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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강 돈 묵
<문학박사, 거제대 교수>
1. 문제 제기의 배경
가히 수필문학 시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수필을 전문으로 하는 문예지만 해도 월간이 4종, 격월간이 3종, 계간이 11종에 이른다. 다른 장르의 잡지가 몇 십 호를 이어가지 못하고 중도에 문을 내리는 형국에 유독 수필잡지만이 성업을 누리고 있다. 이 잡지들을 통하여 문단에 나오는 수필가들의 숫자만 해도 엄청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문인수는 1만 2천여 명 정도인데 그 중 2천 7백여 명이 수필가다. 이 잡지들을 근거로 해서 매달 발표되는 수필작품수를 추측해 보면 어림잡아 오백여 편은 족히 될 듯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수필문학의 번성으로 판단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수필문학의 양적 팽창보다는 질적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그치질 않고 계속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쪽의 현실인식은 수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되는 작품이 너무도 많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것이 한국 현대수필이 처한 현실이라면 하루 속히 개선해 나가야 할 문제이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 역시 많은 작품의 독서와 평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고민에서 나온 것으로 발제자에게 주문 요구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개선되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수필가들의 수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더러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도 자신은 그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속단하는 작가가 제법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쓴 수필이 문학성을 획득하지 못하여 생활 작문 내지 신변잡기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기에 훌륭한 수필로 믿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수필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라면 결코 개선의 가능성은 없다고 보이기에 한번 짚어보자고 내놓은 발제인 것 같다.
여기에는 수필의 태생적 특질이 한 몫 했음도 있다. 수필은 비전환적 표현으로써 결코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반드시 작가의 체험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글을 쓰기를 요구한다. 자연히 수필은 작가의 실생활사가 재료가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기에 글을 접하는 태도에 수월함을 제공 받는다. 이 점을 수필가들이 너무 안이하게 받아들이기에 수필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탈하게 된다. 수필은 작가의 삶에서 소재를 선택하되, 그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찾아 해석해내고 형상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작가의 삶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그것을 상세히 기술해 놓고 수필을 썼다고 하는 예가 빈번하여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작가가 살아낸 삶은 어디까지나 현상이다. 현상에서 선택된 소재는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다. 의미, 즉 그것만이 함유하고 있는 특질이 본질이다. 그 본질을 찾아서 작가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그것을 해석해 내야 한다. 해석해 낸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키거나, 구체적 사물을 더 감각적으로 강화하는 형상화가 따라야 수필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현상만을 적어 놓고 수필로 믿기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짚어보고 앞으로 소재의 올바른 활용과 해석 및 형상화의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최근 문학을 말하는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말이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우선 이 말의 의미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문학적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아무리 들어도 그것은 음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소재를 선택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말하고, 해석과 형상화를 말하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을 일컫는 말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이는 바람소리 이상의 의미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우선 작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소재를 발굴해낸다. 자연에 관한 것,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은 것, 자신의 생활에서 끄집어낸 것, 어느 것이 되었든 이것을 현상이라고 한다. 현상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또 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현상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눈을 감고 취침에 들기 전까지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물상들의 모습이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도 현상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삶이 들어가 어떠한 해석을 내리기 이전의 모습이 바로 현상인 것이다. 이 현상은 의미부여가 되기 이전이라서 단순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개념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성질이나 요소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글을 쓸 때에 현상을 적지 말고, 본질을 적으라는 주문은 눈에 보이는 일차적인 사물의 모습을 적지 말고 그 속에 함유하고 있는 내적 의미를 찾아 적으라는 뜻이 된다. 그래야만 글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알지 못하고 겉모습만 그려준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다. 생활 작문이고 수기에 머물게 된다. 수필은 작가의 혼이 들어 있어야 한다. 작가의 혼은 소재에 대한 본질 인식 후의 해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본질은 사물이나 사건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의 삶이 가미되어 해석해내야 소재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래야 한 작가의 존재 의미가 유지된다. 소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작가가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을 내리느냐는 그 작가만의 것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낯설게 보기’라고도 일컫는다. 그리고 해석해 낸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키거나, 구체적 사물을 더 감각적으로 강화하는 형상화를, 달리 ‘낯설게 하기’로 표현한다. 그러니 이 발제인 ‘낯설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는 ‘해석과 형상화’라는 말이 된다.
본래 ‘낯설게 하기’라는 말은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V. Chklovski)가 내놓은 말이다. 그는 그의 유명한 논문 「기법으로서의 예술」에서 예술의 기법이란 인간사고의 경제원칙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고, 사고와 지각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생활감각을 다시 갖기 위하여, 대상을 느끼기 위하여, 돌이 정말로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은 대상의 감각을 인식으로서가 아니라 시각으로서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이란 대상들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며, 그 형식을 애매하게 하는 기법이고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을 증가시키는 기법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며 오래 끌어야 된다. 예술이란 대상의 생성을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며, 이미 생성된 것은 예술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슈클로프스키 「기법으로서의 예술」에서, 김치수 역
경제원칙이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원칙에 역행한다는 말에서 작가는 자신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를 먹도록 장치하는 사람이란 뜻도 된다. 이러한 장치에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異化, 疏遠化)’ 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늘 보아온 사물에 대해서는 추상화되고,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매일 접하는 사물에 대해서는 신경을 주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저절로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열매가 접착의 힘이 이탈하면 떨어져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열매는 한결같이 지상에서 지표면으로 떨어진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법칙이 있다. 즉 숨겨진 본질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숨겨진 본질은 우리가 찾아내려는 노력 없이는 발견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무심했지만, 뉴턴만은 달리 그것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냈던 것이다.
바로 이 뉴턴과 같은 노력이 예술에서는 ‘낯설게 보기’로 해석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무심히 스쳐지나간 사물이라도 개성이 있는 작가는 자기만의 시각으로 사물의 의미를 찾아낸다. 오늘 처음 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파고들 때, 사물이 추상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즉, 매일 주부들이 설거지하며 닦는 접시도 오늘 처음 닦는 것으로 인식하고 접근해야 진정한 작가의 삶과 만나서 개인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낯설게 보기’란 반복된 삶 속에서 추상화되고 단순화되는 피조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보아서,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 작가의 개인화된 삶을 토대로 다시 해석해 내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슈클로프스키의 말처럼 생활감각을 다시 갖기 위하여, 대상을 느끼기 위하여, 돌이 정말로 돌이라는 것으로 느끼기 위하여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본 발제에서 말하고 있는 ‘낯설게 보기’는 ‘해석’을 의미하고, ‘낯설게 하기’는 ‘형상화’를 의미한다. 올바른 작가라면 현상만을 가지고 집필에 들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그 사물이나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거치게 한다. 한편의 수필을 쓸 때에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상상을 통해 미적구조로 재구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재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서 해석해내고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고, 수기이거나 생활 작문이다.
3. 현상과 본질
수필은 작가의 체험 속에서 소재를 선택하는 문학 장르이다. 작가는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자신의 삶 속을 황금이라도 캐듯 샅샅이 뒤진다. 그렇게 찾아낸 소재를 독자에게 내보이기에 주저함이 없다. 어설픈 작가는 자신이 찾아낸 소재가 나름대로는 신선하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별거 아니란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설복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즉, 문학적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체험 속에서 선택된 소재가 사유와 상상을 거쳐야만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상상은 작가의 체험과 삶이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수필은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얻게 된다.
생활 체험 속에서 사냥해낸 소재는 반드시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하여 해석한 후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고백의 문학’, ‘개성의 문학’, ‘작가의 심적 나상’이라는 수필의 특성에 충실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신적 작용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지루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해 놓고 수필을 썼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체험 속에서 선택한 소재는 반드시 주제의 통솔 하에 재구성이 되어야 한다. 재구성할 때에는 상상의 힘과 지적 구성력을 빌려와야 한다. 수필이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여 상상마저 붙잡아맬 일은 아니다. 글의 분위기와 주제에 맞추어 충분히 재구성해야 수필은 성공한다. 자신의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수필을 썼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비전환적 표현이라 해도 작가가 선택한 소재들을 설정된 주제에 맞추어 도려내고 붙이고 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이란 것은 개별적이고 우발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작가는 선택한 소재를 자신의 삶을 토대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석한 결과로 주제를 만들어 이것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그에 따라 소재를 재구성하여 집필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과정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집필에 들어가면 글이 주제가 없고 생명력조차 상실한 것이 되고 만다. 집필 전에 해석에 이어 주제가 만들어져야만 첫 문장부터 주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심선경의 <빈 자장면 그릇과 신문지 한 장>에서 작가의 눈은 어떻게 사물의 본질을 찾아 나서는가를 살펴보자.
자장면을 비우고 바깥으로 내몰린 그릇이나, 날짜가 지나 일부러 다시 펼쳐 볼 일이 없어진 신문지나 피차일반 새로운 것에 밀려난 처량한 신세가 되다보니 서로가 그 아픔을 쓰다듬고 덮어주기엔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지 싶다. 빈 그릇과 그 위에 엎드려 착 달라붙은 신문지 사이는 누가 봐도 찰떡궁합이라 아니 할 수 없다.……<중략>……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이란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걸까. 위로 받고 싶을 때 위로받고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신문지는 물웅덩이에 안착하고, 자장면 빈 그릇은 철가방에 담겨 다시 중국집으로 실려 가겠지만 아직도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마당을 빙빙 도는 잠자리처럼 마음 둘 곳 찾지 못한 나는 길 아닌 길 위에서 길을 찾아 헤맨다. --심선경의 <빈 자장면 그릇과 신문지 한 장>에서
빈 자장면 그릇과 신문지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사물임에도 작가는 내몰리고 밀려난 존재라는 공통점을 찾아낸다. 둘 다 이제는 인간의 소용에서 밀려난 존재인 것이다. 먹을거리가 비워진 그릇과 날짜가 지난 신문지는 이미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 상태이다. 그러기에 함께 가는 대열에서 밀려난 거리의 노숙자의 얼굴이 이들 위에 겹쳐진다. 노숙자가 추위를 비키기 위해 오직 덮은 것도 신문지이다. 이것은 작가의 본질을 찾는 시각이 없었더라면 캐낼 수 없는 글감들이다. 여기에 작가 심선경의 존재 의미가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어차피 제 홀로 삶을 지탱해야 한다. 이렇게 밀려난 것들이라도 빈 그릇은 식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고, 신문지는 그 나름대로 유랑을 떠나야 한다. 식당으로 돌아간 빈 그릇, 웅덩이에 빠져 안주한 신문지. 그것들을 바라보며 마음 둘 곳 몰라 하는 작가 자신은 영원히 앉지 못하고 마당을 빙빙 도는 잠자리인 것이다.
김양희의 <문>을 보자.
문(門)을 열어보니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그게 이승과의 마지막이었다. 세상과의 연을 문하나 사이로 마감한 것이다. 숨지기 전 자식들이 저 문을 열어주기를 엄마는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문은 세상과의 소통이요 자신을 열어 보이는 통로였다. 열림은 오는 것이요, 닫힘은 가는 것이다. 열린 문은 닫히게 마련이듯이 온 사람 또한 반드시 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문은 인생이요 작별이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은 마지막이 아니요 시작이다. 더러는 입시의 문을 통해 청운을 꿈꾸기도 하고, 인과의 연을 통해 배필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양희의 <문>에서
문은 입구이면서 출구이다. 사람들은 이 통로를 사용하여 드나든다. 또한 안과 밖을 갈라놓기도 하고,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문은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문이 함유하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너무도 크다. 작가 김양희는 이 본질을 찾아내고 있다.
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과 죽음의 통로가 보인다. 그 문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생명은 좌우된다. 이 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의미는 상반된다. 그래서 문은 열림과 닫힘으로 그 기능을 확연히 구분한다. 열림은 오는 것이요, 닫힘은 가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할 때엔 문은 시작이 된다. 이 문은 확연히 다른 두 세계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의 궤적이 달라짐을 자각한다. 희망인 열린 문과 절망인 닫힌 문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는 순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음도 깨닫는다. 마음의 손잡이는 안에만 달려 있어서 남은 열어 줄 수 없고, 자신만이 열 수 있기에 모든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 앞에서 멈칫하며 고민한다. 그 세계가 원만한 곳이라면 덜하겠으나, 그렇지 않고 죽음의 공포가 상존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면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느 세계로 자신이 향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에 접근할 것인가도 고민꺼리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물상은 현상이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건들도 현상이다. 이 현상을 기록하고 말면 글은 수필이 될 수 없다. 이 현상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해석해내어 형상화시켜는 수필가의 노력이 보태져야 수필로서 온전한 위치를 확보한다. 본질을 찾기 이전의 현상은 단순한 소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미부여가 되지 않는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수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체험에 대한 의미부여는 체험자체의 성격보다 작가의 체험 수용자세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용자세는 작가의 삶이 크게 좌우하게 하며, 작가만의 인생관, 세계관, 문학관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내포적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해내는 작업을 등한시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것은 바로 현상을 그대로 적는 것이 문학이라고 오판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문학은 현상을 적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본질을 적는 것이다.
분명 수필은 작가의 일상을 소재로 하여 창조한다. 수필은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을 찾아서 미적 관조를 통해 본질을 들려줌으로써 감동을 주는 문학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수필이 작가의 신변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자기도취, 자기연민의 영토를 고집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필의 예술성 실현을 위해서는 본질을 찾아나서는 작가들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 하겠다.
사물이나 사건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나설 때에 비로소 수필은 출발한다. 물론 다른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형상화를 시도할 때 수필은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삶 속에서 취택한 소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해석해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가치명제로서의 수필은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필의 정체는 작가가 취택한 소재가 지닌 본질적이고 내적인 의미를 밝혀내는 의미화 작업이라고 하겠다. 의미화는 다른 사람이 기웃거리거나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색다른 과정을 거쳐야 효과적이다.
4. 낯설게 보기(解釋)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 해석하는 데서부터 글쓰기는 출발한다. 이 해석은 작가의 인생관 문학관 세계관에 의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석은 그 작가만의 것이기에 신선하고 창의적일수록 좋다. 똑같은 사물이나 사건에서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해석을 내릴 때에 작가는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획득한다.
참신한 소재, 참신한 해석, 참신한 표현으로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문학 작품의 생산 과정에서 보면 작가의 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누구나 접하게 되는 일상사에서 자신만의 소재를 발굴하는 것도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크게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스쳐 지나간 돌을 수석으로 발견하여 좌대에 앉히는 수석가의 안목처럼 작가도 자신만의 날카로운 안목이 있어야 소재를 발견할 수 있다.
소재가 발견되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참신하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소재도 발굴할 수 있기에 소재와 해석의 참신성은 따로 구분되어 이루어지기도 하고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해석은 참신하고 개성적이어야 한다. 문학 작품이 내용과 형식에 의해 그 가치가 좌우된다고 볼 때 해석의 역할은 지대하다. 대개가 이 해석에 의해 문학작품의 성패가 가려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글의 내용이 다른 이가 이미 언급한 해석일 경우에는 아예 집필의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만의 눈으로 해석해낸 참신한 것이어야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낯설게 보기(解釋)’이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처음 그것을 지각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접근해 갈 때에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늘 깨어 있어야 가능하다. 항시 많이 보고, 깊이 보는 삶을 유지해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슈클로프스키가 말하고 있는 ‘낯설게 하기’는 ‘낯설게 보기(解釋)’와 ‘낯설게 하기(形象化)’를 모두 포함한 뜻이지만, 보고 발견해야(解釋) 마침내 표현(形象化)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는 두 단계로 가름해 본 것이다. 해석의 단계에서는 ‘비일상적 시각’, ‘뒤집어 보기’, ‘현미경적 시각’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것도 해석의 참신성을 위한 것이다.
해석의 한 예를 윤석희의 <꼴지의 노래>에서 살펴보자. 기존의 현상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어 어떻게 수필의 예술성 실현에 공헌하는지 알아보자.
<A>앞에 섰으니 더욱 곤혹스러운 거다. 앞장 선 낙타는 가시선인장도 피해야 하고 모래 길도 내며 가야 한다. 선두의 의무가 부담스럽다. 뒷사람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아 어색하다. 일찌감치 앞서기를 포기하고 따라가는 삶만 살아온 터인가. 선두가 되는 게 익숙지 않다. 그래서 더 고되고 마음까지 경직된다.
<B>사막 안으로 열두 마리의 낙타행렬. 노을 속 적막으로 잠겨드는 경건한 의식 같다. 앞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맨 뒤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앞서 가는 사람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뒤에 서니 오히려 모래벌판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적막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자 호젓함이 들어찬다. 어릴 적 대상이 되어 낙타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꿈을 꾸곤 했다. 그 꿈이 다가선다. 술렁술렁 꿈속을 유영하니 참 그만이다. 뒤에서 쫓아오지 않아 조급해지지도 않는다. 한결 여유롭다. 긴장이 풀리고 두려움도 가신다. 걱정 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인데 날 것 같다. 콧노래가 춤을 부추긴다. 들썩들썩 어깨춤도 난다.
<C>꼴찌의 삶은 고달프고 초라한 줄만 알았다.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도 헤어날 수 없는 패배의 늪이라 여겼다. 꼴찌는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는 비겁함으로 꿈마저 접은 자라 추측했다. 일상이 무기력과 나태의 구렁으로 내몰린 불쌍한 사람이라 짐작했다.
상상 밖의 횡재를 한 것이다. 꼴찌 자리는 경쟁 밖으로 밀려난 열외자의 슬픈 지대만은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얽매임도 없고 안락하기만 했다. 나를 응시할 수 있어 졸지에 내 삶의 주역이 되는 기분도 만끽했다. 치열함이 사라진 느긋한 곳이다. 해방감도 누려 볼 수 있다.
--윤석희의 <꼴지의 노래>에서
이 글은 인도의 타르사막이 배경이다. 모래벌판을 낙타를 타고 여행한다. 작가는 대열의 맨 앞에서 가다가 놓고 온 물건 때문에 맨 뒤로 쳐진다. 타르사막을 지날 때에 앞에서도 가 보고, 뒤에서도 가 본다는 것은 현상이다. <A>는 대열에서 앞에 갈 때의 심정을 그리면서 앞에 간다는 것이 어떤 뜻을 내포하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즉, 앞에 간다는 것에 대한 해석이 부여된 부분이다. <B>는 맨 뒤에 갈 때의 심정을 토로한 부분으로 역시 뒤에 간다는 것에 대한 해석에 해당한다. 그리고 <C>는 앞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뒤에 간다는 것은 패배자가 아니요, 무기력과 나태로 내몰린 자도 아니며, 경쟁 밖으로 밀린 슬픈 자도 아니다. 얽매임이 없이 안락하기만 한 삶이다. 오랜만에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느긋하게 해방감을 누리며 삶을 지탱하는 자리가 맨 뒷자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현상에서 본질을 찾아 해석해낸다. 맨 앞에서 갈 때의 심정과 맨 뒤에서 갈 때의 심정이 판이하게 다르다. 여기서 작가는 독자에게 던질 커다란 주제를 놓치지 않는다. 여행하면서 찾아내는 윤석희의 주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담아 띄워 보낸다. 그러기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단어가 정확하게 분류된다. 앞에 갈 때는 ‘곤혹, 부담, 어색, 포기, 고됨, 경직’ 등의 어휘가 나오고, 뒤에 갈 때에는 ‘경건, 장관, 주인공, 관통, 호젓함, 꿈, 여유, 날다, 콧노래, 춤, 어깨춤’ 등의 어휘가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앞에 갈 때에는 조급하여 문장의 길이도 짧은 편이나, 뒤에 갈 때에는 느긋하게 문장의 길이도 길어진다. 어휘 선택에서부터 문장의 길이에 이르기까지 아주 치밀한 계산을 한 작품이다.
김윤재의 <유화 한 점>을 살펴보자.
(A)내가 마당으로 뛰어들어 외할머니를 부르고, 그때까지 느티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던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던 모습은 가슴 속에 유화 한 점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느티나무 아래서 서성이던 한 중년여인을 그린 유화보다 깊은 울림을 준 그림을 만나지 못했다.
(B)세월은 나를 여자의 한숨소리를 이해할 나이로 옮겨다 놓았다. 어느 날 뜬금없이 어머니가 지었던 한숨소리를 기억해 내었고,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그림으로 간직해 왔던 나들이 길이, 실은 삶에 지친 이 땅의 아낙들이 걸었던 슬픈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 어머니가 삘기를 뽑으며 시간을 끌었는지, 외가에 당도해서도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느티나무 아래로 걸어갔는지. --김윤재의 <유화 한 점>에서
(A)와 (B)는 이해를 돕기 위해 앞뒤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 작가의 어머니는 지금 친정집 앞에 와 있다. 시집간 여인에게 친정집 가는 것보다 더 마음 설레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데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친정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나이가 어려 아무 것도 모르던 딸은 이제 성인이 되어 그 어머니를 이해한다. 작가는 어려서 신이 나 달려간 외가 나들이였지만, 어머니는 돈을 구하러 가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친정 나들이였던 것이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까지 낳아 살면서, 살림이 어려워 친정집으로 돈을 구하러가는 무거운 발걸음은 어린 작가의 신나는 행동과 대비되어 잘 그려지고 있다. 격변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가장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지아비의 몫까지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 늦은 밤 외투 가득 추위를 담아오는 가장을 위해 명탯국을 끓여야 했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한국 여인의 고달픈 삶을 만난다.
이 삶은 나의 어머니의 삶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배제하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려줌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한다. 친정집 앞에서 서성이는 여인의 모습에서 인고의 세월을 살아낸 한국 여인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작가는 이미 그 시절의 어머니와 같은 중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되어 있다. 당시 망설이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모계를 따라 대물림되고 있는 한국 여인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사건의 진행 배경이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다. 인고의 삶을 산 한국 여인상과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가 서성이던 마당의 느티나무도 이제는 당신을 대신한다. 땅위로 드러난 뿌리는 각질이 벗겨졌고 몸통엔 군데군데 옹이가 박혔다. 한 쪽으로 기운 가지엔 오갈병으로 오그라든 나뭇잎이 매달려 있다. 고통과 기쁨으로 덧칠된 어머니의 유화 같은 삶처럼 나무도 세월에 부대껴 기형이 되었다. 느티나무는 그대로 어머니로 환치된다.
5. 낯설게 하기(形象化)
소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 해석해낸 것을 형상화시켜야 한 편의 수필은 완성된다. 사물이나 사건들이 함유하고 있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형상화라 한다. 그러나 형상화가 갖는 의미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개념만을 한정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구체적 사물이나 사건이라도 감각적으로 강화시켜 겉으로 드러낼 때에는 형상화라 한다. 이 형상화는 해석의 결과물이 구체적 형체를 갖추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상화가 올바로 되었을 때 수필은 성공할 수 있다.
아무리 참신한 해석을 하였다고 해도 형상화가 어설프면 수필은 성공할 수 없다. 늘 수필의 예술성 실현에 갈증을 느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소재에 대한 신선한 해석이 이루어졌는데 형상화가 이에 따라주지 못하면 글은 관념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신선한 해석에 딱 맞는 형상화가 이루어지면 독자가 느끼는 감동은 훨씬 배가된다.
서정수필에서의 형상화는 대부분 비유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비유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물로 표현해 줄 뿐만 아니라 같은 구체적 사물도 감각적으로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서정수필에서 비유를 통한 형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졸고 <들판의 소나무>를 예로 들어본다.
(A)밤나무, 오리나무들과 뒤엉키어 사는 소나무는 키가 크지 않다. 주위의 친구들과 키를 맞추어 도란거리며 산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월등히 키가 크지 않은 대신 가지를 길게 뻗어 어깨동무하며 산다. 옆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처지를 감안하여 알맞게 자라고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절대 옆의 친구를 외면하거나 질시하지 않는다. 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같이 즐기기를 소망한다. 꽃 피는 봄날에는 풀꽃에 친구 해주고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날에는 옆의 친구와 어깨를 비비며 견뎌낸다.
(B)그에 비해 저희들끼리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키가 크고, 별로 가지를 뻗지 않는다. 몸매가 단조로우면서도 날씬하고 훤칠한 저희들끼리만 어울린다. 다른 나무들과의 대화보다는 저희들끼리의 대화가 더 즐겁기 때문이다. 저희들끼리 모이면 다른 주위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랑곳없다. 다른 나무들이 같이 놀자 손을 뻗쳐도 무시해버리고 큰 키만을 자랑한다. 오히려 다른 나무들을 업신여기고 키만 키우고 팔을 벌려 주지 않는다. 심한 경우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제 주위의 다른 나무들을 내몰아버린다.
(C)들판의 소나무는 혼자 서 있다. 그래서 더욱 나의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옆에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살아간다. 산에 있는 소나무들이 친구들과 다정히 대화를 나눌 때, 들판의 소나무는 외로움을 이기는 연습도 하고 자신의 내면의 성숙을 꾀한다. 들판이 사계를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되씹는다.
산에 사는 소나무들이 개성 없이 친구들과 닮아가지만 들판의 소나무는 그렇지 않다. 소나무의 체신을 간직하려 노력한다. 혼자 체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산의 소나무들은 되는 대로 살아가도 옆의 친구들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는 모든 것을 저 혼자 해결해야 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고풍스런 자신의 자태를 간직해야 한다. 서로의 힘을 합해 견디어 내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혼자 이겨내야 한다. 설혹 산의 나무들이야 가지가 부러져도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는 가지 하나 부러지면 많은 이들에게 흉물로 드러난다.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많은 이들의 시선에 뜨이고 입에 오르내리기에 들판의 소나무는 그만큼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기가 힘이 든다.
(a)산 숲정이를 지나면서 옆의 다른 나무들과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소나무의 지혜를 배운다. 그들은 베풀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내게 일러준다.
(b)저희들끼리 모여 사는 소나무 숲을 지날 때면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라 강요한다.
(c)들판의 소나무 밑에 서면 진정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되씹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모습을 꿋꿋하게 간직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 나의 갈 길이 무엇인가를 터득한다.
--졸고 <들판의 소나무>에서
위 수필에서 명료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아도 형상화의 과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A), (B), (C)에서는 다른 종류의 나무들과 어울려 사는 소나무와 저희들끼리만 군락을 이루며 사는 소나무, 그리고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의 본질을 찾아 차별화하여 해석해낸 부분이라면, (a), (b), (c)는 이를 토대로 형상화를 시도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정수필은 대개 시에서처럼 비유의 과정을 거쳐 형상화가 완성되는 반면, 서사수필은 형상화라는 말조차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사수필에도 형상화의 과정은 꼭 필요하다. 여기서는 대개의 경우 인물, 사건, 배경과 같은 요소들과 어울려 소기의 목표점에 도달한다.
이옥순의 <단감과 떫은 감>에서 형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A)우리 집 감나무에는 단감과 떫은 감이 같이 열렸다.
(B)어른이 되어서 그 내력을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젊어서 두 가지인 감나무 중 한 가지에만 단감나무 접을 붙이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두 가지 모두단감나무 접을 권하자 빙긋이 웃기만 하셨단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도록 우리 집 감나무는 특이해서 두 종류의 감이 열린다고 자랑을 했다. 나무가 커서 두 줄기가 서로 뒤엉킨지라 그럴 만도 했다.……<중략>……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권을 웃음으로 흘리시며 두 가지 중 한 가지에만 단감나무 접을 붙이신 아버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함께 어우러져야 함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려던 그 깊은 뜻을 미혹한 딸은 오늘에야 터득한다.
--이옥순의 <단감과 떫은 감>에서
(A)는 작가의 집에 있었던 감나무에 대한 설명이다. 두 줄기였던 감나무는 단감과 떫은 감이 같이 열리는 나무였다. (B)는 그 감나무가 작가의 부친께서 한 가지에만 단감 접을 붙이어 함께 열리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다. (A)는 집안에 있던 감나무에 대한 설명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 (B)에는 서사적 기술로서 인물, 사건, 배경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로 하여 한 나무에 단감과 떫은 감이 함께 열리는 내력을 파악하게 된다. 하나의 구체적 사물이나 사건이라도 감각적으로 강화시켜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수필은 비전환적 표현을 요구하기에 허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전적 수필에서는 서사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형상화 단계를 거치게 된다. 서사수필에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형상화를 시도할 때에는 소설적 특성을 최대한 살려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소설의 경우처럼 인물, 사건, 배경을 다룸에 있어서 특히 인물의 성격을 극대화하고, 사건도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어야 성공한다. 또 기술할 때에는 시점에도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소기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6. 마무리하면서
의미 전달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은 작가의 자기 고백, 자기 드러내기이다. 그래서 수필은 작가와 독자가 이마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진지하게 고백하는 형식을 취한다. 마치 친구나 이웃에게 자신의 신변이나 신체적 특징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과 흡사하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기에 그 내용마저도 작가에게서 이탈하지 않는다.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취한다.
그래서 수필은 태생적으로 독자의 신뢰를 얻고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허물은 물론이고 자랑거리까지 들고 나오니, 아예 소설가처럼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이 독자에게는 약속이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는 수필가는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작가의 행동에 멍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수필은 작가의 삶 속에서 소재를 취하여 글을 끌고 간다는 것이 업보가 되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작가의 신변사가 소재가 된다고 하는 것을 자칫 잘못 생각하여, 자신이 경험한 바를 주저리주저리 기술해 나가면 수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즉, 수필은 삶의 현장에서 있었던 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는 작업에서부터 글쓰기는 시작된다. 본질을 토대로 해석을 내리고 그 얻어진 결과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야 수필은 성공한다.
수필가들의 양적 증가도 좋지만, 그보다 수필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수필문학의 발전은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필가 모두의 치열한 작가 정신과 끝없는 창작열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아울러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현상을 그대로 적는 글에서 벗어나 이제는 본질을 파악한 살아 숨쉬는 수필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신한 소재, 참신한 해석, 참신한 형상화가 이루어진 수필이 많이 창작되어 진정한 수필문학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