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콕토(1889-1960)의 ‘생애’
장 콕토는 파리 근교의 메종 리피트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기질에 있어서도 순수한 파리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지녔던 장 콕토는 학교 수업은 등한시하고 시 습작과 연극에 몰두한 까닭에 두 번이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실패한다.
아주 일찍부터 서커스와 연극에 매료된 콕토는 문학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여 문단에서 로스탕, 프루스트 등 그 당시의 대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09년에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펴낸 콕토는 1910년에는 당시 파리에서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을 지휘하고 있던 디아길레프와 만난다. 그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은 1917년 무용과 연극을 혼합한 전위극 〈열병식〉(Parade, 에릭 사티가 음악을 맡고 피카소·디아길레프·콕토가 공동 제작했다)을 상연하여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콕토는 시인 아폴리네르·막스 자콥·블레즈 상드라르스·화가 피카소 등 그 시대의 전위 예술가들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이들과의 교류는 콕토의 예술 세계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19년에 콕토는 16세의 미소년 레이몽 라디게(Raymond Radiguet, 〈육체의 악마〉의 작가)를 만나 열정적인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4년 되에 라디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콕토는 절망에 빠져 아편 중독에 이르게 된다. 콕토는 아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하여 17일 동안에 한 편의 소설시 「무서운 아이들」을 쓴다.
시인 콕토는 특히 소년기의 동심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이것은 천진 난만한 어린이들의 맑고 투명한 생활이나 그 정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소년기에는 증오와 질투의 비통한 고뇌가 있는 것이며 어른들의 세계와는 또 다른 비극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아이들은 명확한 의식이 없이 사랑과 증오의 비극을 되풀이하며, 꿈과 현실을 혼돈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포에지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작품에는 꿈의 침잠과 절대에 대한 향수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의 소설시 「무서운 아이들」은 소년 시대의 마술의 왕국과 시적 환상을 고전적인 엄격한 구성 아래 결정시킨 것으로, 그 가운데 등장하는 청춘 군상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압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형식도 그리스극 같은 간결미를 지니고 있다.
사생활까지도 시인의 것으로서 공개하여 인기를 모으고 그 때문에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는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활약을 한 까닭에 마술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콕토의 모든 작품은 비밀과 수수께끼와 거울 저편에 있는 해독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탐색이다. 또는 어떤 침묵의 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그는 그 함정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거짓 주사위 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는 그 함정을 뚫고 나가려고 비밀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그림자 뒤를 따라 달리기도 하고, 바로 그 그림자가 달아나는 데도 그림자를 잡은 체한다. 그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전달하려고 전령인 천사를 만들어 낸다. 그 천사는 다름 아닌, 눈으로 볼 수 없는, 비현실의 세계와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현상 뒤에 있는 불가시성을 탐구하여 허위와 기교의 가면으로 진실을 제시하고자 했다. 불안과 부재가 생겨날 때 그는 거기에서 시를 발견한다.
바로 그때 그에게는 에로스의 화살처럼 재빠른 화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활을 쏘는 사수는 자주 자기가 쏘는 화살의 희생자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흔히 상처 입고 신경질적인 그의 초감성에서 비롯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림자보다는 생리적으로 잠재된, 오히려 시인 자신이라는 먹이이다. 시인을 진정성으로 밀어 올리는 시인 자신의 위험한 놀이에 갇혀 있는 인간의 이 비극을 독자가 깨달았을 때 다행스럽게도 우아한 시인, 새로운 정신의 재단사인 이 시인을 잊는다.
특히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연극계에 초현실주의를 도입한 극작가로서 장 콕토는 이 수법이 관객의 이해를 받을 수 없게 됨을 깨닫자 다시 리얼리즘의 노선으로 회전한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새로운 시를 달고 다채로운 공상을 구사하여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 갔다. 그 구성의 치밀함, 함축성 있는 대사, 독특한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그려내는 재치, 줄거리의 흥미는 그가 탁월한 극작가임을 확인시켜 준다.
한동안 콕토는 시작 대신 다수의 영화 시나리오와 희곡을 쓰는 데 몰두했으며 「폭탄」, 「무서운 부모들」과 같은 희곡들이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시인의 피」,「미녀와 야수」,「무서운 부모들」,「오르페우스」,「무서운 아이들」과 같은 시나리오들이 영화화된다. 1955년에 콕토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60년에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하기도 한 영화 〈오르페우스의 언약〉이 개봉된다. 그 이후로 그는 점차적으로 문학에서 손을 떼고 데생과 회화, 모자이크로 방향을 돌린다.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듯이 1962년에 「진혼곡」을 출간하고, 그 다음해인 1963년 10월 11일에 장 콕토는 밀리 라포레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별들을 반짝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 장 콕토는 그 자신의 말대로 혼자, 외로이 죽지 않았다. 바로 그가 죽기 몇 시간 전에 불멸의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1940년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알게 된 콕토와 피아프는 그 뒤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콕토는 그녀에게 「무정한 미인」이라는 희곡을 헌정 한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감동적인 목소리가 시인들 중에서 가장 칭송 받는 시인의 글을 읽은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는 그녀의 신비스런 목소리로 격정에 가득 찬 열정과 가난한 사람들의 낭만을 구가하고 있었고, 그는, 장 콕토는, 문학 애호가이며 댄디인 시인은 거리에서 노래를 한 것은 아니지만, 에스프리의 모든 정교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들이 만난 지 23년이 되는 해, 정신적인 교감을 누렸던 그 두 사람을 1963년 10월 11일에 죽음이 비로소 함께 묶어 놓았다. 마치 아무도 모르게 두 사람만 이 함께 음모를 꾸며 온 것처럼, 몇 시간의 간격을 두고 그들이 침잠해 들어간 내면의 세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는 듯이.
시인들의 왕자였던 콕토와 최고의 여가수 피아프, 이 두 사람은 우리가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천국으로 함께 떠났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함께 그들은 별들을 반짝이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다니엘 보넬은 쓰고 있다. 지금은 다만 감탄스런 말들과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목소리 한 줄기만이 남아 있어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지금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하지만 예술가는 후세 속에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콕토. 그는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 그리고 예술을 불태웠던 그의 혼은 살아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