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수선화가 마침내 꽃잎을 열었다. 두 송이가 나란히 고개를 내밀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다. 예쁜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 보라고 화분을 베란다 창밖에 내놓고 보니 밖을 내려다보는 쫑긋한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연신 입이 벙글거린다.
수선화는 주로 노란색이나 흰색 꽃이 피는데, 우리 집 수선화는 연분홍 색 꽃이다.
처음 꽃 봉오리가 올라올 때 연분홍색이라 적잖이 놀라며 사전을 찾아보니 수선화란다. 무슨 수선화란 특정한 종명은 적혀있지 않다.
꽃집을 하는 친구가 몇 해 전 아주 귀한 꽃이라며 화분 하나를 주었다. 해가 가도 꽃이 피지 않아 일조량이 부족해서일까. 통풍이 잘, 되지 않아서일까. 꽃이 피지 않는 것에 대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꽃이 필까? 하는 궁리 끝에 베란다에서 거실 여기저기 따뜻한 곳으로 옮겨놓으며 꽃을 얻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해마다 알뿌리 하나씩 늘리는 것 같더니 드디어 올여름에 꽃대를 올려 두 송이를 피웠다.
딸과 아들이 학업으로 서울로 떠난 뒤 건강가정 지원센터를 찾았다. 작은 일이 나마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건강가정 지원센터를 통해 만난 어린이는, 유치원생이다. 아이의 부모는 이혼하고 아빠와 형과 함께 산다. 형과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다. 아빠는 늘 야근이고, 형과는 주말이 되어서야 낮에 함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주중에 두세 번 유치원 마치는 시간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말하자면 부모를 대신해서 밥이나 간식을 챙겨 먹이고, 한글과 숫자 공부, 독서 습관 들이기, 여러 가지 놀이 등 다양한 학습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또 혼자 두면 유해 한 사회 환경으로부터 유혹, 사고 등에 쉽게 노출되고 이를 조절하기 어려운 시기이므로 일상의 놀이나 취미 활동을 함께 함으로써 위험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진다.
방과 후 돌봄 지도는 결손 가정이나 어려운 가정을 대상으로 나라에서 만든 일종의 아동보호 교육체계의 한 형태다. 요즘에는 맞벌이 부부와 결손 가정이 많아서 이 제도를 활용하는 가정이 많다.
내가 가는 시간이 되면 아이는 가방을 메고 유치원 밖에서 기다린다. 그러다 나를 보면 달려와 내 품에 와락 안기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손을 잡고 마구 흔들며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유치원에 있었던 일들을 쫑알쫑알 얘기한다.
골목길 중간쯤에 있는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나를 의자에 앉아 있으라며 내게 가방을 맡기고 친구들과 미끄럼, 시소, 그네 타기 등을 하며 신나게 놀이한다.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가자고 손을 내민다. 딴에는 엄마가 없는 집에 일찍 가기 싫은 것이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재밌게 노는 동안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의 가방을 열어보고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들춰본다. 무엇을 배웠는지 준비물이 무엇인지 등을 챙겨 보며 시간을 함께 보낸다. 또 그네와 시소도 같이 타며 부모가 해줄 수 없는 체험 활동이나 놀이를 함께한다. 그렇게 정서적 지원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내 임무다.
아이는 친구들과 놀다가도 시선을 내게 두고 가끔 달려와 입을 맞춘다. 제게도 엄마 같은 보호자가 있다는 걸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은지 은근히 으스대는 눈빛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처음에 내가 낯설고 또 엄마 아닌 사람이 집에 오는 게 싫어서 나를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리곤 했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물어보지 마세요, 공부 안 하고 오락 할래요” 하며 오락기를 놓지 않는다.
아이가 어느새 많이 달라졌다. 언제 또 오냐고 묻기도 하고 한글 공부, 숫자 공부를 스스로 하겠다며 “선생님, 지금 해요, 미루면 안 돼요. 오늘은 동화책을 3권 읽어주세요” 하는 식으로 변했다.
밥을 먹을 때도 ‘선생님, 맛있는 것 드세요“ 하며 맛있는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내 입에 쏙 널어주기도 한다. 그럴 때 ”고마워“하며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면 내 품에 찰싹 달라붙어 안기며 어리광을 부린다. 아이는 처음에 나를 보고 싶지 않은 사이에서 어느새 나를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 사랑한다는 서툰 글과 사랑 표를 찍어 내게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아이는 종종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싶을 때가 있나 보다. 가끔 졸음이 오면 같이 자자며 손을 잡고 이불을 당기며 내 몸에 제 살을 부빈다. 작은 가슴 안에 따뜻하고 예쁜 엄마를 그려놓고 날마다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고, 엄마한테 떼쓰고 싶고, 갖고 싶은 것 사 달라 하고 싶을까. 지금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어떤 엄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아이 곁을 떠날 것이다. 마치 그 시간을 예감이라도 하듯 “선생님, 내일 또 오세요. 꼭이예요.” 하며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어 약속하는 모습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베란다 수선화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요리조리 한껏 폼 을 내는 모습을 보며 물을 듬뿍 주면서, 보드라운 꽃잎에 입을 맞춘다. 아이에게 사랑의 손길이 계속 뻗쳐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유치원 창밖에서 가방을 메고 나를 기다리고 서 있을 아이의 초롱한 눈빛이 떠올라 서둘러 집을 나선다.
첫댓글 참으로 좋은 일 하십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부디 건강하시어 좋은 글도 좋은 일도 많이 많이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