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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미학 2020년 겨울호/ 이은희 수필가 집중탐구-지상인터뷰
살아온 시절의 회고
마당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이 아닌 마당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진 소중한 것들에 바치는 사모의 눈물입니다. 그나마 작가가 되어 회고할 수 있어 다행인가요. 나의 유년의 기억은 요즘 흔하지 않은 넓은 마당에서 시작됩니다. 어머니의 남다른 생활력 덕분에 뒷마당은 사십여 마리의 돼지와 셰퍼드와 토끼, 닭 등을 키워 동물농장 같았고, 축사 옆으로 바지랑대에 빨랫줄이 매인 마당에는 붉은 고추가 무량하게 널려 있었죠. 고추건조장에서 쪄낸 물고추를 마당에 널어 투명한 햇볕에 바싹 마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희나리를 가리러 오십니다. 마당은 아주머니들의 푸념과 하소연을 풀어놓는 수수한 공간이었죠. 언짢은 날은 한바탕 수다로 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셨지요. 동네 어르신들의 속내가 속속들이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우리 집 마당이었답니다.
저의 삶은 과거도 현재도 다복합니다. 다복하다는 말은 남들의 말인지도 모릅니다. 철이 일찍 든 칠 남매의 맏이로 바라본 현실은 자의든 타의든 미묘한 바람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죠. 한솥밥 먹는 식구가 자그마치 열 명. 함께 머물던 시절에는 식구가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답니다. 부모님과 할머니, 칠 남매와 가축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든 군식구들. 돌아보니 정녕 대식구입니다. 공무원 말단 박봉의 월급을 벗어나고자 어머니는 생활비를 보태고자 당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셨죠. 가축을 키우며 고추 건조와 동네의 일을 도맡아 애쓰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딸들은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식구들은 너나없이 집안의 숨탄것들을 챙기느라 바지런하였죠.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요일마다 당번을 정하여 가축의 먹이를 챙겼지요. 무엇보다 가축의 분뇨를 치우느라 몸에 밴 퀴퀴한 냄새는 오랫동안 코끝을 떠나질 않았답니다. 동물을 키우며 여러 애환도 있었지만, 겨울의 어느 날인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덩치 큰 어미 돼지가 이십여 마리에게 젖을 물리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놓았다면, 아마도 진귀한 사진으로 남았을 겁니다. 오랜 기간 함께한 돼지가 도축장으로 실려 가던 그날, 눈물 머금은 큰 눈망울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신작로까지 따라가 트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던 유년시절의 잊히지 않는 장면입니다.
딸 부잣집 딸들은 부모님의 과보호로 키워집니다. 집안에선 다양한 경험을 했을지 몰라도, 집 밖으로 놀러 다니지 못하여, 마음의 시선은 늘 문밖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반찬거리를 사러 육거리 전통시장에라도 가시면 우리들 세상이 됩니다. 딸들은 어머니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둠벙도 가고 과수원 친구 집에도 놀러 갑니다. 어머니가 돌아오셔서 여동생의 외출을 물어보셔서 시치미 떼지만, 우리는 탄로 나는 거짓말을 여러 번 하였죠. 딸들이 한통속으로 거짓말을 하는 걸 본 어머니는 면벽 수행자처럼 벽을 바라보고 책가방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는 벌을 내리십니다. 당신이 외출하실 때 대문 안과 밖을 싸리비 비질을 해놓고 나간 걸 성장에서야 알았답니다. 비질한 마당에 자매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던 걸 몰랐던 거죠. 당신의 감금 아닌 감금 덕분에 집밖의 세상을 무시로 동경했습니다. 또래가 둠벙으로 달려가 마름을 잡았다든가. 행운의 클로버를 찾아가며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었다는 말을 듣는 날엔 자유가 그리웠지요. 지금도 유년의 꿈이 이어져 끝없이 자유를 꿈꾸는 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와 함께한 차마 웃지 못 할 추억도 떠오릅니다. 학창시절 할머니와 한방을 쓰고 있어 친구처럼 ‘혼자만의 조용한 방을 갖고 싶다.’라는 소원을 일기장에 적어 책상 속에 감춰두었던 순수한 시절 이야기입니다. 시험 공부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방바닥에 펴놓은 교과서와 노트가 없어져 울고불고한 모습이 정지된 화면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종이를 네모반듯하게 찢어 할머니의 밑씻개로 전락한 책과 노트를 본 아버지가 자물쇠 달린 양철 책상을 사주셨지요. 밥상이 책상 대신이었는데, 할머니의 치매 덕분에 책상도 얻고 애지중지한 나만의 비밀창고가 생긴 거지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품은 나의 푸른 시절은 작가의 길로 가는 데 얼마간의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작가가 되어 푸른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는 글감으로 불러왔지요. 수필집 제목인「망새」와「버선코」입니다. ‘망새’는 아버지가 지붕에 앉아 기와를 손수 올리던 모습은 수호신인 불새로 형상화하였고, ‘버선코’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버선발의 코가 이불 밖으로 보여 잊히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유년시절 머물렀던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소중한 부모님과 할머니도 제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던 대상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뇌리의 잔상으로만 남아 더욱 그립습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무시로 들춰봅니다. 기와집 마당에서 가축을 기르며 겪은 자매들의 소소한 경험과 동네 어르신들의 귀동냥으로 얻은 인생사 등 향수어린 기억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무엇보다 중년이 된 여동생들과 다복한 그 시절을 글로 읽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등단 계기와 과정은?
작가의 길은 전혀 상상치도 못한 길입니다. 돌아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문학의 길로 인도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등단 무렵, 그리움의 절정에 달했던 것 같아요. 36살에 정신적 지주인 친정어머니를 여의고 마음을 붙일 곳 없어 부유하는 듯한 삶이었죠. 우연히 딸의 백일장에 따라갔다가 상을 받은 것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이어 공모전 여러 곳에서 수상하며 재능이 있는가 싶어 글에 미친 듯 몰입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내 안의 이야기를 풀어놓게 한 것 같아요. 아홉 권의 작품집 중, 첫 수필집에서 네 번째 수필집까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배어 있답니다. 그걸 지적한 분이 ‘수필미학’의 신재기 교수님이십니다. 2012년 신곡문학상 본상을 수상하며 심사평에서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소재에 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면,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학창시절 백일장에 나가 본 적도 없고, 문예반 근처도 가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책을 좋아하여 늘 책을 빌리러 다녔고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동네 과수원집 친구 언니가 지닌 문학 전집을 읽고 싶어 어머니를 수없이 팔았지요. 소녀시절에 남들도 그렇겠지만,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시(詩)를 노트에 필사하며 암송하였지요. 특히, 고교 ‘성녀’ 축제에 시작 노트를 전시하여 서정의 마음을 이어갔던 것 같아요.
여상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다달이 오천 원의 용돈에서 삼천 원짜리 책을 사서 보았지요. 범우문고에서 나온 법정 스님의 ‘무소유’나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이해인 시인의 시집 ‘내혼에 불을 놓아’ 등을 가슴에 품고 설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그날, 직장 동료들이 책을 좋아하는 나를 두고 십만 원 내기를 했다고 해요. ‘무소유’ 초판본을 가지고 있느냐는 기분 좋은 에피소드입니다.
경영학을 전공한 나로선 글을 잘 쓰려면, 글에 미칠 수밖에 없었답니다. 좋은 작품을 낳고자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라고 잠을 줄여 몰두할 수밖에 없었지요. 주경야독으로 문학에 할애한 시간과 무모한 열정 덕분에 수필「검댕이」로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죠. 당선 특전으로 ‘월간문학’에 등단하며, 수상금으로 바로 첫 수필집『검댕이』를 발간하였습니다. 현재 아홉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고, 등단 16년 차니 거의 2년에 한 권의 작품집을 발간한 격이죠. 작가가 되어 삶을 돌아보며 가슴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음을 알았고, 그 사실에 스스로 놀랄 뿐입니다.
문학 공부와 관련 영향을 받은 인물이나 만남은?
여러 공모전에 입상하며 날이 갈수록 ‘수필’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답니다. 내 마음을 읽은 남편이 서점에서 사 온 수필이론서가 한상렬 선생님의 ‘수필 읽기와 창작’입니다. 이 책을 형광펜으로 밑줄 그며 읽고 또 읽으며 습작을 했지요. 그러다 한 발 더 나아가 문을 두드렸죠. 한번 뵌 적도 없는 선생님께 이메일로 자신을 소개하며 글을 지도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드렸답니다. 선생님의 승낙으로 이메일 첨삭지도를 받게 된 겁니다. 해를 더할수록 선생님은 ‘수필에 미친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가 귀찮을 정도로 작품을 보내도 묵묵히 수필을 향한 목마름을 해갈해주시고, 무모한 열정의 사람을 조련하여 문인으로 키우신 분입니다. 수필을 목숨처럼 여기는 선생님과 함께 가는 ‘수필의 길’이 즐겁고 든든합니다.
문단의 입문에 도움을 주신 또 한 분은 동서커피문학상이 맺어준 귀한 인연, 김우종 선생님이십니다. 역대 수상작 중 수필이 전 부문 대상을 받은 건 처음입니다. 그런데 수필 ‘검댕이’를 보시고 이보다 더 나은 작품이 있느냐고 심사위원분들에게 되물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지방의 촌부 ‘이은희’를 문단의 샛별로 만들어주시고, 제2의 인생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들으며 오래오래 뵈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현재 직장에 매여 문단 활동은 제한적입니다. 작가로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전문지 원고 청탁에 응답하며 주어진 연재 글을 성심껏 게재하는 일이었지요. 그러니 전국에 계시는 수필가의 모습과 삶을 모를 때가 많고, 얼굴이 아닌 글로 인사하고 반가워합니다. 그렇게 지면에 오른 작품을 보고 칭찬과 문기(文氣)를 불어 넣어 주신 분이 바로 김애자 선생님이십니다. 늘 지혜로운 말씀과 베푸시는 살뜰한 정이 친정어머니의 마음처럼 느껴져 좋았고, 무엇보다 당신의 수필적 삶의 모습을 닮고 싶은 분입니다. 그리고 청주 촌사람을 ‘현대수필’로 불러 ‘구름카페문학상’을 수락해주겠느냐고 물어 작가의 격을 높여주신 윤재천 교수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수필세계』지면을 안방처럼 내주신 홍억선 선생님과 좋은 글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다정다감하신 최원현 부이사장님, 부족한 제자 자랑에 침이 마르고 글쓰기 지도자로 거듭나도록 이끈 강전섭 청주문화원 원장님이 계십니다. 이 분들이 계셔서 작가의 길이 풍요롭고 탄탄해졌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분이 많은데 누가 될까 적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마음속 그분들을 사모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세계는?
거창하게 문학세계라고 할 것까진 없습니다. 저에게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지인 몇 분에게 직장 생활하며 야학(혜안글방)으로 재능을 나눠드리고 있답니다. 그분들에게 잊지 않고 하는 말이 있어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적어도 글 100편 이상을 써야 작가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래 세 가지를 바랍니다.
첫째, 작가는 기본기가 탄탄해야만 한다. 좋은 작품집을 필사와 다독으로 문장력과 어휘력을 길러야 합니다. 둘째는 작품에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신변잡사로 시작하지만, 신변잡기로 끝나면 안 된다. 일상에서 낚은 글감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개성적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거나, 낯설게 형상화해야 문학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작품의 공유이다. 수필전문지나 매체의 지면을 확보하여 변함없이 글을 발표하여 독자와 소통해야 한다. 글을 써놓고 책상 속에 박아둔다면 기록이나 일기에 불과한 글입니다. 저의 바람대로 혜안글방 제자들은 국내 유수 문학상을 거머쥐고,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진정한 문인으로 거듭나고 있어 보람됩니다.
저는 오래된 물상을 좋아합니다. 틈만 나면,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찾아 사찰 기행을 떠납니다. 나를 찾는 사색의 공간으로 사찰만큼 좋은 곳이 없답니다. 절집을 오래 서성이며 물상이 주는 고유한 결을 느끼며 사유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습관은 일상에서 부딪는 모든 것에서도 숨결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수필집『결을 품다』에 실린 ‘꽃결, 사색의 결, 바람의 결, 전통의 결, 삶의 결’은 길 위에서 만난 무량한 숨탄것들의 ‘결’의 집합입니다. 더불어 인간의 마음결을 어떻게 다듬어 가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또한, 18, 19세기 고전 산문에서 선인의 삶과 좋은 문장을 발췌하여 그 느낌을 나만의 해석으로 적고 있습니다. 내 삶의 철학과 경험을 빚어 ‘이은희의 수필여행법’이란 제호로 계간『수필세계』에 6년째 연재하고 있답니다. 고전 산문에서 조선 지식인의 민낯도 발견하고 시대의 아픔과 고민, 분노 등을 함께합니다. 글 속에서 드러난 인간의 애증과 희로애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책 속 인물 중 책 읽기를 너무나 좋아하여 ‘책만 읽는 바보’라고 불리는, 스스로 ‘간서치’란 호를 지은 이덕무를 사모합니다. 저도 머지않은 미래에 원 없이 책만 읽는 그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간서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밥보다 책을 끼고 살았던 진정한 문사입니다. 나의 무딘 감정에 열정을 불어넣은 조선 지식인입니다. 또한,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있다면, 다산과 추사의 유배일기가 있지요.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억울함과 분노가 폭풍처럼 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훌륭한 제자 배출과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한국의 문화유산인 ‘세한도’를 그렸을 정도로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예술가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았던 세 분의 문장가를 자주 만나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더불어 소망하지요. 세파에 꺾이지 않는 문사가 되기를.
작가의 대표작과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대표작은 이은희를 문단의 샛별로 만들어준 수필「검댕이」입니다.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역사상 수필로는 처음으로 전 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고, 아직도 그 신화가 깨지지 않았답니다. ‘검댕이’는 대학교 수필 창작반에서 교재가 될 정도였지요. 무엇보다 ‘검댕이’는 삶의 굴레에서 종종거리던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게 해준 작품입니다. 글쓰기는 고속 질주하던 삶을 멈춰 자신을 돌아보게 한, 팍팍한 일상에 숨을 쉬게 한 시공간입니다.
‘일상의 불멸의 순간을 담는다.’라는 생각으로 글쓰기에 매진합니다. 운 좋게도 출간하는 수필집마다 국내 유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2017년 선우미디어 이선우 대표가 마음을 다하여 출간해준 사진 수필집『결을 품다』는 하나의 작품집으로 세 개의 문학상을 받았지요. 또한, 독자의 사랑으로 지난봄에 3쇄를 찍었답니다. 최근 전국수필전문지에 발표한 작품 중 최근에는『계간수필』에 발표한「묘시」가 주목받았고,『에세이문학』에 발표한「빗살」이 계간 평을 받아『선수필』에 재수록 되었답니다.
저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됩니다. 낮과 밤의 푸르스름한 경계의 하늘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묘시’를 혼자만의 시간처럼 애용하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유년시절 마당 넓은 집을 그리워한 덕분일까요. 아니 열심히 살아온 저의 삶을 신도 공감하여 흙 마당처럼 꾸밀 수 있는 공간을 하사하신 것 같습니다. 24층 복층 아파트에 마련한 하늘정원에는 토종 꽃과 나무가 백여 종이 넘습니다. 이른 봄부터 초겨울까지 저의 손길로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생장하고, 무엇보다 식물들은 저의 심성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마법 같은 시공간, ‘묘시’에 일어납니다.
‘빗살’은 아름다운 사찰 여행 중에 만난 비에 관한 통찰이라고 할까요. 팔작지붕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시각과 청각 아니 온 감각의 세포를 일으켜 감성과 운치가 넘치는 날이었죠. 하지만, 바닥에 꽂히는 빗살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말에 삶을 되돌아본 글입니다. 이렇듯 영감은 일상이나 기행, 독서 중에도 번뜩이는 섬광처럼 스쳐 갑니다. 글감을 잡고자 저의 ‘묘계질서’는 끝이 없을 겁니다.
수필가들에게, 수필을 배우는 예비 작가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은가
수필은 “사유의 보궁(寶宮)” 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수필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심오한 철학과 사상이 밴 사유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글쓰기 전 맑은 영혼의 자세로 임해야 하고, 글은 바로 그 사람이기에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수필은 작가에겐 성찰의 기회를 독자에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탐구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전문지에서 작가를 무수하게 배출하고 있지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합니다. 글 몇 편 가지고 등단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수필의 질을 떨어트리는 격입니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 공모전 등 등단의 기회는 많습니다. 작가가 꿈이라면, 글을 쓰고 싶다는 애달픈 마음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작가’라는 업(業)은 한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유하는 업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하루라도 워드에 글을 끼적이지 않으면 ‘글맥’을 잃어버립니다. 또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저도 생업에 매여 이루지 못한 일에 불편한 마음이 든 적이 여러 날입니다. 자신을 수시로 담금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니터에 붙은 메모지 글귀를 수시로 마음에 새깁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적어도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콤 글래드웰의『아웃라이어(Outliers)』1만 시간의 법칙은 하루에 3시간씩, 일주일에 20시간, 10년을 할애한 시간이지요.’ 나무의 나이테가 해마다 촘촘히 쌓여가듯 ‘엄청난 노력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한 분야의 대가(大家)가’ 될 수 있답니다. 대가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작가로서 글쓰기 기본자세는 갖춰질 겁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실력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고, 당신은 뭐라도 쓰고 싶어 참을 수 없게 되고, 글의 마력을 실감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수필적 삶을 살다 보면, 좋은 글감이 섬광처럼 찾아오리라 봅니다. 정녕코 문학은 개인의 심심풀이가 아닌 보배롭고 귀중한 삶의 선물입니다.
문학인으로 보람된 일과 아쉬웠던 점은?
저는 청주 토박입니다. 청주에서 태어나고 수학하고 직장 생활하고 있습니다. 작가로 활동하며 향토 문인으로 고향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2006년 청주문화원에 입회하며 청주문화와 문화유산에 관심이 깊어졌지요. 무엇보다 나의 글감들이 대부분 오래된 물상에 머물고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세월의 더께에 낡은 빛이 드러난 예스러운 멋과 고유한 결을 좋아합니다. 마침, 계간『수필미학』에서 한국의 역량 있는 중견 수필가에 선정되어 전통문화유산 관련 수필을 엮어 수필선집『전설의 벽』을 엮었답니다. 그리고 충북일보에서 한 지면을 내줘 충북문화유산을 직접 찾아보고 느낀 전통의 미와 고유한 결을 ‘이은희의 결’이란 제호를 달고 글과 사진을 삼 년간 연재하였습니다. 연재한 글을 엮은 수필집이 바로, ‘이야기가 있는 충북문화유산’『문화인문학』입니다. 이 책이 충북의 문화유산 기행서가 되길 바라는 바람이 컸지요.
드디어 소원하던 일을 ‘2019년 대한민국 독서대전’에서 이뤘지요. 청주를 방문한 관광객이 청주문화기행 지침서가 된『문화인문학』을 한 권씩 들고 작가의 삶과 문화재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로 청주문화유산 탐방을(고인쇄박물관-용두사지철당간-정하마애불-정북토성) 하였답니다. 문화유산을 돌아보며 독자와 즐겁게 소통한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행사가 외지인들을 위한 행사여서, 기행을 함께하고 싶어 달려온 청주 시민 가족을 돌려보낸 것이 제일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청주 시티 투어도 지역작가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예술 외에 하고 싶은 분야는?
저는 새벽형 인간입니다. 새벽 5시, 겨울날 묘시는 어둠 그 자체입니다. 겨울잠에 든 동식물처럼 봄을 기다리며 서재에서 침잠합니다. 직장을 다니며 글을 쓰려면, 시간 관리가 중요합니다. 봄부터 초겨울까지는 묘시의 하늘정원에서 장자의 ‘소요유’를 누리며 한 시간여 나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 시간만큼은 무념무상을 원하지만, 꽃과 나무를 매만지며 질문만 늘어갑니다. 작가가 되고는 질문하는 인간의 삶, 바로 그것이죠.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이유와 의미를 묻고 찾아가는 것. ‘문인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자문하지만 답은 얻어지지 않습니다. 단, 하나는 남들과 똑같은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요. 남다른 주제와 행보로 삶의 문화를 남기고 싶습니다. 더불어 문학을 통하여 주변과 소통하며 위로하는 삶이길 원합니다.
제자 한 분은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글쓰기를 하며 삶의 변화가 일었습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생활의 변화가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선 소감에서 ‘작가님은 자신을 음지에서 양지로 빛을 보게 해준 사람’이라는 그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되돌아보면, 문학을 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주변을 두루 살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작가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수년 전부터 서예가와 가야금 연주가, 도예가, 무용가 등의 전시와 공연에 문학과 협연하여 시너지 효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스마트경영포럼의 문화예술지원분과 위원장을 맡아 기업과 지역 문화를 공유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만35년 재직하며 몸소 얻은 경험으로 기업과 지역민이 소통하며 상생하는 문화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 작업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미약한 재주를 보태어 청주가 기록 문화, 문자의 성지답게 문화예술 도시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코로나로 묵언 수행자처럼 칩거하는 예술가들에게 힘찬 기운을 보냅니다. 문학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손잡고 나아가겠습니다.
【작가 연보 및 문단 경력】
-1967 충북 청주 출생
-2001 충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졸업
-2004『월간문학』지에「검댕이」로 등단
-2009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학사 졸업
-2009 독서논술지도사 자격 취득
-2009 국립청주박물관(박물관 연구과정) 이수
-2019 ‘2019년 대한민국 독서대전’ 향토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기행 기획 및 진행 (이야기가 있는 충북문화유산 수필집『문화인문학』)
-1985~현재 (주)대원 전무이사로 재직
-2005~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및 제27대 문학생활화위원회 위원 임명(2019)
-2005~현재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및 감사(2019~현재)
-2006~현재 청주문화원 정회원 및 부원장 임명(2019년~현재)
-2012~현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2003~현재 에세이포레문학회 회원 및 문학회 회장(2018~현재)
-2014~현재 계간『에세이포레』편집장
-2014~현재 혜안글방 운영 (재능기부로 후학 양성)
-2015~현재 계간『수필세계』‘이은희의 수필여행법’ 연재
-2018~현재 충청투데이 ‘에세이’란에 연재
-2018~현재 격월간『그린에세이』‘한국의 무늬, 이은희의 결을 찾아서’ 연재
-2020~현재 (사)스마트경영포럼 문화예술지원분과 위원장
【수상 및 지원금 수혜】
-2004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수상
-2009 충북개발공사 문학창작지원금 수혜
-2011, 2014, 2017 충북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 3회 수혜
-2014 계간『수필미학』한국수필문단의 역량 있는 중견수필가 선정, 수필선집『전 설의 벽』출간
-2018 구름카페문학상 수상집『춤추는 처마』출간
-2004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전 부문 대상 수상
-2007 제13회 제물포수필문학상 수상
-2010 제17회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12 제17회 신곡문학상 본상 수상
-2013 제1회 국립청주박물관 사진공모전 금상 수상
-2013 제8회 충북여성문학상 수상 (동양일보)
-2013 제4회 민들레수필문학상 수상
-2015 제6회 김우종문학상 본상 수상
-2016 청주문화인상 수상 (청주문화원)
-2018 제14회 구름카페문학상 수상
-2019 제6회 에세이포레문학상 수상
-2019 제5회 박종화문학상 수상
-2019 충북도지사 표창장 수상 (사회공헌)
【작품집】
-2004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수상집『검댕이』
-2005 수필집『검댕이』
-2007 수필집『망새』
-2009 수필집『버선코』
-2011 삽화가 있는 수필집『생각이 돌다』
-2014 사진 수필집 『결』
-2014 수필선집『전설의 벽』
-2017 이야기가 있는 충북문화유산 수필집『문화인문학』
-2017 테마 사진 수필집『결을 품다』, 2019년 11월 『결을 품다』3쇄 발행
-2019 구름카페문학상 수상집『춤추는 처마』
첫댓글 1만 시간의 법칙 유념하겠습니다.
남다른 주제와 행보로 삶의 문화를 남기고,
문학을 통하여 주변과 소통하며 위로하는 삶이길 원하는 선생님의 소망을 응원합니다. 선생님의 삶의 이야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순옥 선생님, 어쩜 그리 맛있는 댓글을 다세요. 같은 작가지만,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는 일은 쉽지 않지요. 이 또한 주변과 소통하는 일이지요. 좋은 작품 많이 낳으시길 바래요. 고맙습니다.
수필미학에 집중탐구로 게재됨을 축하드립니다.익히 아는 부분도 있었지만 집중탐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것도 많았습니다.오늘이 있기까지는 대상에 대한 깊은 탐구와 치열한 작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겁니다. 집중탐구를 계기로 더욱 비상하는 작가님이되소서.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 진심어린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집중탐구 소식을 받고 부감이 컸지요. 고민 끝에 내가 추구하는 대로 진정성 있게 소개하자고 생각했지요. 덕분에 문학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자 새롭게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평소 이은희 선생님을 뵈면 저 일을 어찌 다 이루어낼까 불가사의하다 생각해 왔지만, 오늘 이렇게 수필미학의 집중 탐구를 통해 다시 바라본 선생님의 삶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집니다. 치열한 작가정신, 나를 담금질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꼿히네요. 쥐구멍에 얼굴을 묻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 부끄러워요. 그저 좋아하는 일이라 지칠줄 모르고 하고 있어요.선생님과 함께 글쓰며 공감할 수 있어 좋아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