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의 발설發說 /강태승
백겁 천겁 돌아온 물방울이 잎사귀에 쉬고 있다
뒷동산 한 바퀴 돌고 온 것처럼 달려있다
할머니가 사랑방 뜨락을 헛일삼아 다녀오듯이
억겁의 억겁 걸어온 물방울
죽은 고라니의 눈썹 적시던 물방울이
아이의 눈망울로 바라보다가
볍씨 눈뜨듯이 안녕? 병아리 몸짓으로 안녕?
육지를 밀고 강물 기름지게 하던 이력履歷이
증명서도 없이 안녕? 한다
선과 악 음지와 양지였던 시절을
발설發說치 않고 지나가는 시간처럼 안녕?
살인자의 피 예수 부처 나이팅게일의
땀방울이었던 것이 거꾸로 매달린 채 안녕?
잎사귀 차별하지 않고
마련한 살림살이에 새소리 물소리 깃들었다
바람이 발목 담그니 툭 떨어지는
간결하지만 깨끗한 저항
솔잎은 한 방울 꾀려 이내빛에 슬쩍 얹은 웃음
오장五臟이 환하게 들여다보이지만
울타리 없어 찾을 수 없는 문門
그 문 열고 햇빛이 들었어도 무게가 늘지 않고
천개 달이 떠도 소란스럽지 않는 물방울이
천겁 만겁 여행을 했어도 햇순처럼 안녕?
다시 가야 할 억겁의 속으로
주춤거리거나 망설임 없이 무너지면서
내 눈과 찰나로 마주치자 안녕? 한다.
눈보라
밖에는 죽어라 무너져라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빈틈으로 칼을 들이미는
너덜너덜한 신발들만 모인 식당
옆 탁자에서 한 사람은 명퇴자이고
한 사람은 명퇴하여 사업 중이고
한 사람은 명퇴 대상자라는데
펄펄 끓는 선짓국이다
처음엔 꽃송이를 주고받다가
말과 말 사이 핏물이 보이더니
칼을 쥔 것처럼 솔직한 손짓발짓에
누룽지 까맣게 탄
이야기 내 술잔에 배인다
딸이 고3인데 명퇴하였다는
아들이 대학2학년인데 명퇴금으로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사기당해 다시 취직했다는
노모가 암에 걸렸는데 명퇴 대상자라는
날고기가 안주로 배달된다
살점 떼어 주는 것처럼 권하는 소주
어린 사람은 피처럼 받아 마신다
금세 꽃이 다 떨어졌는지
대화가 묵처럼 엉키고
컴컴한 데에 못질하는 소리
관棺뚜껑처럼 깔리는 눈꺼풀
이때다 하고 창문 후려지는 눈보라,
나이 든 사람이 소주잔을 중앙에 놓는다
다시 놓인 선짓국
나도 문제를 가로질러
막걸리를 사발에 부었다
눈보라가 팽팽하게 들이치다 도망가고
멀어지다가 죽은 듯이 펑펑 내린다.
▲강태승 시인
충북 진천 백곡 –출생-
2014 계간 문예바다 등단
김만중 문학상 /아르코 문학 나눔
머니투데이 경제신문 신춘문예 대상
백교 문학상 /한국 해양문학상
추보 문학상/해양 문학상
무성서원 상춘 문학상 /김명배 문학상
시집; 『칼의 노래』 『격렬한 대화』 『울음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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