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거든 나무 밑으로 가라
3장14,성찰(省察)의 특징에 관하여
『존자여, 성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목적수행을 특징으로 합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목공이 잘 다듬어진 목재를 잇는 곳에 이어 고정시킴으로써 목적을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목적수행이 성찰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주님의 집 안에, 우리 하나님의 집 뜰 안에 서 있는 사람들아,
주님은 선하시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가 은혜를 베푸시니, 그의 이름 찬송하여라.
주님께서는 야곱을 당신의 것으로 택하시며, 이스라엘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택하셨다.
나는 알고 있다.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며, 어느 신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바다 밑 깊고 깊은 곳에서도, 어디에서나,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분이다.
땅 끝에서 안개를 일으키시고, 비를 내리시려 번개를 치시고, 바람을 창고에서 끌어내기도 하신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맏이는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모두 치셨다.
이집트야, 주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너희에게 나타내셨다. 바로의 모든 신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께서 많은 나라를 치시고 힘이 있는 왕들을 죽이셨으니,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 가나안의 모든 왕들을 죽이셨다.
주님께서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주셨으니,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다.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기념하는 일이 대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변호해 주시고, 당신의 종들을 위로하여 주신다.
이방 나라의 우상들은 은덩이나 금덩이일 뿐,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으로 숨도 쉴 수 없으니,
우상을 만든 자들과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은 누구나 우상과 같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가문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아론 가문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레위 가문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주님, 시온에서 드리는 찬송을 받아 주십시오. 할렐루야.
-(<시편> 135편)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목적수행이 성찰의 특징입니다"를 보자.
분명한 문장이다. 목적이 없으며 무엇하러 살피겠는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자신이 잘 되라고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에서 “바람을 창고에서 끌어내기도 하신다.”를 보자.
시적인 문장이다. 응용해 보자.
“그대의 마음에 애절한 바람을 넣어 / 나를 향한 사랑을 끌어내고 싶소”
유치하다.
다음으로 “이집트에서 태어난 맏이는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모두 치셨다.”를 보자.
살벌하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벚꽃과는 달리 피는지 지는지 관심도 끌지 못하지만 한 서식지의 소나무도 거의 동시에 꽃이 핀다. 소나무는 번식에 성공하기 위해서 대개 5월 초 일주일 동안 송홧가루라고 불리는 노란 꽃가루를 날린다. 소나무는 바람에 의해 꽃가루가 밑씨 근처에 도달하는 풍매화이다. 풍매화는 꽃가루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일단 꽃가루의 양이 많아야 하므로, 소나무 또한 엄청나게 많은 꽃가루를 짧은 개화기 동안 한꺼번에 날려 밑씨가 있는 비늘잎 위에 내려앉는 기회를 늘리고 있다.]
열심히 사는구나.
<성경 속 나무 스토리텔링>에 나오는 글을 보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열왕기상 19:4)
엘리야는 카르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그리고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다. 하느님이 그의 제단에 불을 내려주셨던 것이다. 이에 거짓 선지자들은 백송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에게로 돌아선다. 그리고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그 땅에 폭우가 쏟아진다. 그런데 이 극적인 승리의 사건들이 있은 다음, 엘리야는 자기를 찾아내어 죽이려는 왕후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친다. 그는 호렙산에 이르러 로뎀나무 아래서 몸을 쉬었다.
아마도 카르멜산 위에서의 영적 대결과 비를 위한 간절한 기도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극도로 불안한 심리 가운데서 광야의 한 로뎀나무 아래 누워 하느님께 죽기를 자청하며 기도를 올렸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열왕기상 19:5)
엘리야는 왜 로뎀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올렸을까? 사실 로뎀나무는 잎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쉴만한 그늘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막에는 마땅히 쉴만한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로뎀나무 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만큼 광야에서의 그의 처지가 비참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는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더니, 천사가 나타나 그를 어루만지며 먹을 것을 먹여주었다.]
죽으려고 변변하게 그늘도 없는 나무 아래 앉았는데, 천사가 먹을 것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인데, 참으로 극적인 장면이다. 그 나무가 로뎀나무라는데 검색하니 대싸리로 나오는데, 위 책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로뎀나무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나무다. 이 나무는 서양골담초(애니시다)의 일종이며, 로뎀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의 히브리어 이름 로템(rothem)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학명은 레타마 라에탐(Retama raetam)이며, 영어 이름은 화이트 부름(white broom)이다. 부름(broom)은 금작화(金雀花)라는 뜻인데, 서양골담초인 애니시다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골담초가 노랑생 꽃을 피우는데 비해, 로뎀나무는 흰색 꽃을 피우기 때문에 흰골담초 즉 화이트부름이라 한다.]
대싸리는 명아주과 한해살이 풀이고, 서양골담초는 콩과 소관목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무 동정을 떠나 나무를 두고 죽음과 삶이 동시에 벌어지는 장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래 죽고 싶으면 나무 아래로 가자. 그러면 살 것이다.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이 호주 남부에 새로 구입한 소유지에 사이프러스 150그루를 심었을 때 잘 드러났듯 말이다. 그녀는 심지어 토착종 사이프러스를 심지도 않았다. 전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장 프레드 굿윈이 그의 어둑한 소유지를 에워싼 8미터가 넘는 사이프러스들 때문에 이웃들과 벌였던 길고긴 분란은 전기톱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법정까지 갔을 것이다. 2013년 이래 새로운 산울타리 높이 조례가 스코틀랜드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욕심을 채워줄 수 있구나.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의 감각체계도 재구성됐다. 낮에 활동하는 생활 방식과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 덕분에 우리의 눈은 정면을 향해 있고 이리저리 굴릴 수 있다. 세상은 감각으로 지각된 만큼 변형됐다. 식량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뛰려면, 색을 구분하고 거리를 가늠하며 응달에 가려진 구렁을 찾아내는 데 알맞은 시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복잡한 환경이 우리의 지적 활동을 자극한 덕분에 뇌의 크기도 커졌다. 물론 그에 따라 잃은 것도 있다. 시각에 집중하면 후각이 약화된다. 하지만 천만 다행이 청각은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문화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후 문자와 같은 시각 언어가 발명됨으로써 청각은 배경 정보가 되었다.]
문자가 시각 언어라? 보통 시각 언어는 몸짓 발짓을 말하는데, 이걸 같은 걸로 썼다. 그러니까 음성언어, 문자언어, 시각언어, 이렇게 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참신하다. 문자는 시각 언어다. 괜찮다.
<생물 세계의 이해>에 나오는 글을 보자.
[이 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만일 내가 이 점을 설명하지 못하면 모처럼 지금까지 나의 논지(論旨)라는 것도 한순간에 와해될지도 모른다. 당초부터 나는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쓰고 싶지는 않으나, 이 중요한 곳을 오늘날 생물학에서는 아직 뚜렷이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생물을 조사해 보면 신경중추나 감각기관의 발달에도 여러 단계가 있으며 그것은 물론 우리 인간에 있어서 최고 단계까지 도달해 있어도 이러한 단계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보면 즉 진화의 과정에 있어서 생물은 스스로의 환경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거나 또는 스스로의 작용 또는 스스로의 생활 세계를 넓히는 발전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진화에 관한한, 세상에 대한 설명에 관한한, 모두 모호한 인식뿐이다. 누가 그럴 듯한 문장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설득력 정도가 달라질 뿐이다. 어렵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가 꿈 속에서 보았던 새는 죽어 있었다. 그 새는 그의 마음속에서 죽어 있었다. 그는 윤회의 업보에 휘말려들어갔다.]
열심히 수행하면 벗어날지어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죽고 싶으면 나무 아래로 가라
키 크고 우거진 잎이 있는 나무 말고
뙤약볕에서 그늘 한 점 못 만들고
기대고 싶어도 가지가 휘청거리고
목을 매고 싶어도 연약해 뚝뚝 부러지는
가녀린 나무 아래로 가 누워라
그러면 살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이런 데서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아나
엘리야가 손을 내밀고
천사가 나팔을 불고
단감과 단술이 쏟아져
훨훨 날게 해줄지
그래도 언젠가 죽을 것이니
너무 기뻐하지는 마라
나무가 너보다 오래 산다고 투정부리지 마라
잠시라도 나무가 너를 살렸다
나무에게 감사하고
남은 생 남을 위해 살아보거라
죽으려고 나무 밑에 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