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연말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 있다. 바로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이다. 나는 역사학자도 드라마 전문가도 아닌 일개 시청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드라마와는 다른 감흥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이런 사극이다. 사극도 여인들의 치마바람이 아닌 사나이들의 나라와 권력을 앞에둔 건곤일척 대결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요즘 판을 치는 이른바 퓨전 사극과는 의미가 달라도 사뭇 다른 것 아니겠는가.
나도 나이가 들면서 지난 역사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그 역사가 진실된 역사였나 아니면 승자의 승전보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에 불과한 것인가 등등 궁금한 점도 많았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들으면서 내 나름대로 퍼즐을 맞춰가는 중이다. 그런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고 다양한 묘사가 이뤄졌던 것이 바로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대왕에 이르는 흐름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대하드라마를 통해 이성계 이방원에 대해 이런저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상남자인 마초맨들이 머리속에 각인돼 있다. 물론 이성계는 장군출신이었기에 마초적인 성향이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까지 상남자 이미지가 머리속에 박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 역을 맡은 유동근 배우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참으로 유동근 배우는 이방원 역할에 충실했다. 당시 시대상을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유동근배우니까 저런 왕자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좀 나쁘게 말하면 조폭 두목같은 캐릭터로 덤비는 무리들을 한칼에 도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예전 이성계와 이방원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예외없이 현대식 조폭 영화를 닮아 있었다. 목소리를 짝 깔고 말하는 것이나 넵 형님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나 두목의 지시에 따라 스스럼 없이 도륙을 일삼는 것 등이 어찌그리 조폭영화 일색일까 하는 것이다. 하기야 그런 현장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어울렸을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인 2021년 12월 11일 밤 9시 40분에 등장하는 태종역에 배우 주상욱씨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미리 예고편을 시청하지 않은 나로서는 조금 놀랐다. 주상욱씨는 그동안 주로 멜로 드라마나 차도남 연기에 익숙한 배우 아니였던가. 목소리도 조금 하이톤 스타일 그러니까 유동근씨의 굵고 낮은 톤과는 사뭇 달랐다는 이야기다. 하도 유동근씨의 이방원에 익숙해져 있는 내 눈과 귀에는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른 생각이 밀려왔다. 역사책 어디에도 이방원이 덩치크고 목소리가 바리톤스타일이라는 것은 없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실제 이방원의 모습이 유동근씨보다는 주상욱씨에 가깝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방송후 자료를 찾았더니 실록에 나온 이방원은 건강체질은 아니였고 외모가 조금 곱상한 스타일이 아니였나 그렇게 생각됐다. 그렇다면 유동근씨보다는 주상욱씨가 조금 사실과 가까운 인물 배역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또한 가족들을 생각하는 가정적인 남자로 묘사되고 있다. 우왕의 군사들에게 쫒겨 달아나면서도 자신의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업고 피신하는 모습에서 저런 인물이 어떻게 형제들을 도륙하고 앞길을 가로막는 인물들을 처단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연출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캐릭터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런 데는 필히 연유가 있을 것이라는 복선을 깔고 있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역을 맡은 김영철 배우도 마찬가지이다. 사극에서 뼈가 굵은 배우이자 성격파인 김영철씨는 예전에 느꼈던 카리스마에 넘치는 장군 이성계가 아니라 조금 고뇌하고 이것 저것 생각이 많은 군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까라면 까가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런 조금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었다. 목소리는 예전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 궁예의 목소리이지만 그래도 톤이 많이 낮아져 있다. 이것도 기존에 보고 머리에 각인됐던 이성계의 이미지와 다른 면이었다. 자신의 입신영달만을 획책하는 인물이 아니라 명분을 중시여기는 선이 섬세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성계와 그의 자식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사극에서 보지 못했던 가족간의 평범한 일상사가 그려진다. 딱딱하고 고답적인 형제 관계가 아니라 서로 장난도 치고 노골적으로 싸움도 행하는 그런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현대극의 도입이 아닌 당시 그 시절의 시대상을 연구한 결과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 당시도 지금과 인간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 않을 터 그동안 사극에서는 너무 형식적인 모습에 경도된 것이 사실 아니든가.
듣자니 연출자 김형일 피디는 주상욱 배우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한다. 자신은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인 이성계와 이방원에게서 영화 <대부>에 나오는 말론 브란도와 아들 알 파치노의 캐릭터를 읽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피아 세계를 평정해 가는 두 부자의 접근 방식을 이 드라마에 쏟아 넣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말론 브란도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위해에 대해 단연코 보복한다. 물론 먼저 선제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할 시에는 처절하게 보복한다는 그 패밀리 정신이 이 드라마에 녹아 들어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알 파치노의 경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가려는 목표에 장애물이 되면 자신의 가족들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비록 그 대상이 자신의 혈육이라도 말이다. 대단히 중요한 관람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이 태종 이방원 드라마가 횟수가 거듭할수록 어떤 모습을 보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사건의 배열이 아닌 각 배역들의 행동에 고뇌가 담겨 있는 장면이 상당히 포함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등장한 배역들 이성계 이방원 이방원의 처 민씨, 이성계의 후처 강씨, 이방원의 형제들, 정몽주, 정도전 등등에서 지금까지 사극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에서도 그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부디 알찬 역사적 사실의 전달은 물론 이방원과 이성계의 숨겨진 역사적 인물상을 제대로 전달해 주기를 역사를 귀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전하고 싶다.
2021년 12월 13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