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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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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고풍스러움과 운치를 겸한 조계산의 고찰 순천 선암사(제1부)
현림 추천 2 조회 304 17.10.22 18:31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고풍스러움과 운치를 겸한 조계산의 고찰 순천 선암사(제1부)


순천에서 머문 이튿날 아침 선암사로 향했다. 날은 오늘도 여전히 흐려있다.

그나마 비소식이 없어서 다행이다.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인 선암사(仙巖寺)는 전라남도 순천시의 조계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조계산을 중심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와 인접해 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인 529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해천사(海川寺)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신라 말기에 도선이 선암사를 창건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고려 시대에 의천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천태종의 본거지로 번창했으나,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절이 거의 소실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창을 반복하다가 순조23(1823)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해붕(海鵬), 눌암(訥庵), 익종(益宗) 세분의 대사가 6차 중창을 일으켜,

산 이름도 옛 청량산(淸凉山)은 조계산(曹磎山)으로,

사찰명도 해천사(海川寺)에서 선암사(仙巖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선암사 경내로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에 양옆으로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 안성맞춤이다.


사찰 탑으로는 조금 이른 시간인데 이미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느긋하게 소요하는 모습이 참으로 사찰의 운치를 돋군다.


경내가 가까워져 질수록 아름들이 고목이 빽빽이 서 있다.


우측에 부도군이 있다.


날은 계속 흐렸는데도 비는 크게 내리지 않은 모양이다.

계곡물이 참 평화롭고 고요하게 흐른다.



@선암사 장승은 조선조 말엽에 세웠던 장승을 그대로 모조하여 1987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남자 장승 밑 둥에 <호법선신(護法善神)>,

여자 장승 밑 둥에는 <방생정계(放生淨界)> 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선암사 승선교(仙岩寺 昇仙橋)>


@선암사를 찾는 진사들이 즐겨?는 선암사의 승선교(昇仙橋)

196392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길이 14m, 높이 4.7m, 4m로 숙종 39(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에 석재가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승선교는 원래는 자연암반위에 건설되었으나 판상절리의 균열로

이 다리를 만든 지 209년만인 20034월에서 20046까지 완전해체하여

자연암반부에 지대석을 보충하여 대대적인 복원하였다.

다리는 홍교 즉 무지개모양으로 다리 아래 중심부에 돌출된 석이 있는데 이를 용머리라고 한다.

다리의 중심이 이 용머리에 있다.


 

다리를 중심으로 개울 양쪽으로 석축을 쌓아 전체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 다리는 임진왜란 이후 승병으로 성곽을 쌓는 큰 역할을 했던 승려들이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 승선교는 1713년 호암대사가 축조한 뒤 절리가 발생하여

200311월에서 20046월 완전 해체하여 자연 연암반부에 석재를 보충하는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다리 중간에 보이는 정자는 강선루다.


 

@196392일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었다.

선암사는 창건(創建)과 중건(重建)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60(현종 1)에 중창한 것을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1824(순조 24)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이 돌다리도 임진왜란 이후 사찰을 중창할 때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24년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보려고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자 자살을 하려 하자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했다.

대사는 이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우고 절 입구에 승선교를 세웠다고 전한다.

승선교의 치석(治石)과 홍예의 결구(結構)가 벌교 홍교의 것보다 고식(古式)을 띠고 있으며,

그 구조도 웅장한 점으로 보아 영조(英祖) 때 조성하였다는 벌교 홍교보다 조성연대가 앞선다.






승선교에서 본  강선루로 가는 길


강선루


강선루를 조금 지나면 이 고목을 만난다.

세월의 무상을 말하는 듯 곰삭은 형태가 천년고찰로 가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찰경내를 얼마두지 않은 거리에 조성된 삼인당이란 연못이다.

삼인당(三印塘)이란 이 작은 연못은

연못 안에 긴 알 모양의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신라 경문왕 2(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축조당시 도선국사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뒤산의 봉우리가

구봉(龜峯)임으로 거북이는 물을 필요로 하고

또 알이 있어야 종족번식을 이어가기 때문에 연못을 만들고 알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삼인(三印)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의미한다,

삼인당(三印塘)은 현재 지방기념물 제46(80.6.2)로 지정되어 있다. 연못의 길이 11m, 폭은 7m 이다.



운무 속의 용을 조각한 조상




이제 사찰 경내로 들어간다.


선암사 일주문이다. 편액은<조계산 선암사>다.

선암사의 일주문(一柱門)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은 누문(樓門)인 강선루(降仙樓)를 지나면 첫 문으로 1719년에 세워진 것이다.

<조계문창건상량문>에 의하면 원래의 건물은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고

1540년에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당하였다가 1719년에 다시 세운 것 이라고 한다.

단층 맞배기와집(옆에서 볼 때 인() 자 모양) 으로

원형의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기둥이 중간은 굵고 위 아래로 가면서 가늘게 된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3군의 공포를 배치해 놓은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대개의 사찰구조는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나 사천왕문을 두는데

선암사는 조계산 주봉이 장군봉이기 때문에 천왕문이나 사천왕문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계단 위에 바로 누각이 하나 보인다.

편액은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로 되어 있다.




<고청량산 해천사>라는 편액이 붙은 문. 옛적 일주문인듯...


육조고사



<@육조고사(六朝古寺)>의 육조는 혜능대사를 일컫는 말인데

대개 육조(六曹) 내지 육조(六祖)로 표기하는 데 육조(六朝)로 표기된 것이 특이하다.

편액의 <육조고사>라는 이 글씨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金萬重:1637~1692)의 부친인 김익겸(金益兼:1614~1636)의 글씨라는 한다.


범종각





대웅전이다. 앞쪽에는 2기의 석탑이 있다.

선암사에는 3()라는 것이 있다. 하나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임으로

따로 불법수호를 위한 사천왕을 두지 않았고,

둘은 대웅전에 주련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하여

입을 열면 착오를 일어킨다는 것이다.

셋은 어간문(御間門)을 두지 않았는데

이는 부처님만이 진실로 깨달은 분이시기에 따로 문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암사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법당으로 1824년에 중창되었다.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보물 제13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 변천을 보면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875(헌강왕 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타 없어져

1660(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 등 3대사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현존 대웅전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1766(영조 42)에 불탄 것을

1824(순조 24)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제395)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 면에는 각 3,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높이 1m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하였는데,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四分閤門)이며 위에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두는 낮은 창)을 두지 않았다.

내부는 천장을 우물 정()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後佛璧)을 세워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 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부처님 뒤편에 걸린 탱화는 영산회상도로서 영취산에서 설법하시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모시고

10대보살과 10대 제자 그리고 신장들이 나열되어 있다. 가로 3.65m 세로6.5m로 영조(1765)때 제작된 것이다.


예적금강을 위에 그 아래 위태천을  그리고 좌우에 신장을 도형화 한 신중탱


아미타내영도


삼장불탱


이 괘불도는 대웅전 앞 만세루에 걸려있다.

선암사의 괘불은 조선후기 작품으로 문화재 지정 보물 제1419호로 등재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1260.5cm, 가로 678cm 이며 재질은 비단이다. 제작시기는 1753년이다.

 이 괘불도는 화면 중앙에 거대한 크기의 석가여래와 상부 왼쪽(향우측)의 다보탑과 다보불,

오른쪽(향좌측)의 시방불(十方佛) 만이 배치된 간단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괘불도 조성시 복장낭(腹藏囊)과 복장물(이상 1753) 및 괘불함(1757) 등이 함께 남아있다.


세로 길이가 12.6m나 되는 거대한 화면에는 본존인 석가모니가 화면에 꽉 차게끔 그려졌으며,

화면 상부 오른쪽(향좌측)에는 10명의 부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

왼쪽(향우측)에는 구름 속에 우뚝 솟아있는 황금 탑 안에 앉은 다보불과

그 앞에 서있는 보살 1구가 작게 묘사되었다. 석가모니는 원형의 두광과 키형의 신광을 지니고

연화대좌 위에 서서 두 발을 약간 벌린 채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있는데,

석가모니의 뒤쪽 하단에 뭉게구름이 묘사되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왼손을 가슴께로 올려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잡았는데,

아래로 내린 오른팔이 유난히 길다. 머리는 나발(螺鉢)이며 육계(肉?)가 뾰족하며,

원형의 정상계주와 넓적한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장식되었다.

얼굴은 가는 필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묘사하였는데, 약간 아래로 쳐진 눈썹과 반쯤 뜬 눈,

적당한 크기의 코, 단정한 붉은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루었다.

신체는 매우 건장한 편으로, 어깨는 넓으면서 거의 직각으로 표현되어 다소 경직된 느낌을 준다.

착의법은 왼쪽 어깨에만 대의를 걸친 편단우견식(偏袒右肩式)이며,

대의의 가장자리와 이음새에는 호화로우면서도 다양한 모습의 화문으로 장식되었는데,

아래로 늘어진 대의자락은 좌우로 날카롭게 뻗어 있다.

두광은 청색과 적색의 색대(色帶)를 여러 겹 칠한 후 내부를 녹색으로 채색하였으며,

키 모양의 신광은 적색으로 테두리를 칠한 후 청색 바탕에

화문으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내부를 흰색으로 마무리하였다.


 

이 괘불도는 18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인

금어(金魚) 은기(隱奇), 치한(致閑), 내순(來淳), 모영(慕英), 지언(持彦)

화사 즉민(卽?), 월계(月桂), 봉찰(鳳察), 책화(策花), 계탄(戒坦), 쾌혜(快慧),

쾌윤(快允), 인계(印戒)가 함께 조성하였다. 이들은 이 괘불도와 함께

26점의 각종 불화를 제작하여 선암사와 부속암자 및 인근사찰에 봉안하였다.


이 괘불도는 화면에 꽉 차게 본존을 배치한 모습이라던가 뾰족한 육계에 표현된 정상계주와 중간계주의 형태,

편단우견식의 착의법, 원형의 두광과 키 모양의 신광,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는 본존의 모습 등에서

축서사 괘불도(1768), 개심사 괘불도(1772) 18세기 후반의 괘불도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준다.



@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仙巖寺 東·西 三層石塔)은  선암사 사찰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639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95호로 지정되었다.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암사는 신라의 아도화상이 개창하여 비로암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헌강왕 때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믿을 만하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여,

이 때문에 선암(仙岩)’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는데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고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중앙의 불조전 좌위에 전각이 늘어서 있다.


조사전

<조사전주련>

放出曺磎一波淸(방출조계일파청)

劈開南岳千峯秀(벽개남악천봉수)

(육조혜능)스님이 나타나 한 물결로 맑게 하고

(남악회양)스님이 등장하자 일천봉우리가 수려해졌구나.

불조사의 이 주련의 출처는 8.15해방후 선암사 초대종정으로 지내신 박한영스님의 글이다.

 


조사전 중앙에는 달마대사 진영을 봉안했다.

앞에서 본 육조고사와 연관된 모양이다.


불조전




~2부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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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10.22 20:32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17.10.23 05:53

    감사한 마음으로 즐감하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즐겁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 17.10.23 10:16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성불하세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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