기 쉬운 교만을 꺾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유산된 자’에 비교되는 비유 역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들이 허황된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한 그들의 생명의 시간적 길이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생존하기도 전에 이 세상에서 떠나갈 것이며 완전한 생명체가 되기 전에 무생명의 세계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본문 9절은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주의 도가니가 가시나무 불을 느끼기도 전에 주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아직 설익은 고기처럼 저를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 칼빈)” 입니다.
문장 구조가 단순치 못하고 단어에 두 의미가 있어서 분명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סידות(씨로트)는 ‘솥’ 또는 ‘가시나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의미를 택한다면 이 구절은 ‘너의 솥들이 가시나무들에 의하여 불붙여진 그 불로 데워지기 전에’라는 번역이 되고 두번째 의미를 택한다면 ‘너의 가시나무들이 덤불로 자라나기 전에’ 즉 키가 충분히 크고 굵어지기 전이란 번역이 됩니다 첫 번째 의미를 따라서 우리가 ‘생것의’ 라고 번역한 말은 두 번째 의미를 따르면 ‘유연한’ 또한 ‘아직 다 자라지 않은’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서 이 시인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원수들에게 내리실 그 심판이 빠르게 임할 것을 말합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마치 가시나무가 무성한 수풀로 자라는 것처럼 충분히 힘을 쓸 수 있게 모두 자라기 전에 또는 가마솥 안에서 익은 고기처럼 성숙하고 쓸 수 있게 되기 전에 회오리바람으로 그들을 휩쓸어 가시도록 기도합니다.
두 번째 의미가 이 구절의 의미를 매우 쉽게 알도록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 의미란 회오리바람 같은 분노에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쓸어 가시되 솥의 고기가 불의 열기를 채 받기 전 아직 생것으로 있을 때 꺼내는 것처럼 신속히 하신다 입니다.
시편 58 편
시58:10-11 의인은
다윗은 극도로 악한 자들이 멸망을 받음에 대하여, 의인(義人)들은 기뻐할 것과 및 모든 사람들은 깨달음이 있게 될 것을 말합니다(10, 11).
그러나 이따금 그것을 명백히 깨달으리만큼 일이 발생됩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죄를 쌓아 극도에 이르게 된 자가 특별한 심판을 받게 되는 사건들입니다.
1. 본문 10절은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입니다.
여기서 의인들이 가지게 된다는 감정은 얼른 보기에는 그들의 성격이 되어야 하는 자비와 일치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성구에서 거듭 말했던 것같이 의인들이 가지게 된다고 다윗이 말 하는 그 감정은 성령에 의해 순결하고 잘 조정된 종류의 것임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믿는 이들이 성령의 조명 및 감화와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불합리한 점이란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원수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잔인한 만족감은 심한 보복의 욕망을 일으키는 증오와 분노와 조급함에 의한 거룩치 못한 격정의 소치입니다 부패된 마음이 작용하는 한 바르고 용납될 만한 행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보응의 정당함에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거룩한 열의에 따라 움직일 때는 악한 자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그들이 돌이켜 구원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력하고 거짓이 없는 것만큼 순결합니다.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하는 수단이 헛되게 되고 그러한 가혹한 행위를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비난으로 여기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자신이 자비롭다 하더라도 엄중한 심판을 내리지 못하시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의인들은 자기 원수들이 회개하기를 안타깝게 바라며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손상을 당하면서도 많은 참을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완고한 고집이 마침내 보응받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개인적 안전에 관심을 갖고 게신 사실을 입증하시면서 그 고집에 보응하시는 것을 보고 의인들이 기뻐할 것은 당연합니다.
시편 58 편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자기 원수들의 박해행위를 벌하지 않고 눈감아 주시는 것은 그성도들을 슬프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 악인들에게 내리실 때에 어찌 의인들이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 본문 11절은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말씀으로부터 성도들이 가지는 기쁨에는 나쁜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나 원인에 관한 다른 증거를 얻습니다.
다윗은 위에서 다만 의인들만이 가졌다고 말한 그 감정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씀의 전개 방식에서 그 증거는 보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관찰하는 눈을 가진 성도들만이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곧 이어진 말씀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은 ‘사람의 말이’라는 표현이 암시하고 있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식의 말씀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믿음 안에 확고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의인에 관하여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수를 말하는 데는 확정적인 말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중에 분명히 평탄치 않고 난처한 일이 생기면 믿음이 쉽게 흔들리게 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며, 심판을 나타내실 때 하나님의 팔이 명백하게 나타나면 실제로 용기를 내어 생각들을 완전히 바꿀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는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이 구절에서는 광범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가 선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26:9).
우리가 ‘진실로’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불변화사 אך(아크)는 때때로 단순한 긍정을 의미하기도 하나 주로 강렬한 긍정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연기하실 때 우리가 갖기 쉬운 불신앙과 심판을 내리실 때 우리가 갖게 되는 확신과는 대조를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안에서 반복되는 이 불변화사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지 않고 참고 계실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음 속에 스며들기 쉬운 그 우유부단함을 내버리고 자기들이 유혹받아 끌려들어간 그 과오를 스스로 고칠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 58 편
의인이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는 심오하고 확실한 신념보다 경건한 마음을 더욱 증진시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도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사3:10)라고 말했습니다.
의로운 행위가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믿음이 없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다스리지 않고 물러나셨고 세계의 관심사에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제73편을 설명할 때 상세하게 논하겠습니다.
본 절에는 의로운 사람이 경건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심판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전제한다면 하나님께서 조만간에 선과 악을 분간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더욱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통치는 하늘에만 한정되어 있고 이 세상의 일들은 맹목적인 우연에 맡겨져 있다고 불경스럽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