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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단일제국으로 세계최대의 제국을 건설한건 사실이요
몽골군이 인류역사에 남을 강군중 하나라는 사실에도 동의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국 호라즘,금나라가
개쳐발리는 사태는 없었을테죠(물론...금나라는 애초에 몽골을 우습게보다가 당한거고 호라즘은 대군끌고 성안에만 틀어박혔다가
당한 애들이긴합니다만 어쨌든 쳐발랐으니 인정 다만 사마르칸트점령당시엔 약간 고전도 했죠 아바스는 뭐ㅡ.ㅡ 다무너져가는 애
들이었으니ㅡ.ㅡ;;;;)
그런데 오고타이칸만 안죽었어도 몽골이 유럽,아프리카쯤은 쉽게 제패했을거라는 의견이 많더라구요ㅡ.ㅡ
더군다나 근거로 대는게 다 리그니츠전투,모히전투인데 문제는 이 전투를 하나같이 정체불명 근거로 신격화시킨다는게 문제;;;;
리그니츠전투에서 심지어 몽골 수천명이 10~20만의 유럽연합군을 짓밟고 중세유럽 3대기사단중 하나인 튜튼기사단전멸 떡밥까지 있죠ㅡ.ㅡ
모히전투 에서도 몽골이 헝가리의 벨라4세를 상대로 쉽게 이긴것처럼 묘사를 하시는분들이 많더라구요 근데 웃긴건
리그니츠 전투에서 전멸했다던 튜튼기사단은 전투가 끝난지 4개월도 안돼서 동프로이센에 대규모원정을 떠나서 성공을 시켜버림ㅡ.ㅡ;;;;
거기서 전사했다던 튜튼기사단 지휘관은 포포 본 오스테르나인데 실제로는 튜튼기사단장도 아니었을뿐더러 실제역사에선 무려 15년을 더 살았음;;;;
타타르연대기,얀 듀코츠연대기등의 기록을 종합해서 당시 리그니츠의 전황을 살펴보면 양쪽 동원병력은 양쪽병력이 각각 7~8천수준으로 추정하며 이 수치는 상당히 신뢰를 얻고 있지요
따라서 당시 튜튼기사단은 아예 참전 자체를 안했거나 참전했다한들 소수가 참전한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또 당시 폴란드군은 전문 직업군인이 아닌 "금광광부"와 모라비아인으로 구성되어있었으며 초반 전투에서 몽골군 선두를 격파하고 추격하다가 매복에 걸려 패배한 병력이며 다른 폴란드의 정예병은 따로 석궁으로 상당히 효과적으로 교전중에 몽골군내에서
폴란드어로 돌아가라! 고 외치자 몽골군의 책략을 의심하여 철수해 버렸죠ㅡ.ㅡ
따라서 남은부대는 슐레지엔공 하인리히2세의 병력인데 처절한 "백병전"끝에 끝내 무너지고 맙니다
당시 초반전투는 폴란드의 우세였습니다만 몽골군의 연기와 악취를 동원한 술책에 말려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죠
당시 초반 전위가 무너지고 막판 백병전으로 인해 몽골군이 입은 피해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리그니츠전투가 낙승이었다면 단언하는데 폴란드 역시 러시아처럼 타타르의 멍에를 안고 지냈을겁니다
하지만 리그니츠에서 승리를 했음에도 아무런 정복작업 없이 곧바로 헝가리로 이동해버립니다
그 소린 몽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몽골군의 전력으로 그 지역을 정복하는것이 어렵단 얘기가 맞겠죠
모히전투요? 몽골군은 아주 심각한 상황을 맞습니다 모히전투에서 몽골군은 3~5만 헝가리는 1만5천에서 3만수준으로 추정합니다
헝가리의 왕 벨라 4세는 한밤에 야습으로 다리를 건너 강건너의 몽골군을 격파해버리고 소수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해 버리자 뒤늦게 바투가 이끈 본대가 사조강을 넘어 벨라 4세를 공격합니다 당시 몽골군은 투석기를 동원해서 강건너의 헝가리군을 공격했고
헝가리는 이번에 오는 부대가 몽골의 소규모 부대인줄 알았는데 본대인걸 알자마자 잽싸게 ㅌㅌㅌ합니다
헝가리가 부대를 재정비하는동안 바투가 군단을 완전히 도하시키고 벨라 4세의 헝가리를 공격합니다 한마디로 백병전이 벌어진거죠
몽골이 숫적우위도 가지고 해서 몽골이 우세할거라는 예상이 있으시죠? 천만에요 오히려 사태가 악화됩니다
그때 지형이 배후에 사조강을 낀 좁은 땅이라 몽골이 자랑하는 경쾌한 기마전을 펼칠여건이 안됐거든요ㅡ.ㅡ
덕분에 헝가리에게 유리한 전황이 펼쳐집니다
당시 몽골은 군단전체가 무너질뻔하였으며 바투의 부관은 물론 30여명의 수행원마저 전사해버리는 사태가 옵니다
총사령관인 바투 스스로가 직접 백병전에 나설정도였으면 대충 짐작하실수있겠죠?
그때 후방에 부교를 놓고 사조강 도하에 성공한 수보타이의 병력이 절묘하게 후방을 급습하는데 성공하면서 헝가리군을 격파합니다
바투는 그때 거의 죽다살아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느냐면 헝가리 벨라 4세를 죽일수있는 절호의 찬스도 끝내 놓치고 말았죠 그나마 가까스로
수보타이가 강경하게 추격을 요구해서 추격을 했지만 이미 벨라 4세는 토낀지 오래죠....
이 두전투는 동유럽의 폴란드,헝가리를 상대로한 전투입니다....
헝가리의 급격한 팽창을 허용하게한 헝가리 군사력의 기둥인 쿠만인은 벨라4세가 이미 제거해버린지 오래였죠
따라서 몽골이 서유럽에 간다면 프랑스,신성로마제국,덴마크,잉글랜드같은 강국들을 상대로 혈전을 펼쳐야 하며
서유럽에 평원이 많다해도 문제는 서유럽의 평원은 초원이 아니라 "경작지"입니다 경작지에서 몽골의 기동성이 제대로 발휘될수 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유럽은 바보가 아닙니다 유럽은 이미 강력한 유목민족인 훈족,마자르족을 상대한바가 있으며
훈족은 로마에게 마자르족은 신성로마제국의 원형인 동프랑크왕국에 의해 방어된 바가 있으며
전성기 이슬람의 경쾌한 기병역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와티에 전투에서 막아낸전력이 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의 앵글로 색슨족은 경기병대를 보유한 켈트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끝내 켈트족을 웨일스,스코틀랜드등 산지로 몰아냅니다
더군다나 서유럽에 가면 단단한 성들이 몽골군을 맞이해 줄겁니다 설령 야전에서 승리했어도 곳곳에 산재되어있을 요새들의 방해로 적군의 완전격멸이 힘들어질테죠 더군다나 요새를 활용한 서유럽의 전략은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상당히 섬세한 전략을 사용하죠
몽골이 아무리 금과 호라즘정벌로 공성의 노하우를 쌓았다지만 서유럽의 성들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지속적인 공성은 몽골군의 전력을 차츰차츰 깎아먹어 끝내 패배로 이어지게 하겠죠(몽골이 서유럽의 성들을 우습게 쓸어버릴 전력이면 단언하는데 몽골은 양양성을 단숨에 함락시켰을것이요 조어성이 끝끝내 버티지도 못했을겁니다)
또 당시 서유럽은 이민족에게 위기가 올경우 "카톨릭"의 깃발아래 잘 뭉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미 유럽은 십자군으로 한데 뭉친경험이 있는데다 더군다나 백년전쟁당시 영국 프랑스는 전쟁와중에도 투르크가 위협을 가하자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켜 투르크에 대응하기도 합니다
몽골의 위협이 다가와도 서로 반목하며 쌩까다가 무너질것이다? 몽골이 진짜 그리 생각하고 서유럽에 온다면 그건 몽골의 제대로된 착각일 뿐이죠
참고로 유럽은 샤를마뉴 대제의 프랑크왕국이래 적어도 기본적인 통합성은 유지했습니다 물론 종교또한 한몫했구요
무엇보다 교황이 몽골군에 대응해 십자군을 일으킨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있습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서유럽으로 바투가 돌진할경우 유력한 첫번째 매치업상대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손꼽히는 황제 무려 "프리드리히 2세" 되시겠습니다 ㅋㅋㅋㅋㅋ(참고로 미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는 다른인물입니다 이 인물도 우리나라에 인지도가 적어 그렇지 문무에 정통한 먼치킨입니다 ㅋㅋ) 그리고 바로 옆나라 프랑스엔 중앙집권의 기틀을 닦고 본격 서유럽의 중심으로 조국을 도약시킨 성왕 "루이 9세"가 계시네요? 매치업 상대만 봐도 ㅎㄷㄷ한 지경인데ㅡ.ㅡ 중세 유럽이 왜 만만해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덜떨어진 상대를 아바스왕조를 위시한 이슬람의 먼치킨들이 호구라서 가만뒀을거 같습니까?
그리고 몽골의 유럽침공이 바투,수보타이의 정벌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바투는 킵차크한국을 건설한뒤
지속적으로 유럽을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벨라 4세는 몽골의 침략이후 당시의 전쟁을 교훈삼아 "서유럽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받아 전략,전술을 재정비하고 헝가리 곳곳에 돌로만든 요새를 증축및 건설했습니다 결과는?
1284~85년에 걸친 킵차크한국의 노가이칸의 대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일단 오자마자 트란실바니아지역은
성공적으로 유린합니다만 북부헝가리에서 눈에 막혀 공세가 좌절된뒤 페스트에서 헝가리의 라디슬라우 4세에게 완패를 당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세케이인들의 매복에 걸려 또다시 죽사발이 나죠 이듬해에 또 공세를 펼치지만
또 깨집니다
이게 몽골의 유럽정벌의 실체에요ㅡ.ㅡ;;;;;
물론 바투,수보타이의 군대는 강합니다 인정 합니다 다만 몽골군도 인간입니다 보르츠요? 먹을것만 해결된다고 보급이 해결됩니까? 화살은? 창은? 하다못해 갑옷은? 갑옷을 보수할 기름은? 보급은 단순히 먹을것만 해결하면 다가 아닙니다ㅡ.ㅡ
물론 중국처럼 몽골이 바로옆에 있어 지속적으로 유럽에 원정을 갈수있다면 솔직히 전 유럽정벌 가능할수있다고 봅니다 남송의 우주방어도 기어이 깨낸 인재들이니 불가능하진 않겠죠....
단 바투의 군대만으로 유럽을 정벌하는게 가능하냐? 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
첫댓글 이이제기
1. 이 두전투는 동유럽의 폴란드,헝가리를 상대로한 전투입니다....헝가리는 당시 신흥강국이 맞습니다만 헝가리의 급격한 팽창을 허용하게한 헝가리 군사력의 기둥인 쿠만인은 벨라4세가 이미 제거해버린지 오래였죠
-> 그 당시 헝가리는 잘나가던 시절이 아닙니다. 벨라 4세의 아버지인 안드라시 2세가 실지왕 존처럼은 아니지만 잦은 외정,사치로 인해 벨라3세가 일으킨 중흥기를 끝내는 선이 아니라 왕권을 약화시키고 고위귀족의 신장을
인정한 어러니 블러(이는 오-헝 연합까지 이어지는 헝가리 귀족이 오-헝 이전까지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유럽 귀족 막장의 투톱을 이룹니다.)
로 인해 왕권 강화겸 친위육성 일환으로 몽골침입전엔 웬수같던 쿠만족 회유해서 아들을 쿠만족 칸 딸과 혼인시킬 정도였고.. 몽골침입당시 국가비상사태라고하나 고위귀족들이 몸사리느라... 동원병력이 적었을 것(이건 어디까지나 제 몽상이지만..)입니다만 다행히 모하치패전같은 경우를 피한거죠.
@데미르 카라한 데미르 카라한님 지적이 맞습니다 제가 표현을 신흥강국이라고 표현한게 어떻게보면 헝가리를 제법 건실한국가로 표기를 해 버린격이 되었네요 ㅎㅎ 다만 당시 헝가리가 벨라 4세에 치세아래 영토확장이 활발한 시기로 제가 알고 있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마네 사실 고위귀족이 덜 날뛰거나 암군인 안드라시 2세만 아녔다면.. 유목민 전술 잘 아는 헝가리의 피해가 크지 않았을겁니다. 폴란드는 뭐 당시 나라가 쪼개져 있어 모르겠고.. 오히려 몽골의 서유럽 침입했다면.. 신롬 경우 독일내 왕권 복구할 마지막 기회(지만 뼛속같이 시칠리인인 프리드리히2세라 안될거야..)였을거고.. 프랑스도 승패여부떠나 왕권강화가 더 촉진됐을것 같습니다. 대신 정복보다 약탈이나 전초전으로 간다면 성을 지나치고 주변지만 약탈할테니 심각한 피해를 입겠죠?
@데미르 카라한 동감합니다 무엇보다 벨라 4세가 모히전투에서 몽골군과 격돌할당시의 환경이 상당히 안좋은 상황이었는데 그만한 선전을 한걸보면 벨라 4세도 범상한 왕이 아니라고 생각되더군요 진짜 딴거없이 쿠만인만 가세했었어도 몰랐을것 같습니다 근데 사실 약탈이나 전초전으로 갔어도 얼마 못갔을것 같습니다;;;
2. 전성기 이슬람의 경쾌한 기병역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와티에 전투에서 막아낸전력이 있습니다.
-> 동로마를 파상공세한거와는 좀 비교하기가...(뭐 서고트왕국의 유산이 싸그리 말소된거 보면....인정하긴 합니다만..) 당시 프랑크는 보병-기병 과도기라 비교우위하기 힘듭니다.
3. 또한 잉글랜드의 앵글로 색슨족은 강력한 경기병을 보유한 켈트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끝내 켈트족을 웨일스,스코틀랜드등 산지로 몰아냅니
-> 당시 호빌라경우 등자도 없던 시기라 강력한 경기병이라고 보긴 좀 힘들지 않나 싶네요...
투르 푸와티에전투는 공세의 정도는 분명히 틀리나 이슬람의 서유럽공세를 좌절시킨 중요한 전투이기에 넣었으며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여 승리한 전투인지라 넣었습니다. 그리고 등자가 없던 시기라는 지적엔 공감하나 "당시 기준"으로 봤을때 앵글로 색슨족 기준에선 분명 강력한 상대였을것이었기에 수식어를 집어넣어 봤습니다 그리고 중요한건 유럽의 대기병전 능력도 절대 약한 수준이 아니며 유럽도 여러종류의 기병대를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지역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는데 제가 필력이 딸리다 보니 전달이 좀 미흡했나 보네요
4.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서유럽으로 바투가 돌진할경우 유력한 첫번째 매치업상대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손꼽히는 황제 무려 "프리드리히 2세" 되시겠습니다 ㅋㅋ
->안타깝게도 이 황제는 독일내 왕권을 재확립시키려던 아들 하인리히를 제후들의 항의로 인해 감옥에 가둬 죽게할 정도로 작센-살리조의 독일 대공령을 쥐고 이탈리아에게 세금받고 교회를 거뭐진 정책이 아닌.. 슈바벤-부르군트-북이탈리아를 거뭐지고 제후를 다스린 할아버지보다 더한..
중앙 집권된 이탈리아 위주의 제국(뭐 오토 2-3세의 이상향과 얼추 비슷해보입니다...)을 바라던 인간이라... 오히려 제후들이나 교황을 통해 이득을 볼려했을 것 같은.. '근대적'인
5. 명목상 사령관은 바투가 맞는데.. 실질적인건 수부타이인건 다들 아실겁니다. 루이9세의 치세경우 중앙집권을 완성시켰다고 보기힘든게.. 필립2세가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루이8세부터 고추밭을 만들어서.... 귀족가문을 내치고 분파가문으로 채우는 식으로 했지만.. 카페왕조시기까지는 별 문제는 없었지만 촌수가 멀어지고.. 후사가 끊어지는 후나.. 왕위계승에 거리낌이 없다보니 훗날 오히려 반왕파로 돌아서는 지라.. 루이 14세 치세에 이르러 된거죠.
@데미르 카라한 4.아무리 시칠리아-이탈리아를 중요시 여겼다지만 당장 빈이 위협당하고 독일내부까지 분탕쳐놓는 꼴까지 가만둘 황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되네요 어떤방식으로든 바투군단을 상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5.옙 카라한님 말씀이 맞네요 루이 9세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중앙 집권체제를 완성했다기보단 왕정집권의 기틀을닦았다? 이정도가 적당해 보이는거 같네요 이부분은 제가 과대설명을 한것 같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6. 1284~85년에 걸친 킵차크한국의 노가이칸의 대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 이시기는 잡음이 없던건 아니지만 일치단결하던 40년전과 달리 몽골제국 해체로 따로가던 시절이고 노가이도 칸이 아니라 칸을 조종하는 막후 실력자였죠. 헝가리가 방어잘한것도 크지만 과거같은 포스가 나오기 힘듭니다. 대신 불가리아는 탈탈 털어서 재미를 봅니다.
몽골찬양이 심각한 정도여서 후기 몽골이 세운 킵차크 칸국의 유럽정벌 사례를 든겁니다 몽골이 그리 강하면 상황따윈 씹어드시고 유럽따위 털어드셔야 맞는건데 실제론 그정도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언급했습니다
데미르 카라한님의 지적을 참고하여 약간(?) 글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데미르 카라한님 지적 감사드립니다
뭐, 따지고 보면 아인잘루트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1. 모히 전투에서 몽골 군대의 피해는 사실 바투의 전략적 실책이 주 원인이었습니다. 본래 수베에데이의 계획은 부대를 5개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강을 도하, 여러 방향에서 헝가리 군대를 단박에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투는 지나치게 빠르게 자신의 군대를 진군시키는 바람에 피해가 컸구요. 1241년 여름 헝가리에서 이뤄진 대규모 집회에서, 수베에데이는 바투의 성급한 진군으로 피해가 컸다고 설명해주었고, 바투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습니다.
2. 헝가리 군대의 서유럽화...랄까, 요새 증축 및 건설은 900년대 이후부터 진행되던 겁니다. 이유는 카롤링거 제국의 약탈 원정이 너무 매서워서(...) 사실 헝가리 대평원이 크기가 작아, 막상 기병은 1만 5천 가량 정도 유지가 한계라 훈이든 아바르든 머저르든 간에, 이주 초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기병 위주의 군대를 운용하지 못했습니다.(때문에 몽골 군대의 퇴각 이후 헝가리 평원의 지력이 심각한 타격을 입는 바람에, 이후 헝가리 왕국 상황이 더 개판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몽골 병력은 최소 5만 이상이 헝가리로 침입했으며, 한해 가량 보내고 퇴각했습니다)
3. 몽골의 헝가리 원정 목적이 정복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원정 목적은 킵차크 초원 원정 이후 헝가리 방면으로 도주한 킵차크-쿠만 유목민들을 추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헝가리 왕에게 몽골 군대가 보낸 서신에서 보이지요. 그걸 증명하듯, 몽골 군대는 헝가리에서 공성전을 단 한번도 수행하지 않고 벨러 4세의 추격에만 집중합니다.
4. 몽골이 유럽 정복에 나섰다면, 이란 방면이나 중국 방면 정복과 같은 형태로, 도시 정복 > 그 인구 대부분을 징발하여 주변 도시 공략 > 반복 의 형태였을거라 생각합니다. 몽골기병 빠는 사람들이든 까는 사람들이든 사실 이게 몽골 정복의 핵심인데 다들 이생각은 안하시는듯.
몽골이 유럽정복을 시도했다면 몽골의 발목을 제일 잡는 건 보급이죠. 본문에도 적으신 내용이지만 서유럽의 요새들은 몽골 입장에서도 그리 만만하게 볼만한 존재들이 아니었고, 더불어 상당히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었죠. 즉, 회전 몇번 잘했다고 파죽지세로 밀어버린다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니 전쟁은 장기화의 양상을 띄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가장 큰 난제는 보급이죠.
계산하기 쉽게 모든 식량을 곡물로 충당한다고 가정하고 대충 세보면 3~4만의 병력을 먹히는 데 하루에"만" 대략 30톤의 곡물이 소요됩니다.
더구나 이 계산은 인간보다 몇배는 더 먹는 말의 소모분은 아예 뺀 값이죠. 예전에 카페에 어떤 분이 말도 곡물을 먹일 수 있으므로 목초지의 부족을 이유로 몽골의 유럽 원정이 실패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라고 하셨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말에게 곡물을 먹일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니 먹여야 합니다. 소와는 달리 말은 되새김질을 못하는지라 건초만 먹여서는 제대로 열량을 공급해주기 어렵거든요.
문제는 기병의 특성상 말이 머릿수만 따져도 최소 두 배 이상은 많은데다가, 말 한 마리가 사람보다 몇배는 더 먹는다는 것이죠. 말의 운동량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체중의 2~3%를 주는 게 통상이라더군요.
몽골군의 군마 사이즈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대략 제주 조랑말을 기준으로 잡아봤을 때, 말 한마리당 얼추 300kg 정도이니 필요한 사료의 양은 대략잡아 7kg 정도 됩니다. 그리고 기병이 3만이면 말은 적어도 그 2,3배는 데리고 다니는 것이 통상이니 이 말들에게 곡물을 먹이려면 어림잡아도 500~600톤 정도가 필요하군요. 곡물과 건초의 비율이 1:1이라 하더라도 2~300톤 가량입니다. 아, 물론 하루에 말입니다. 유럽의 요새들을 순조롭게 공략한다고 하더라도 이걸 몇 개월 아니 몇 년 이상, 원활하게 공급해줘야 합니다. 더구나 윗분이 말씀하신대로 공성을 위해서 추가로 병력을 징발한다면 소요량은 더더욱 늘어나겠죠.
@우주존엄깻잎파닭 갑자기 뜬금없이 무다구치 렌야의 명언이 떠오르네요.."식량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풀을 뜯어 먹으면서 전진하면 된다!" ㅋㅋㅋ 보급따위 알게 뭐야 일단 전진!! ....... 으앙쥬금 ㅋ 몽골 장수들이 렌야만큼 멍청하진 않았을테니..ㅎㅎ
@Caligula 멍청하진 않더라도 기술적인 한계로 선택지는 더 부족하죠 ㄲㄲ
당시 몽골이 접수한 땅 중 가장 비옥한 곳이 우크라이나 정도일텐데, 현재야 우크라이나가 연간 밀 생산량이 2000만톤 가량 됩니다마는 이는 현대와서 농업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늘어난 수치죠.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1950년대에서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쌀 생산량이 4배 가량 늘었거든요;; 후하게 쳐줘서 지금의 1/4라고 해도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수확량의 절반 가량을 기병 3만 먹이는데 바쳐야 합니다 ㅜㅜ
@우주존엄깻잎파닭 몽골 장수들이 렌야만큼 멍청하진 않았을테니 만약 손쉽게 폴란드-헝가리 군을 격파했다고 하더라도 보급때문에 서유럽으로 깊숙히 들어가진 않았을 거란 뜻이었요 ㅎㅎ
@Caligula 넹, 저 역시 몽골 지휘부가 제정신이라면 아무리 원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어도 그정도 선에서 멈췄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근데 폴란드는 당시에 공국시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