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맨 끝자락에 위치한 마를리히 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이 있었다. 어떤때에는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이야기.
성 뒤편 숲속엔 가지 말아요. 헝클어진 나무가 길을 잃게 만들고 만월이 뜨는 밤이면 짖궂은 요정들이 노래로 유혹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본적있니? 이 곳은 어디에서도 볼수없는 아름다운 꽃들이 달콤한 향기를 전해주지! 그렇게 아이를 꼬여내면 요정들은 돌연히 자취를 감추고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용이 나타난답니다.
그리고 용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한입에 꿀꺽 삼키겠지요.
-프롤로그
"싫어! 싫다고!"
"비아! 넌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잖니!"
"미쳤어! 이 성 사람들 다 제정신이 아니야! 엄마도.. 엄마가 되어서 어떻게 나를 그 노망난 늙은이에게 팔아버릴 생각을 하는거야!"
비올라 쿠릴렌코. 애칭은 비아. 오늘부터 폰이란 귀족 성을 하사받은 이 아가씨는 드디어 귀족의 이름을 받았다는 놀라움도 잠시 어여쁜 열일곱살에 벼락같은 청혼을 받아야 했다. 상대는 먼 영지에 늙은 귀족으로 특출난건 돈이요 흠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것이 부인만 열두명에 자식들도 열다섯을 둔 사람이었다. 그리고 비아가 더 화가 나는건 생전 냉대만 하던 아버지가 그 늙은 귀족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고 더군다나 그 아버지가 어여삐 여기는 언니 레티시아 폰 쿠릴렌코 대신해서 받은 청혼이란 것이다. 레티시아를 보낼수 없었던 아버지는 비아가 더 어리다고 늙은 귀족을 꼬여낸 다음 돈을 더 받고 청혼을 당사자 의견없이 받아 들였다.
"우린 이제 귀족이야. 귀족 이름을 네 아이에게 줄수있어!"
"귀족 그따위 무슨 상관이야! 하나뿐인 엄마 딸을 이렇게 팔아넘길 정도로 좋은거야? 그런거냐고!"
쫙! 매서운 손바닥이 여린 피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분에 못이겨 소리지르고 있는 와중에 맞은터라 비아의 입속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하! 더럽게 아프네. 비아는 자신의 얼굴을 때린 엄마를 노려보았다. 맞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진 않았다. 다만 하나뿐인 딸을 때리고 벌벌 떨면서 기어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엄마의 표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욕심 많은 사람. 이 마를리히성에 하녀출신 이었던 엄마는아름다운 얼굴로 아버지 눈에 들었지만 천한 신분탓에 정식 부인은 되지 못했었다. 그때의 설움을 비아도 모르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세월의 설움과 고통을 그대로 물려줄려는 엄마의 마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넌 아무것도 몰라. 귀족이 아니면.."
"그래 나 몰라. 그 지긋지긋한 귀족 타령 더이상 듣고 싶지도 알고싶지도 않아."
"비올라!"
"어린여자 좋아하는 그딴 변태노인이랑 결혼할바에 나가 죽는게 낫지. 이 거지 같은 성 진작 떠났어야 했어!"
그리고 비아는 뛰었다. 어디든 도망가고 싶어서 뛸수 밖에 없었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애처로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지긋지긋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귀족이라는 신분도 엄마의 신분 타령도 견딜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을거야! 청혼을 받아들이기 한달전 하만과 함께 떠났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런 더러운 문제로 맞지도 않았을테고 비참한 기분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죽자. 나가서 죽어 버리자.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늙은 노인과 결혼할 일은 없는 일이 될테니까. 어쩌면 밉상인 레티시아가 결혼해야 될지도 모르지.
죽겠다는 모진 마음을 굳게 먹은 비아는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성 뒤편 짙은 숲 입구까지 들아섰다. 오래전 늙은 노파가 이야기 했던 숲. 많은 사람들이 요정에 홀려 들어가 보았지만 한명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숲속 전설이 떠올라 비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러면 어때. 속터져서 죽으나, 용한테 잡아먹혀 죽으나. 엄마는 분명 비아가 제풀에 지쳐 돌아올것이라 생각하고 있을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이제 정말 돌아가지 않을거야. 비아는 서서히 지는 노을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마를리히성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돌아가지 않을 마음을 대변하듯 뒤돌아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태양은 마치 비아의 앞날을 예고하듯 금세 서쪽산에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겁없는 비아의 발걸음은 더 깊은 숲속으로 거침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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