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5.8.14 광복 70주년 기념 호좌의진 영남소토사 경암 서상렬 선생 유묵전을 관람하였는데...사진을 한꺼번에 다 못올려서 2편으로 나누어 올린다.
제천문화원에서 기획하고 제천시민회관에서 전시한 120년전 을미의병기의 호좌의진 영남소토사 '경암 서상렬' 유묵전에 참관하러 가는데 제천에 살고 계시는 장영구 제천의병유가족회 회장님과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장영구님은 제천의병에 투신하여 '산거만록'을 집필하신 장충식 선생의 고손자고 단양 민병장이셨던 장익환 선생의 증손자이시다.
경암 서상렬 선생의 유묵전은 제천에서 병산영당의 유사일을 보시고,문화원 이사로서 ,대단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양승운님이 기획하고 후손이 자료를 내주시고 해서 이루어진 대단한 전시회입니다.벽에 걸린 자료들은 이번에 전부 처음으로 공개된 자료들이라고 합니다.
경암 서상렬 선생은 필자의 집안과도 세연(을미의병 때 예천 미산고택을 방문)이 있고,을미의병 때 안동의병진을 방문하여서 안동의병연합진을 지도하셨고,'예천회맹'을 주도하여 맹주가 되신 분입니다.그후 의암 류인석의 호좌의진이 왜군에 밀려서 서북행(만주로 감)을 할때 앞장서 도로장(道路將,선봉장)이 되어 길을 열다가 강원도 '낭천전투'에서 순국하신 분입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워낙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도록집도 준비못했지만...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날 되새겨 자랑스런 번영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이 순국선열들에 대한 도리라고 각오를 다져봅니다.
호좌의진과 관련이 많은 ,의암 류인석 선생님과 습재 이소응 선생의 고향인 춘천에서는 춘천문화원장님과 사무국장이 참석하였다.
노고가 많으셨던 양승운님과 문화원장님과 사무국장님,문화원 이사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경암 서상렬 선생 영정-화서학파의 대부분의 영정처럼 복건과 방령심의(方領深衣)를 착용하고 있다.서상렬 선생의 유일한 영정이다.
동문인 최열 선생이 쓴 제문
의암 선생이 귀국하여 일본군과의 교전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의 객관에서 경암 선생의 서거(순국)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며 쓴 글이다.최열 선생의 자료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없다....후손이 있다면..독립투쟁을 이어가는 집안이 아니었을까?
동문제자인 윤병의尹秉義 선생이 쓴 제문
경암의 친구 윤앙섭尹양燮 선생이 쓴 제문
경암집.경암 서상렬의 문집이다.손자인 서정국 선생이 유고를 수습하여 1983년에 간행했다.오완근이 쓴 서문과 김용숙 ,서정국이 쓴 발문이 있다.
육의사 열전-제천출신 이정규(호는 항재 혹은 옥산)가 편찬한 서상렬,주용규,이춘영,안승우,홍사구,이범직 여섯 의병장들의 약전이다.류인석 선생을 좇아 만주를 왕래하였으며 광복후 2대 호좌의진을 이끌던 운강 이강년 선생을 현창할려고 동분서주하시다 운명하셨다.항재집과 종의록을 쓰셨다.
운강선생창의일록
2권 1책. 목판본. 이강년이 남긴 기록에 편자인 박정수(朴貞洙)·강순희(姜順熙)의 종군기를 엮어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권두에 김동진(金東鎭)의 서문이 있다.
권1에 일록, 권2에 일록·보유·격문·서융사졸(誓戎士卒)·고결팔역동지(告訣八域同志)·장임록(將任錄)·지(識)·발(跋)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일록에는 1895년(고종32) 그가 경상북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柳麟錫)의 진에 합류하여 항쟁한 사실, 1907년 3월 재차 의병을 일으킨 후 그 해 말까지의 사적이 일기체로 기록되어 있다.
권2의 일록에는 1908년 1월부터 9월 사형당하기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보유에는 일록에 누락된 기사가 실려 있다. 격문은 <격고각도열읍문 檄告各道列邑文>과 <격이등박문 檄伊藤博文>이다.
<장임록 將任錄>에는 그의 의병부대 조직과 주요 종군자의 명단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은 을미의병보다 정미의병에 비중을 두고 있어 1907년 이후의 의병전쟁을 연구하는 데 긴요한 자료이다.
특히, 일록에는 한국 군대가 해산되어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황제가 각지 의병장에게 비밀리에 칙령을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칙령에는 “4천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땅이 되었으니, 이강년을 도체찰사로 삼아 짐과 함께 의병은 사직에 순절하라.” , “조서는 비밀히 내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모든 일을 거행하라.”라고 적고 있다.
권2 말미에는 1908년 6월 4일 청풍 작성(鵲城)에서 적과 싸우다가 탄환을 맞아 붙잡힌 사실, 제천·충주를 거쳐 서울에 압송되어 평리원(平理院)에서 공판을 받을 때 담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묻는 재판관에게 “너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어찌 의병이 무엇인가를 모르는가! 나는 왕실의 후손으로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불행히 잡힌 몸이 되었으니 빨리 죽여주기를 바란다. 선비에게는 죽음을 줄지언정 욕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9월 19일에 쓴 유서에서는 “내가 노력하여 토벌한 지 13년에 원수의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도리어 살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천운을 어찌하랴!”라고 하였다. 그의 최후의 말은 “우리나라 2천만 동포가 장차 차례로 나처럼 죽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하였다.
<장임록>에는 역대 의병장과 참모, 그리고 종사(從事)들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으며, ‘좌종사(坐從事)’라 하여 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협력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어 이채롭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강선생창의일록 [雲崗先生倡義日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암 서상렬 선생의 연보
경암 서상렬의 시종 김선이의 묘소
인사하시는 분은 이근규 제천시장이다.
인사하시는 분은 서상렬 선생의 증손자이시다.
충주 MBC에서 촬영을 왔다.
경암 서상렬 의병장 특별전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