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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덕·김성주·김정주 할머니 역정 담은 ‘자서전’ 발간 -“일본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근로정신대 동원 -강제노역, 사회적 외면, 기나긴 법정투쟁… 인생역정 담담히 풀어 |
■양금덕(梁錦徳)님 기억의책 e-book 링크
http://memorialbook.kr/dflip/default.asp?search_idx=95
■김성주(金性珠), 김정주(金正珠)님 기억의책 e-book 링크
http://memorialbook.kr/dflip/default.asp?search_idx=96
10대 어린 나이에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일제 강제노역 피해 할머니들의 삶이 담긴 자서전 2권이 발간됐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양금덕(梁錦徳.1931.2) 할머니의 인생을 담은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꿈틀), 김성주(金性珠.1929.9)•김정주(金正珠.1931.8) 자매 할머니의 인생을 푼 『마르지 않는 눈물』(꿈틀)을 각각 발간했다.
자서전의 주인공들은 일제 말기인 1944년~1945년 10대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 선생이나 담임 선생의 꾀임에 의해 일본 군수업체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 회사 등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양금덕 할머니는 나주대정국민학교(현 나주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다가 1944년 6월 미쓰비시중공업에 동원됐고, 자매가 차례로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김성주 할머니는 순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6월 미쓰비시중공업에, 동생인 김정주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1945년 2월 국민학교 졸업식을 코앞에 두고 후지코시 회사로 각각 동원됐다.
이들은 일본에서의 강제노역 피해는 물론,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일본에 다녀왔다”는 사회적 편견과 오해로 가정불화를 겪는 등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뒤늦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를 무릅쓰고 일본정부와 일제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명예회복을 위한 일본 소송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소송에서는 실패했지만 일본정부가 내놓은 후생연금 99엔은 새로운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이들은 2012년과 2013년 각각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를 상대로 광주와 서울에서 소송에 나섰다.
마침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가 했지만 일본정부의 방해로 판결 이행을 둘러싼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김정주 할머니가 후지코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도 2019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승소해, 현재 대법원의 마지막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가 지금까지 법정투쟁에 매달린 시간은 장장 29년째, 일본 법원에서 기각 패소된 것만 9차례다. 양 할머니는 1992년 광주 천인소송 원고로 일본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을 시작으로, 1994년 관부재판, 1999년 나고야 소송에 나섰지만 각각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고, 이어 2012년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2018년 마침내 대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진실회복을 위한 싸움에 온 생을 바쳤다.
자매인 김성주•김정주 할머니 역시 일제의 한을 풀기 위해 각각 투쟁에 나선 지 20여 년 안팎이다. 언니 김성주 할머니는 2000년 12월 나고야 소송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1년의 세월, 동생인 김정주 할머니도 2003년 4월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해 현재 18년째다.
자서전에는 주인공들이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거나 재학 중이었던 10대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간 경위, 일본 현지에서 겪은 지진과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 해방 후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아픔, 그리고 거듭된 좌절을 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고된 인생역정이 담담히 풀어져 있다.
주인공들의 삶은 우리의 굴곡진 근현대사의 단면이다. 일제에 빼앗긴 세월을 되찾기 위해 일본에 이어 한국 법정에서까지 싸워 온 피해자들의 고난에 찬 역정은, 그 자체로 일본 제국주의 범죄를 고발해 온 인권투쟁의 역사이자, 장엄한 인간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근로정신대 문제를 접할 수 있는 교양 도서 하나 없는 실정에서 자서전은 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이번 자서전 2권은 발간비(1천만 원) 마련에 힘을 보탠 시민들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아름다운재단’과 ‘카카오같이가치’에서 진행한 온라인 모금 캠페인에 564명이 직접기부, 9,384명이 참여기부자로 힘을 보탰고, 일본 지원단체 ‘나고야소송지원회’에서도 30만 엔(한화 약 316만원)과 함께 축하 현수막을 보내 마음을 보탰다.
●사진 파일 등 카페(http://cafe.daum.net/1945-815) 참조 / 비매품
●문의: 062-365-0815
2021년 1월 1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 원고 진진정, 김혜옥, 양금덕, 박해옥, 이동련 할머니가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소송 변호단, 소송 지원회와 함께 행진하고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기려, 80주년이 되는 1999년 3월 1일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
쉽게도 일본에서의 소송은 2008년 11월 11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으로 최종 마무리됐다. 나고야 고등재판소 기각 판결 후 법정을 빠져 나오면서 오열하는 양금덕 할머니를 주위에서 부축하는 모습. 2007년 5월 31일.
나주대정국민학교 6학년 재학 중 일본에 끌려간 양금덕 할머니는 학교 졸업장이 없다. 나주초등학교는 뒤늦게 할머니의 사연을 알고 2008년 5월 20일 학교 개교기념일에 양금덕, 이유녀 할머니 2명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양금덕 할머니가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철수를 요구하며 의연하게 1인 시위에 나서고 있다. 2010년 3월 10일.
2009년 12월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사회보험청은 대리인을 통해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들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을 지급했다. 현재가치로 약 1,033원. 99엔은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투쟁에 불을 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옛다! 99엔". 양금덕 할머니가 후생연금 99엔 지급에 항의하며 호소카와 리쓰오(細川律夫) 후생노동성 부대신(차관) 집무실을 찾아 탁자 위에 99엔을 내 던지고 있다. 2010년 2월 24일.
삼보일배 시위를 마치고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양금덕 할머니가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이후 미쓰비시중공업과 면담을 갖고 13만 5천여 명 항의 서명용지, 대한민국 국회의원 100명의 서명용지를 전달했다. 왼쪽부터 당시 김선호 광주시의회 교육의원 당선자, 민주당 이용섭 국회의원,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당선자.
광주고등법원 승소 후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열린 시민 보고대회에서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해 참석자들이 함께 어깨춤을 추고 있다. 2015년 6월 24일.
금요행동 500회를 맞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한일시민단체 회원들과 양금덕 할머니가 판결 이행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2020년 1월 17일.
김성주 할머니는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5월 말 일본인 담임 선생의 감언이설에 속아 일본으로 강제동원됐다. 1944년 6월경 나고야에 도착해 본격적인 노동에 들어가기 전 순천에서 동원된 동료들과 함께 나고야성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일본정부가 후생연금 99엔을 지급해 피해자들을 모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외교부 규탄 시위에 나선 할머니들. 마이크를 쥐고 계신 분이 김성주할머니. 2010년 1월 26일.
‘99엔은 일본의 양심!’ 서울 일본대사관 앞 규탄 시위. 왼쪽부터 김정주,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 2010년 2월 8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일과거사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할머니들. 왼쪽부터 김정주, 김성주, 양금덕 할머니. 2012년 2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 직후 외교통상부 앞에서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왼쪽부터 김성주 할머니, 서진영 회원, 김정주, 양금덕 할머니. 2013년 2월 27일.
광주지방법원 담당 재판부는 이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당사자 진술에 앞서 특별히 법정 사진 촬영을 허가했다. 역사적인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법정을 가득 메운 시민모임 회원들과 학생들. 2열에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 이와츠키 고지 변호사의 모습도 보인다. 2013년 10월 4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김성주 할머니가 취재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18년 11월 29일.
순천남공립국민학교 김정주할머니 생활기록부 사본.. 두 번째 장 왼쪽 하단(붉은선 표시)에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不二越)제강회사에 여자정신대원으로서 입대함’이라고 표기돼 있다.
김정주 할머니는 순천남공립국민학교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일본인 담임 교사의 감언이설에 속아 일본 도야마에 위치한 후지코시(不二越) 회사로 강제동원됐다. 졸업장도 없던 김정주 할머니는 그동안 졸업도 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순천남초등학교는 김정주 할머니의 전후 사정을 전해 듣고, 2008년 12월 졸업장을 다시 발급해 전해 드렸다. 왼쪽 사진은 김정주 할머니가 후지코시에서 배고픔에 내몰리며 만들었던 금속 부품의 홍보물.
‘우리는 구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교통상부 앞 기자회견에서 김정주 할머니가 손 피켓을 들고 있다. 2010년 1월 26일.
일본 지원단체 ‘호쿠리쿠연락회’ 주최로 후지코시 회사 앞에서 소송 피해자들이 항의 행동(시위)을 개최한다는 소식에 후지코시는 일찍부터 회사 정문을 걸어 잠궜다. 정문이 봉쇄된 가운데 김정주 할머니가 회사 측에 항의문을 전달하기 위해 출입문 창틀 사이로 몸을 비집고 안타깝게 팔을 뻗어 서류를 내밀고 있다. 2011년 10월 31일 도야마.
박근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2월 27일 서울 외교통상부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정주 할머니. 그 옆으로 김성주, 양금덕 할머니.
항의 행동을 마친 김정주 할머니가 후지코시 공장 앞에서 일본 지원단체 ‘호쿠리쿠연락회’ 무라야마 요시코(村山良子) 회원과 안타까움과 설움이 뒤섞인 채 서로를 얼싸안고 있다.
도야마는 금세 바뀌는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날씨로 유명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참가자들이 우산을 쓰고 후지코시 항의 행동을 갖는 동안 어느새 참가자들 뒤편으로 무지개가 떴다. 2013년 11월 26일.
후지코시 회사 앞 항의 행동(시위)이 진행되는 내내 비가 내렸다. 김정주 할머니가 시위 도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2011년 10월 31일 도야마.
김계순(앞 왼쪽)·김정주(앞 오른쪽) 할머니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의 한 식당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호리에 세츠코(堀江節子), 정경희, 안영숙, 나카가와 미유키(中川美由紀). 2017년 5월 30일.
‘근로정신대시민모임’ 회원들이 김정주 할머니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자택을 찾았다. 2017년 11월 11일.
할머니들의 자서전 출판 소식을 듣고 ‘나고야소송지원회’에서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앞줄 왼쪽부터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고이데 유타카(小出裕), 이와츠키 코지(岩月浩二), 히라야마 료헤이(平山良平), 스기시타 요시마츠(杉下芳松), 뒷줄 마에야마 쿠니오(前山邦雄), 2020년 12월.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소송지원회 공동대표가 자서전 발간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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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545)회에 걸쳐 2009.10.23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홍보하여 왔습니다.
Re:[판결문]후지코시 근로정신대 2,3차 항소심 소송 판결문(1/30, 1/23) B
http://blog.daum.net/hblee9362/11336366
[초청강좌] 29일 시작... 아직 오지않는 해방, 다시 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
2009.10.23 09:08
http://blog.daum.net/hblee9362/11304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