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이진화 | 날짜 : 09-12-26 00:26 조회 : 1787 |
| | | 느린 밥상
이진화
얼마 전에 새로 시집 온 사촌 동서가 집들이를 한다고 해서 어른들을 모시고 갔다. 젊은이들이 거의 맞벌이를 하므로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드문 일이 되었다. 혹시 한다 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라 부담 없이 방문을 했는데 새댁이 혼자 음식 장만을 하느라 쩔쩔 매고 있었다.
공부하느라 결혼이 늦어졌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새댁이라 집안 어른들도 기대를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손수 마련한 상차림에 더욱 흡족해 하셨다. 식단도 어른들 건강에 좋은 채소와 해물 등 자연식품 위주로 정성껏 준비를 했다. 칠십대 중반을 넘긴 다섯 분의 어른들은 이렇게 모여서 식사를 나누는 일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느냐고 기뻐하시며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누셨다. 비록 청력이 떨어져서 서로 동문서답은 하셨지만 형제 자매간의 우애는 그런 장애를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바로 전날은 할머니 기일이라 우리 집에서 추도식을 가졌고, 고모 세 분과 작은 아버지께서 오셨다. 기독교식이라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추도식 때는 어른들이 늘 드시는 음식을 장만한다. 탕국, 나물, 생선전과 나물적, 흰살 생선구이, 편육, 우엉과 연근조림에 김치 서너 가지가 전부지만 모두 맛있게 드셨다. 모든 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하며 즐겁게 드시기에 이것저것 챙겨드리고 싶었다. 남해에서 가져온 죽방멸치가 있는데 좀 드릴까요?’ 했더니, ‘야야, 임금님도 대추 준다카면 좋아한단다. 싸 도고.’하셨다. 떡이며 전이며 건어물을 싸들고 가신 것이 그 전날 저녁의 일이었다. 어른들은 날마다 어제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며 한바탕 웃으셨다.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를 보살피고 북돋워주는 일이다. 오감 중에서도 미각이 가장 사회적인 감각이라 사람들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소통을 한다. 만약 음식의 재료들이 스스로 가꾼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마음이 가까워진다. 땅에 심겨져서 자라다가 거두어들여지는 모든 과정에서 가꾼 이의 땀과 눈물, 정성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번 김장이 그런 경우다.
시골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농사를 지었다는 문우 이 선생님은 초보 농부답지 않게 배추를 수 백 포기나 재배를 했다며 몇 포기를 우체국 택배로 보내주었다. 우체국 택배용 상자 안에는 지푸라기 옷고름도 풀지 낳은 배추 일곱 포기가 정성스레 담겨있었다. 햇빛을 받고 노지에서 자라 푸른 잎이 많은 배추들은 마치 여러 겹의 초록빛 치마를 겹쳐 입은 아가씨처럼 예뻤다. 뽀얀 줄기에 배춧잎이 지지미같이 오글조글하고 몸피가 작은 배추는 속이 꽉 찬 시장 배추보다 한결 고소하고 달았다. 급히 보내느라 흙을 털어낼 새도 없었다는데 그 바람에 흙에서 사는 작은 딱정벌레 몇 마리도 함께 우송이 되어왔다. 싱싱한 배추와 상자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곤충들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이것저것 장만해서 김치를 담았다. 그 김치가 어른들의 입맛에 맞아 칭찬을 듣게 된 것이다. 농부가 여름에는 물 때문에 늦가을에는 갑자기 닥친 추위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것을 아는 바라 그 분의 김장 후기는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여덟 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내가 직접 심어서 따고 말려서 방앗간에서 빻은 고춧가루와 소박하게 자란 갓과 쪽파를 버무려 김장을 담았다. 할머니들은 정성껏 키운 배추가 너무나 곱다고 하신다. 올 겨울 동평리 노인정엔 맛깔난 김치가 할머니들 마음을 위로해 주겠지.’
농사라고는 지어본 일이 없는 분이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 시골 노인정 할머니들에게 김장을 담아주다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하고 가족들의 밥상조차 인스턴트 식품에 의존하는 시대에 조용히 멈추어서서 거울을 들여다보게 하는 일이었다. 서툴지만 손수 첫 밥상을 차린 새댁과 초보 농부 이 선생님으로 인하여 이번 겨울은 땔감 없이도 한결 훈훈하리라는 일기예보를 들은 셈이다. 정성이 발효된 슬로우 푸드와 시간이 녹아들어 느리게 마련되는 밥상은 속도에 지친 마음과 몸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준다. |
| 임재문 | 09-12-26 01:17 | | 이진화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느린 밥상이 아니라 정성이 가득한 밥상입니다.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 | 이진화 | 09-12-28 10:17 | | 임재문 선생님,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사모님과 더불어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눈이 많이 오고 춥습니다. 왕송호수도 꽁꽁 얼었겠지요? | |
| | 정진철 | 09-12-26 09:04 | | 오늘 12. 26 모처럼 집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홈페이지를 열고 올리신글들을 정말 천천히 읽어 가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합니다. 이진화 전 회장님은 어디에서 이런 좋은글을 쓸수 있을까? 그 예쁜 용모에서 나오시나 , 그러다가 배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남에대한 배려가 먼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범사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새댁의 처지에 대한 배려에서 정성을 읽고 초보 농군의 가슴에서 자연을 읽을수 있는 원천이 배려라는것.... 고거 지가 배웠네요 ㅎㅎㅎ | |
| | 이진화 | 09-12-28 10:22 | | 정진철 선생님, 정말 배려가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격려와 칭찬을 하시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창 밖이 온통 은세계입니다. 맑고 쨍한 날씨가 제법 겨울다워요. 모두들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스런 발길이라 겸허해 보이네요. ㅎㅎ..(^_^* | |
| | 임병식 | 09-12-26 14:51 | | 좋은 분들과 교분을 나누며 사는 모습은 언제나 훈훈하고 아릅답습니다. 각별한 우정이 부럽습니다. 금년 한해 고마웠습니다. 얼마남지 않는 금년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에는 더욱 좋은 일만 많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 |
| | 이진화 | 09-12-28 10:39 | | 임병식 회장님, 2009년에는 내내 마음이 서울과 전국을 순회하셨겠지요. 여수는 좀 따스한가요? 어제 오후부터 서울에는 눈발과 추위가 엄습을 했습니다. 제 친구들이 둘레길, 올래길도 좋지만 남해안 도보여행을 한 번 가자고 하더군요. 남해안 하면 여수. 통영, 마산, 창원, 진주... 우리 동인들과 문우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저절로 생각납니다. 남은 해와 다가올 해에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 |
| | 박영보 | 09-12-27 01:51 | | 궁중요리, 진수성찬보다 마음으로 끓여 내 놓는 한그릇의 라면국물이 더 구수하고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 함께 모인 한자리에서의 오손도손한 모습들,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는 기쁨, 고향 집의 따뜻한 안방의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 속에 두 발을 들여놓고 싶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에도 좋은일만 있으시기를 빕니다. | |
| | 이진화 | 09-12-28 10:52 | | 박영보 선생님, 그런 가족의 모습이 사라지는 요즈음에는 식탁만이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25년 간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지켜지던 밥상이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서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더군요. 머나먼 타국에서도 텃밭 일구며 가정적으로 자상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 최복희 | 09-12-28 13:02 | | 이진화 선생님 글을 읽으며 바로 제 이야기 같아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세월따라 자꾸 변화되네요. 좋은 것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으련만... 가슴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은 점점 깊은 맛이 납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읽게 해 주십시오. | |
| | 이진화 | 09-12-29 11:31 | | 최복희 선생님, 안녕하시죠~!^^ 선생님야말로 자연이 숨쉬는 느린 밥상을 실천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은 한 해 잘 보내시고 새해에는 문단과 문단 밖에서 두루 빛을 발하소서. 밝고 푸근한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인 최선생님, 늘 건강하세요. | |
| | 김창식 | 09-12-28 19:17 | | 느린 밥상이 바로 그런 밥상이었군요... 절대 공감! 이진화 선생님 댁내 평안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 |
| | 이진화 | 09-12-29 11:33 | | 김창식 선생님, 새해에는 더욱 젊어지시고 각박한 세상을 넘어서는 낭만과 읽는 즐거움을 주는 좋은 글 많이 보여주세요. | |
| | 김정자 | 10-01-01 23:26 | | 이진화 전회장님 가슴 따뜻하고 온기가 가득한 글 잘 감상했습니다. 어찌 하면 이리 좋은 수필을 쓸수 있을까 또다시 고민이 되는 밤입니다. 미모에 목소리에 명필가에 그 어느것 한가지 빼 놓을수 없는 선생님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경인년을 맞이하여 더욱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건강하소서~ | |
| | 이진화 | 10-01-02 23:55 | | 김정자 선생님, 감사합니다. 기쁜 소식 듣고 더불어 즐거웠습니다. 요리의 달인이신 선생님께서 격려를 해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 일만성철용 | 10-01-02 06:24 | | 금년은 아내가 고희를 맞는 해입니다. 그래서인가 단 둘이 사는 집에 요즈음 갑자기 아내가 밥하는 일을 버거워 합니다. "여보, 80이 되면 우리 시설로 갑시다. 친구들이 그래요. 남이 해주는 밥은 무엇이나 제일 맛있다고." "그러면 6년 후에 가자는 말이네!" 우리는 하염없이 웃습니다. 그런 우리 아내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글이네요. | |
| | 이진화 | 10-01-03 00:02 | | 일만 선생님, 사모님과 나누시는 식탁이 늘 따스하리라 여겨집니다. 사모님께서 오랫동안 수고가 많으셨으니 맛있다, 고맙다 칭찬하시면 훨씬 힘을 얻으실 겁니다. 그 많은 여행을 해도 지치지 않는 선생님의 활력이 바로 사모님의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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