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한국의 책쟁이들은 무슨 책에 파묻혀 있을까?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와 최한기의 후예들이 전수하는 책 세상의 매력
책에 미친 미련퉁이들에 대한 훈훈한 보고서
매주 200여 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와도 성인들의 연평균 도서 구입비는 만 원도 안 되는 나라 한국. 이토록 척박한 토양에서 책 구입비로 매달 몇 십만 원씩을 지출하고 고서점 나들이를 유일한 휴식으로 삼으며 끌어 모은 책 무게로 집이 무너질까 고민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한국의 책쟁이들》은 돈과 이름값에 미친 세상에서 역주행하듯 오로지 책에 미친 미련퉁이들에 대한 훈훈한 보고서다. 참신한 기획과 맛깔스런 문체로 책동네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한겨레신문 기획연재를 바탕으로, 기사에서 모두 담지 못한 책쟁이들의 삶과 책 이야기, 꽁꽁 숨겨둔 서재 풍경과 근황을 더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이 책의 저자이자 한겨레신문 선임기자인 임종업 역시 일주일에 이틀은 밤을 새워 책을 읽고 ‘헌책방 순례’와 ‘한국의 책쟁이들’을 연재한 못 말리는 책쟁이다. 한 책쟁이가 다른 책쟁이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다가가 친구가 되고 그들이 보여준 참모습을 맛깔 나는 글솜씨로 풀어낸 책, 그것이 바로 《한국의 책쟁이들》인 셈이다.
한국의 젠틀 매드니스들이 들려주는 있는 그대로의 책쟁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한국의 책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는 썩 많지 않다. 겉멋으로 읽는 사람을 제하고, 책이 아닌 물성에 탐닉하는 사람을 제하고, 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제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재 속에서 수줍게 숨어 사는 책쟁이들을 찾기 위해 어렵사리 헌책방에 잠복하고 인터넷의 헌책방 동아리를 탐색했다.
이렇게 찾아낸 사람들이 바로 추억의 만화를 찾아 헌책방을 헤매다 만화편집자가 된 신세대 만화 마니아 박지수 씨, 부인이 여행 간 틈을 타 집을 온통 책으로 뒤덮고는 결국 북카페를 차린다며 28년간 몸담은 회사에 사표를 낸 김종헌 사장, 자궁과 월경에 다이제스트판 현대사가 들어 있다며 사람 책과 종이 책을 동시에 읽기를 즐기는 이유명호 한의사, 25년 동안 모아온 10만여 점의 고서를 위해 책 박물관을 열었다가 빚잔치를 벌인 화봉책박물관 여승구 관장, 독서동아리에서 책을 매개로 평생의 소중한 인연을 얻은 현대판 나무꾼 김태석 씨 등 28인이다.
어릴 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고 보지 못한 책을 대하면 번번이 웃어 책에 미친 바보라 불린 이덕무나, 책만 사들이다 결국 가산을 탕진한 최한기 못지않게 책에 미친 책쟁이들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에게 자칫 기행이나 광증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독서애호가들에게 이 책에 등장하는 책쟁이들의 처절한 삶과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로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자 격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책 고수들의 독서 목록과 독서법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
책쟁이들의 특징은 서재 공개를 꺼린다는 것. 책을 꽂아둔 서가에서는 지적 편력이, 모두어 분류한 방식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니, 자신의 속살 같은 서재를 쉽게 내보일 책쟁이가 어디 있겠는가. 바로 이런 속사정 때문에 이 책에서 책쟁이들이 큰맘 먹고 공개한 서재를 엿보는 재미가 더욱 각별해진다. 이들이 섭렵해 온 책의 목록을 구경하고, 아끼는 책을 손에 쥐게 된 경로를 추적하고, 책장 위에 덮인 먼지를 쓸어보는 일은 또 다른 세계로의 탐험이자 여행이다. 특히 한국고전과 세계명작부터 최신 유행하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이나 만화, 동화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이들의 책읽기 여행에 독자들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놈만 패듯이 한 작가만 파고드는 전작주의 독서법, 꽂히는 주제를 따라 10권, 50권, 100권으로 확장시켜 읽는 하이퍼텍스트식 독서법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읽는 감성 독서법 등 고수들의 특별한 독서 노하우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이다. 아직 나만의 독서법을 발굴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과 책쟁이들이 알려주는 헌책방 정보, 책 수집 요령 등의 부록은 그야말로 덤으로 주는 선물이다.
고서나 희귀본을 수집하는 나이 지긋한 장서가나 노년의 고집 센 학자뿐만 아니라,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젊은 만화 마니아부터 책쟁이에서 글쟁이로 진화한 톡톡 튀는 커리어우먼, 젊은 시골 우체국장과 고졸 목재상까지, 직업ㆍ성별ㆍ나이는 다르지만 책과 한 몸이 된 사람들을 곳곳에서 찾아내 소개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다종다양한 책의 세계를 체험한다.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책쟁이들과 우리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책이 삶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지를 논할 수 있다. 이들이 살며시 열어놓은 비밀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책 세상의 블랙홀 같은 매력에 빠져 이 책에 등장하는 책쟁이들과 금세 친구가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한해 400~500권씩 늘어가는 책은 30평대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10년 전 60평으로 넓혀야 했다. 새 집으로 이사하는 날은 부인 이씨가 인도 성지순례를 떠나는 날과 겹쳤다.
“아무 걱정 말고 여행이나 잘 다녀오시오.”
돌아와 보니 남편이 인심 쓴 이유를 알았다. 60평 새집이 더 좁아 보였다. 방마다 책을 두고도 모자라 거실과 안방, 화장실에까지 책이 널렸다. 빤한 벽은 서예 작품과 그림 도배였다. 지하 서고를 따로 두고 쌓아두었던 책을 이사하면서 책장에 꽂아버린 것. 안방 화장대도, 옷장 위에도 책, 책.
“어디서 화장을 하란 말예요?”
“나는 화장 안 한 당신이 제일 예뻐요.”
_chapter 4 “20년 만에 이룬 북카페의 꿈_춘천의 북카페 사장 김종헌” 중에서
조씨가 따라 읽은 사람은 소설가 이윤기 씨. 《하늘의 문》 《나비넥타이》 등 창작소설로 시작한 그의 따라 읽기는 번역본으로 확대돼 200여 권을 모두 독파했다. 그렇게 하면서 작가 이윤기의 전모뿐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 세상 이치까지 두루 읽게 됐다. 사실과 인과로 꽉 짜인 역사의 시각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 세계인 신화라는 틀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 공간이 생긴 것. 사회나 사물을 직관적으로 보고 그때그때 욕망을 표출했는데, 그의 책을 보고 나서 말랑말랑해지고 욕망을 억누르는 여유도 생겼다.
그 무렵 사내 커플의 사랑은 무르익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800자 원고지 10장에 빼곡히 사연을 적고 그동안 독파한 200여 권의 이윤기 책 사진을 동봉해 반 협박 편지를 띄웠다. 당신 아니면 주례 설 사람이 없다며. 결혼식 며칠 전까지 답이 없어 포기하고 있던 차 이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가 12월 9일 화천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활자가 목소리로 되고 책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는 듯한 환각.
“책과의 인연에서 더 이를 수 없는 극점이었다”는 게 조씨의 말이다. 소설가 이윤기는 주례 이윤기가 되었고 스승 이윤기가 되었다.
_chapter 6 “우체국과 책, 사라지는 것의 끄트머리_화천 상서우체국장 조희봉” 중에서
“중간상이 책 욕심을 내서는 안 되죠. 주인 찾아 책을 넘기는 게 본업인데…….”
그한테 책은 흐르거나 잠시 머무는 존재. 그런 탓일까. 그의 집에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어디선가 꺼내온 이것들은 책이라고 하기는 뭣하고 그나마 때와 때 사이에 좀 길게 머무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욕심이 없기로서니 이것뿐일까, 라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왕 보여줄 것 다 보여주마, 하면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누리는 안복. 40년에 걸쳐 자신의 욕심을 줄이고 책들을 졸여 남긴 것이니 어련할까. 그의 절제와 인내는 범인이 이를 수 없는 ‘저만치’에 있었다.
_chapter 9 “시간과 시간 사이_책 중간상 김창기” 중에서
그가 고서 덫에 걸린 것은 26년 전 술자리에서다. 1982년 윤석창 씨 소유의 책으로 두 달간의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마치고 나서의 뒤풀이. 한 일간지의 문화부장이 꺼낸 말이 씨가 됐다. 그 책들을 경매에 붙여 팔지 말고 여 사장이 사들여 문학 박물관을 만드는 게 어떻겠는가? 여씨는 자신을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에 비유했다. 그로부터 2~3년간 강아지가 주인 따르듯 서지학자인 안춘근 씨의 뒤를 따라 헌책방을 다니며 책 보는 눈을 키웠다. 그렇게, 초판본 전시회에서 만난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은 320여 종의 다른 판본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에서 만난 《텬로역뎡》은 100여 종의 다른 판본까지 인연이 넓어졌다.
“책 모으는 재미가 엄청났지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책은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전광석화 같은 순간에 인연이 아니면 그곳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블랙홀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죠.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지경이었어요.”
_chapter 11 “내가 주인인가 책이 주인인가_화봉책박물관 관장 여승구” 중에서
이메이션에서는 책값을 회사에서 대준다. 사고의 폭, 창의력을 키우는 데 독서만 한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직원들이 소설이나 어학 등을 제외한 책을 산 뒤 결제를 올리면 한 달 단위로 전액 지급된다. 주제나 금액에 제한이 없고 보고서나 독후감 등 부담도 없다. 한 해 2,500만 원 정도가 책값으로 나가니 직원 한 사람이 평균 100만 원어치의 책을 사서 읽는 셈이다. 마케팅 담당 함동철 씨는 “작년에 책값으로 70여만 원을 지원받았다”면서 “회사 안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전했다.
3년 전부터는 젊은 직원들 사이에 ‘책사모’라는 동아리가 만들어져 아침저녁으로 책을 읽고 난 뒤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 부회장은 ‘그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처음 쭈뼛쭈뼛하던 책값 결제 신청이 시행 10년이 지난 지금 자율로 이뤄지듯이 책동아리 역시 특별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_ chapter 13 “뉴턴의 사과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_‘독서경영’ 이메이션코리아 대표 이장우” 중에서
과일 333억, 우유 449억. 도서 10억. 2002년 국방비 16조 3,640억 원 가운데 도서비는 0.006퍼센트다. 그나마 일관되게 0.003퍼센트를 유지하다가 두 배로 올렸다. 이후 도서비는 10억 원선을 유지하고 있다. 10억 원을 육해공 3군으로 나누면 3억 3천만 원정도. 중대급에 풀면 19~20권꼴. 한 해 한 번 보급하는 ‘진중문고’는 그래서 20권 한 질이다. 책에 목마른 일선 부대에서는 감지덕지다. 군인이 강인한 체력에 총만 잘 쏘면 그만이지 무슨 독서냐고?
8년째 병영 도서관 건립 운동을 펴는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민승현 본부장은 “군인들에게 반드시 책을 읽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군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사병은 2년여 동안만 군인입니다. 이들은 복무가 끝나면 우리 미래 사회의 주체들이죠. 그러므로 병역을 감당하되 그로 인해 고립, 퇴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병사 개인은 물론 국가의 손해죠.”
_ chapter 16 “군인도 총만 쏘고 살 수 없다_책나눔 운동의 결실 병영 도서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