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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離別의 雙頭馬車
설화린은 잠이 들었다.
꿈도 없고 다만 어둠 뿐이었다.
이따금 눈을 뜨면 연민에 찬 청지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으면 또 잠이 왔다. 잠은 익숙한 안락의자와 같았다.
모든 것을 그는 다 잊었다.
어머니의 정갈하게 쪽진 머리도, 행자방의 아이들도,
번뜩이면서 자신의 뒤통수에 떨어지던 몽둥이도 잊었다.
단지 한 가지 생각이 났다.
눈(雪)처럼 흰 피부, 서늘한 눈빛, 새벽 풀잎과도 같은 정갈한 목소리의 청지, 바로 그녀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가지런한 치아를 있는대로 다 드러내 보이며 소년처럼 웃고 있었다.
그녀가 웃으면 신기하게도 방울소리가 났다.
눈내리는 한 밤을 가볍게 달려가는 여리고 쾌청한 방울소리.
"오빠, 여기가 어딘지 알아?"
"글쎄?"
"알아 맞춰 봐."
"천국(天國)이 아닐까?"
"천국? 호호호호호…… 맞았어! 여긴 천국이야."
"번쾌는, 번쾌는 어떻게 됐니?"
"몰라. 그는 보이지도 않았어. 그치만 그는 살아 있을거야."
"그래, 녀석은 살아 있을 거야.
녀석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녀석이니까. 한데 청지야!"
"응?"
"여기가 어디지?"
"악양(岳陽)이야. 동정호가 바로 눈 앞에 있어."
"아, 악양이라구?"
"응! 오빠가 혼절해 있는 동안 내가 마차에 싣고왔어.
오빤 지금까지 사흘동안 줄곧 잠만 잔거야."
(안돼! 항주(杭州)로 가야 해. 행자방의 아이들이 피흘리며 쓰러져간 저 항주로…)
설화린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설화린은 일어서지 못했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방바닥에 차악 달라 붙었다.
"또 아픈거야, 오빠?"
청지가 그의 이마를 짚으며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이 열(熱) 좀 봐!"
"괜찮아."
"괜찮은 게 다 뭐야? 왜 진작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찬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 놓으며 그녀는 말했다.
"오빤 키만 큰 바보야!"
"물수건은 필요없다."
입 안이 타는 듯했다. 설화린은 혀로 자신의 입술에 침을 묻혔다.
"잠을 자고 싶다. 오래…… 오래 자고싶다."
"그럼 잠을 자, 오빠!"
"입술이 자꾸 말라."
"열 때문이야."
그녀가 물 한 모금을 제 입에 물어 설화린에게 건네 주었다.
설화린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둘렀다.
"청지야!"
"응?"
"이상해, 눈 앞에 뭐가 자꾸만 어른거려."
"잠을 자, 오빠. 너무 쉬지 못해서 그래. 모든 걸 잊고 잠을 자."
그녀는 그의 커다란 머리를 자신의 좁은 가슴에 안았다.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머리였다.
끼륵! 끼르르륵…
파도소리에 섞여 갈매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이렇게 영원히 일어설 수 없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면 저 부랑(浮浪)의 길고 긴 강(江)을 더 이상 거슬러 가지 않아도 될텐데…)
잠이 밀려왔다.
절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잠들자 설화린은 비로소 편안하였다.
걷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으므로…
나흘 째 되는 날 오후에야 설화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은 씻은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두 팔을 쭈욱 펴자 우두둑!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됐어!)
설화린은 중얼거렸다. 뭐가 됐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그의 사지(四肢)는 팽팽한 바람을 담고 싱싱하게 깨어났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는 거야.
행자방의 아이들이 비리(非理)의 칼날에 피흘리고 쓰러진 바로 그곳에서부터
내 마지막 싸움을 시작하는 거다!)
설화린은 생각했다.
드르르륵!
창문을 열자 동정호의 백사장이 보였다.
청지의 작은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대해(大海)와도 같은 동정호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동정호의 물결은 햇빛을 받아 고기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물새가 끼륵끼륵 수면을 차고 날았다.
설화린은 창가에 이마를 기댔다.
아름답다. 아무리 잘 그린 수채화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너무 아름다와 설화린은 온몸이 축축한 습기로 젖어드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휘스스스스슷!
바람이 열어젖힌 창문으로 왈칵 밀려 들어왔다.
"청지!"
바람소리처럼 설화린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곧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암울한 그늘이 그의 전신을 무겁게 덮어내렸다.
지난 날 내게 밝은 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네가 준 것이다.
네가 지닌 섬세한 손과 따뜻한 피는
내 온 몸에 쌓인 허망(虛妄)과 절망(絶望)을 씻어낼 수 있으리라 때로는 믿었었다.
그러나 청지야, 그건 처음부터 무리한 소망이었다.
내가 가야될 저 피 냄새나는 강호(江湖)로 너의 어린 육신(肉身)을 끌어 들일 수는 없어.
결국 너는 네게 알맞는 길로, 나는 내게 알맞는 길로 따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별(離別)…
설화린은 마침내 작별을 생각하였다.
아무런 약속도 남길 수 없는 이별,
망각(忘却)의 땅으로 그녀를 태워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검(劍)!
설화린은 청지 몰래 한 자루의 검(劍)을 샀다.
그것은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他人)을 찌르기 위한 것이었다.
……
"오빠, 나 이쁘지?"
"그래, 이쁘다."
"얼만큼?"
"그건 비밀이야."
"말해 줘, 얼만큼 이뻐?"
"하늘 만큼."
"정말?"
"그렇다니까?"
"호호호… 호호호!"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청지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묻어온 것은 알 수 없는 적막과 허전함이었다.
어느새 달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 침잠해 있던 동정호의 물결이 일시에 수근대며 새로 깨어났다.
월광(月光)은 잘디잘게 부서지고 바람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설화린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 밤이다. 내일 이후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설화린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지막 밤인데도 이렇게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게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아아… 하다못해 서투른 마술(魔術)이라도 배워 놓을 걸…
검은 보자기 속에서 꽃과 비둘기를 꺼내 보일 수 있다면 이 앤 얼마나 즐거워 할까.)
"왜그래, 오빠?"
"일어서봐, 청지야!"
설화린은 그녀를 일으켜서 벽에 기대 세웠다.
"내가 네 옷을 벗겨 줄께…"
"전부?"
"응."
"부끄러워서 어떡해?"
"눈을 꼭 감고 있어. 그리고 절대로 말을 하지마."
그녀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얇은 양파껍질을 벗기듯 설화린은 정성스럽게 그녀의 속옷을 벗겨 나갔다.
손바닥 만한 고의를 끄집어 내리자 완전 알몸이었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물이 차 있는 욕조에 내려 놓으니 그녀의 알몸은 수초(水草)처럼 출렁거렸다.
군살도 모자라는 살도 없었다.
작았지만 그녀는 팽팽한 탄력을 피부 밑에 감추고 그 욕조 안에서 한 마리 은어(銀魚)였다.
쏴아--
동정호의 파도가 백사장을 쓸어갔다.
설화린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씻기기 시작했다.
목, 가슴, 겨드랑이, 등과 엉덩이, 아랫배, 다리, 발가락…
발가락 사이를 수건으로 문지를 때 그녀가 약간 몸을 비틀었다.
쌔근쌔근 부끄러움을 절제하는 가쁜 숨소리도 들렸다.
(이제, 다시는 여자의 알몸을 이렇게 샅샅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화린은 자신과 약속하였다.
씻기는 데만 정신을 쏟았으므로 욕망(慾望)은 전혀 끌어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정갈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다 씻긴 그녀를 자리에 누이고서야 그는 자신의 그 정갈한 마음이
사실은 슬픔의 다른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 모친이 슬픔과 기다림을 참기 위하여 밤새 깨끗한 검날을 닦고 또 닦고 했던 것처럼
설화린은 그녀의 맨몸을 닦았던 것이다.
"잠든거야, 오빠?"
한참동안 미동도 않고 있자 청지는 나직이 물었다.
"아니."
"그럼 뭘 생각하고 있어?"
"……"
"오빠, 혹시?"
그의 가슴에 부딪쳐 오며 청지는 똑바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의 잔영(殘影)을 꿰뚫고 눈빛과 눈빛이 만났다.
"오빠, 나를 떼 버릴 작정을 한 건 아니지?"
"……!"
"안돼! 그동안 오빠 마음대로 해 왔으니까, 이젠 내 마음대로 할거야!"
(이 바보야 그건 이미 나 혼자 결정하였다. 넌 결국 내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안돼.)
설화린은 와락 청지를 껴안았다.
채 마르지도 않은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잡혔다.
향긋한 방향(芳香)이 입안 가득 채워져 왔다.
그는 정성을 다해 말조개 같은 그녀의 입을 열고 있었다.
파도가 연거푸 백사장에 밀려와 쓰러져 누웠다.
쑤아아! 쑤아아--!
파도가 비명을 질렀다.
(이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야, 넌 언제까지나 내곁에 있을 순 없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날 떠나야 해.)
설화린은 그녀를 향해 내심 속삭였다.
쏴쑤와와…
모래언덕을 핥고 빠져 나가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설화린은 슬픔처럼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랑해, 청지야 널 사랑해…)
두두두두두…
마차는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청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아픈 설화린을 돌보느라 그녀는 사실 나흘 밤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설화린은 가슴에 손을 넣었다.
순간 섬칫한 느낌이 손에 잡혔다.
비단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차가운 그것은 바로 청지 몰래 사 두었던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설화린은 검날을 지그시 쥐어 보았다.
날은 잘 서 있었고 손바닥은 그 날의 예리함을 있는 대로 다 감지해 들였다.
설화린은 속삭였다.
네가 지금부터 나를 도와야 한다.
나의 계획은 공야발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비행(非行)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법(法)이 그를 단죄(斷罪)하지 못하면 이 세상이 그를 단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를 단죄하지 못하면 그땐 내가 할 것이다.
그 일을 내가 하는 거야…
설화린은 그렇게 믿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안위(安危)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마차는 광활한 벌판을 향해 달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
항주(杭州)가 가까와질 수록
청지와의 작별에 대한 만감이 그의 피를 자꾸 서늘하게 깨우고 있었다.
"오빠 안자?"
때때로 눈을 뜨며 청지는 묻곤 했다.
"응, 나도 자."
"이상하네… 자꾸 잠이 와."
그러면서 그녀는 설화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쌔근쌔근 숨소
리까지 내면서 다시 잠 속에 빠져 들곤 했다.
마차는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산과, 강과, 벌판과 마을을 지나갔다.
설화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청지! 어떻게 이 애와 작별할 것인가?)
그의 조바심은 항주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 때문이 아닌 청지와의 이별 때문이었다.
설화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맨손으로 적을 향해 출정(出征)하는 것보다, 공야발을 깨뜨리는 것보다
그녀와의 작별이 더 어렵다는 것을 설화린은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녀가 잠든 사이에 마차에서 내려 버리면 어떨까?)
설화린은 그 생각이 비교적 마음에 들었다.
이제 항주는 얼마남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품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청지… 넌 나에게 빛나는 희망이었다. 너에게 절망을 남겨놓지 않기 위해 이렇게 떠나는거야.
다시는 넌 날 볼 수 없을거야. 널 영원히 잊지 않을께…>
설화린은 거기까지 적었다.
가슴은 벌써부터 썰물이었다. 뭔가 꼭 해야할 말이 있는 듯한데 그것이 뭐였는지 아물아물 했다.
멀리 항주의 한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설화린은 종이쪽지를 집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어깨에 기대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밀어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그녀가 한두 차례 입맛을 다셨다.
(안녕, 청지야…)
그녀의 얼굴을 가슴에 새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설화린은 한동안 잠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설화린은 어금니를 사려물고 등을 돌렸다.
"내가 내리거든 이 마차를 돌려 온 길로 다시 가주시오. 전속력으로."
그는 마부(馬夫)에게 은자를 듬뿍 쥐어 주었다.
그가 내리자 마차는 곧 방향을 바꾸더니 전속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잘가… 청지야!)
설화린은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오래 그곳에 서 있었다.
휘우우우웅…
매서운 바람이 한 차례 그의 빈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됐다! 이제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
그래 내 마지막 승부(勝負)는 저 항주에 있다.
가자! 저 비정(非情)한 거리로 나는 다시 입성(入城)하는 것이다."
그는 지나가는 마차를 잡았다.
마부는 그를 태우자마자 투덜거렸다.
"젠장할 항주엔 될 수 있는대로 들어가지 마쇼!"
"아니, 왜요?"
"난리가 났소, 난리가."
"난리라니 무슨 말씀이오?"
"아, 글쎄, 번쾌라는 자가 계월루(桂月樓)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지 뭐요?"
"계월루?"
오오, 계월루라면 바로 묵련의 패거리들이 몰려있는 곳이 아닌가?
"아, 글쎄 그자가 그곳에서 인질극(人質劇)을 벌이고 있다지 뭐요."
"번쾌!"
"항주는 완전히 난리예요.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될려는지, 원…"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눈 앞에 번쾌의 살기띤 얼굴이 명백하게 보였다.
"빨리! 빨리 갑시다!"
설화린은 악을 쓰듯 소리쳤다.
마차는 항주를 향해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짜식들! 날 우습게 보지 마! 야! 차수, 너 말야!"
차수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너, 그 옆에 있는 고양이를 이리로 보내."
전과 달리 번쾌는 여러자루의 비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중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거꾸로 잡았다.
고양이가 왔다.
번쾌는 다짜고짜 고양이를 힘껏 걷어찼다.
고양이는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잽싸게 뒤로 도망쳤다.
그 순간,
쉭!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비수가 번쾌의 손을 떠났다.
캬옹!
비명소리는 단 한 번 뿐이었다.
칼 끝은 움직이는 고양이의 목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일시에 핏기가 걷혔다.
"봤지?"
칼을 뽑아 바지가랑이에 피를 닦으며 번쾌는 소리없이 웃었다.
"어느 놈이고 섣부른 짓 하면 고양이 꼴이 될 줄 알아!"
삼층(三層).
계월루의 삼 층에 자리한 주루 안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번쾌가 구석으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탁자를 쌓아 공간을 차단시킨 것이다.
줄잡아 삼십여 명쯤 될까?
도수악과 그의 수하 오륙 명쯤, 십여 명의 기녀(妓女),
그리고 나머지는 술을 마시다가 재수없이 걸려든 주객(酒客)들이었다.
인질들은 지치고 초조한 얼굴로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거나 탁자 위에 엎드린 채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번쾌와 시선이 마주쳤다가 재수없게 곤욕을 치르거나
심한 경우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계월루를 점거한 지 꼭 하룻째, 밖에는 수백 명의 관군(官軍)과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사실 관군 쪽에서 볼 때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상대는 단 한 명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힘으로 밀어붙여 상황을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군들이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번쾌의 수중에 폭약(爆藥)이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계월루에 들어선 번쾌는 우선 도수악의 목에 칼을 들이댐으로써
묵련의 패거리들을 꼼짝 못하도록 옭아 매는 데 성공했다.
번쾌의 기습작전에 그들은 어이없게도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당한 셈이었다.
원래 번쾌의 목적은 공야발이었으나, 그는 이미 감쪽같이 빠져 나가고 없었다.
번쾌는 할 수 없이 관군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공야발을 올려 보내면 인질을 풀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관군은 그러나 번쾌의 협상에 응해주지 않았다.
끈질기고 지루한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그동안 번쾌는 도수악에게 공야발의 행방을 물었으나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다그치고 위협해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모른다는 것이었다.
"짜식! 정말 모른단 말이지?"
번쾌는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음식은 얼마든지 있었으나 문제는 잠이었다.
이러한 상태로 이틀만 더 지나면 잠이 번쾌를 죽일 것이다.
(여기서 끝장을 내야 해!)
번쾌는 그렇게 생각했다.
"도수악! 다시 묻겠다. 공야발은 어디있나?"
"몰라.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죽일 놈!"
번쾌는 도수악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 찼다.
"우욱!"
"좋아! 이번에야말로 따끔하게 혼내주지!"
소리없이 번쾌는 이를 드러냈다. 살기가 쫘아악 돋았다.
그때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들으라! 공야발이 왔다!
관군은 이미 그의 비인간적이고도 잔혹한 범죄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인질을 풀어라!"
"먼저 공야발을 올려 보내라!"
"그의 단죄(斷罪)는 관군이 한다! 인질을 풀어주고 어서 내려오라!"
"허튼 수작 말고 공야발이나 올려보내!"
"마지막 경고다! 인질을 풀지 않으면 힘으로 밀고 올라갈 것이다."
"짜식들! 좋아, 어디 올라와 보라구!
만약 네놈들이 한 발짝이라도 계월루로 들어서면 폭약으로 이 계월루를 몽땅 날려 버릴거야!"
번쾌는 악을 썼다. 물론, 그의 수중에 폭약 따위는 없었다.
한데 그때,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번쾌야…"
"……!"
"나 화린이다."
"……!"
"공야발은 여기 있다. 그를 대동하고 올라 가겠다."
"올라오지마. 나 혼자, 혼자 해결하겠어!"
"관군이 허락을 했다. 올라갈테니 비수를 던지지마."
일방적으로 설화린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번쾌는 양손에 비수를 거머쥐고
도수악을 표적이 되게 앞으로 앉혀 놓았다.
문이 그때 열렸다.
"나다, 번쾌!"
처음엔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 다음엔 공야발의 얼굴이 보였고 그의 뒤로 설화린이 들어섰다.
"형!"
"그래, 나다. 번쾌!"
"살아있었구나, 형!"
설화린의 낯익은 모습에 어쩐 일인지 순간 번쾌는 콧날이 시큰해져 왔다.
그러나 설화린도, 번쾌도 이 순간 살아서 다시 만났다는 벅찬 감격에 싸여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공야발과 그의 수하들을 잠깐 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짧은 순간, 공야발의 눈이 번뜩 빛났다.
"도수악, 너는 설가(薛家)놈을 맡아! 나와 아이들은 번쾌를 맡는다!"
공야발의 외침에 패거리들은 설화린과 번쾌를 향해 우르르 달려 들었다.
"위험해, 형!"
신형을 납짝 엎드리며 외친 번쾌의 손에서 비수가 연이어 날았다.
파파파팍!
"와왁!"
"끄으… 흑!"
서너 명의 패거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가슴을 싸쥔 채 나뒹굴었다.
그 순간을 공야발은 놓치지 않았다
.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공야발은 비호같이 번쾌를 향해 돌진해 갔다.
"윽!"
등 뒤에서 기습을 받은 번쾌는 칼을 떨어뜨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콱!
번쾌의 뒤통수를 내리친 공야발의 손이 비수를 잡으려고 앞으로 뻗쳐졌다.
이때 도수악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던 설화린의 시야에 얼핏 공야발의 굽은 등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설화린의 손이 품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순간
허공에 새파란 광채를 눈부시게 뿜어냈다.
파악!
"와와왁!"
도수악이 검붉은 선혈을 뿜어내며 나뒹군 순간
설화린의 검이 또 다시 힘차게 반원을 그었다.
번쩍!
허공에 뇌전 같은 푸른 섬광이 타올랐다.
"억! 헉!"
참혹한 비명소리가 났다.
이 일련의 상황은 모든 것이 돌발적이고도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인지라
설화린과 번쾌 자신도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역한 피비린내와 함께 아연한 침묵이 계속됐다.
"형! 칼솜씨 대단한데."
한참만에 설화린은 번쾌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비로소 마룻바닥에 나뒹구는 도수악의 시신과
공야발의 등에 박힌 자신의 검을 내려다 보았다.
칼이 등에 박힌 공야발은 엎어진 채였다. 피가 마룻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죽었어, 형…"
칼을 뽑을 자세로 번쾌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놔둬."
설화린이 쇳소리를 냈다.
번쾌는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계월루는 관군에 의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이제 모든게 끝났다…"
번쾌는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둘 다 살인자(殺人者)가 되었어. 구원 받을 길은 전혀 없겠는데…
ㅋㅋㅋ, 잡히면 형도 나도 참수형을 당할 거야.
망나니의 손에 의해 형과 나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 감촉 칼날이 스치는 순간의 그 감촉은 어떨까? 형?"
"……"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목련꽃이 무더기로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바라보며 번쾌가 중얼거렸다.
(희디 흰 저 눈 위에 내 피가 뿌려지겠지. 공야발이나 도수악처럼…)
끔찍한 상상이었으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이 순간, 번쾌의 마음은 오히려 눈(雪)처럼 정갈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눈이 와, 형…"
"눈이… 온다구…? 눈이…?"
설화린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살인자라기 보다도, 먼 길을 홀로 걸어온 자의 황막한 표정을 그는 갖고 있었다.
"술 한 잔 어때, 형?"
"……"
씨익 웃으며 다가오는 번쾌의 손엔 어느새 술병이 들려져 있었다.
"……"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어쩌면 살아서는 마지막이 될런지도 모를 술잔이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 순간, 이 세상의 그 어떠한 말로도 서로를 위로할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술자리가 끝나면 그들은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든가, 아니면 개처럼 끌려가 참수형(斬首刑)을 당하든가.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있다면 빈 술잔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절망과 허무,
깊고 깊은 바닷속처럼 농밀한 침묵 뿐이었다.
그렇게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번쾌야…"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을 걷어내며 설화린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우린 사람을 죽였다. 너와 난 이제 살인자(殺人者)야."
"그게 어쨌다는 거야?"
침묵을 지키던 번쾌가 쨍! 하고 쇳소리를 냈다.
"우린 복수를 했을 뿐이야!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인 것 뿐이라구!"
"번쾌야, 이 나라에는 황법(皇法)이 있다.
단죄(斷罪)는 법(法)이 하는 거야.
우리에겐 그들을 단죄할 아무런 명분도 권한도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 단순한 살인자(殺人者)일 뿐이야."
"좋아, 그럼 우리가 살인자라고 치자구! 그렇다면 형은 도대체 어쩌자는거야?"
"우리는 이제 어떡할 수 없다. 이 마지막 한 잔의 술을 마신 후… 우린 투항(投降)하는거다."
"뭐라구? 안돼, 그건!"
번쾌는 탁자를 꽝 치며 일어섰다.
그 순간 그의 조그만 등 뒤에 서려있는 살기(殺氣)를 설화린은 보았다.
설화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느릿하게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 젖혔다.
휘우우우-- 휘우우우웅!
목련꽃송이 같은 탐스런 눈송이가 왈칵 밀려 들어왔다.
설화린은 고개를 내놓고 관군을 향해 외쳤다.
"그들은… 죽었소."
"죽어?"
"그렇소. 내가… 죽였소!"
"무슨 짓이야, 형!"
순간, 번쾌는 설화린을 밀어제쳤다.
밀어제치며 그는 공야발의 등에 꽂혀있던 검(劍)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이제 비수가 아닌 장검이 들려져 있었다. 칼 끝이 설화린의 목에 닿았다.
번쾌의 눈에 독기가 묻어났다.
"난… 투항할 수 없어. 관군들에게 잡혀 개죽음을 당할 순 더더욱 없고…"
"번쾌야…"
"놈들이 죽은 걸 알았으니 관군들은 더 이상 양보하지 않을 거야. 형은 날 배신했어!"
"번쾌야, 우린…"
"닥쳐! 형은 지금부터 내 인질이야!"
설화린의 등이 벽에 닿았다. 검 끝이 지그시 목을 조여왔다.
살의(殺意)와 그리고 설득과 연민의 빛으로 일렁이는 네 개의 충혈된 시선이 맞부딪혔다.
눈싸움 하듯 그들은 서로를 노려 보았다.
번쾌의 시선이 먼저 아래로 내려왔다.
시선을 따라 칼도 내려오고, 그리고 한 순간 번쾌는 칼을 탁자에 콱 쑤셔 박았다.
"좋아, 형! 내려가라구!"
"함께 가자, 번쾌야."
"난 싫어!"
"안됐지만 탈출은 불가능하다."
"놈들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어! 제기랄! 뭔가 방법이 있겠지!"
설화린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패잔병처럼 어깨를 내려뜨리고 서 있는 번쾌에게도 보이는 건 절망밖에 없었다.
(그래……저놈은 알고 있는 거다. 놈은 희망 때문에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절망 때문에 죽고싶어 하고 있는 거다. 죽을 핑계를 찾고 있는 거다.)
한 줄기 번쾌에 대한 연민이 설화린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영원히 작별해야 할 연인(戀人)같이 번쾌를 와락 끌어 안았다.
"번쾌야…"
"혀-- 엉!"
기다렸다는 듯 번쾌의 작은 몸이 설화린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널…이곳에 남겨두고 혼자 내려갈 순 없다. 같이 내려가자.
어차피 피하지 못할 죽음이라면… 떳떳하게 맞도록 하자, 번쾌…"
"혀-- 엉!"
한순간 단절됐던 두 사람의 마음은 절망 속에서 다시 만났다.
"형! 다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야.
여길 내려 가거든 나같은 놈은 잊어버려! 그리고 다시 시작해.
형은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아. 언젠가 한 번 형은 멋지게 살아볼 수 있을 거야.
난… 그걸 안다구…"
"번쾌야…"
그때다.
슈-- 욱!
파파파-- 팍!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설화린은 허벅다리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으윽! 위, 위험하다, 번쾌!"
본능적으로 그는 번쾌를 쓰러뜨리며 납작 엎드렸다.
팍! 팍!
몇 개의 화살이 더 날아왔다.
계월루의 맞은편 건물에 잠복해 있던 궁수(弓手)들이 쏘아대는 화살이었다.
"맞은거야, 형?"
"빌어먹을… 허벅다리에…!"
"이놈들이 지금…!"
우르르 달려간 번쾌가 기녀(妓女) 하나를 끌어다 창턱에 올려 세웠다.
관군들과 군중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야, 이놈들아! 이따위로 나오면 하나씩 모조리 내던질 거야!"
악에 받쳐 번쾌는 소리쳤다.
"진정해라! 그저 위협으로 그래본 것이다!"
"위협이라구? 나쁜 놈들…!"
기녀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번쾌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창 위에 간신히 다리를 붙이고 있던 기녀의 몸이 휘청하며 기울
었다. 그때였다. 어느 쪽에선가 갑자기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안돼, 번쾌!"
곧이어 한 대의 마차가 계월루 앞에 멎더니 조그만 인영 하나가 뛰어 내려왔다.
관군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다짜고짜 계월루를 향해 뛰어 들어오며 외친 것이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가 바로 청지라는 걸 번쾌는 단번에 알아 차렸다.
"청지, 청지가 와. 형…"
"청지라구…"
설화린이 놀란 표정으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때 문이 열렸다.
번쾌에게나 설화린에게나 뼈저리게 그리운 청지의 상반신이 문 밖에 나타났다.
"다친거야, 오빠?"
청지가 물었다.
설화린은 손을 내저었다.
"난 괜찮아.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내려가라, 청지. 여긴 네가 올 곳이 못돼."
달래듯 설화린은 말했다. 그의 허벅지에선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번쾌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가, 청지. 네가 들어오면 난 이 여잘 창 밖으로 밀어버릴 거야!"
"번쾌는 절대로 그러지 못할 거야…"
청지는 침착했다.
설화린도, 번쾌도 놀랄 정도로 그녀는 담대하고 침착했다.
"번쾌…그 여잘 내려 놔."
"오지마! 제발… 날 시험하려 들지 말란 말야!"
"난… 번쾌를 잘 알아. 넌… 잔인한 살인자가 아냐. 난… 널 믿어, 번쾌…"
"에이!"
번쾌는 결국 창턱에 세웠던 여인을 확 끌어 내렸다.
백납같이 질려있던 기녀가 오열을 쏟아 놓았다.
이때, 피 흐르는 설화린의 다리를 잡으려던 청지는 흠칫 놀라며 주저앉았다.
"어마! 저, 저건…"
"놈들을… 모두 죽였다. 우리가…"
"바보… 바보!"
청지의 외침은 그러나 울음에 의해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그녀는 재빨리 자신을 수습했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찢어 설화린의 상처를 꼼꼼히 싸매 주었다. 출혈이 한결 줄어 들었다.
"어떻게 할거야, 이제…?"
청지가 묻자 번쾌는 자르듯 대답했다.
"투항은 할 수 없다. 투항해도 너무 늦었어. 도망쳐야 해."
"도망…?"
"그건 불가능해. 우선 이 기루를 빠져나갈 수가 없어
. 탈출할 기미가 보이면 관군들은 우릴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릴거야."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방법… 이라구?"
번쾌가 두 눈을 빛냈다.
청지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날 인질로 삼아. 그래서 우선 이곳을 벗어나고 봐."
"제기랄! 난 또 무슨 기발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야, 이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야! 우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너 하나쯤 죽일 수도 있어.
그게 바로 관군들 생리라구!"
번쾌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설화린을 향한 청지의 눈빛은 진지했다.
"오빠, 방법은 그 한 가지 뿐이야."
"안된다, 그건…"
설화린은 딱 잘라 말했다.
"잡히면 끝장이야, 오빠… 제발 내 말을 들어. 내가 누군지… 오빠는 알잖아."
"……"
"그 방법은? 한 가지 뿐이야. 날 인질로 삼으면 이곳을 벗어나는 게 가능할런지도 몰라.
오빠, 인질이란 말이 싫으면 동행(同行)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렇다. 그녀가 동행해 준다면 탈출은 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오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살아보는 거야… 으응…"
이 순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의 한줄기 빛처럼 일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맙다, 청지… 네가 날 두 번이나 살리는구나…"
설화린은 청지의 손을 굳게 잡았다.
청지의 조그만 손을 꼬옥 쥔 채 설화린은 툴툴 웃었다.
"좋아! 탈출한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