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에는 '도봉동문'이 송시열 꺼라는 신화 류와 도봉서원 등의 정사(正史)가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뒤안길 그늘진 어느 어름에 전설과 야담(野談)이 없을 수 없다.
등산박물관은 대중의 환호 또는 8000m의 성취 대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그들에 주목한다
오늘은 부봉재의 짝 인봉재에 관한 이야기 한토막이다.
부봉재에 관한 글을 쓰자 그게 인연의 실마리가 되어 '도봉만필(한솜, 2011)이 눈에 들어왔다.
코리아헤럴드 원장을 지낸 저자 표재두는 1981년 도봉산자락으로 이사와서 30여년간 2천2백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일년에 70여회라니. 대단한 애정이다. 그런만큼 도봉산에 관한 그의 기억은 상당히 디테일할 거라 짐작한다.
책에는 "차(茶)문화의 산실, 이조다실(李朝茶室)이라는 제목으로 부봉재와 인봉재를 그려내고 있다.
전문은 하단에 싣고 중요부분을 우선 언급해 본다.
여기서 새로운 팩트가 등장한다. 첫번째, 철거 시기가 2009년가 되겠다. 책을 펴내기 불과 2년 전의 일이니 아마 그의 기억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단층목조 두 채가 있었는데, 나는 건물 하나는 부봉재에 부속된 줄로 알고 있었는데, 또다른 건물의 당호가 인봉재(仁峰齋)라는 걸 보면, 결국 두채의 사랑채였다고 보아야겠다.
*2006년 7월 24일 사진출처
그러니까 이른바 이조다실이라고 하는 이곳의 동선은 이렇다.
이렇게 단정한 대문을 들어서면,
나름 조경을 한 수석 뒤에 부봉재가 역시 단정하게 서 있다.
조금 더 위쪽으로 건물 한채가 있으니 저게 바로 인봉재가 되겠다.
건물의 규모나 형태가 부봉재처럼 독립한 사랑채(?) 였을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2006년 당시 부봉재보다 더 상태가 안좋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이는 '본채 부봉재'에 이어 이 건물은 '별채'라고만 하고 있는데, 당호가 인봉재임을 이제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강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 부봉재와 인봉재 중 어느 것이 윗자리에 놓였을까.
(2) 부봉재와 인봉재는 언제적 붙여진 이름일까.
(3) 부봉재와 인봉재는 과연 가능한 명명방식인가.
1) 인봉재와 부봉재 중에 두말할 것 없이 어질 인(仁)이 들어가있는 인봉재가 더 형님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인봉재와 부봉재의 대강을 다시 보자. 어느 건물이 더 멋있어 보이는지.
2) 염치를 좋아했던 당시 시대상황상 부(富)를 아무리 강렬하게 욕망했다고 하더라도 당호에 드러내놓고 '감히' 부(富)를 넣었으려나. 부봉재와 인봉재는 그래서 1960년 이곳으로 옮기면서새롭게 붙여진 이름일거라 짐작한다.
3) 한문에 문외한이라서 그렇긴 한데, 부(富)와 인(仁)은 세트로 놓여질 단어가 아니라고 본다. 채근담의 유명한 문구 '저쪽에서 富를 내세우면 나는 仁을 내세울 것이요, 저쪽에서 벼슬을 내세우면 나는 義를 높이 치켜 올릴 것이다.'를 볼지어도 인과 부는 서로 대척점에 놓고 본 시대였다.
부봉재 옆에는 이렇게 작지만 폭포의 모습을 갖춘 계곡이 있어 관폭(觀瀑)을 할 수 있었다. 공터에 대충 옮긴 건 아닐 것이다. 하여 내 짐작은 이렇다. 1960년 이곳으로 옮기면서 후손들은 비용문제를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자 주변에서 풍수학적으로 보아 재물복이 있는 터이거나 또는 삼정승을 지낸 권돈인의 이전작업은 후손들에게 부를 가져 올 거라고 설득하며 '부봉재'라는 당호를 권하지 않았을까 싶다.
"70년대 이곳을 지날 때면 '적선지가 필유여경'(선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이란 글 외 몇구절이 적힌 주련이 있어 과연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방문이 열린 날 고서가 몇권 놓여 있어 빈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80년대 중반 이후는 집이 비어 있는 날이 대부분이고 점점 가옥이 퇴락하기 시작했다."
사랑채는 부엌이 없기 쉬울텐데, 따라서 이곳에서 살림을 하고 살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게다가 부봉재의 주인은 도봉산을 찾은 이들과 서로 교류를 하지 않았음도 짐작하게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서재'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러나 재(齋)는 뜻에 '재계할 재'가 있듯이, 학문의 즐거움이 아니라 종교적 근엄성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서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훨씬 후에야 이곳이 '이조다실(李朝茶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조(李朝)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이 별칭은 아무리 빨라도 식민지 시대였을 것이다. 저자가 '이조다실'이라는 건 어디서 알게 되었을까. 혹시 몰라 이병주의 '산을 생각한다'를 찾아보아야겠다. 이병주는 알다시피 북한산 도봉산 매니아였고, 저자는 이병주와 도봉산행도 함께 하고 했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사진조차 몇장 남아있지 않은 터라 "안까운 마음이 들어 복원할 것을 관련기관에 건의한 바도 있었다."라고 한 저자의 마음씀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권돈인은 놀랍게도 권상하의 5대손이다.
권상하는 알다시피 송시열 선생의 수제자이고 도봉서원 앞 무우대 한수옹'이란 암각 글씨를 남겼다.
*사진출처 및 이 글씨에 대해 더 읽으시려면-> 여기를
그러니까 권돈인의 사저 일부를 도봉산에 옮겨온 건, 안동권씨 가문과 도봉산과 오래된 인연이 있어서라는 걸 알게 된다.
도봉산은 북한산과 반열을 같이 한다고들 하는데, 북한산 관련서적이 수십여권이 되는데에 비해 도봉산을 소개하는 책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다행히 도봉산을 30여년간 2000여회나 오르며 맺음말에서 '미운 정 고운 정 사무치는 연인과도 같은 도봉산이다'라고 적고 있는 저자의 책 '도봉만필' 이 선보이면서 체면치레를 한 셈이 되겠다.
* 에세이 전문은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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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30여년간 올랐다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산행추억이 담긴 사진이 없다. 80년대 도봉산을 볼 수 있을텐데 아쉬울 뿐이다. 왜그랬을까 싶어 저자의 말을 읽었더니 조금은 이해된다. 맺음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저자가 조금더 궁금해져 검색을 해보니 이런 내용이 뜬다.
의령군 부림면 여배리 조우분(85) 할머니의 손녀(19·대구광역시)가 최근 2009년도 대학입시에서 고려대학교 화학과에 합격했다. 이 사실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부림면 여배리 마을 입구에 내걸렸다. 조우분 손녀, 표갑두 이명자 장녀 표지영 고려대 화학과 합격. 표재두 표정두 표임두 가족일동.
왜 조 할머니의 이름을 내세웠나. 또 왜 형제 가족일동의 이름으로 현수막을 내걸었나. 재대구 향우 자제의 대학입학 기사처리를 싸고 고민하던 기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조모 및 부모님이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가 이어져 오늘의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자손들이 몸 성하고 번성하는 것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또 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제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또 다른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조 할머니의 큰아들 표재두(68)씨는 기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출처
그리고,
나는 가끔 '등잔 밑이 어둡다' 는 말에 실감한다. 왜냐하면 우리 고향집 바로 앞집에서 태어난 표영인 박사를 생각지 못하여 마을의 역사에 넣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와서 미국 코네티컷대 엠비이에이 과정을 거쳐, 퍼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2년에 강원대 회계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재직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 무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고등학교 등을 거쳐 어려운 독학의 과정을 통해 서울대에 늦게 입학하였다. 평소 앞집의 허후일 형님은 자기 누님의 아들인 표영인 박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대학 졸업식에도 참여한 이야기를 나에게 한 기억이 난다.어렸을 때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저서로는 회계원리라는 책이 유명하고 서울대출판부에서 공저로 낸 회계연습이라는 책도 냈다. 표영인 교수는 함창읍 대조리에 자리한 남계 표연말(1431-1498) 선생의 직계 후손인 셈이다.시골에서는 표실이라 하지 않고 포실이라고 후일 형님의 누님을 그렇게 불렀다.신창표씨는 드문 성씨인데 본관인 신창은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을 지칭한다.
그리고 1941년생인 표재두 씨는 함창고등학교를 나와서 건국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졸업한 언론인이다.최근 도봉만필이라는 수필집을 내었다.2013년 6월 15일에 전화가 와서 표재두 선생과 통화를 하였다. 다음 주 토요일 6월 22일 오후6시경에 인사동 수도약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재경상주시향우회' 카페에 이런 글이 뜨오른다. 글투가 눈에 너무 익어 글쓴이를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허철회 박사(宰岳山人 許喆會(銀尺) 이다. 오래전에 등산서적을 찾아 무림을 표표히 쏘다닐때, 어느 고서점에서 주인과 나누는 대화를 한나절 가까이 엿들은 적이 있다. 대화의 소재와 방식이 그 이전에 한번도 듣도보도 못했다. 그들의 대화에 혹해서 한국고서연구회에 두어번 나간 적이 있었다. 기인이사들의 모임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