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는 몽고족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인 고려후기 사회의 시대적 아픔을 온몸 으로 느끼면서 살다 간 장흥출신의 승려이다
충지의 속성은 위(魏)씨이며 속명은 원개(元凱)이다. 1244년(고종31)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한림 (翰林)에 이르렀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으며 문체가 원숙하고 뛰어나 당시 선비들이 탄복 하였다 한다. 그러나 충지는 어릴적부터 속세를 떠날 뜻을 두고 관직 생 활을 하는 중 몽고에 반기를 든 최씨 무인정권의 항몽으로 강화로 수도 를 옮기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정부를 유지하 기 위한 과중한 조세 부담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안은 암담한 현실을 보 고 개인의 역량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여 출 가를 결심하였다.
충지는 선원사 원오국사(禪源寺 圓悟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법명 을 법환(法桓)이라고 하다가 충지(沖止)로 고쳤으며 법호를 복암노인(宓庵老人)이라 하였다.
1266년(원종7) 김해현 감로사(甘露寺) 주지로 있다가 원오국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조계종 제 6세가 되었다. 원(元)나라 세조의 요청으로 북 경에 가서 세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금란가사(金欄袈裟)·벽수장삼(碧繡長衫)·백불자(白佛子) 등을 선사 받았다. 서로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松)이 전한다
국사가 세수(世壽) 67세, 법랍(法臘) 39세로 세상을 뜨자 충열왕이 시호를 보명(寶明)이라 하였 원감국사의 탑은 송광사 감로암에 있으며, 장흥에는 그의 형제들이 줄곧 장원으로 통과하자 그 형제가 살았던 마을 뒤(장흥경찰서 뒤) 높은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