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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사야서의 말씀 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어떤 사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안타까움의 토로입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의 대표적인 토로가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입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안타까움은 '알면 좋을 텐데’, '아는 대로 하면 좋을 텐데'하는 느낌입니다.
알면 좋은데 모르는 것이 안타깝고, 모르면 배우면 좋을 텐데 배우려고 들지 않음이 안타깝고, 잘 되기를 바라는 그가 잘못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겁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미워하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하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잘못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과 사랑의 사람만이 안타까워 하고 충고도 하는 건데,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할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충고해주는 그의 지혜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껏 얘기해줬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 없는 사람은 분노하고 그를 포기해버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안타깝고 그런 그가 불쌍합니다.
그렇지만 불쌍해도 어쩔 수 없는데, 이 '어쩔 수 없음'이 또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 말도 듣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어린애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어린애는 물론 말 잘 듣는 어린이가 아니지요.
아주 미성숙하기만 한 아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은 죽어라고 듣지 않고 떼만 쓰는 아이이며, 지혜로운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로 오늘 당신 말씀의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그러니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식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도 배우고, 같이 먹고 마시는 주님에게서도 배우겠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입니까?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까?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이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이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해지려면 지혜로운 자를 사랑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다가오는 통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도 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온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데, 삼구(三仇,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던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지혜’가 아니면 사랑의 실천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이 지혜를 전하는 역할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실로 거칠고 힘들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교만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기 싫어하는 이들은 여러 핑계로 세례자 요한의 지혜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합리화를 이렇게 합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마태 11,18)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지혜, 곧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마태 11,19)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세대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삼구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을 거쳐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문에 변하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머물러야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변화된 사람과 머무를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분이 물 위를 걸으면 시도할 용기가 납니다.
그 시도 안에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말로만 들어도 안 되고 인간이 아니어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행복을 사는 사람과 머물 때만 증가합니다.
지혜는 지혜로운 자와 머물 때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어디에 머무십니까?”라고 물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배운 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우리가 잘 알듯이 이탈리아 표준어의 시발점이 된 『신곡』(Divina commedia)을 쓴 사람입니다.
『신곡』은 단테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까지 올랐으나 정치적 격변으로 추방당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유랑하다 라벤나에서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랑생활을 하며 지은 이 책은 ‘지옥-연옥-천국’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별히 지옥은 35살(당시 평균 연령이 70세) 피렌체의 최고 공직인 프리오리가 된 시점에서 ‘삼구’(三仇)로 길을 잃고 있었던 자신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입구에서 그는 세 무서운 동물을 만납니다.
표범(육욕)과 사자(권력욕)와 암늑대(재물욕)가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만든다는 교리를 표현한 것이고, 자신이 그런 처지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옥을 거쳐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때 그를 천국까지 인도하는 이는 ‘베아트리체’(Beatrice)라는 여인입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9살 때, 그리고 18살 때 딱 두 번 만났을 뿐인데도 그는 평생 그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9살 때 그녀를 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딸이 아닌 신의 딸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감히 그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18살 때 다시 한번 천사와도 같은 그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불행히도 1290년 향년 24세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만남에서는 잠깐 대화를 나눕니다.
단테는 이미 1283년 다른 여인과 결혼한 상태였고 3남 1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단테는 단 두 번의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말하기 위해 『새로운 인생』(La vita nuova; 1295)이란 책을 씁니다.
그 이후에 10년 동안 세속-육신-마귀에 빠져 지옥의 삶을 살기는 했지만,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준 사람은 그 여인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그녀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외로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 고상한 여인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달콤한 잠에 떨어졌다.”
자신의 아내인 ‘젬마 도나티’에 대해서는 어느 책에서도 일절 언급이 없던 그가 단 두 번 만난 여인에게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날 그녀의 의상은 매우 고귀한 색상인 예쁜 주홍빛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게 허리띠가 달리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해서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때부터 줄곧, 내 영혼과 결혼한 사랑의 신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영혼과 결혼한 신이라 표현한 것이고 그녀를 심장에 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만큼 어떤 누군가를 심장에 받아들이면 그 누군가가 평생 그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그는 순수했던 시절, 자신의 심장 안에 들어온 그녀를 통해 다시 정화되어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단테는 고귀한 사랑만이 그 사람과 함께 머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다는 지혜를 평생을 거쳐 베아트리체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세례자 요한이고 베아트리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면 그분이 심장 안에 머물며 우리를 가난으로 이끌고 이어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을 체험합니다.
먼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그래야 행복하다고 삶으로 말하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라고 하십니다. (마태 11,17)
왜 우리는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무심할까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더 고마워하고 사랑하는 것과 머물게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돈이나 쾌락, 명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과 반대의 길로 이끄는 세상의 세례자 요한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인 그리스도께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천국에 오르는 계단도 사라집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마태 11,17)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11,34-36)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 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콜로 3,16)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언행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의 얼굴은 절대로 경건하거나 엄숙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목이 뻣뻣하다거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로 붐볐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얼마나 소탈했으면 가시는 곳마다 아이들이 졸졸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 지도자들처럼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던지 강의를 시작하면 수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 상을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라도 그 하느님 상이 왜곡된 것은 아닙니까?
두려운 하느님, 처벌자 하느님, 진노하는 하느님,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은 이미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명확하게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둘째 아들, 순식간에 유산을 다 까먹고 맨발의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된 우리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걱정, 우리 죄에 대한 걱정, 종말에 대한 걱정은 이제 한쪽으로 밀쳐두길 바랍니다.
대신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그분이 차려놓으신 이 세상이란 잔칫상 앞에 기쁜 얼굴로 앉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우리 각자 인생의 잔에 담아 감사하며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 한 번뿐인 ‘이승의 삶’에 최대한 감사하며 온몸과 마음으로 만끽하길 바랍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얼마나 적응이 안 되었으면 유다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오랜 세월 메시아를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유다인들이 그린 메시아상은 한 마디로 대단한 메시아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꼬질꼬질한 이 세상의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메시아,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초인(超人) 메시아,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아, 오랜 인간의 소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줄 기적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드러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초라했습니다.
범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밥 같은 것 안 먹어도 되는 메시아, 화장실도 안가는 고상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은 동네잔치 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예수님,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엄청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 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신 하느님 - 겸손, 경청, 배움, 순종>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슬기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한밤중 잠 깨어 숙소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본능적으로 바라보는 하늘과 산입니다.
바다가 그리울 때는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느 자매와 주고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산속에 살기에 바다를 감상하라고 파도 소리 바다를 보내드려요.”
“산이 그리울 때는 산이 되고, 바다가 그리울 때는 바다가 되지요.”
“아!”
33년 동안 날마다 참 많이 바라본 하늘과 산이며 써놓은 시도 참 많습니다.
문득 생각난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당시 작시(作詩)할 때의 느낌입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
물론 여기서 ‘당신’이 지칭하는 대상은 영원한 그리움의 스승이자 주님이신 하느님입니다.
엊그제와 어제 양일간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로 이어지는 긴 헌시(獻詩) 기도문이 인용된 강론에 대해 소감을 밝힌 카톡 메시지 둘을 나눕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어제 성모님 축일 강론 마지막 말씀, 오늘 첫 부문,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계속 이어지는 깊은 관상에서 나온 주옥같은 말씀으로 이른 새벽부터 저희에게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만 찬미하고 귀한 자녀로 기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심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 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기도문이 어제도 오늘도 가슴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이 구절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이유 지향 목표, 생명이 지속되는 이유,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이라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이래서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과 생명의 소통을 위한 숨쉬듯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권하는 것입니다.
요 몇 년 동안 집무실 안에 있는 ‘스파트 필름’이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꽃말은 ‘세심한 사랑’이요 실내 공기 정화 식물이라 합니다.
참 특이한 것이 며칠마다 반드시 물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시들어 죽어가다가도 물만 주면 곧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이 꼭 영혼에 대한 기도의 물주기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영혼과 기도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스파트 필름에 자주 물 주듯 끊임없이 평생 영혼에 기도는 영혼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두루두루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오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을 좌절케 한 이런 인간의 반응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망애의 결핍을 보여 줍니다.
결정적 원인은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위한 기도의 부족입니다.
당시 말씀의 대상자들은 물론 그대로 오늘 나태하고 무기력해진 우리 영혼에 회개와 분발을 촉구하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이사 48,17ㄴ-18)
이사야를 통한 주님 말씀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역시 주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무감각한, 참으로 무디어지고 왜곡된 순수를 잃은 심성들을 보여줍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편견의 시각으로, 멀쩡한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지극히 살아있는 감성을 지닌 현자(賢者)이자 각자(覺者)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는 ‘먹보와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하며 피상적 일방적 왜곡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나는데,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편견의 무지에 눈먼 영적 맹인들의 군중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이 이들은 물론 우리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요즘 수없이 목격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 확증편향(確證偏向), 내로남불, 적반하장(賊反荷杖),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사람들!
모두가 무지와 편견에 눈먼, 귀먹은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1,15)
마음의 눈으로 “보라”와 더불어 마음의 귀로 “들어라”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무지에 눈먼 이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고, 귀먹은 이들의 마음의 귀를 열어주는 것은 경청뿐입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과 겸손의 마음 자세요, 평생 배움의 여정에 참으로 결정적 요소가 끊임없는 경청입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의 기도에 경청의 영적 삶의 기초가 됩니다.
이런 경청과 배움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실천입니다.
참으로 경청에 이어 수용과 동화의 순종의 실천이 뒤따를 때 정화와 성화의 내적 변화이겠습니다.
새삼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 영적 삶의 자세는 ‘겸손-경청-배움-순종’이란 일련의 과정으로 표현됨을 봅니다.
그러니 저절로 간절한 영혼의 부르짖음과 같은 기도입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가 되게 하소서”
주님 친히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신망애 관계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화답송 후렴과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요한 8,12)
“주님이 오시니 마중 나가자.
주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
(복음환호송)
무지에 눈먼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주님 향한 내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성체성사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참 많은 놀이가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등장했던 놀이는 모두 제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였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설탕 뽑기 게임, 줄다리기, 구슬치기, 오징어 게임 등등….
그 밖에도 많은 게임으로 심심한 줄 몰랐습니다.
워낙 게임을 같이 할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참고로 한 반에 70명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심심해할 때가 있기는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모이지 못했을 때, 서로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았을 때는 할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 할까?”라고 제안을 했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가 “그러면 이거 할까?”라며 새로운 놀이를 제안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냥 집에 가자.”라는 말에 하나둘씩 집으로 향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장터에서 혼례잔치 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제안했습니다.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어떤 놀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흥미를 잃은 세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도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떤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함께 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불평불만으로 힘들다고만 말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들은 어디에 흥미를 느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이사 48,18.19)
주님의 계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평화와 의로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며, 이 모든 은총이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고 있나요?
세속적인 것에 대한 흥미가 너무 많아서 주님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와 주님 말씀을 외면하는 지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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