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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콜로 1,15-20
복 음 : 루카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합시다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어제는 오늘 말씀 묵상중 내내 예수님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30년 전 제 사제서품식 때 입당성가(445)와 더불어 제 좋아하는 성가(61)가 생각났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그분만을 따릅니다.”-445장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세상 어떤 것과도.”-61장
어제 저녁은 참 행복했습니다.
얼마 전(8.11) 새벽 저녁놀에 이어 거의 한 달만(9.5)에 참 많은 지인들에게
참 좋은 저녁 무지개를 선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하늘길 예수님을 뵙는 듯 반갑고 행복했습니다.
그 시간은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었지만 저는 고백성사 차 좀 일찍 나왔고,
하여 6:50분쯤 참 황홀한 무지개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여 “사랑의 무지개 선물입니다” 메시지와 더불어 참 많은 분들께 하늘길 무지개를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또 어제 저녁에 저는 하느님께 하늘길 무지개 선물과 더불어
사랑하는 손님 거주 사제에게 추석을 앞두고 뜻밖의 청포도 사탕과 볼펜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선물을 받듯이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사랑의 무지개 같은 하늘길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사랑’ 대신 ‘예수님’을 넣어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 했겠는가 심사숙고해 보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예수님을 닮아 올바른 분별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예수님을 한 결 같이 사랑할 때 관상의 선물에 마음의 순결이요 더불어 올바른 분별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예수님을 닮아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사랑-지혜-자유가 하나로 이어짐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단식논쟁과 새것과 헌 것’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단식의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라 때에 맞는 단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단식은 사랑의 표현일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평상시는 주님과 함께 축제처럼 지내고 신랑이신 주님을 빼앗길 날이 올 때에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날에 단식하면 무난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식의 원리를 명심하는 것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어지는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도 분별의 지혜를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새 부대의 상황에 맞도록 생각과 말과 행동도 새 포도주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묵은 것이 좋다 합니다.
여기서 옛것인 묵은 포도주는 유다교의 관습을, 새것인 새 포도주는 복음을 상징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이념이나, 습성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의 옛것들은 얼마나 바뀌기 힘든지요.
새 부대의 상황에 늘 새포도주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늘 새로이 만나 닮아 변화되는 길뿐이 없습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통해서, 향해서 창조되고 구원된 세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정신은 하늘처럼 높아지고
영혼은 하늘처럼 깊어지며 마음은 대지처럼 넓어지고 낮아질 수 있습니다.
내면은 한없이 비워지면서 예수님처럼 텅 빈 충만의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 찬가’는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상이자 우리 인간의 원형입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닮아가야 할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매주 수요일 저녁 성무일도 때 찬미가로 바치는 내용입니다.
길다싶지만 다시 깊이 묵상하시라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의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서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켜 주셨습니다.”-(콜로1,15-20)
너무 깊고 아름답고 풍부하여 전문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세상 모두가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존속합니다.
황송스럽게도 바로 이런 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날로 주님 사랑을 닮아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지며, 자비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끝으로 제 자작 ‘예닮기도문’ 일부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 예수님!/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제 생명, 제 사랑, 제 기쁨, 제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돌아오는 9월 20일(금) 저녁 7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갑곶성지에서는 순교자성월 기념 음악회가 열립니다.
특별히 이번 음악회는 평화방송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음악회를 열겠다고 결정을 하고 구상을 할 때에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세부 사항들을 방송국 사람들과 점검하고 준비하면서
막연함에서 벗어나 구체화 됩니다.
며칠 전 모든 출연진의 섭외를 마쳤고, 음악회 포스터까지 나왔습니다.
준비할 것이 아직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 9월 20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음악회에 오신 분들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악회에 찾아오실까?’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지만,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기대되고 빨리 그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제 마음을 보면서 하느님 나라도 비슷하지 않겠냐는 묵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빨리 주님 곁으로 가는 것보다 이 세상 안에서 오래오래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빨리 그 나라에 들어갔으면 하는 큰 기대감에 벅차오를 것입니다.
더욱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되며, 이 안에서 큰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불평의 말을 전합니다.
요한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고 기도를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에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단식을 가리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시지요.
주님의 살과 피를 통해 함께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에, 단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지요.
과거의 율법만을 좇아 살고 있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제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모든 것이 새로워졌는데, 그들의 마음은 문드러져서
새 계약의 일꾼들과 화합하지 못하면서 비판만 하면 사는 것입니다.
이 상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저 과거에만 매여 살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지키고 있을까요?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의 새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더욱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단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습니다. 학점은 3학점이었습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론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었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린양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제단에 이사악을 바치려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며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런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인류의 지성과 이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체험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박해하였던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임을 체험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방문하였고, 공동체를 위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공동체에 전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의로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명예, 권력, 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나의 가식과 위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지금 상처받고 있는 이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신앙도, 희망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입니다. 의혹에서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욕망, 시기, 질투, 원망의 삶에서 헌신, 나눔, 용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입니다.
정신을 잃은 법
전삼용 요셉 신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강사는 김창옥 씨일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 긴장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강의를 잘 하는 줄은 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한 기업에서 남성 500명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는 너무 재미있게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책임자 몇 명이 오더니 막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비하 발언을 너무 많이 해서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성문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창옥 씨는 수천 번을 강의한 내용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 항의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들도 재미있게 웃고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강의료는 받아야하니까 참고 반성문까지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강의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움이 자꾸 솟구쳤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김창옥 씨는 딸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도 대변을 자신보고 닦아달라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두 명이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마치 대변을 다 보고난 듯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저런 발언은 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면 옳고 그름은 둘째고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독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은 뺄 생각을 못하고 누가 쐈는지부터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잘 따진다고 해서 그 말이 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기분을 살펴야합니다.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아침은 왜 안 먹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잔소리는 항상 옳지만 상대의 기분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잘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자꾸 따지게 되는 이유는 사랑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당신 수녀회의 회칙이 자꾸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 우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윗분들은 세세한 규정을 정해 놓아야 그때그때 편하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모이면 새로운 규칙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썩 긍정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가족에 법이 생기면 어떨까요?
남편이 언제 일어나서 무얼 해야 하고 언제까지 들어와서 집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면 그곳은 가정이 아니라 감옥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신, 어머니의 정신, 자녀의 정신만 올바로 갖고 있다면 세세한 규정은 필요 없습니다.
세세한 규정이 생긴다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드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10가지로 규정을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규율을 613개 항으로 세세히 구분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 되어 관습법을 만들어 수천 개의 규정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모든 규정은 다 지키는데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법에 얽매여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불평합니다.
단식의 정신은 신랑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육체를 죽여야 영이 강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도 단식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무례가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따지는 법들은 정신을 잃은 트집 잡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 혹은 “저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며 싸움을 한다면
잠시 멈추고 먼저 ‘지금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부터 살펴봅시다.
그렇지 않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신을 잃은 법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적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하여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피고 옳고 그름을 말해야합니다.
그래야 새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어 깁는 것이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기분과 법 둘 다 지킬 수 있습니다.
완전한 변화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더니 ‘지금은 무인수납 중’이라는 푯말이 나를 맞았다.
청년 직원이 코앞에 있는데 손님을 응대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그와 대화해서 조그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주문기가 저 뒤에 있었고, 어린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서 선택하고 결제하고 있었다.
셀프 주유소는 익숙해졌는데, 식당 무인주문기는 아직 어색하고 불편하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참 빨리 변한다.
옛날 것이 더 좋고 편하다고 배움(?)을 게을리 하면 이제는 밥 한 그릇도 사먹기 힘들 것 같다.
어쩌면 정말 로봇이 손님을 맞이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예수님의 등장은 그 시대와 권력층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아무런 계보와 배경이 없는 한 똑똑한 사람으로 치부하기에 그분의 영향력은 두려워할만 했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사회를 전복하는 혁명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율법의 본질을 제대로 해석하고 사람들이 율법의 제정자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그 본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들에 끝까지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억지로 그 사회에서 밀어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회의 붕괴가 아니라 변화였다.
예수님도 그들처럼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에게도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함과 철저함을
거룩하다고 이해했던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분은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그 너그러움의 끝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원하면 생명까지 내어주실 것 같을 정도였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우리가 철저하고 엄격하게 실천해야할 법은 사랑의 법이고, 그 의무의 끝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세상이 자신에게 너그럽고 부족함과 실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란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마음속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주셨다. 그들이 바라는 그대로 해주셨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지어내셨다.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창조사업,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 청년은 무인주문기계를 찾지 못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먹기만을 바라는
멀쩡한 한 아저씨를 안쓰럽게 여겨서 가게규칙을 깨고 나에게 말을 걸고 아이스크림 퍼주었던 것 같다.
부끄럽고 고맙다. 삶이 있고 법이 따라왔다. 그러니 삶이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한다.
옛 법은 기록물 보관소에 남기면 된다. 새 삶에는 새 법이 필요하다.
영원한 생명에는 하느님 사랑의 법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의 법 일부를 떼다가 옛 법에 끼어 넣을 수 없다.
완전히 새로워져야 하고 깔끔히 버려야 한다.
예수님, 새롭고 완전한 법이신 주님,
세상은 당신 안에서 당신을 향하여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시간과 정력낭비입니다.
결국은 당신 뜻대로 세상은 만들어질 테니까요.
무인수납기가 잘 다루지 못해도 주님의 법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사랑법을 가르쳐주시고 그 길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 막시밀리안 수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먹고 마시기만 하냐’고 이야기한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자 함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 집중할 힘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여지기 위해 하는 단식, 해야 하니까 마음도 없이 하는 단식은
영적 교만을 가져옴을 우리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통해 알고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움은 늘 약간의 긴장을 동반한다.
익숙하지 않는 환경, 처음 만나는 사람, 새로운 생활방식의 시도 등.
낡은 것들, 나로 꽉 채워진 기존의 낡은 생활방식으로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비워내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다.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매일 말씀을 접해도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변화는 멀어보인다.
살아가면서 매일 영적전투를 치러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치열함이 필요하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매일 우리를 새롭게 만나주시는 주님을 찾도록 하자.
“그분의 도우심이 우리를 거슬러 돌격해오는 원수의 무리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우리를 위해 싸운다.“(요한 카시아누스)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