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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집회서의 말씀 48,1-4.9-11>
그 무렵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바로잡아주는 사람>
오늘 집회서는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다시 오리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거짓을 바로잡은 것같이 세례자 요한도 그러할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싸워 이겼지만, 세례자 요한이 싸워 이겼나요?
살해당했으니 싸움에 진 것이고, 그러니 바로잡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요?
다시 돌아온 엘리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고 하시며 당신도 같은 운명이 될 거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잘못이나 거짓을 바로잡는 사람은 죽음을 당하든 수난을 당하든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도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벨에게 쫓기지 않았습니까?
도망가지 않았으면 그도 틀림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보지 못하여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설사 알아봤더라도 사람들이 바로잡는 사람을 내버려 둘까 생각합니다.
한번 나에게 적용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누가 나를 바로잡아주면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겠습니까?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여기서 성인은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성숙한 어른이라는 뜻의 성인(成人)과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의 성인(聖人)입니다.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한 사람은 겸손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에 당장은 비록 입에 써도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마워할 터인데, 그건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싫어하는 것을 욕먹어 가며 바로잡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해코지까지 당할 것 같으면 더더욱 바로잡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나를 바로잡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사람도 웬만한 사람은 한두 번 바로잡아주다 통하지 않으면 나를 포기하고 떠나는데, 계속 옆에 있으면서 잡아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지금 내 옆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진정 사랑하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진정 지혜로고 성숙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그리고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리고,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베드 4,13-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29)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현재의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의 용서를 받게 하고 스스로를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리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로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남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으니 한번 오라고 초대장을 보내와 동생이 자신의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곳에 있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일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 되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 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 16-17절은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요한 1,23)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마르 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17,11)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
(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
(십자가의 성 요한)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 주님과 만남의 여정>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시편 80,4)
부활의 선물을 갈망하는 시편의 화답송 후렴입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결코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이란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선물입니다.
무지에 눈멀어 까맣게 잊고 지내는 선물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아주 예전, 무려 20년전에 써놨던 ‘선물’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삶은 꽃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가는 꽃들
바로 선물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 버리고 살았는지
살아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 폈다 사라지면 또 오늘의 꽃 폈다 지고
꽃같은 인생이다
평생을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
어제도 여러 선물을 받았습니다.
먼저 카톡을 통해 전해 온 귀한 깨우침이 되는 선물 내용을 소개합니다.
* 인생에서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을 수 없는 세 가지
1 존경, 2 신뢰, 3 우정
* 실패하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세 가지
1 술, 2 자만, 3 화냄
* 성공적인 사람을 만들어 주는 세 가지
1 근면, 2 진실성, 3 헌신과 전념
*인간의 세 가지 좋은 습관
1 일하는 습관, 2 운동하는 습관, 3 공부하는 습관
아, 여기서 부득이 하나 더 넣어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 빠졌네요!
“기도하는 습관!”
*남에게 주어야 할 세 가지
1 필요한 이에게 도움, 2 슬퍼하는 이에게 위로, 3 가치있는 이에게 올바른 평가
* 살면서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
1 시간, 2 말, 3 기회
* 인생의 세 가지 후회
1 참을걸, 2 즐길걸, 3 베풀걸
* 반드시 소유해 할 세 가지
1 건강, 2 재산, 3 친구
아, 여기서도 부득이 하나 더 넣어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 빠졌네요.
“하느님 믿음!”
* 내가 진정 사랑해야 할 세 사람
1 현명한 사람, 2 덕있는 사람, 3 순수한 사람
아, 여기서도 부득이 하나 더 넣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 빠졌네요.
“믿음의 사람!”
* 세 가지 만남의 복
1 부모, 2 스승, 3 도반(道伴)
* 가치있는 성공의 원천 세 가지
1 사랑, 2 자신감, 3 긍정적 사고
참 중요한 깨우침과 가르침이 되는 선물같은 조언들입니다.
어제 올해 들어 맨처음 받은 성탄 선물에 감사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모습의 성물에 짧은 편지가 곁들여 있었습니다.
“존경하올 이수철 신부님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영육간에 건강을 빕니다.
수사님들께서도 기쁜 성탄 맞이하시시기를 기도합니다.
- Sr.노유자 쟌느 마리
또 저녁 휴게 시 내년 1월 12일 사제서품을 앞둔 과묵한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로부터 선물처럼 사제서품 상본을 받고 축하한다고 격려의 악수를 선물했습니다.
서품 성구가 참 특이했습니다.
종신서원 상본 성구는 “아브라함아!”(창세 22,1)이었는데, 사제서품 상본 성구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11)-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기가 수도승답습니다.
이어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교황님께서 무릎 꿇고 겸손히 고백성사를 보시는 장면도 신선한 감동의 선물이었습니다.
참 많이 선물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물 중의 선물이 주님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선물을 통해 무지의 눈이 열릴 때 선물들의 발견과 더불어 감사와 찬미요 참으로 나는 물론 이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치유가 바로 주님과 만남의 선물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선물을 통해 참나의 발견의 구원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에 눈멀어 얼마나 어리석게도 선물을 못 알아보고 불행하게 살아가는지요!
그러니 선물도, 감사도, 행복도 발견인 것입니다.
눈만 열리며 곳곳에 널려 있는 감사와 행복의 선물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엘리야가 주인공입니다.
저자는 엘리야란 인물의 선물에 감사와 놀라움의 찬탄을 쏟아냅니다.
흡사 엘리야 예찬 같습니다.
성서와 교회에 차고 넘치도록 주신 하느님의 성인 선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엘리야!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를 통해 엘리야는 물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잠든 죽음의 선물이요, 이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선물로 살아날 우리임을 깨닫게 되니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요!
사실 부활의 희망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미사 경문 중에 나오는 아름다운 선물 같은 기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무지가 참 치명적이요 고질적 마음의 병입니다.
유일한 처방의 명약은 주님과 만남의 선물뿐입니다.
예수님 역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못만났기에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우쳐 알게 하는 주님이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 자신의 고난을 예감하는 주님이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무지의 눈이 열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았다 합니다.
주님과 만남의 결과 이런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선물 중의 선물이 주님과 만남의 선물인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당신 말씀과 성체를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결정적 상급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곧 간다.
상도 가져가, 사람마다 제 행실대로 갚아 주리라.”
(묵시 22,12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작년에 어머니께서, 그리고 올해에는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한동안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 또 하늘 나라에 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 세상 삶의 무상함도 크게 제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삶은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들고, 순간의 만족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 한 직후는 만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멋진 노을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노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찰나의 즐거움이 모여서 내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어야지만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 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엘리야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재림도 영광 속에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는 메시아관은 고난과 부활이 함께 있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막연한 영광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순간의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전부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과연 어디에서 느끼고 있습니까?
특별한 상황,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상황만을 요구하지 말고, 매 순간에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듭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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