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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비창)
지난번에 게재한 <장진호 전투 이야기>가 예상도 못했는데 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이 잘 알 것 같지만 정작 몰랐던 역사에 목말라 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한국전쟁 뒷얘기를 담은 <한국전쟁 비사(秘史)>를 상,하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앞으로도 세계사와 관련해서 꼭 알아야하지만 잘 모르고 지나가는 흥미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가끔 올리려고 합니다. 하편에서는 14후퇴, 명장 리지웨이의 등장, 맥아더 원수의 해임, 팽덕회의 비참한 최후 등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 모택동의 한국전 참전 결심 ]
1950년 6우러 25일 태양이 뜨겁게 내려쬐기 시작하는 북경의 정오, 중남해에 있는 모택동의 거처인 국향서옥에서 모택동은 평소처럼 늦잠에서 깨어나 비서진이 갖다준 <참고소식(매일 아침 모택동에게 보고하는 세계 주요뉴스)>을 들척이다가 평양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군의 도발에 의해 한국전이 발발했다는 평양발 뉴스였습니다. 그동안 모택동은 김일성이 남한에 대해 군사활동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막연히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날짜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한국전쟁의 계획과 실행 단계에서 쏘련과 북한으로부터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일단 한국전쟁 초기에 몇 가지 예방책을 취했습니다. 군인들의 제대를 취소시켰으며 25만명에 해당하는 동북 특수 부대의 창설(제13군)을 명령합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한반도 남쪽을 유린하고 있었지만 8월 들어서부터는 북한군의 진격속도가 느려지고 사상자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평양으로부터 계속 날아옵니다.
모택동은 8월 6일 군수뇌부 모임을 갖고 한반도 사태와 관련 참전여부에 관하여 토의를 가졌습니다. 군 수뇌부들은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해서는 대부분 비관적인 애기들을 털어 놓았습니다.
‘ 중국은 한반도 가까이 창고도, 군수품 수송로도, 통신시설도, 그리고 도로도 없다. 미군 항공기에 대한 현대식 고사포도 없고 전투기도 구식이다. 만약 미국이 보복조치를 취한다면 중국은 도시들을 방호하기 위한 수단이 전혀 없다. 미국은 마음만 먹으며 언제라도 폭격을 할 수 있다.그리고 원자탄은 어떤가? 만약 중국이 전쟁에 끼어들면 원자탄을 투하하여 중국은 석기시대로 되돌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맥아더에게 좋은 구실을 줄 것이다’ 등등
모택동은 듣기만 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만약 미국이 우세하게 되면 북한을 도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맥아더가 압록강을 위협하면 중국은 싸울 것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는 갖추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9월 15일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여 상황을 역전시키고 북한군을 북쪽으로 몰아붙인 후에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덩화가 이끄는 동북 특수 부대(제13군)를 압록강 일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10월 1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고 김일성이 허겁지겁 도와달라고 다급한 전보를 보내오자 모택동은 군 지휘관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날 밤 주은래는 주 북경 인도대사인 파니카르에게 미군이 압록강 국경을 향해 계속 북진한다면 중국이 참전할 것이라고 미국 측에 알려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날 회의에서 처음 발언을 한 사람은 국공내전 때 만주를 평정한 전략가 임표였습니다. 그는 침을 튀겨 가면서 반대의사를 나타냈습니다. 요지는 중국인민공화국이 새로이 창건되었는데 멀리 떨어진 말단지역에서 전쟁을 할 그런 경황이 없다. 아직도 국내에서는 장개석군과 싸우고 있지 않느냐,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내심으로는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참석들도 중국은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해 왔고 아직도 모든 게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다. 경제력은 새로운 전쟁의 부담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등 대부분 반대 의사를 내놓습니다. 회의는 3일동안이나 계속하여 열렸습니다.
이와같이 군부와 정치지도자들이 대다수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10월 6일 참전을 확정합니다.
'같은 사회주의 형제 국가인 인접한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것, 미군이 화력에서 우세하다고 하지만 중국은 지리상으로 가깝고 중공군이 국공내전을 통해서 단련되어 한 번 붙어 볼만하다는 것, 압록강까지 미국이 진출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대만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한만국경에 미군이 포진한다면 대만 침공은 물 건너 갈 뿐더러 남과 북에서 미국에 협공당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대외적으로 신중국을 널리 알리고 입지를 공고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참전을 결정합니다.
모택동은 일단 한반도 파견 중공군을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고 이를 지휘할 사령관으로 국공내전 때 만주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임표를 지명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모스크바로 내빼 버렸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은 뻔히 질 거고 그래서 본인이 감당하기가 싫었던 거지요. 사실 그는 평소에 병치레가 잦긴 했습니다.
* 임표와 가족, 오른쪽 마누라 예췬, 아래 왼쪽 딸 더우더우, 오른쪽 아들 린리뤄
임표는 문화대혁명때 모택동의 비호로 전횡을 일삼다가 모가 팽 시키려고 하니까
쿠데타를 모의, 발각되자 마누라 아들과 비행기로 소련으로 탈출하다가 몽고에서
추락사함. 딸은 생존
* 돌쇠 팽덕회, 한국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나중에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과
관련 바른 소리 한번 했다가 문화혁명 때 모택동에게 된통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게 팽덕회였습니다. 그는 그 때 시안에 있었는데 모택동은 팽덕회를 북경으로 급히 불러 다짜고짜 사령관을 맡깁니다. 우직한 돌쇠형 스타일인 팽덕회는 군말 한마디 없이 승낙합니다.
1950년 10월 19일 새벽, 팽덕회는 북경반점(호텔이름)을 나섰습니다. 오전 9시, 전용기가 심양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고강(당시 동북군구 사령관)과 함께 동북군구 사령부로 직행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압록강 도강 계획을 보고 받았습니다.
오후에 미그-15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경도시 안동(1965년에 단동으로 개명)으로 향했습니다. 그날 밤 압록강 연안에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장군인과 노동자, 군용차량, 포차가 강변에 바글바글 했습니다.
가끔 조명탄이 터지고 강 건너 신의주 쪽에서 은은히 포성이 울렸습니다. 불빛 하나없는 녹색 군용 지프 한 대가 압록강 대교를 건넜습니다. 팽덕회와 경호원 2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무전장비를 실은 차량이 뒤를 따랐습니다.
며칠 전인 10월 16일 팽덕회는 이미 제13군 병력인 25만 병력을 일차로 강을 건너게 했으며 다시 또 10만을 도강시킴으로써 북진해 오는 연합군 제1선에 13만 병력과 일단 35만 병력으로 맞설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병력을 밤에만 기동하게 하여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팽덕회는 미군에게 공격을 개시할 지점을 미리 요소요소에 선점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 1차 공세를 위하여 한반도로 스며드는 중공군
그 때 미국 정보부대는 압록강 남쪽에 중국군 병력이 있긴 있지만 1만이 채 못된다고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11월 중순까지는 맥아더가 중국군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도대체 얼마나 있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만 살살 움직이고 낮에는 골짜기나 동굴에 숨어 납작 엎드려 있는데다 밥을 할 때도 가급적 연기를 안 피우고 했다니까 대단한 은닉 전술을 펴고 있었던 거죠. 거기다가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예 중국의 참전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 제1차 공세(10월 25일~11월 1일) >
압록강을 향하여 오로지 앞만 보고 내달리던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25일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의 제1차 공세에 얻어맞고 순식간에 청천강 선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중공군은 갑자기 도깨비처럼 깜쪽같이 아군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중공군 특유의 기동방식인 은닉 전술을 아군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 제1차 공세
급하게 서둘러 공세를 취했던 중공군은 일단 유엔군과 국군응 청천강 이남으로 몰아낸 뒤 이틈을 타서 부대를 증강시키면서 다음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공군이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뜻밖의 결과를 낳고 맙니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이 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전선을 남으로 거세게 밀어붙일 정도의 기세라면 공세가 계속해서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중공군이 귀신처럼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입니다.
유엔군 최고 사령부는 전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이런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초반에는 다소 신중하게 대처를 하다가 막상 결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버렸습니다. 그동안의 이상 징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단지 국지적인 저항으로 깔아 뭉게 버렸던 겁니다.
제1차 공세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주로 국군 제2군단이 있던 지역이었는데 당시 국군이 보고한 중공군의 출몰 정보를 유엔군 사령부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오히려 국군 제6,8사단이 패배당한 것을 핑계대기 위해서 중공군을 과대포장해서 보고한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대규모의 중공군의 개입 사실을 애써 부인하던 유엔군 지휘부는 전선이 순식간에 고요해지자 자신들의 최초 판단이 맞는 것으로 단정 짓습니다. 맥아더는 이를 길조로 받아들여 일단 밀려난 청천강 선에서 아군의 전열을 재정비한 후 종전을 위한 최종 공세를 강행하기로 결정합니다.
< 제2차 공세(11월 25일~12월 >
* 제2차 공세 약도
1950년 11월 24일 10시. 서부지역의 박천-영변-구장-덕천-영원을 잇는 청천강 북쪽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한만국경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이보다 3일 늦은 11월 27일에는 동부지역의 미 10군단도 공세에 동참했습니다.
추수감사절(11월 23일)이 다가오면서 부터는 맥아더의 확신은 더욱 높아만 갔습니다. 그는 개인 전용 비행기를 타고 압록강 상공을 선회한 후 주공을 담당한 미 제1군단 사령부 앞 마당에 착륙합니다.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장병들에게 "늦어도 성탄절까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격려했을 정도로 상황을 지극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맥아더의 호언장담을 그대로 인용하여 유엔군의 공격개시를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불렀습니다.
10월 말에 있었던 중공군의 제1차 공세 때 호된 신고식을 치른 국군 제2군단은 조심스럽게 진격하고 있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적진은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오히려 지난 중공군 공세에서 붙잡혔던 아군 포로들이 대거 탈출하여 부대에 복귀할 정도로 상황은 낙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런 모습과는 달리 아군은 중공군의 덫에 걸려들고 있었던 겁니다. 중공군은 지난 공세에서 패배한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병력을 재정비하는 한편 후속해서 압록강을 건너오는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유엔군이 공격하면 예정된 지역까지 후퇴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을 유인한 후 일거에 격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 파괴된 미군 트럭 사이로 진격하는 중공군
이어서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유엔군의 후방으로 파고들어 전선을 평양-원산까지 밀어버릴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중공군은 아군의 공세 직전에 서부 지역에 18개 사단, 동부 지역에서 12개 사단을 지정된 위치에 은밀히 배치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군은 자신만만하게 진격을 개시했지만 사실은 중공군의 아가리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11월 25일, 갑자기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미군의 정면은 물로 후방에서도 중공군이 나타나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꽹가리, 나팔소리, 호루라기 소리가 난무하면서 새카맣게 몰려 들었죠. 결국 자신만만하게 한만국경으로 진격하던 미 8군은 불과 1주일도 안돼서 다시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였으나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세는 완전히 유엔군의 얼을 빼놓기에 이릅니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유엔군 전체에 일대 공황(恐慌)상태가 일파만파 번지면서 청천강 방어선이 다시 무너집니다. 이어서 평양을 내놓으면서 중공군에 대한 공포가 극으로 치달으면서 완전히 지리멸렬된 유엔군은 정신없이 아래로 아래로 퇴각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12월 중순까지 유엔군을 내리 밀어 붙이던 중공군도 숨이 차던지 38선에서 추격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 평양에 입성하는 중공군)
유엔군의 퇴각은 중공군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들도 병참선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폭격에 노출이 되면서 팽덕회는 전진을 중단시키고 잠시 숨을 고르고 후방의 지원을 기다리도록 합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부인하기만 하고 그 의의를 축소시키기에만 급급하던 맥아더를 비롯한 유엔군 지휘부는 11월 28일에 이르러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맥아더 체면이 말도 안되게 구겨져 버렸습니다.
전세를 뒤집은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 데는 중공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서라기 보다는 중공군에 대한 정보 무시, 이에 따른 오판과 전술적 실책이 겹쳤기 때문이었습니다.
* 김일성(가운데)과 팽덕회(오른쪽에서 두번째),팽덕회는 김일성을 전략가로서 형편없다고
폄하했으며 어느 회의석상에서는 대드는 김일성에게 따귀를 갈겼다는 애기가 전해옵니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역량은 충분했으나 갑작스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고, 또한 적에게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전략과 전술을 간파하고 약점을 알게 된 1951년 여름을 지나면서부터야 그제야 그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1951년 봄까지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기가 막힌 상황 반전에 아군은 경악을 넘어 내내 공포에 시달렸던 겁니다. 다음 편에 1.4 후퇴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 한국전 당시 중공군 공세 약도
[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죽음 ]
미군이 정신없이 퇴각하던 12월 23일 서울 북부 도봉구 도봉동 의정부로 향하는 길(현재 도봉역 부근),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추운 날씨 탓에 전쟁이 잠시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그날, 그는 의정부 24사단과 27여단 소속 사병들에게 '표창'이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고 서울에서 떠났던 그의 지프가 마주 오던 한국군 6사단 소속 쓰리쿼터트럭과 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워커는 원래 운전사에게 차를 험하게 몰게 하곤 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도로는 거칠고 좁은 데다 여기저기 빙판이 있는데도 지프의 속력을 높이곤 했습니다. 그날 워커는 운전병과 부관, 경호원과 함께 지프를 타고 의정부로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워커 중장의 표창을 받기로 한 미군 가운데에는 6·25에 참전한 또 한 명의 '워커', 그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도 있었습니다. 그는 24사단 소속 중대장으로 의정부 북방의 최전선 전투에 투입됐습니다. 북진(北進) 때의 전공(戰功)으로 미 정부가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을 예정이었고 그 훈장을 아버지 워커 중장이 직접 아들에게 달아줄 계획이었습니다.
* 문제의 한국 6사단 소속 쓰리쿼터 트럭, 이 트럭 운전병은 워커 장군의 가족들에 의해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방면되었다고 합니다
길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 행렬로 꽉 막혀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군 무기 운반 차량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워커의 지프 앞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워커가 탄 차는 충돌을 피하려다 결국 전복되었고 네 사람 모두 길가 도랑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워커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머지 세 명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당시 제8군이 적의 손에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 워커는 자기가 곧 파면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불명예 제대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어서 크게 낙담해 하던 상태였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버텨낸 업적은 온데간데없고 중공군에게 패한 책임만 남아 있었던 그 때 그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겁니다. 이 후에 4성 장군으로 추서되고 맥아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모든 영예는 그가 죽은 후에 주어졌습니다.
*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워커 장군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1인치라도 적에게 내 주는 자가 있다면 그는 수천명 전우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탈출구가 있다고 기대하지도 말라! 사수하느냐 죽느냐(Stand or Die), 그것뿐이다."
단호했습니다. 야수 같은 월튼 워커 중장의 눈빛이 장병 하나하나를 향했습니다. 포기란 건 그의 사전엔 없는 단어였습니다. "죽어도 함께 죽는다. 내가 죽더라도 한국은 꼭 지킨다." 워커 중장의 일성(一聲)이 터질 때마다 늘어졌던 장병의 어깨에 점점 힘이 들어갔습니다. "우린 이길 것이다!" 워커의 마지막 연설이 끝나자 장병의 함성이 쏟아졌습니다.
서 있기만 해도 등골에 땀이 줄줄 흐르던 1950년 8월 대구. 미 8군사령부가 차려진 그곳에 작고 단단한 체구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단 적을 잡으면 숨통을 물고 절대 놓지 않는다는 불도그처럼 호전적이며 저돌적이어서 불도그란 별명이 붙었던 워커 중장이었습니다.
* 낙동강 전투 당시 콜린스 미 참모총장을 태우고 한국 1사단을 방문한 워커(찝차에 서있는 사람)
6·25가 발발한 그해 7월 13일 초대 미 8군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그의 급선무는 흐트러진 군의 사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점령당했습니다. 낙동강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매캐한 화약 냄새는 시체 썩는 냄새와 뒤엉켜 코를 찔렀고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습니다.
1·2차 세계대전을 지휘하며 각종 공훈을 세워 '별 3개'를 단 '불도그' 워커는 한국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군의 무선 통신을 감청·해독해 비밀 작전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 낙동강 주변의 지세를 읽어 효과적으로 방어막을 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8월과 9월 2개월여간 마산·왜관·영천·포항 일대를 잇는 낙동강 전선, 일명 '워커 라인'을 성공적으로 사수하며 전세를 만회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워커의 지휘 아래 참전 용사와 학도병, 유엔군은 하나가 돼 최후 저지선을 지켜냈고,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바탕이 됐습니다.
사망 뒤 4성 장군으로 추서된 워커 장군의 명성은 아들 샘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아들 샘 워커는 6·25 참전에 이어 베트남전에도 참전하는 등 32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은성훈장, 수훈비행장 등 훈장을 받았고, 52세엔 육군 최연소 4성 장군에 올랐습니다. 미 육군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이 4성 장군에 오른 건 이들이 처음입니다.
* 아들 샘 워커 대장
워커 가문의 참전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워커 장군의 손자, 즉 샘 워커 장군(88)의 두 아들 월튼 워커 2세(64) 예비역 대령과 샘 워커 2세(61) 예비역 중령은 수십년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면서 걸프전 등 전장을 누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젊은 대위였던 월튼 워커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그 유명한 패튼 밑에서 사단장과 군단장을 역임했습니다. 워커는 적극적인 태도 때문에 패튼에게 좋은 점수를 얻었고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불도그라는 별명은 이 때 패튼이 붙졌습니다.
워커 장군은 애당초 38선을 돌파할 때 서부전선의 미8군과 동부전선의 제10군단으로 양분하여 북진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워커 생각대로 두 부대가 밀집 대형을 이루면서 차근차근 북진을 했더라면 중공군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맥아더가 누굽니까. 워싱턴의 기라성같은 합참본부의 장군들도 꼼짝 못하는데 자기 목을 내놓지 않고 어디 감히 워커 수준에서 반대의견을 개진하겠습니까?
후일담이지만 워커도 중공군의 제1차 공세 때 호되게 얻어맞은 후 상당히 신중하게 북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진호 전투에서의 미해병 1사단장 스미스 장군처럼 고집스럽게 간격을 좁혀 병력운용을 하였다면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세 사가들은 말합니다 (허긴 그렇게 신중하게 아니 다른 말로 꾸물꾸물하게 병력을 진격시켰다면 맥아더는 당장에 그의 옷을 벗겼을 겁니다).
* 도봉역 근방에 있는 워커 장군 기념비(순직한 장소)
[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의 전사(이 이야기는 김명호 저 <중국인 이야기 2편>에서 발췌한 것임) ]
* 모택동과 아들 모안영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1950년 10월 7일 밤, 모택동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정치위원 팽덕회를 "늦은 저녁이나 하자"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지휘관을 위한 일종의 송별연이었던 겁니다.
이날 모택동은 장남 모안영을 지원병으로 추천했습니다. 팽덕회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닙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습니다"며 웃었습니다.
잠자코 앉아 있던 모안영이 대화에 끼어 들었습니다. 다급하게 지원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저는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레닌 군정대학을 마쳤습니다. 기갑부대 중위로 독.소전에도 참전했습니다. 지원병 1호로 나가겠습니다."
아들이 팽덕회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모택동은 팽덕회와 눈이 마주치자 "이 애는 우리가 못하는 러시아 말과 영어도 다 할 줄 안다. 조선에 가면 소련사람, 미국사람들과 부딪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할 거냐"라며 싱글벙글 했습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팽덕회도 결심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요원으론 절대 안된다"고 안영에게 못을 굳게 박았습니다. 그날 밤 팽덕회는 잠을 설쳤습니다. 작은 사고라도 났다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죠.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오싹했습니다.
한반도로 들어온 팽덕회는 모안영을 자신의 집무실 부근에서 비서 겸 통역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보초 근무를 못하게 하고 총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눈앞에 보여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부사령관 덩화와 홍학지, 그리고 팽덕회 집무실 근무자 외에는 아무도 안영의 신분을 몰랐습니다.
* 동굴안에 있는 중공군
팽덕회는 폐광지역인 평안북도 대유동 골짜기에 중공군 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금광 사무실이었던 목조건물에 지휘부를 차렷습니다. 한때 금맥을 찾아 헤매던 흔적들이 주변에 허다했기 때문에 방공시설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가 예정된 11월 25일 전날, 24일 오후 미군 비행기 두 대가 대유동 상공을 한 시간 남짓 휘젓고 돌아갔습니다. 동체에 'BLACK WIDOW(미국산 독거미)'라고 씌어있는 정찰기였습니다. 징조가 심싱치 않았습니다.
그날 밤, 한반도 북단의 폐광에서는 이튿날 예정된 대공세에 대한 준비상황을 체크할 겸 중공군 수뇌부의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참모장 홍학지가 팽덕회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홍학지는 팽덕회에게 산중턱에 있는 동굴로 집무실을 옮기자고 건의했습니다. 모안영이 폭사하기 전 몇시간 전의 일이었습니다. 팽덕회의 수행부관이었던 양봉안에 의하면 팽덕회는 호통을 치며 군 수뇌부의 건의를 거부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한 홍학지는 팽덕회가 화를 내건 말건 죽을 힘을 다해 멱살을 잡고 문 쪽으로 나갔습니다.
넋을 잃고 있는 경호원을 향해 사령관의 붓, 벼루, 전보용지를 들고 따라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굴 앞에서 부사령관 덩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팽덕회가 양봉안에게 상황실에 가서 공세 상황을 알아 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B-26 전폭기 두 대가 지휘부 상공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상황실에는 참모 네 명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입구에, 아침밥을 거른 모안영과 서북 출신의 참모 한 사람은 안쪽에 있는 난로를 쬐며 볶음밥을 데우고 있었습니다. 보고할 문건을 챙겨 든 양봉안이 문을 여는 순간 방금 전에 봤던 전폭기가 회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양봉안은 빨리 피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수십 발의 폭탄이 비오듯 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팽덕회의 집무실도 불구덩이에 휩싸였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그 폭탄들이 네이팜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황실 입구에 있던 사람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안쪽에 있던 모안영과 참모 한 사람은 화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온 지 34일 만이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팽덕회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직접 확인하겠다며 동굴을 뛰쳐나갔습니다. 현장은 참혹했습니다. 시신의 식별과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러시아제 시계와 아이들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긴 호신용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되자 팽덕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4년 전 소련을 떠나올 때 스탈린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자랑하던 모안영의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삶이었습니다. 모안영은 1922년 10월 24일 호남성 창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모택동, 어머니는 일본과 영국에서 교육한.철학을 전공한 북경대학 윤리학 교수 양창제의 딸 양개혜였습니다.
다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무한으로 떠난 아버지는 폭동을 주도하고 정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체포되는 바람에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총살당하자 보석으로 풀려난 모안영은 동생들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했습니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떠나기까지 5년간 상해 거리를 헤매며 구걸과 호떡집 종업원, 인력거꾼 등 안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막내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바로 밑의 동생은 경찰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모안영이 소련에서 귀국하는 날 모택동은 병중이었습니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장에 나가 아들을 맞이했습니다. 19년만의 부자 상봉이었습니다. 이틀간 부자는 방에서 열 끼를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도 회복했습니다.
주은래로부터 장남의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후일 경호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주석은 눈물 한 방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 처연한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팽덕회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2월 하순 한반도 상황과 작전방침 지시를 받으러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을 때 모안영의 주검을 송환하는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청산(靑山) 곳곳에 충골(忠骨)들이 묻혀 있다. 구태여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싸우다 죽었는데 송환해 장사지낼 필요가 있겠는가. 지원군의 영웅 자녀들이 적과 피 흘려 싸웠다. 수없이 많은 우수한 전사들이 희생되었다. 안영도 희생된 수많은 열사 중의 한 사람이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곳의 황토에 모두 묻혀 있다. 안영은 희생된 우수한 전사들과 함께 조선의 국토에서 장사지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안영의 무덤은 지금도 북한에 있습니다.
* 평남 회창에 있는 모안영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