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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詩人 김연지
 
 
 
카페 게시글
일반 게시판 스크랩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윤봉길 의사의 저한당..
최종탁 추천 0 조회 112 16.08.07 18: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장부는 집을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쓴

'부출가생불환'라는 붓글씨 족자를 보면서

윤봉길의사의 애국심에

누구나 감사함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윤봉길 의사가 4살 때부터 중국으로 망명했던 1930년 이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저한당'이라는 이름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저한당의 정문인 계명문을 들어서면

단아한 초가집 저한당이 보인다.

 

저한당은

사적 제229호인 매헌윤봉길의사사적지에 속해 있으며

윤봉길 의사는 일제시대였던 1932년 4월29일 일왕의 생일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킨 독립운동가이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을 복원하였고 유물전시관과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을 세웠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2년후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천황생일인 천장절겸 상하이 사변전승 기념식장을

폭파하는 의거를 거사하게 된다

그때 흔히들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라고 한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는 당시 침체되었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소였고

또 그당시 일본인 민단장과 시라카와 사령관이 죽고 수뇌급 수명은 중상을 입게되는

사건이 중국등 여러 나라에 보도되고

세계만방에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알렸다고 한다.

윤봉길의사는 일제에 속박딘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소 보여준 실천 사상가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저한당을 둘러보는데

너무나 고즈넉하고

정갈한 풍경이 아름다웠다.

 

 

 

 

 

 

윤봉길의사 동상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사적 제229호)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저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이 복원되고 유물전시관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세워진 것은 1970년 이후이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으로서 초상를 모시고 있으며,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충의관을 세워 윤의사의 농촌 계몽운동과

 4·29의거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를 추모하는 매헌 문화재가 열린다.

-문화재청 발췌-

 

 

 

윤봉길의사 기념탑

 

 

 

 

 

 

 

저한당으로 가는길...

 

 

 

안채와 사랑채가 마주 보고 있었다.

 

 

 

저한당 안채

 

 

 

 

 

저한당의 일각문.

 

 

저한당 사랑채의 야학방에는

그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봄이 오려는지

여기저기 나무와 마른잔디에도 푸른빛이 돌고,,,,

 

 

 

저한당 후문,,

이문을 나와서  도중도교를 건너면 생가광현당으로 갈 수 있었다.

 

 

윤봉길의사의 지극한 삶

간결했지만 강한 삶..

 

저한당을 돌아보며

나는 가장 맑은 가슴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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