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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辟邪)와 길상(吉祥) & Utopia
<까치호랑이>
19세기, 종이애 채색, 72.0×59.4cm, 일본 개인소장
민화의 까치호랑이는 단순히 호랑이와 까치를 그린 것이 아니라
권력자와 민초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호랑이와 까치는 인간을 대신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풍자한 케릭터들이다.
<까치호랑이>는 사팔뜨기로 희화화되었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붉은 입을 벌리고 있지만 꼬리를 아래에 감추었다.
반면에 기품이 느껴질 만큼 점잖고 당당한 까치가 무언가 계속 시비를 걸지만,
호랑이는 아예 까치를 등져 버렸다. 더 이상 까치와 승강이를 벌일 생각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권력을 맘껏 부릴 수 있는 호랑이는 우스꽝스럽게 나타내고, 힘없는 까치는 당당하게 표현했다.
세상의 권위는 적어도 민화 속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민화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공평하다.
높은 것은 깎아내리고 낮은 곳은 돋우어서 평등하게 만든 세상,
이것이 서민들이 꿈꾸는 이상향인 것이다.
<산신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02.7×70.8cm, 도쿄 일본민예관
조선시대만 하더라라도 호환虎患이라 하여 호랑이에 물려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호랑이에 대한 공포가 극단에 이르러 종래에는 산신의 몸 속에서 호랑이가 나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산신과 호랑이가 한 몸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고 호랑이는 공포의 대상만이 아니다. 따뜻하고 친근한 존재로 우리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신라 원성왕 때 김현이 호랑이와 정을 통했다는 호원설화 '김현감호金現感虎'는 애틋하기까지 하다.
후백제의 견훤까지도 호랑이 설화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되었을 정도다.
<담배 피는 호랑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수원 팔달사
호랑이와 인간의 교감은 담배 피는 호랑이 설화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랑이가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고, 토끼가 담뱃대를 붙여서 대령하고 있다.
다른 토끼는 그 옆에서 조심스럽게 호랑이를 지켜보고 있다.
할아버지 무릎베게에 누워 듣는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정겨운 그림이다.
호랑이를 통해 무언가 인간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갑과 을의 갈등 관계를 통해서 당시 불공평한 신분관계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장주莊周가 나비이고 나비가 장주이듯, 호랑이와 인간이 동일시된 것이다.
호랑이에 대한 존재가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그것에 대한 반항도 클 수밖에 없다.
서민화가는 무서운 존재에 대하 반감을 직접 표출하기 보다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호랑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극과 극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만큼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게 각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까치호랑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91.7×54.8cm, 삼성미술관 리움
1978년 서예가 김응현이 일본에서 한국의 까치호랑이 한 점을 들여왔다.
그런데 이 작품을 두고 까치호랑이의 뿌리가 어느 나라인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었다.
서예가 임창순은 제발의 내용과 글씨체로 보아 원나라 그림이라 주장했고,
민화연구가인 조자용과 김호연은 우리 민화로 보았다.
<자연호도子蓮虎圖>
명(明) 16세기, 비단에 채색, 159.0×98.5cm, 도쿄 도카이안
중국에서 호랑이 그림에 까치가 등장하는 것은 원나라 및 명나라 이후부터다.
편안하게 앉아 이는 어미 호랑이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새끼 호랑이들이 노닐고 있고
소나무 위에 까치 네 마리가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명나라 때 유행한 절파화풍(浙派畵風)으로, 입체적인 표현과 견고한 실재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까치호랑이>
조선 16세기 말~17세기 초, 비단에 채색, 135.0×81.7cm, 서울 개인소장
명대 호랑이 그림은 임란 전후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명대의 그림인지 조선 그림인지 분간하기 힘들만큼 명대 유호도의 영향이 강한 작품이다.
전형적인 절파화풍의 공간구성으로
화면 속에서 튀어나오듯이 실감나게 그린 호랑이의 표현도 명나라 화풍이다.
반면 배경은 명대의 호랑이 그림처럼 강렬하지 않고 약하다.
소나무가 겹친 선으로 묘사되 어리어리할 만큼 몽롱하게 표현되었다.
호랑이는 명대 그림을 방불하지만, 배경에서는 한국화된 정조가 물씬 풍긴다.
<용호도>
이정, 17세기 초, 비단에 옅은 채색, 116.0×75.5cm, 교토 미술관
명나라 화풍에서 한국적인 그림으로 탈바꿈 되는 전환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입체감이 뚜렷한 명나라식의 호랑이가 아니고 이미 평면화된 한국 호랑이다. 평면성은 한국 회화의 전형적 특색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단순히 평면화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강렬하고 새동감 넘치는 미감으로 재탄생시켰다.
서예적인 맛이 풍부한 필선으로 호랑이를 묘사하고, 배경의 나무는 소낙비가 내리듯 강렬한 필선으로 표현했다.
이제 한국 고유의 그림이라고 믿어왔던 민화 까치호랑이가 16세기 말 중국 명나라에서 들여온 호랑이 그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민화 까치호랑이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의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 그림처럼 까치와 호랑이가 등장한다는 사실만 같은 뿐, 거기에 펼쳐진 이미지, 감정, 이야기 등
모든 것들은 전혀 다른 세계다. 민화 까치호랑이의 이미지에는 우리의 정서와 감각으로 충만해 있다.
<송하맹호도>
김홍도,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90.4×43.8cm, 삼성미술관 리움
옛날 중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보면,
'저들의 일생의 반은 호랑이에 물려가지 않으려 애쓰는데 소비하고,.
나머지 반은 호환을 당한 사람 집에 조문을 가는 데 쓴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국적인 호랑이 그림이 정착된 시기는 조선후기 18세기 후반이다.
호랑이 그림 뿐 아니라 다른 주제에서도 한국적인 화풍이 뚜렷해졌다.
한국적 호랑이 그림의 전형은 김홍도로 부터다.
배경을 생략하고 화면 위쪽에 소나무 가지만 멋들어지게 걸치며 호랑이를 크게 부각 시켰다.
소나무의 굵은 줄기는 완만한 경사를 보이며 화면 상단을 가로 지르고,
거기서 작은 가지 하나가 경쾌하게 아래로 뻗어 내린다.
절파화풍과 달리 단단한 구도 속에 호랑이를 배치한 것이다.
마치 사진의 트래밍 기법처럼, 전체가 아닌 일부를 보여줌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확대시켰다.
구도는 간결하지만, 호랑이의 포즈는 매우 극적이다.
꼬리를 곧추세우고 등을 올리고 가만히 얼굴을 돌려 눈에 노란 불을 켜고 화면의 앞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모습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적이 나타날 때 여차하면 공격하기 일보 직전의 긴박한 순간을 표현했다.
생동감 넘치는 호랑이의 표현도 김홍도가 이룩한 성과다.
호랑이의 터럭을 하나도 빠짐없이 화폭에 담은 듯한 사실적인 표현으로 호랑이의 실재감을 높여 주었다.
김홍도는 명나라 호랑이 그림처럼 밍크 담요같은 질감이 아니라 터럭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활기찬 사실성을 나타낸 것이다.
<백자청화작호문항아리>
18세기, 높이 40.6cm, 미국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18세기 들어서 호랑이와 까치의 관계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호랑이와 까치가 각기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 둘 간의 관계가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변화의 기점을 보여준다.
항아리의 가운데로 뻗어 있는 소나무 위에 까치 두 마리가 깃들어 있고,
앉아 있는 호랑이가 뒤돌아서서 까치를 바라보고 있다. 호랑이가 까치를 향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호랑이 표정으로 봐서는 그다지 기분 좋은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호랑이와 까치가 긴밀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19세기 민화에 유행하는 까치호랑이의 전조를 엿볼 수 있다.
회화에서 호랑이의 나라다운 면모는 김홍도에 와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이 있었기에 19세기 민화작가들은 자유롭고도 다채로운
호랑이 그림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까치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116.0×80.0cm, 일본 구라사키민예관
일본에 소장된 민화 호랑이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이 그림을 유명하게 만든 눈은 독특하다. 눈동자가 두 개인데다 다이아몬드 형인 것이다.
이 눈동자에 대해서 토노무라 키지노스케 관장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딘가 야생적이고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무엇보다도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준다.
분노로 가득차 눈빛이 괴이하게 움직이고 빛나고 있는데, 이 4개의 눈동자만큼 진실로 적절하고
유사한 예가 없다. 피카소가 인체를 해부하고 또한 조립한 것과 같은 시도는 여기에는 없다.
간절함이 없는 無法무법의 놀라움과 두려움이 이 표현을 심도있게 한 것이다. 화론 등에는 없지만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된 해맑은 표현이 여기에 보인다.
진실로 화론 이전의 초근대적인 표현이다."
눈동자가 한 눈에 2개씩 4개인 것은 방상시方相氏의 눈처럼 벽사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의 특징은 도식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조용히 앉아서 뒤돌아 까치를 바라보고 있지만,
호랑이의 몸이 자아내는 곡선과 그것에 상응하는 소나무의 구부러짐은 화면에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호랑이의 줄무늬도 일반 호랑이그림과 달리 패턴화되어 있지만, 그것 역시 마치 선의 구성처럼 활기차다.
부드럽고 은은한 표현 가운데 강렬한 생명력이 발산되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까치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105.0×68.0cm, 도쿄 일본민예관
까치와 호랑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공간을 배정한 반면, 까치는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민초를 대변하는 까치와 부패한 관리를 상징하는 호랑이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이는 양반과 서민간의 신분갈등 문제를 우화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맞대응하는 까치의 배짱이 두둑하다.
만일 호랑이가 덤비면, 까치는 날아가 버리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까치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117×85cm, 경기대학교박물관
당당하게 표현되던 호랑이는 점차 우스꽝스럽게 변해가고, 까치는 거꾸로 점점 더 당당해진다.
호랑이는 무언가 어수룩하고 얼빠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까치의 기세에 눌린 호랑이는 물론이고, 사팔뜨기 호랑이.
고양이 같은 호랑이, 발톱이 솜방망이처럼 거세된 호랑이 등 호랑이의 모습은 다양하게 희화화 된다.
까치와 호랑이는 점점 격렬하게 대립각을 세운다.
범이 가다가 뒤돌아 서서 붉은 입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까치를 위협하고 있다.
몸 전체가 둥근 점들로 장식된 것으로 보아서는 표범임에 틀림없는데,
예전에는 호랑이나 표범을 모두 '범'이라 불렀다. 여하튼 여기서 물러설 까치가 아니다.
오히려 몸을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위로 곧추세운 범의 꼬리는 까치가 깃들어져 있는 소나무 가지와 X자로 교차함으로써
서로의 갈등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까치가 단순히 범의 배경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범과 맞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왜 범과 까치가 이처럼 대립하는 것일까?
민화 까치호랑이는 벽사와 길상 이상의 또 다른 상징성을 갖는다.
악귀를 쫒는 벽사의 호랑이가'바보 호랑이'로 전락하고. 새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는 더욱 당당해진다.
이것은 원래 상징과 다른 그 무엇이 개재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풍자다.
호랑이는 권력을 빙자하여 폭정을 자행하는 관리를 상징하고, 까치는 힘없는 서민을 대표한다.
까치가 호랑이에게 대드는 구성을 취함으로써 서민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카타르시스적으로 해소하고자 한다.
실제 당시 서민들 사이에는 까치호랑이의 설화가 유행했는데, 그 내용은 까치가 지혜로 힘센 호랑이를
골탕 먹임으로써 신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억울함과 푸대접을 항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까치호랑이 그림이 대부분 상류계층의 집에서 나오는데, 과연 서민 입장에서 이 그림을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다. 오히려 호랑이를 서민과 같은 친근한 존재로 폄하한다는 의견이다.
원래 까치호랑이에서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기쁨의 상징이고, 호랑이는 벽사의 상징이다.
호랑이 대신 표범이 등장하는 경우는 표범의 표豹자가 알린다는 뜻의 보報자와 같기 때문에 서로 바꾸어 써서
보희報喜, 즉 기쁨을 전한다는 길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 19세기에는 까치가 대부분 대립의 구도로 설정된다.
물론 예전처럼 배경으로만 머문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급격하게 나빠진 까치와 호랑이의 관계속에서
서민화가의 사회의식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까치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120.0×75.4cm, 삼성미술관 리움
맹수성이 거세된 모습의 호랑이 형상이다.
호랑이가 아니라 거의 고양이 모습에다 발에는 날까로운 발톱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백수의 제왕으로서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다.
오른쪽은 옆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왼쪽은 정면의 모습이다. 등줄기를 기준으로 몸의 좌우가 이원적으로 나뉜다.
기묘한 형상이 오히려 감상자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다.
민화에서는 백수의 왕 호랑이가 까치뿐만 아니라 참새, 토끼 등 연약한 동물과도 짝을 짓는다.
이것은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불공평한 관계를 동물을 통해 우회적으로 풍자한 것이다.
<토끼와 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109.2×62.9cm, 삼성미술관 리움
마치 할아버지의 등을 타고 노는 손자처럼 토끼가 호랑이 등 위에서 놀고 있다.
호랑이는 무서욵 입을 다물고 있는 데다 그 얼굴은 합죽이다. 부드러운 인상에 안심한 토끼는
재롱 부리듯 호랑이 등을 타고 논다. 둘 사이에 그 어떤 긴장감도 감지되지 않는다.
토끼의 꾐에 속아 결국 놓치고 만다는 우화를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보면,
호랑이의 얼굴이 왜 멍청하고 어리석게 표현되었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까치호랑이>
신재현, 1934년, 종이에 채색, 96.8×56.9cm, 삼성미술관 리움
호랑이와 까치는 늘 긴장 관계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은 둘 사이가 매우 좋은 그림에 해당한다. 그림 윗쪽 중앙에 적혀있는
"호랑이가 남산에서 부르짖으니, 까치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라는 구절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화면 가득이다.
어미 호랑이는 속눈썹을 예쁘게 치장하고 밝게 웃으며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거세되어 있다.
까치들은 긴장을 풀고 호랑이의 부름에 응하고 있다. 밝고 명랑한 호랑이 그림인 것이다.
이 그림은 도식적인 표현과 장식적인 패턴이 두드러진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거세된 발톱에서는 호랑이의 맹수성 보다는 친근감이 풍겨나고,
패턴화된 호랑이의 무늬에서는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어미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를 돌보는 장면은 명나라 때 유행한 유호도의 도상이다.
하지만 그 뿌리가 무색할 만큼 표현방식은 전혀 다른 세계다.
<호랑이 가족 虎子圖>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59.8×39.5cm, 일본 세리자와케이스미술관
이 그림을 보면 유호도의 변신이 기상천외하다.
어미와 새끼들이 함께 노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언제나 보는 이에게 따뜻한 정감을 안겨준다.
어미 호랑이르 중심으로 한 마리는 등에 타고 다른 한 마리는 땅에서 놀고 있다.
호랑이 가족의 단순한 정감을 나타나는데 그치지 않고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호랑이의 눈은 술에 취한 듯 뱅글뱅글 돌고 있고, 이빨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줄무늬는 일정한 패턴으로 단순화되고 어린아이 그림과 같이 천진난만하게 표현되어 더욱 친근하다.
이처럼 호랑이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이유를 화제에서 찾는다.
"어른이 떳떳하게 효를 보배롭게 여겨야 한다." 라는 경구에서 그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못생긴 호랑이 가족이지만, '효'로서 가족의 우애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던져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워낙 큰 존재였다. 그렇기에 바보로 표현하는 역발상이 가능했다.
해학을 통해 강자의 권위를 단숨에 끌어내리는 민화의 세계는 서민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공간인 것이다.
<사람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민화 작가 서공임, 20005년, 종이에 채색, 180×530cm, 소공동 롯데백화점 1층
이 작품은 원래 20009년 북경전시회에 출품했던 것인데, 2010년에 다시 선보인 것이다.
2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는 이 작품은 극적인 효과도 일품이다.
원래 <대호도>(아래 작품) 병풍을 모델로 삼은 이 그작품은 크기를 확대하고 적색의 안료로 배경을 곱게 칠해서
원작에서 느끼는 호랑이의 위용보다 더욱 강렬하게 나타낸 것이다.
크기만 키우고 배경에 채색만 다르게 했을 뿐이지만, 그 느낌은 원화와 확연히 다르다.
<대호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50×460cm, 삼성미술관 리움
대형 호랑이 그림은 원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했다.
8폭의 병풍을 화폭으로 삼아 호랑이의 위용을 자유롭고 강렬하게 표현 했다.
그 이전 호랑이 그림은 대개 족자나 화첩으로 제작되었지만, 19세기 후반부터는 병풍으로 꾸민 호랑이 그림이 유행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호랑이 그림에만 국한되지 않고 당시 화단을 풍미했던 조류였다.
궁중을 중심으로 발달한 병풍문화가 일반 백성에게 확산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월하송림호족도月下松林虎族圖>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119.0×439.0cm, 삼성미술관 리움
발빛 비치는 소나무 숲속의 호랑이 무리라는 <月下松林虎族圖>가 대형 호랑이 병풍 그림의 대표적인 예.
8폭의 병풍을 화폭으로 삼아 사선 방향으로 긴장감 넘치게 뻗친 소나무 사이에 참 호랑이들과 개호랑이들이
배치되어 있다. 호랑이와 소나무가 제각각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 화면에는 활기로 넘친다.
<호랑이병풍>
20세기 전반, 종이에 수묵, 각 97.8×48.9cm, 미국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까치호랑이의 종합판 <호랑이병풍>은 이전에 그려졌던 까치호랑이의 도상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료집 역할을 한다. 위의 병풍과 달리, 각 폭에 호랑이 한 마리씩 배정되어 있다.
배경의 소나무는 단순히 배경의 역할에 그친 것이 아니라 까치가 호랑이에게 다가가는 마음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병풍은 수묵화로 그렸는데, 이러한 기법은 20세기 전반에 유행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여덟 첩을 한 폭으로 삼아 호랑이를 그리고, 어떤 경우는 각 첩마다 호랑이 한 마리씩 놓았다.
다양한 모습의 호랑이르 병풍 하나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이들 호랑이 그림은 대부분 수묵화거나
아니면 수묵에 옅은 담채, 그것도 광물성 안료가 아닌 식물성 염료로 그려서 맑은 느낌이 난다.
<서낭신>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105.0×73.0cm, 황해도 무속화, 서울 개인소장
황해도 무속화巫俗畵인 <서낭신>에도 까치호랑이가 등장한다.
소나무 위에는 까치 두 마리가 깃들어 있고, 그 아래에는 호랑이가 배치되었다.
영락없는 민화 까치호랑이 구성이다. 해학적인 표현도 민화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까치호랑이르 그린 것이 아니라 서낭신을 그린 종교화다.
호랑이는 서낭신을 대표하고, 까치는 신의 메신저다. 흥미로운 점은 소나무가 해와 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나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신목神木이요, 우주목宇宙木이요, 하늘 사다리인 것이다.
이 무속화에는 우리 민족이 숭상하는 태양숭배사상이 담겨 있다. 서민의 간절한 소망이
평범한 이미지를 통해 우주의 중심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남다른 존재다.
호라이는 장식화로, 세시풍속의 실용화로, 그리고 종교화로 우리와 함께 했다.
이미 단군신화부터 호랑이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다
. 하지만 호랑이는 우리 산천에서 사라졌다.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은 호랑이를 마지막으로 멸종되었다.
이제 배가고파 마을로 내려올 호랑이도, 곶감이 무섭다고 도망갈 호랑이도 더 이상 없다.
호랑이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점점 이상화되고 상징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하하호호>
오채현, 2008, 높이 39cm, 개인소장
통도사 경내에 전시된 호랑이 석상
통도사 경내에 전시된 호랑이 석상
맹호도
거창읍 상림리 건계정(建溪亭)
술신(戌神) 두라대장(招杜羅大將)
1977년 만봉스님
도량장엄(道場裝嚴·불교 무대미술)의 하나인 십이지신번(十二支神幡) 가운데
술신(戌神) 초두라대장(招杜羅大將)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용맹한 개의 모습.
모견도
김두량, 조선 후기, 국립민속박물관
당삼목구(唐三目拘)
조선 후기, 국립민속박물관
개 모양 연적
국립민속박물관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뜻이 긴 연적이다.
- 운룡도雲龍圖 -
세종은 대언들에게 이른다.
'용이 어느 곳에 보이는가? 태종 때에 용이 밭 가운데서 솟아나온 일이 있었다지만,
용도 금수의 일종이니 괴이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언들이 대답한다.
'신들이 아는 바로는 충청도의 평택, 아산, 전라도의 만경, 임파, 용담 등지에 간혹 보인다고 합니다.
만약 널리 물어보신다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상상의 동물인 용을 어떻게 그렸을까?
상상의 동물이라고 마음대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그리는 일정한 규준이 있다.
중국 후한시대 학자인 왕부王符는 용의 아홉 가지가 다른 동물들 모습과 비슷하다고 했다.
뱀과 비슷하고, 뿔은 사슴과 비슷하며, 눈은 토끼와, 귀는 소와, 목은 뱀과, 배는 조개와, 비늘은 잉어와,
발톱은 매와, 발 바닥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또한 입 주위엔 수염이 있고 턱 아래에는 명주明珠가 있으며,
목 아래에는 거꾸로 선 비늘이 있고,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이 있다.
삼국시대 위魏, 220~265 나라 때 장읍張揖이 지은 자전字典인
『광아廣雅』에서도 유사한 특징을 거론하고 있다.
뿔은 사슴, 머리는 낙타,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로 이루어진 동물이 용이라 했다.
머리가 뱀과 비슷하다는 내용이 낙타로 바뀐 것 외에는 같다.
1596년 명나라 때 발간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도 왕부가 설명한 특징을 그대로 인용했다.
용은 적어도 9개 동물의 부위로 조합된 것이다. 용이라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은 아니고
기존 동물에서 이미지를 딴 것이다. 이런 규준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태조어진>
1872년, 비단에 채색, 220.0×151.0cm, 전주 경기전
1396년 제작된 것을 1872년에 그대로 모사한 <태조어진>에 그려진 여러가지 용의 문양에서
앞서 말한 용의 형태에 대한 조합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은 왕권의 상징이었던 것.
용이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 때부터다. 진 이전의 주나라가 음양오행사상으로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에 '수水'를 상징하는 용으로 주나라의 권위를 압도하고자 했다.
고구려 주몽신화를 보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오룡궤五龍軌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오고,
그를 따르는 백여 명의 사람들은 고니를 타고 털깃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고 한다.
용이 하늘의 아들임을 과시하는 장관인 것이다.
<운룡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103×61.5cm, 삼성미술관 리움
18세기에 제작된 <운룡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보면, 앞서 말한 『광아廣雅』의 기준을 따르고 있다.
물론 발바닥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호랑이 발바닥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 용의 눈물처럼 눈에서 나온
더듬이가 좌우로 휘날리고 있고, 등줄기에는 불꽃이 피어오르며, 돼지 코에 입을 크게 벌려 불꽃이 위로
휘날리는 여의주르 삼키는 모습이 추가되었다. 기본 규준에 새로운 특색이 덧붙여지면서
18세기 용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운룡도>
석경, 16세기, 종이에 채색, 24.6×19.6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런한 본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의 이미지는 시대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며 작가마다 달랐다.
위 그림보다 2백여 년 전에 그려진 석경의 <운룡도>는 뿔과 여의주와 구름만 없다면 용의 얼굴이라기 보다는
사람 얼굴에 가깝다. 그것도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인상이 아니라 어딘가 수줍은 듯하고 낭패한 얼굴빛이
역력하다. 눈 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입까지 멍하니 벌리고 있다. 코 주위로는 지느러미가 힘없이 휘날리고 있다.
인간적인 면모가 짙게 풍기는 용의 이미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용의 출현이 빈번하다.
용은 왕의 상징이자 신적인 존재이자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면서도 실제의 동물이고, 권위의 동물이면서도 친근한 동물이다.
이처럼 용의 이미지는 상과 실존 사이 그 어디쯤에 존재한다.
<청룡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222×217cm, 국립중앙박물관
용은 '물의 신'이다. 바다를 관장하고 비를 내리게 한다. 백성들의 생업과 직접 관련된 신이다.
물과 관련된 용의 속성에 의지하여, 가뭄이 들면 용그림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시대 화룡기우를 목적으로 용그림이 제작된 경우가 많았지만, 확실하게 그 용도로 쓰인 그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위 <청룡도>가 비교적 기우제의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 그림으로 보인다.
가로, 세로 2m로 지금까지 알려진 용그림 가운데 가장 큰 그림으로 여러 번 접어서 운반을 용이하게 했고
세련된 궁중 화풍으로 미루어 궁중에서 기우제 때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구름 속에서 살짝 감추었다 이내 드러내는 용의 위용은 화폭의 크기만큼이나 힘차고 역동적이다.
먹구름은 검은 연기처럼 몽실몽실 피어올라 농담을 달리하면서 화면을 가득 메웠다.
쫙 벌린 입, 코 옆에서 자유롭게 원을 그리면서 구부러진 더듬이, 구불구불 곧게 뻗은 두 뿔,
뒤로 휘날리는 갈기, 울퉁불퉁한 이마, 가운데가 구멍 뚫린 여의주와 가늘게 휘날리는
화염문 등으로 보아 18세기 후반 도화서 화원이 제작한 용그림으로 추정된다.
<용신기>
20세기 초, 무명에 채색, 156×261cm, 온양민속박물관
물에 대한 공급은 용왕이 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용왕에게 맑은 물을 달라고 빌고 있다.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용신기>를 보면 공룡을 연상케 하는 용의 위용이 화면을 압도한다.
라디에이터 파이프처럼 과장된 틀임을 하여 몸의 길이를 최대한 줄인 채,구름 위를 걸으며
눈 앞의 여의주를 잡으려고 입을 한껏 벌리고 있다. 인간은 용에게 물을 달라고 빌고 있고,
용은 여의주를 잡아 신통력을 발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백자청화용무늬항아리>
18세기, 높이 38cm,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에서 사용한 그릇답게 어깨가 당당하고 몸체가 육중한 데다 용그림의 위용에서도 기개가 넘친다.
어느 시대보다 건장함이 느껴지는 몸에 위엄을 갖춘 표현에서는
조선후기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정조시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고, 반점으로 가득한 얼굴에 눈썹과 수염이 날카롭게 삐져나왔으며,
더듬이는 콧등에서 위 아래로 휘날리고, 갈기는 위와 옆으로 나누어 곱게 빚어졌다.
또한 가늘게 구부러진 목에서 갑작스럽게 큰 가슴을 한껏 내밀고
앞발을 이리저리 휘젓는 모습에서는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황룡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140.9×80.0cm,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이 그림 역시 위용이 넘치는 자태와 극적인 자세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용이 자태가 매우 권위적이고 구름은 묵법의 변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오른쪽 발들을 강하게 내밀고 몸을 두 번 급격하게 꺾으면서
오른쪽에 불꽃을 휘날리는 여의주를 무섭게 응시하고 있다.
용이 본래 상상의 동물이지만,
이 그림 속에서만은 허구의 느낌보다 사실성과 실재감이 두드러져 보인다.
<백자철화운룡무늬항아리>
17세기, 높이 36.2cm, 삼성미술관 리움
용을 그렸다고 해서 모두 왕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발가락이 다섯 개인 오조령五爪龍은 황제를 상징하고, 네 개인 사조룡四爪龍과 세 개인 삼조룡 三爪龍은
왕족이나 왕 이외의 귀한 신분을 의미한다.
위 청화용무늬백자는 용의 발가락 수와 상관없이 위엄이라곤 온데간데 없고
만화의 캐릭터처럼 이리저리 일그러져 있다. 항아리 위를 S자 흐름을 따라 노니는 용의 모습을 보면,
멍한 눈동자, 몇 가닥의 힘 없는 갈기, 낭패를 본 듯한 표정, 개구진 이빨들, 그리고 더욱 멍청하게 보이게 하는
점무늬 등 좀처럼 용의 위엄은어느 한 구석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릇은 거칠지만 매우 힘차게 빚어졌는데,
이는 관요가 아닌 민간가마의 특색이다.
<백자철화 운룡무늬 항아리>
17세기, 높이 34.0ccm 교토 고려미술관
민화와 다름없는 용무늬는 17세기 철화백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항아리의 좌우가 똑같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항아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릇 전면의 공간을 한껏 활용하여 그림을 활달하게 그려넣었다.
그런데 용의 얼굴은 이러한 위세와 전혀 다르다.
그 표정에서는 무언가 낙담한 듯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 어디에서도 삶의 의욕이 보이지 않는다.
약간 찌그러진 그릇에 우수꽝스러운 용그림. 두 요소는 정형의 파격이란 점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다.
17세기에는 청화백자가 드물어지고 철화백자가 늘어났다.
이것은 임란으로부터 병자호란까지 4변에 걸쳐 겪은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경제 사정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대다가 조선을 침범한 청나라에 대한 감정까지
수그러들지 않자, 전량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던 청화 대신에 국내에서 산출이 가능한 철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천 명이 넘는 도공들이 끌려갔으니,
조선의 공예산업은 쑥대밭이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그릇은 그 형태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시기의 철화백자는 궁중용으로, 관요에서 제작한 것과 민간용으로 지방가마에서 제작한 두 부류가 있다.
궁중용 도자기에 그려진 철사의 그림에는 세련된 운치가 흐르는 반면에, 민간용 그림은 해학적이고
분방한 흥치로 가득 차 있다.
궁중용 철화백자를 수묵화에 비견한다면, 민간요 철화백자는 민화라고 할 수 있다.
<운룡도>
19세기, 115.2×112.7cm, 종이에 채색, 호림박물관
도대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용인가 아니면 구름인가?
당연히 용일 테지만, 구름이 용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고기 비늘과 같은 모양의 구름, 풍수지리도의 산과 같은 모양의 구름,
둥글게 여울지는 물결 같은 구름 등 다양한 형상의 구름이 화면에 가득하다.
『주역周易』의 첫 번째 괘인 건괘乾卦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雲從龍 風從虎" 고 했다.
용과 구름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짝으로, 상사의 동물인 용에게 구름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그런데 19세기 용그림에서는 용보다는 배경인 구름이 주인공 노릇을 한다.
구름은 화려한 배경으로서 용의 장식적인 면모를 드높이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구름 속에 파묻혀 있는 용의 모습도 우리의 흥미를 끈다.
'용의 눈물'처럼 눈에서 흘러나온 더듬이에 사람 모양의 여의주가 걸려 있다.
더욱이 보는 이의 미소를 띄게 하는 것은,
여의주가 의인화되어 난폭한 동물에 잡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용의 얼굴은 포악한 맹수처럼 살기가 등등하기 그지없다.
용의 갈기는 색실처럼 녹색, 적색, 황색으로 물들어져 있고, 가슴은 붉은 대나무 형상이며,
등은 가재나 새우의 껍질문양을 연상케 한다. 장식적인 구름무늬와 해학적인 용의 표현이
19세기 운룡도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운룡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89.9×69.2cm, 미국 브루클린미술관
황룡이 구름 속을 헤치고 하늘을 향해 상승하고 있다.
주변의 구름이 심하게 흔들리는 듯한 모습에서 용이 매우 격렬하게 올라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아직 구름이 완전히 도식화되지 않았지만, 도식화의 기운이 곳곳에 엿보인다.
용의 표정에서는 위엄보다 해학이 더 두드러져 보여 이미 민화적인 변형이 상당히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적인 구름의 표현에서 장식적 패턴의 구름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작품이다.
<운룡도>
종이에 채색, 153×96.5cm, 19세기, 개인소장
용보다는 구름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구름이 톱니바퀴 모양의 패턴으로 도식화되어 장식적인 효과가 매우 크다.
이와같은 장식적인 구름은 용의 동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먹구름 사이로 드러난 용의 자태는 밝고 강한 색상으로 부각되지만, 이내 구름 속에 파묻히고 만다.
그만큼 이 그림에서 구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다.
<구룡도>
19세기, 63.8×122.4cm, 통도사성보박물관
사찰의 금어화사金魚畵師가 그린 불교의 용그림에서도 구름이 도식적이고 장식적으로 표현된다.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아홉 마리 용이 물을 품어 몸을 씻어준 '구룡토수九龍吐水'와 관련된 용이다.
용 그림의 장식성은 용이 아니라 구름이 주도했다.
용은 까치호랑이의 호랑이처럼 권위와 위엄을 벗어 던져버리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대신 구름은 이전 어느 시기보다 장식성이 강화되었다.
구름이 용을 따른다고 했지만.
적어도 민화 운룡도에서는 용이 구름을 따른다는 말이 더 울린다.
<쌍계사 팔생탱 비람강생도>
구룡호수 부분, 1728년, 비단에 채색, 쌍계사성보박물관
마야부인이 여러 채녀들과 동산에서 놀다가 무우수나무 아래에서 나뭇가지를 잡고서 태자를 낳았다.
그가 바로 석가모니다. 허공중에 아홉마리의 용이 물을 품어 태자의 몸을 씻겨주었다.
목욕이 끝난 뒤, 태자는 7보를 걷고 사방을 돌아보며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이 그림은 바로 불화에서 즐겨 그려지는 소라모양의 오색구름 속에 용이 파뭍혀 있다.
패턴화되고 장식적인 구름의 표현이 19세기 작품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어도용문鯉魚跳龍門圖>
청대, 종이에 채색판화, 44×35cm, 사천성
360마리의 잉어들이 황하를 거슬러 용문龍門을 향해 올라간다. 용문은 선서성 하진河津에 있다.
잉어들이 용문에 이를 때쯤이면 새끼를 낳아 3,600여 마리가 되고물결이 험하여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그 가운데 가장 용감하고 신령스러움을 갖춘 한 마리 잉어만이 용문을 통과하여 용이 된다.
용문을 통과하지 못한 잉어는 이마 위에 흑점이 찍히게 되고, 그 해에는 다시 도전할 수 없다.
재수의 낙인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등용문登龍門 이야기다.
이처럼 잉어가 용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약리도躍鯉圖라 하고, 어변성룡魚變成龍,, 등용문이라고 부른다.
중국 민화 속의 약리도는 매우 현실적이고 설명적이다.
이 그림에서는 잉어가 끓는 물과 같이 일렁이는 황하의 파도를 헤치고 용문에 들어가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고 있다.
그런데 조선 민화에서는 등용문이 고사가 웅혼하게 변신한다.
잉어가 차이나타운의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패방 모양의 용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태양이나 여의주를 품으려는 자태로 표현된다.
아무래도 중국 패방 형식의 용문은 우리에게 낮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
<약리도躍鯉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114×57cm, 개인소장
붉게 달아오른 해의 위용이 겹겹이 물결진 마다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 아래에는 붉은 햇빛에 몸이 물든 잉어가 U자 형으로 몸을 꺾어 파도 위로 솟구치고 있다.
떠오르는 해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 잉어가 드디어 용으로 변신하게 디는 '엄숙한'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용문'을 ㄷ르어가야 용이 된다'는 꿈같은 희망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이 얼마나 늠름한 기상인가. 여기에는 태양신앙을 선호하는 조선인의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청화진사백자잉어형연적>
19세기, 높이 6.8cm, 도쿄 일본민예관
어변성룡이 이미지는 인기를 끌어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표현되었다.
잉어가 용문을 통과하기 위해 U자 형으로 몸을 휘어 도약하고 있다.
잉어의 배에는 물결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물 위에 튀어 올라오는 모습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변성룡이 합격과 출세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 연적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학동이나 선비에게 적격이다.
그런데 이 연적의 잉어는 어딘지 모르게 새색시 같은 수줍음인 느껴진다.
형태 자체가 투박한 데다 눈 아래 홍기를 띤 모습에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강렬하게 도약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용이 되기 위해 애쓰는 서민의 순박함이 이 연적의 곳곳에 서려있다.
<어변성룡도>
조선 19세기말, 종이에 채색,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잉어의 혀끝은 해보다 여의주를 향해 있다.
해를 품어야 용이 된다는 우주적인 발상 이전에 여의주를 물면 용이 된다는 현실적인 인식이 앞서 있다.
여의주 위에는 해가 떠 있지만 개인소장품을 뛰어넘을 만한 위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여의주를 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출세를 향한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해가 아니라 여의주르 향해 X자로 모이는 구름과 아래의 바닷물이 좌우동형에다
도식적으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케 할 만큼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충자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56.2×31.2cm, 선문대학교 박물관
1획부터 3획까지의 입口자는 용으로 표현되고 4획은 잉어 꼬리를 직선적으로 나타내었다.
잉어가 용으로 변신하는 어변성룡에서 착상을 얻어 충자를 이미지화 한것이다.
잉어는 <청화지사백자잉어형연적>처럼 U자형으로 도약하는 형상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할 잉어와 용, 용의 몸체와 꼬리가 분리되어 있다.
단순화된 구성에 용이나 잉어의 비늘처럼 패턴화된 장식이 현대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다.
어변성룡도는 바로 그러한 대중의 요구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주제가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반전 때문이다.
<까치호랑이>
은고(殷睾),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105×56cm, 개인소장
조선조에는 정월 초하루에 대문 위 한 짝에는 호랑이 그림을 붙이고 다른 한 짝에는
용 그림을 붙이는 풍속이 유행했다. 이러한 그림을 '용호문매도龍虎門排圖'라 한다.
문배란 정월 초하루에 일 년 내내 집안에 잡귀를 쫒고 행복을 불러 오기 위해
대문 앞에 붙이는 그림을 가리킨다.
그림 대신에 용龍자와 범虎자를 종이에 써붙이기도 한다.
호랑이는 삼재를 쫒고, 용은 오복을 가져온다는 길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용호도>
호랑이 그림 판목과 탁본, 청, 84.0×47.0cm, 원주 고판화박물관
이 <용호도 판목>을 보면 용호문배도의 기능과 도상에 관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판목 상단 가운데에는 신이 내린 명령이란 뜻의 칙령勅令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이들 판목이
부적으로 쓰였던 것을 알려 준다.
용호도 상단의 제문을 보면, 용은 등용문처럼 출세와 같은 복을 가져다주며,
호랑이는 산과 바다를 얼어붙게 하고 온갖 짐승들이 눈치를 보며 모습을 감추게 할 만큼 강렬한 의용으로
집안에 들어오는 잡귀를 물리친다고 했다.
<용호도>
용그림 판목과 탁본, 청(淸), 84.0×47.0cm, 원주 고판화박물관
구름 속에서 물 위로 내려오다 멈춰 선 용의 모습을 표현했다.
『설문說文』에 '용이란 비늘 달린 충의 우두머리다. 능히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혹 짧아졌다 길어졌다면, 춘분에는 하늘을 날며 추분에는 연못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한국의 용그림에서는 주로 상승하는 기세를 나타내는 반면, 이 용그림에서는 하강하는 기세를 그렸다.
아울러 손에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한국의 용그림에서는 용이 여의주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처럼 중국과 한국에서 선호하는 취향이 약간씩 다르다.
<용호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93×56cm,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시대 민화 용호도는 보다 다채로운 전개를 보였다.
청나라 용호도 부적처럼 문배도로 길상과 벽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도 있고
영웅의 상징처럼 권위적인 용호도도 있다.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한 작품이다. 화면에 꽉 차있는 호랑이는 늙은 고양이 같은 얼굴에
꼬리를 내리고 돌아앉아 있어서 전혀 공격할 의사를 찾아볼 수 없어 보인다.
반면에 까치는 고개를 길게 내밀고 달려들고 있다. 호랑이가 까치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노란색의 황룡은 파문을 그리는 구름 속에서 나와 빨갛게 타오르는 여의주를 응시하고 있다.
도식화디고 장식성이 강한 구름의 표현에서 19세기 후반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잡귀를 쫒는 벽사와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길상의 기능에 해학성까지 곁들여진 것이다.
19세기, 장지에 채색, 118.3×71.3cm,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1884년 스미소니언 무관 존 버나도우가 조선을 방문하여 수집한
족자 형태의 그림 두 점 중 호랑이다.
이 그림은 18세기 전형화된 호랑이 그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노란 눈에 빨간 입, 그리고 작은 눈동자의 호랑이다. 터럭은 고동색으로 빽빽하게 그렸고
호랑이 줄무늬를 도안화하지 않았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용호도>
19세기, 장지에 채색, 117.4×71.5cm,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주먹코에 용의 눈물, 조개껍질 모양의 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패턴화되어 있는 구름에서는 19세기의 특색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반면에 머리와 몸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용호도>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93.0×31.5cm, 삼성미술관 리움
세로로 긴 화폭에 용과 호랑이가 함께 등장한다.
호랑이가 아래에서 구름 속에서 자태르 드러낸 용을 쳐다보고 있다. 다른 유례가 없는 특이한 구성이다.
용은 느긋하고 여유있는 모습이지만, 호랑이는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감상자는 이내 대립에 의한 긴장감 보다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용과 호랑이가 우수꽝스럽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용의 얼굴은 쾌할함과 해학으로 가득 차 있다.
가슴에 반복되는 동그라 패턴을 통해 용틀임의 형세를 드러내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갈기에서 활기가 느껴지면서
황색, 청색, 적색의 원색들이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호랑이의 표정에는 백수의 왕다운 기개보다는 앙증맞은 긴장감이 잔뜩 서려있다.
<용호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82.0×145.0cm 안백순 소장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긴박감보다는 왠지 해학적 분위기가 감돈다.
호랑이가 달려들자 용은 서기를 내뿜으며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다.
소나무 위에 까치 두 마리는 이제 호랑이의 편을 들어 용과 대치하고 있다.
간단한 구성이지만, 용과 호랑이의 관계가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해학반도도>
19세기, 비단에 채색, 153.0×412.7cm, 미국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이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병풍은 19세기 작품이지만,
조선후기 십장생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등장하는 소재로는 해.물.구름.학.바위.거북.영지.대나무.사슴.복숭아나무이다.
복숭아나무를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십장생도의 구성이다.
헌데 십장생도의 중심을 이루는 소나무는 안보이고 대신 복숭아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복숭아나무가 8폭 가운데 4폭을 차지할 정도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왼쪽에는 바다가 배경을 이루고, 오른쪽에는 육지를 배경으로 삼은 복숭아나무가 화면의 반을 차지하며,
그 위에 노니는 학들의 행렬은 왼쪽 바위에 까지 이어져 있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대표하는 표상이다.
그런데 조선후기 십장생도에서 이러한 소나무를 제치고 그 자리를 복숭아나무가 보란 듯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 즉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셈이다.
복숭아나무는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요지瑤池 옆에 있는 반도원蟠桃園에 나는 반도蟠桃다.
요지는 서왕모가 사는 궁궐인 낭원閬苑의 왼쪽에 있는 연못으로,
이곳에서 나는 반도라는 복숭아는 3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를 한 번이라도 먹으면 1만 8천 살을 산다고 했다.
조선후기 십장생도에 돌풍을 일으킨 주역인 반도가 등장한 배경에는
서왕모 신앙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임란과 병란을 겪은 뒤 기복적인 성향의
서왕모신앙이 조선에 유행하면서 새롭게 부상한 나무이자 도상.
반도는 십장생도뿐만 아니라 해학반도도, 요지연도, 군선도, 신선도 등
조선후기 그림에 광범위하게 등장한다.
불로장생의 유토피아는 크게 동방과 서방으로 나눌 수 있다.
동방의 유토피아는 한국과 일본의 바닷가에 있고 그곳에는 불로초라는 진기한 식물이 자란다.
서방의 유토피아는 중국의 서쪽 끝 타클라마칸 사막에 위치한 곤륜산에 있고 그곳에는 반도라고 불리는 복숭아가 난다.
이들 유토피아는 여러 도상의 그림으로 제작되면서 우리의 꿈과 염원을 펼쳐왔다.
그중 십장생도는 한국에서 정립된 유토피아 도상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서불과차(徐市過此)>
세로 50㎝, 가로 100㎝. 경상남도기념물 제6호.
남해 금산(錦山) 부소암(扶蘇巖)으로 오르는 길목 바위에 새겨진 화상문자(畵像文字) .
삼신산(三神山)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진시황(秦始皇)의 시종인 서불(徐市)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을 찾아왔었다는 사실도
기실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유토피아 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
<십장생문 동경>
고려, 청동, 지름 18.4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동경은 본디 잡귀를 쫒는 벽사의 기능을 하는 신물神物이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점차 길상적인 상징과 교훈적인 의미를 갖는 기능으로 바뀌게 된다.
고려 동경에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문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 때문이다.
<자수십장생문안침모>
조선 19세기, 지름 21.0cm, 교토 고려미술관
흥미로운 사실은 몇 백 년 뒤인 19세기 말에 제작된 <자수십장생문>에도 고려동경 문안과 비슷하게
배갯골 옆구리를 기대는 기구의 장식판의 좁은 공간에 십장생이 수놓아져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시대적 차이가 많이 나고, 연관이 없다기엔 서로의 구성이 유사하다.
다섯마리의 박쥐가 감싸져 있다.
박쥐의 한자 표기인 편복蝙福의 복자는 행복幸福의 복자와 발음이 같아서
다섯 마리의 박쥐는 곧 오복五福을 상징한다. 가장자리의 회문回紋은 영원하다는 뜻이다.
열 가지의 상징을 모아 그린 십장생도는 한국적인 조합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숫자에 집착하지 않고 장수의 상징 몇 가지를 조합하는데 그친다.
목은 이색이 읊은 십장생에 관한 詩 를 보자.
- 세화歲畫 십장생十長生 을 읊다 -
圓象蒼蒼晝夜旋 / 푸르고 푸른 하늘은 밤낮으로 회전하고
山河大地海中船 / 산하 대지는 바다 가운데 배와 같은데
日輪萬古無停處 / 해 바퀴는 만고에 멈추는 곳이 없건만
可笑姮娥或後先 / 달이 혹 앞서고 뒤서는 게 가소롭구나
십장생도는 도교의 유토피아를 담고 있지만, 이색은 여기에 유교적인 설화와 이상향을 더붙인다.
五嶽聯綿壓衆山 / 오악이 죽 연이어 뭇 산을 압도하건만
只將沙土肉成團 / 오직 모래와 흙으로만 둥글게 뭉쳐졌는데
誰知有石中爲骨 / 누가 알리요 돌이 한가운데 골격이 되어
水囓雷搖兀自安 / 물이 할퀴고 천둥이 쳐도 끄떡하지 않는 걸
이색은 십장생도에 연이어 있는 산을 오악五嶽으로 보았다. 다음은 물에 관한 詩.
浴沂當日洒煩襟 / 기수에 목욕한 당일 번잡한 가슴 씻었으니
便識長流亘古今 / 문득 긴 흐름이 고금에 뻗치었음을 알겠 네
一領仲尼川上嘆 / 한번 공자가 냇가에서 탄식하고나서는
不容觀海始知深 / 바다를 봐야 깊은 줄 안다는 말 인정 않노라
'기수'는 『논어』에 나오는 개천의 물.
이른바 도교적 성격의 바다에서 유교적 성격의 개천을 노래하는 목은牧隱의 심중.
<해학반도도>
19세기, 비단에 채색, 135.5×330cm,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장식화인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는 바다에 반도蟠桃를 중심으로 학이 그려졌다.
오봉병에서 해학반도도로 전이된 그림 내용으로, 4개의 봉우리를 앞세운 산들이 연운에 아랫쪽이 가려져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인다. 좌우에 쌍을 이룬 반도를 비롯하여 해. 산. 물. 바위. 영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상단 좌우에 원산이 구름 위에 떠있고, 그 안쪽으로 해와 달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넘실대는 파도를 배경으로 세 개의 바위 가운데 좌우의 바위 위에
반도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는데 그 열매와 잎들이 바다를 가리 정도로 강조되어 있다.
산들의 좌우에 해와 달이 있으니 오봉병의 개념이 적용된것이 분명.
<해학반도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03.0×65.3cm, 국립중앙박물관
해학반도도에서 급기야는 학과 반도만 대표로 그린 그림까지 등장하게 된다.
바다 위에 솟은 반도 한 그루와 공중에서 날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흥미로운 자세의 학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반도와 학이 얼마나 인기를 끈 소재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요지연도> (부분)
19세기, ㅂ단에 채색, 134.2×47.2cm, 경기도박물관
서왕모 생일잔치의 예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중국 여신의 우두머리 서왕모는 자신의 생일인 음력 3월3일 삼짇날에
곤륜산에 사는 신들을 요지瑤池로 초청하여 잔치를 배풀었다.
이러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요지연도瑤池宴圖'라 부른다.
왼편에 곤륜산의 신들은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물, 하늘, 육지의 공간을 통해 무리를 지어 오고 있다.
물에는 여동빈, 종리권, 조국구, 장과, 이철괴, 한상자, 남채화, 하선고의 팔선八仙을 중심으로,
마고, 선녀, 안기생, 청오공, 팽조등이 함께 부력이 없어서 모든 사물들이 빠진다는
약수弱水를 유유히 건너고 있다.
팔선은 특정한 지물을 들고 있거나 물결 위로 지물을 타고 오기도 한다.
지물은 그 신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엠블럼 역할을 한다.
더불어 지물로 악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음악적인 효과를 줌으로써
잔치 분위기를 흥겹게 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하늘을 통해 오고 있는 신선들은 학이나 봉황 같은 새나 구름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중앙에는 부처를 배치하고 그 아래로는 월신 항아姮娥와 태양신 동군東君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땅을 통해서는 사슴을 탄 소선공蘇仙公과 소를 타고 가는 노자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생일잔치 장면도 화려하지만,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바닷길, 하늘길, 땅길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신선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파준마를 타고 온 주나라 목왕은 왼쪽 탁자에 서왕모는 오른쪽 탁자에 앉아 가무를 즐기고 있다.
탁자 위에는 반도를 비롯하여 불수감, 영지 등의 과일이 생일잔치의 음식으로 놓여 있고,
이들 뒤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삽병이 설치되어 있다. 선녀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선녀가 춤을 추고 마당에는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봉황이 노님으로써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주나라 목왕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서왕모의 초대를 받은 손님이다.
당시 주나라 목왕이 고국에 돌아갈 일을 잊을 정도로 서왕모와 사랑에 빠졌다고 옛 문헌에 전한다.
한 시대의 영웅인 인간과 여신의 러브스토리는 이리저리 부풀려져 흥미로운 설화로 발전했다.
어느덧 요지연에서 벌어진 여러 이야기는 픽션인지 아니면 넌픽션인지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요지연도를 혼례병풍으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러브스토리의 위력 덕분이다.
요지연에서 일어난 해프닝.
동방삭東方朔이 이곳에 몰래 들어와 반도를 세 번이나 훔쳐가는 사건이 벌어진 것.
三千甲子동방사이라는 별명도 이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요지연도는 곤륜산에 사는 신선들이 약수를 건너오는 모습을 그린 군선도나
여러 개별 신선의 그림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었다.
김홍도가 궁중의 큰 벽에 해상군선도를 비바람처럼 순식간에 그렸다는 기록은
당시 궁중의 신선도에 대한 요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청화백자 진사채 복숭아형 연적>
18세기, 높이 10.8cm, 삼성미술관 리움
반도로 대표되는 서왕모신앙의 여파는 그림에만 그치지 않고 생활 깊숙히 자리 잡았다.
선비의 문방구인 연적조차 복숭아 형상을 취한 것이 있다.
선비의 문방사우 가운데 관능의 대표로 복숭아연적이 떠오른 것이다.
장수를 염원하면서도 에로틱까지 하다면야....!
<십장생도병>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210×515cm 삼성미술관 리움
십장생도는 오봉병과 더불어 조선시대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주제다.
이 병풍은 10폭 규모에 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궁중회와의 화려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병풍 전체에 불로장생의 유토피아가 화려한 산수도로 펼쳐져 있다.
단순히 십장생으로 구성된 산수화나 화조화가 아니라 사슴을 중심으로 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토리 전개는 오른쪽 높은 산 아래 있는 동굴이고 끝은 왼쪽 하늘에 떠있는 해다.
사슴이 동굴에서 나와 길을 따라 왼쪽의 깊은 계곡을 향해가고 있다.
그 과정속에 십장생이 낙원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십장생 이야기의 실마리는 동굴이다.
이 동굴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도화원처럼 장수의 낙원에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
<십장생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2.5×215.3c, 통도사성보박물관
하늘에는 태양이 모든 자연을 대표하여 붉은 빛을 발하고 있고,
구름 속 절벽 사이에는 폭포가 내리꽂히고 있다.
그 아래 펼쳐진 물에는 거북이 노닐고, 그 옆 바위 위에는 대나무가 솟아 있다.
이처럼 웅장한 광경을 하늘에서 한 쌍의 학이 내려다 보고, 소나무 아래에는 사슴 가족이 노닐고 있다.
이것은 산수화가 아니라 산수인물화의 경치요, 화조화의 풍경이다.
<자수십장생도>
19세기, 자수, 각 77.8×31.3cm, 교토 고려미술관
고급 재료에 견고하고 명료한 마무리에서 궁중자수의 높은 완성도를 볼 수 있다.
자수에는 민화식의 그래픽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자유자재로 구부러진 소나무가 화면을 지배한 가운데
산과 구름을 비롯한 다른 십장생들이 점점이 떠있듯이 표현되어 있다.
대나무 아래의 바위는 사각형의 조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나무 잎은 방사선 모양의
일정한 모양이 반복되고 있으며, 흐르는 물도 일정한 간격으로 패턴화되어 있다.
<화조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11.0×51.0cm, 일본 구라시키민예관
민화에서도 십장생도가 제작되었다.
반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나무 아래 방아를 찧고 키질을 하는 흰 토끼, 영지를 물고 있는 사슴,
춤을 추고 있는 학이 배치되어 있다. 장수를 기원하는 여러 상징 중에서 반도를 강조했다.
옥토끼 역시 반도처럼 서왕모와 함께 등장하는 도상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옥토끼가 큰 복숭아처럼 생긴
그림 속의 달에서 뛰쳐나와 바위 위에서 방아를 찧고 키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발상은 민화에서만 볼 수 이쓴 유쾌한 상상력이다.
이 장면은 매우 서정적인 풍경으로 보이지만,
서왕모가 준 불사약을 남편 예羿 몰래 훔쳐 먹고 달에 피신 온 항아姮娥에게는 쓸쓸함의 상징이다.
달은 일 년 내내 약을 찧는 흰 토끼와 계수나무 한 그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그녀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쓸쓸한 월궁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른 시기의 설화에서는 항아가 달로 오자마자 못 생기고 흉한 두꺼비로 변해버렸다고 전한다.
때문에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두꺼비가 등장하는 둥근 달이 그려졌는데, 고려시대 부터는
달에 두꺼비 대신 계수나무와 약을 찧는 흰 토끼가 나타나는 그림으로 바뀌게 된다.
유토피아는 우리의 꿈이요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은 매우 현실적인 데서 출발한다.
우리 조상들의 유토피아는 불로장생이란 실제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간절한 소망 속에서 펼쳐졌다.
그러한 점에서 유토피아는 현실적인 소망의 아름다운 장식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현대인에게도 유토피아가 있는 것일까?
돈, 건강, 가정 등 가장 현실적인 소망은 있을지언정, 십장생처럼 꿈과 희망이 담긴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 못하다.
아무리 현실이 급박하더라도 유토피아Utopia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와 낭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 참고서적 : 정병모 著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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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저기서 새해를 맞았다고 법석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언제 단 한 번이라도 헌해를 살아 본 적이 있었던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인간 의식의 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前전後후에 대한 설정이요,
벽사와 길상이고 유토피아가 아닐런지?
상상과 현실이 엄연히 다름은 내 남없이 다들 잘 인식하고 있는 터.
하지만 치열한 계급사회는 결코 멀어지지 않고 이 시간도 그 위력을 더 해만 간다.
뭇庶 백성民으로 일컬어지는 보통의 우리네들도 콧구멍에 바람 정도는 스쳐야 살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한 바탕 웃음을 선사 받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해학의 장.
까치 호랑이, 상상의 동물 용 등에 얽히고 설킨 민담이 바로 해원의 디딤돌이라 보면 되겠다.
그것이 예술의 세계이고 아니고는 뭇 서민에겐 그리 중요치 않다.
그저 일순간의 힐링이면 족하다.
이상향을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행복 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고난과 역경을 단지 망각 속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의지의 소산 쯤이라 해 두자.
벽사와 길상, 유토피아와 현실을 애써 구분 짓지 말자.
'웃음'과 '새로움'이라 규정 지어진 것들에는 언제고 가슴을 뛰게 하는 매력적 요소가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우리는 늘 그렇듯, 여전히 새 날을 살고 있을 뿐이다.
Arirang - George Win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