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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63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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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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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3NA7JmCp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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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믿음의 방패를 꼭 붙잡고, 구원의 투구를 꽉 쓰고, 성령의 칼을 단단히 쥐어야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 저곳, 그리고 오늘 우리네 삶 한 가운데에,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굳게 현존하시는가 하면, 성령을 거부하고 모독하는 악의 세력, 악령 역시 존재함을 확연히 느낍니다.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크게 환영하고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러나 몰지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고발하고, 궁지로 몰아넣고, 죽이려고 기를 썼습니다. 여우같은 헤로데 역시 합세했습니다.
보다 못한 의로운 바리사이 몇 사람이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다가와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복음 13장 31절)
걱정은 고맙지만 보잘 것 없는 군주 헤로데에게 굴할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헤로데를 비롯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34절)
주변을 유심히 돌아보니 우리 가운데도 악의 세력이 버젓이 존재하고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눈만 뜨면 하는 일이 가짜 뉴스 유포요, 선량한 국민들 분열시키기 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 악령들입니다.
입을 열 때마다 공동선을 파괴하고, 움직임 하나 하나가 민폐인 적폐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어둠의 세력이 분명합니다. 남북 분단 고착화 세력들, 토착 왜구들, 범국민적 암 유발 당원들...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명백한 악의 세력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악이 넘쳐나는 이 시대,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를 위해, 2천년전 바오로 사도께서는 어떻게 악에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좋은 지침을 내려주셨습니다.
①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②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③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십시오.
④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⑤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⑥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⑦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⑧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악이 창궐하는 시대 부디 굳세어지라고 당부하십니다. 굳세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은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총이나 칼이나 창과 같은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기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힘도 세상의 힘,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힘, 온유의 힘, 성령의 힘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악령이 쏘는 불화살의 파워는 만만치 않습니다. 사악하고 교활합니다. 천개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 유혹하면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갑니다. 그 화살을 막고 악령과 싸워 이기기 위한 복장을 단단히 갖춰야겠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꼭 붙잡고, 구원의 투구를 꽉 쓰고, 성령의 칼을 단단히 쥐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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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는?>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s79PpkQY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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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 생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려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십니다. 그 이유가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뜻에 지배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 안에 머물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기실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신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당신 모든 것도 내어주십니다.
예전에 공원 원두막에서 친구들과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개 한 마리를 줄로 끌면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는 남자 청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개의 목줄이 자전거 바퀴에 걸리며 작은 개는 바퀴를 따라 한 바퀴 빠르게 돌더니 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위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개는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청년은 저희가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도 피 흘리는 개를 흔들며 오열하였습니다. 저는 ‘저 사람이 부모가 죽어도 저렇게 오열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개 한 마리가 무엇이길래 한 청년을 오열하게 했을까?’라는 생각으로 넘어갔습니다. 왜 그 청년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개를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것일까요? 청년은 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습니다.
동물들은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같은 모양으로 생겼어도 자신의 새끼를 더 사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기적 유전자』를 쓴 사람과 같은 진화론자들은 그 이유가 자신의 새끼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유전자를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부모가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유전자 복제를 하여 나와 똑같은 인간을 만 명 정도 만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에서도 나오고 가까운 미래에 이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와 똑같이 생기고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바보가 될 수 있을까요?
영화 ‘그램린’(1984)은 기즈모라고 하는 작고 예쁜 동물이 12시가 넘어 음식을 먹으면 생겨나는 것으로 어쩌면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썽을 부리자 기즈모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들이지만 그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합니다. 만약 나의 자녀가 히틀러나 빈 라덴이 되어 세상에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리고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라면 자식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들을 두둔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복제되어 단순히 나의 DNA를 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DNA를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자식이 악함을 알면서도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주장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간이 후대에 전달하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뜻’입니다. 모든 동물은 자기 뜻을 따라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생존본능 이외의 뜻은 모두 부모를 통해 부여받습니다. 어떤 아기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서 자란 아기가 스스로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기는 어떤 동물이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의 뜻을 물려받고 그런 모습으로 자라게 됩니다.
부모도 아기가 자기 ‘뜻’을 따라줄 것을 압니다. 자기도 그렇게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예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개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면 그 개는 분명 그 주인의 뜻을 어떤 개보다도 잘 따라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받는 방법은 그 대상의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 안에서 자신의 뜻이 담겨있는 것을 보며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뜻이 길이 보존되게 하려고 자녀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합니다. 자기 뜻을 따라주는 대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사랑은 내어주게 만드는 힘입니다. 만약 위의 청년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 개를 위해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은 당신 뜻을 따라주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당신 영원한 생명까지 내어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선착장 옆을 지나가던 빨간 자동차 한 대가 가드레일을 받고 바닷물 속으로 빠졌습니다. 주변 시민들은 물속으로 뛰어내려 먼저 할머니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물이 반쯤 차오르는데도 자신의 반려견을 먼저 구해달라고 창문 틈으로 내밀었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도 구조될 수 있었지만, 이는 자신의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선택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개가 할아버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소중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DNA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뜻을 따라주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해야 그 대상의 뜻을 따라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뜻을 따름은 하나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의 뜻을 따라주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보상이 달라집니다. 늑대의 뜻을 따라주면 늑대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늑대가 주는 보상입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주면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뜻을 따라주면 하느님 자녀의 모든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죽음 앞에서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던지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당당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이 따라주는 뜻을 주시는 분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의 뜻을 따라야 신이 줄 보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개가 주인의 뜻을 따라주면서 먹을 걱정, 잘 걱정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본성적으로 하느님께서 가진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은 당신의 뜻을 따라주는 이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보상으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물 위를 걸을 마음이 생겨날 수 없지만, 하느님은 그런 뜻을 강요하십니다.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 뜻은 아드님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 목숨을 바쳐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뜻을 알려주시기 위해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것이 이 앞 내용에 나오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그 좁은 문인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 뜻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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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13,31-35 :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했건만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31절). 바리사이파 사람이 와서 이렇게 일러드린 것은 어제 복음 말씀에서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올바로 살지 않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셔서 예수님께 증오의 불을 댕겼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르게 되면 지도자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님께 떠나라고 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헤로데를 두고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32절) 그 여우는 자기 자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젖먹이들을 학살했다. 젖먹이로 태어나신 말씀 대신 죄 없는 젖먹이들을 죽였던 것이다. 그 아기들은 입으로 주님을 고백할 수 있기도 전에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바친 맏물들이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32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까봐 염려했던 일을 하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 육신의 죽음을 겪으실 것인지 다 알고 계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33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많은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많은 도시임을 밝히시면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도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져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가벼이 여긴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34-35절)
그분은 모세를 시켜 그들을 가르치셨고, 바른 몸가짐과 칭송받을 만한 삶의 인도자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그림자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경배의 예형이 들어있다. 그분은 거룩한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타이르셨다. 그렇게 당신 날개 아래에서 당신의 권능으로 지켜 주려 했으나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축복을 잃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35절)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당신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님을 우리에게서 밀어내지 않고 그분의 뜻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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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평화로운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도시가 함락되어 성전이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약 100년 뒤에 도시가 재건되었으나 이후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 주변 강대국에게 침탈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요?
예루살렘은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우상 숭배를 마다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를 비판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지만, 그곳 주민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거나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루카 19,42)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들 가운데 최고의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곳에서 목숨을 바치시고자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그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곳 골고타산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시며 평화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또 그곳에서 부활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라고 인사하시며 당신의 평화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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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무기력하게 목숨을 ‘빼앗긴 일’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일’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7-18)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나,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같은 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서 ‘권한’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당신의 권한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 권한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내놓는 일’은 ‘빼앗기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박해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실 때 그 일의 진행을 거들어 준 도구가 된 셈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설명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살인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 2,2) 그 제물에 대한 권한은 아버지 하느님에게만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과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신비’에 속한 일, 즉 하느님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가 우리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생활도 각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바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신앙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봉헌’은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바치는 일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봉헌한 분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착취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사랑으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 백성의 여론을 걱정했습니다.(마태 14,5) 요한을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자기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고 슬퍼했더라도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리사이 몇 사람’은 헤로데가 보낸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라는 말은, 아마도 실제로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 라는 협박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헤로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여우’ 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교활함을 꾸짖으신 것이기도 하고, 헤로데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과 내일”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 기간을 가리키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가리킵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그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요한 7,30) 여기서 ‘그러나’는 ‘그렇기 때문에’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에 관해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일이 실패로 보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는 것뿐이고, 그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넓은 뜻으로
‘하느님께서 어떤 임무를 맡겨서 세상에 보내신 사람’을 모두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도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은 헤로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임무 완수를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으신 특별한 도시입니다(루카 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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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를 보았습니다. 긴박감도 있고, 짜임새가 있어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미국은 테러와 사고의 위험을 대비해서 큰 행사로 정부의 요인들이 참석하는 경우 대통령 직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테러로 인해 대통령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 요인이 사망했고, 지정생존자가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 생기는 사건과 대통령의 지도력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기자가 대통령에게 불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참모 중에 한 명은 사실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참모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정면 돌파의 방법도 있고, 위기를 피해가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정성’이었습니다. 드라마의 곳곳에서 위기를 ‘진정성’으로 극복하는 대통령의 지도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실의 정치는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대통령 후보의 토론회를 보았습니다. 정책이나 신념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언어의 선택에도 품위와 인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미국의 언론에서도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낮은 토론회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한국은 언론과 정치의 수준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정확한 사실을 검증하지 않고 보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기보다는 당리당략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성이 결여된 언론과 정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비판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언론과 정치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같이 가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이 일해야 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고, 정치인이 싸워야 할 대상은 외부의 적들입니다. 누워서 침을 뱉는다는 말처럼 정치인이 서로 싸운다면 싸워야 할 대상을 잘못 고른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보다는 다른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싸운 적이 많았습니다. 믿음, 성령, 진리, 구원의 확신에 의지하기보다는 권력, 재물, 명예에 의지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가야하겠습니다. 비록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십자가와 죽음이 기다릴지라도 우리는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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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갈림길에서>
루카 13,31-35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다)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갈림길에서>
죽음 이후로 건너가기 위해
죽음으로 끝나야 할
삶의 길을 걷습니다
그 끝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한결같이 걸어야 합니다
누군가 말할지 모릅니다
지금 끝 앞에서 서있으니
길을 돌아가라고
지금 그 끝에서 벗어나려고
길을 돌아가는 것이
지혜롭다는 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돌아선 삶의 길은
끝을 잠시 미룰지언정
이미 삶의 길이 아닙니다
두려움으로 죽음에 무릎 꿇은
돌아선 삶의 길은
죽음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길은 언젠가
죽음 이후로 넘어가기 위해
죽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삶의 길을 걷느냐
죽음의 길을 걷느냐
매순간 맞이하는
갈림길에서
또 한걸음 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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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최영균 그레고리오 신부님]
강영구 루치오 신부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루카 13,31-35
<下覽閑江 (하람한강)>
저는 몇 년 전 낙동강변에 있는 ‘가르멜의 모후 수녀원’에서 살았습니다. 사제관은 낙동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너무나 고요해서 전율할 지경이었습니다. 그토록 큰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3급수도 안 되는 혼탁하고 더러운 강물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 갖가지 부유물과 죽은 것들을 안고 강물은 소리 없이 바다로 향해 흐릅니다. 그래도 그 강물은 살아있을 뿐 아니라 낙동강변에 살고 있는 2천만 시민들의 생명의 물입니다.
저는 사제관의 옥호를 하람한강(下覽閑江), ‘도도하게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는 집’이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저 강을 닮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여우같은 헤로데가 큰 강 같은 예수님의 길을 어찌 막을 수 있습니까? 권모술수와 온갖 책략,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헤로데가 시끄럽게 흐르는 작은 시궁창 물이라면, 예수님은 바다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는 큰 강물입니다.
예수님은 큰 품 안에 썩은 것, 병든 것, 죽은 것들을 품고 바다로 흘러가 그것들을 정화하고 다시 살려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행복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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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압돈 압돈 신부님]
<핑계 >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곤합니다. 핑계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방패막이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미사에 빠진 이유에 대해 주위에 성당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웁니다. 실제로 성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찾아 봤는데 자기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핑계는 대부분 잘못된 일에 대해 다른 것의 탓으로 둘러대는 변명입니다. 우리는 이런 핑계를 찾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핑계 꺼리를 찾고 핑계를 대는 걸까요?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럴 때 든든한 방패막이가 하나쯤 있으면 훨씬 수월합니다.
그러나 변명, 핑계라는 방패막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어려움을 정당하게 헤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도 핑계만 대고 있다면, 어린아이가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때 쓰고 있는 장면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일을 해야 되는데 핑계 꺼리가 있어 피해 갈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게 우리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이 잔을 제게서 거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실 만큼 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핑계를 대고 안했으면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좋은 핑계 꺼리를 제공해 줍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나는 내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핑계를 댈만한 꺼리를 주지만 그 모든 것을 마다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 일이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돌로 치는 그곳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그 심장부에서 바로 하느님의 뜻을 보여 주시려 모든 것을 헤쳐나가십니다.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두려움이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부에서 하느님 뜻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핑계라는 방패막이를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나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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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서품을 받으면, 첫 소임지로 발령받기 전에 선배 신부님들 본당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첫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데 그때 평소 존경했던 신부님 본당에서 첫 미사를 한 뒤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신부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신부로 잘사는 겁니까? 이제 막 신부가 된 저희에게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죽을 때까지 신부로만 살면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라, 돈을 멀리해라, 세상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등등, 어떻게 살라는 말은 전혀 없이 말입니다. 그냥 신부로만 살면 된다는 말은 너무 쉬운 말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 후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습니다. 신부로 죽을 때까지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계속된 자기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신부로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의 엄청난 노력이 그리고 주님의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신부로 살기 힘들며, 주님의 사랑 없이도 신부로 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는 신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배우자로 산다는 것도,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도, 자기 삶의 일터에서 생활하는 것도, 그 밖에 나의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모두 죽을 때까지 그 모습으로 살기 위해는 자신의 노력과 주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가능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그들은 주님 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호의적인 듯 보이는 그들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사탄과 질병과 죄의 사슬에 묶인 자들을 풀어 주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증거하고, 십자가 수난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주님의 변하지 않은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 구원의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를 뛰어넘어 돌아가신 후에도 당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그 너머까지 지금의 나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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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힘내세요.>
갑곶성지의 초창기 때, 우리 성지에도 지하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하수 파는 업자를 불러서 물을 찾도록 했지요. 더군다나 순교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있었던 우물터가 있었기에 지하수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지하수를 파는 업자도 분명히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마실 수 없는 바닷물이 나와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포기한 상태에서 어떤 신부님께서 성지를 방문하셨습니다. 이분은 물이나 수맥을 찾는데 아주 유명한 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제까지 지하수를 파기 위해 고생했지만, 지금은 포기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도구를 가지고 한참을 살펴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조금만 더 팠으면 좋은 지하수가 나왔을 텐데 왜 포기했냐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다른 일이 더 급해서 지하수를 파지 못했지만, 그때 신부님의 말씀은 항상 기억하게 합니다. 포기하려는 순간에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만 더 힘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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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전투>
-주님의 전사-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거의 40년 동안 제가 한결같이 좋아한, 또 수없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영적전투-주님의 전사-’였고 오늘의 강론 주제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계속 영적전투중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의 수도승의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 주변에서 참 대단한 주님의 전사들같은 자매들을 대할 때는 전우애를 느끼며 용기백배하기도 합니다. 정말 평생을 주님의 전사로 하루하루 치열히 살 때 우울증이나 치매는 전혀 걱정안해도 될 것입니다. 행여나 치매에 걸린다 해도 주변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고운 치매, 예쁜 치매가 될 것입니다. 예전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대화도 생생합니다.
-“제 남편은 전우입니다.”
“맞습니다. 전우끼리 전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과의 영적전투도 힘겨운데 부부의 전우끼리는 절대 심하게 싸워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부끼리의 심한 싸움은 자중지란, 세상과의 영적전투에 치명적입니다. 아무리 세상살이 힘들어도 부부끼리의 전우애의 일치가 견고하다면 영적전투에 백전백승일 것입니다. 감히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지요.”-
부부만이 아니라 우리 수도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의 전사로서 전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전 아빠스님은 기상 시간이 출근 시간이고 취침시간이 퇴근 시간이라 했는데 저에겐 기상 시간이 영적전투가 시작되는 시간이고 취침시간은 하루의 영적전투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새벽 3시가 영적전투 개시 시간이라면 지금은 새벽1시, 그리고 오후 8:30분이면 영적전투가 끝나 잠자리에 드는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인생은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힘듭니다. 첩첩산중, 살아갈수록 힘듭니다. 젊었을 때는 공부와의 전쟁, 중년기에는 일과의 전쟁, 노년에는 병마와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노년은 치매와의 전쟁이 대세 같기도 합니다.
지난 번 주님은 제 소원을 들어 주시어 교통사(交通死)할 뻔 한 저를 살려 주셔서 전사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영적전사란 기도하다가, 또는 공부하다가, 또는 일하다가가 죽는 것을 뜻합니다. 고속도로에서 9.29일 대형 교통사고 순간 떠오른 것은 내일의 미사와 강론이었던 저를 주님은 기적적으로 감쪽같이 살려주신 것입니다. 상처부위의 머리에 붙였던 흰 커다란 반창고를 볼 때 마다 네가지 깨우침은 평생 영적전투에 필수 지침이 될 것입니다.
1.깨어 있어라.
2.회개하라.
3.감사하라.
4.사랑하라.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배수진을 치고 종신불퇴의 자세로 32년 동안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영적전투중인 저의 삶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평생 영적전투를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참 고맙게도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의 주제가 영적전투요 그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백전노장, 영적전투의 베테랑인 바오로 사도의 충고가 참으로 고맙고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평생 영적전투에 전의와 사기, 훈련과 무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생략하기가 아까워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나 이제나, 아니 옛보다 악마들이 더욱 발호하는 시대라 유비무환의 자세가 참으로 절대적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진리로 허리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그래야 악한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도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 담대하십시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영전전투에 금과옥조의 필수 지침입니다. 진리, 정의, 평화, 믿음, 말씀, 기도등 얼마나 좋은 영적무기들인지요. 주님의 전사는 진리의 전사, 정의의 전사, 평화의 전사,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기도의 전사라니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하여 영원한 영적 훈련병이 되어 끊임없는 회개와 기도등 온갖 수행의 영적훈련에 항구하고 충실한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앞서 영적 전투에 최고로 빛나는 모범이 바로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니 두분뿐 아니라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오로는 물론 많은 순교자들이 순교의 전사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기 전 죽음에 직면한 예수님께서 전의를 새로이 하는 단호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은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서의 순교의 전사를 예감하는 주님의 말씀이 참 비장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전사’인 우리 모두를 당신의 권능으로 완전 무장시키시어 오늘도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다음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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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마리 여우>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가 9,7이하)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간교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랍비문학에서 여우는 간교함의 상징입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가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가12,50).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포기에 직면하게 될 때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가13,34).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 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이요,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은 아닌지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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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진정한 하느님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 드러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듯하지요. 예수님께 적대적인 바리사이들 중 그나마 호의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일 수도 있고, 민중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예수님을 자기들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질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께 겁을 주고 도망치게 하여 수치를 안기려는 음모일 수도 있지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의지를 밝히십니다. 정면돌파라 할까요? 역사 이래 예루살렘이 박해하고 죽인 예언자들의 운명을 예수님 자신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는 선전포고와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맞서야 할 상대는 헤로데나 빌라도, 바리사이나 백성의 원로들, 사제 계급 등 일개 사람이 아니라 인류를 도탄과 어둠에 몰아넣는 악의 세력임을 그분은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오셨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실 길이란, 아버지께서 인류를 죄악과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위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이스라엘을 하느님 날개 아래로 모으려는 예수님의 노력은, 그러나 모든 이에게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임을 그분은 잘 아십니다. 예수님의 의지가 아니라 유다인의 의지 때문입니다. 백성의 고통이나 갈망과는 별개로 온갖 기득권을 쥔 채 율법의 문자에 갇힌 그들에게 새로운 길은 위험 가득한 모험일 따름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모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에페 6,12)
사도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실존적 한계와 어려움을 꿰뚫어 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람에게서 도전을 받고, 또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요. 그가 꼭 나의 반대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종종 장벽이 부딪히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쉽게 사람에게 화살을 돌려 맞서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유혹과 시련을 안기는 존재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어둠과, 그에 반응하는 내 안의 어둠입니다. 두 존재 안에 또아리 틀고 있는 죄악과 상처와 탐욕이 작용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무언가에 분노하며 곱씹고 되씹는 사이 우리 마음의 어둠은 점점 커지고 주님의 자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영혼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싶어하는 악이 이를 잘 알고 노리는 것이지요.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힘으로 악에 맞서야 합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성령의 칼이 곧 말씀입니다. 어둠으로 우리를 잡아끄는 악에게 말씀은 매우 강력한 무기입니다.
만남과 사건, 사람들 안에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두려움이 커질 때, 그날 내게 다가오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대응법입니다. 어둡고 불결하고 성난 생각들에게 관심을 주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떠올려 되뇌이며 머무르는 겁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습니다. 악은 그리 순순히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니까요. 끈질긴 악의 힘에 대항하면서 한두 번 해보고 안 된다고 실망해 포기하지 말고, 말씀이 어둠을 걷어낼 때까지 말씀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빛이 영혼을 적셔올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악에 대항하는 지혜와 용기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머무름이 곧 기도이기에, 그렇게 배우면서 우리는 성큼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의 에페소서 대목 안에는 영성 생활을 위한 지침이 가득하니 여러 차례 찬찬히 정독하면서 머무르시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사도가 전투에 비길 만큼 치열하고 교묘합니다. 용기와 굳셈과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지요.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델이 있습니다. 그 어떤 유혹과 협박과 회유에도 예수님께서 견지하신 참 예언자의 길이 그 답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역시 꿋꿋하게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동행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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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은 일하는 자에게 기쁨과 마음의 보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런 내재적 보상이 없이 힘든 일만 계속하게 되면 과부하가 걸려 오히려 일의 능률이 떨어집니다. 일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일의 효과율 두 가지를 모두 놓치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일 중독증에 걸린 사람이나 휴식을 게으름이라고 생각하는 강박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내재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휴식을 취하려는 자신을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고, 아무런 마음의 위로도 받지 못한다면 결국 지치고 짜증스런 상태에 빠져 무기력에 이르기도 합니다. 쉬지 않고 장거리 운행을 하다가 퍼져 버리는 자동차처럼 말이지요.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 어려운 분들은 일을 마친 후 주님에게라도 위로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혹사만 시키고 돌보지 않는 당신 자녀를 안쓰럽게 여겨 당신 곁에 잠시 앉아 쉬며 숨을 고를 수 있는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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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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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하신 두 가지 말씀입니다. 먼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바리사이들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 호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여행을 방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떠한 인간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관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루카 13,3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수행을 확실히 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가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자진하여 당신의 길을 가심을 밝히십니다. 곧 담대하고 의연하고 결연한 의지로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실 것을 밝히십니다. 그것은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면서도 이루지 못했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어도 이루지 못했던, 그 죽음을 이제 당신께서 스스로 이루려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제시하는 길은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에페 6,13-17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명수행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에페 6,1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야겠습니다.”(루카 13,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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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13,33)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13,32-33)
죽음이라는 고통 앞에서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견디시면서 끝까지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끝까지 견디어 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힘듦과 고통 앞에서 나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힘듦과 고통 앞에서 나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힘듦과 고통 앞에서 나의 믿음도 드러납니다.
힘듦과 고통은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나의 거울이요,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나의 스승, 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몸소 행하신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도록 합시다!
오늘 독서(에페6,10-20)가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칼을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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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obM38HbFQ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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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 33)
사랑의 길은
멈출 수 없는
가장 따뜻한
우리의 소명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길이다.
가장 낮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장 화려한
예루살렘에서
사랑의 새 길을
마련하신다.
가장 가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정화하신다.
십자가로
그 길을
여신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여정은 다름아닌
우리 삶의
여정이었다.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여정이었다.
갈릴래아도
예루살렘도
소중하신
하느님의
자리이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의 길이다.
사랑의 길은
모두를
아름답게
만든다.
영원한 길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듯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아픔
우리모두를 위한
사랑의 눈물이다.
예수님의 길에서
나아갈 길을
다시 만난다.
예루살렘을
빛나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닌
예수님의 삶
사랑이다.
이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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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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