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너머 부재골로
무더웠던 날들이 물러가고 뒤늦게 가을다운 날씨가 제자리를 잡아가는 시월 둘째 주말이다. 산자락으로 뚫어 놓은 임도를 따라 걸으면서 가을의 정취를 느껴 보려고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월영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마산역 앞에서 내렸다. 광장으로 향하는 노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제철 과일과 푸성귀들이 펼쳐진 저자가 형성되어 오가는 이들을 맞았다.
지난해 작황이 부진했던 사과는 풍작이 예상되는지 가격이 제법 내린듯했다. 창원 근교 북면이나 동읍에서도 많이 생산되는 단감은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었다. 밤이나 대추도 보였다. 푸성귀로는 결구가 된 배추는 귀해도 무와 고구마순이나 호박잎까지 다양했다. 부추나 쪽파도 보였다. 토요일은 마산역 광장에 노점에 전을 펴고 일요일은 댓거리 장터로 가는 상인들도 있을 듯했다.
노점을 둘러보고 번개시장 들머리에서 김밥을 한 줄 마련하는 사이 내가 가고자 했던 진동 대현으로 가는 72번 버스는 출발해 다른 행선지를 물색했다. 대현에서 봉화산 허리로 난 임도를 따라 걸을 셈인데 그 버스는 놓쳐 의림사로 가는 74번 버스를 탔다. 어시장과 댓거리를 지난 밤밭고개를 넘었다. 70번대 버스는 진동까지 노선이 겹쳐 환승장을 둘러 나와서부터 골짜기가 달라졌다.
진북면 소재지 지산에서 예곡을 거쳐 산골로 드니 들녘보다 가을걷이가 빨라 추수를 끝낸 빈 논이 더러 보였다. 버스가 인곡에서 의림사 산문으로 들었을 때 내려 절집으로 들지 않고 인성산 북향 비탈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섰다. 길섶은 풀을 자르지 않아 제철에 피어난 야생화를 탐방하기는 여건이 좋을 듯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들머리에서 늦게까지 핀 물봉선꽃 군락을 봤다.
저수지 둑을 지난 임도 길섶에는 무더위를 이겨내고 핀 물봉선꽃이 계속 이어지고 분홍 송이풀꽃도 개체 수가 흔했다. 꽃잎이 노란 이고들빼기꽃도 흔하게 만났다. 길바닥으로 무성하게 덮은 풀잎에는 이슬이 맺혀 신발이 젖을 정도였다. 파랗거나 보라색으로 피는 산박하나 오리방풀이 피운 꽃들도 만났는데 절개지 경사면에는 참취나 미국쑥부쟁이가 피운 하얀 꽃송이들도 보였다.
경사가 가팔라 임도를 지그재그로 돌려가며 뚫은 비탈을 올라가자 여름부터 피웠을 이삭여뀌와 털여뀌가 피운 꽃이 남아 있었다. 야생에서 절로 자란 고욤나무가 열매를 맺었는데 은행처럼 자잘했다. 해발고도가 점차 높아지자 쑥부쟁이나 구절초가 피운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꿋꿋하게 피었을 자주색 등골나물꽃도 보였는데 물레나물이 피운 꽃은 보이질 않았다.
높이 오른 산마루에서 고개를 돌리자 겹겹이 둘러친 산 너머 광암 바다가 호수처럼 드러났다. 진동 앞은 점점이 섬들이 뜬 다도해였고 거제섬이 바다 바깥을 에워쌌다. 인성산에서 수리봉으로 건너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선 바위 더미에 앉아 김밥과 커피로 소진된 열량을 벌충시켰다. 쉼터에서 일어나 부재고개 가는 길섶은 구절초를 계속 볼 수 있어 열병을 받다시피 호사를 누렸다.
부재고개에 이르자 서북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사내 넷을 만났다. 마산에 산다는 이들이었는데 칠십대였음에도 내보다 건장해 보였다. 그들보다 먼저 부재골로 내려서니 산중 표고 농장에 이러러 다시 합류해 산주 아내가 깎아낸 사과와 드롭 커피를 내려주어 대접을 잘 받았다. 임도가 끝난 곳에서 교직 은퇴 후 전원생활을 누리는 예전 근무지 동료를 만나 밀린 안부를 나눴다.
교직 선배는 드물게 전공이 농업이었는데 이론과 함께 실제로 농사를 잘 지어 내가 별호로 ‘신농’씨로 붙여드리는 분이다. 고지대라도 여러 수종 과수와 채소를 잘 키우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진 곳이라 내가 방문할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배는 잘 자라는 무밭에서 싱싱한 솎음 무를 뽑아주어 고맙게 받아 가슴에 안고 미천마을로 내려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2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