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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 3,14-18ㄱ>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 제2독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4,4-7>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 복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청하세요>
오늘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을 나누어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 실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한을 메시아로 아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소위 ‘사랑 실천’을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실천법은 세례자 요한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새로 태어나게’,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요한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CCC, 460)라는 말씀을 인용해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법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실천법을 알려주는 수준은 세례자 요한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사랑 실천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오십니다.
그 능력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믿느냐에 따라 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허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감기를 빨리 낫는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허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물어도 될 것을 예수님께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 의 내용입니다.
최보나는 광고회사에서 5년째 조감독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녀를 여자로 봐주기는커녕 무시하고 구박하고 이용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대우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 촬영지에서 이승재를 만납니다.
이승재는 신인 시절 최보나가 감독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잘 나가는 지금은 온갖 허세와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보나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보나는 해변에 외로이 혼자 남아있다 모래사장 위에서 깜박 잠이 듭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추워서 일어난 보나는 주변을 돌아보던 중 잡화 물건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발견합니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 트럭으로 향했는데 그 트럭에서는 누구든 따라 하기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수많은 비디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 꾸러미를 삽니다.
비디오를 보다 잠든 내용을 다음 날 아침부터 우연히 써먹으니 이상하게 정말 먹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까칠하게만 살아왔는데, 필요에 따라 사과하고 웃어주고 거리를 좁히는 등의 절차를 따라 하면서 여러 위기를 모면합니다.
점점 회사와 남자와 세상의 인정을 받아갑니다.
이렇게 남자사용설명서를 완벽하게 익혀가면서 그는 승재의 사랑도 얻습니다.
그러다 이승재는 보나의 집에서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자신에게 그대로 따라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용당한 느낌에 그녀를 떠납니다.
그녀는 승재에게 진심을 말해보려 했지만 실제로 비디오의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기에 승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디오의 마지막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쳐주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실천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자신에게 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소중함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전에 오랜 시간을 걸쳐 행동 실천법이 나왔던 것일까요?
이는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을 본 보나는 마음을 다잡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일도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되자 승재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다시 끌립니다.
보나가 승재를 향해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승재는 보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인기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만인 앞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닌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입니다.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디오에 비유하기는 차마 못할 일이지만,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 행동을 지정해주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자존감을 주는 방법 면에서는 보나가 배운 비디오와 같은 역할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고를 때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길어주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로 그 여인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존감도 지니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종은 여인을 이사악에게 보내고 이사악은 그녀와 하나가 됩니다.
이사악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상징하는 레베카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임을 알아 그 실천에 노력하는 이미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지정해주는 사랑의 실천만을 가지고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랑 자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인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는 이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에게 키워지면 늑대라고 믿고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아닌 늑대의 본성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사랑이 나오게 하려면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믿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사랑의 실천만 묻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요한을 메시아로 여긴 사람들처럼 메시아를 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기껏 예수님께 와서 새로 태어날 생각은 안 하고 사랑의 실천 방법만을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당신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수준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할 수 있어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스승님 능력의 두 배를 청합니다.
제자가 어떻게 스승의 두 배를 청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엘리야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믿어주는 엘리사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두 배의 영을 주님께 청하여 제자에게 줍니다.
우리도 주님께 청할 때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바로 당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청해야 그분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당신께서 하신 일의 두 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청해도 다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공경하는 길은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해 달라는 그 믿음입니다.
나의 자존감을 주는 정체성을 확고히 믿게 할 믿음을 청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합당하고 기쁘게 받아주실 청원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림 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 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 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
(스바 3,15.17)
이처럼 그가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의 삶 안에, 그들의 현장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곧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 일쑤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좇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저희의 거부로 상처 입습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좇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3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대림 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날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저녁미사를 시작하려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미사가 시작되니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부부가 4살박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쥐어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 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먹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라고 말씀하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 (잠언 11,25).
받기 위해 준다면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 봉헌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이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5-17).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 벌 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신명 30,14)
그런데 마음과 몸이 따로이고,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앞이 훤하잖아요?
흰머리라도 좋다, 빠지지만 말아다오!
어느 분이 머리 염색약을 슬며시 가져다 놓으셨는데 발라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잖아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지요.
왜 고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는데, 행복해지는데, 왜 그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은 것을 확인하고도 그냥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가진 것을 ,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듣고도 왜 그냥 넘어갑니까?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피 4,6-7)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찰떡궁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예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찰떡궁합이야!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용하게도 알아맞히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번 지적하고 명하지 않아도 그분 뜻을 먼저 알아듣고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들며 무엇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깨우치길 바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임금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다니 4,24).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자기 영광을 떨치려고 하다가 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제정신을 차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진실하고 그 길은 다 공정하니 그분께서는 교만 속에 걷는 자들을 낮추실 수 있는 분이다.”
(다니 4,34)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죄를 벗고 가난한 이를 도우면 허물을 벗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
(시편 37,25-26)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
(신명 15,10)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성 암브로오시오)
“자선을 하면 영벌을 면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시니 많고 적음을 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선을 하십시오.
(성 요한 비안네)
결국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나 자신의 영생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언젠가 회의차 지방에 내려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역 주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노숙인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 신자들의 무료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 동안 바짝 다가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불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배식 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
아마도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과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어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 번 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쇠고기국밥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그릇 받아먹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 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 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노숙인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을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 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커피를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하고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못해 제게 한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거기 서 있어 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아주머니의 한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깊은 축제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미사였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던 백성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지니셨던 측은지심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지녀야 할 주일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행위이자 구원을 직접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가난의 악순환을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더욱 근본적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자선 행위, 몸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시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시작하면 그 '맛'이 대단합니다.
내 호주머니에서 뭔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은 잠시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느새 빠져나간 그 이상의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자선은 우리에게 뿌듯한 마음, 넉넉한 가슴을 축복의 선물로 베풀어주십니다.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자선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도구입니다.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무거운 등짐 하나를 내려놓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자선과 더불어 우리는 오랜 상처와 아픈 기억들이 조금씩 치유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누려고 해도 나눌 거리가 있어야 나누지?’ 라는 분들, 조금만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건네는 작은 미소 한번 역시 큰 자선입니다.
실의에 빠져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힘내라'는 표시로 어깨 한번 두드려줄 때, 우리는 큰 자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가르침 -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사랑과 겸손>
오늘은 희망과 기쁨의 절정과도 같은 대림 3주 “기뻐하라”, 장미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 셋이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의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마침 교황님의 성탄 구유와 성탄 트리에 대한 강론 말씀이 은혜로워 그 일부를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구유는 구원에의 보편적 부르심이다.
성탄 트리는 재탄생을 뜻한다.
구유와 성탄 트리의 상징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평화와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데 있다.
나무와 구유는 전형적 성탄 분위기인 따뜻함, 나눔, 가족적 친밀함으로 인도한다.
거짓되고 상업적인 성탄을 체험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 모두 하느님의 연민, 부드러운 친밀함에, 또 예술, 음악, 노래, 전통들이 우리 마음에 가져오는 성탄 분위기에 에워싸이도록 하자.
성탄은 신뢰와 희망의 축제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신뢰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 결코 지칠 줄 모르는 그분은 희망의 근거가 되는 분이시다.
그분은 높이 계셔서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고자 작고 가난한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닮고 섬기기 위해 더 낮아지자.
성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오셨고, 우리에게 우리 형제자매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변두리에 버려진 가장 가난한 이들,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보아 주라고 요청하신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오늘 주님은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십니다.
대림 제3주에 앞서 우선 참 보람 가득했던 어제의 행복했던 개인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 계획대로가 아닌 하느님 계획대로였습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계획에 감동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습니다.
지체할 수 없다는 예감에 오늘 토요일 오전 시간을 미리 약속드렸고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신심 깊은 루시아 80세 사촌 누님을 미사와 병자성사를 드리러 아침 일찍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급히 부랴부랴 챙겨 아침 미사 후 한 자매의 차량 봉사 도움을 받아 무거운 짐을 들고 화랑대역에 도착했는데 병자성유를 빠트린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다시 반대편 출구를 나오니 마침 고맙게도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 즉시 수도원 제의방 앞까지 간 후 병자성유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그 택시를 타고 서대문구 아현동 누님 댁까지 직행했습니다.
평생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택시비 3만원 정도는 문제가 아녔습니다.
병자성유를 잊었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택시로 목적지까지 직행하니 토요일 아침이라 차도 막히지 않아 오전 8:30분 일찍 도착하여 고백성사, 성체성사 중 병자성사를 모두 드리고 충분히 누님과 착한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약간의 요기를 나누니 11시였습니다.
마침 중간에 점심 약속이 예상되어 전화하니 도저히 바빠 힘들다는 지인의 연락에 조카 차로 수도원에 직행하러 나왔을 때 누님의 서운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나를 바래다주는 조카 차로 수도원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하니 너무 반갑고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점심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음이 정말 잘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고향집 같은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그리워함은 기본적 정서입니다.
성지 순례하는 마음으로 아들 차에 동승한 누님은 아이처럼 기뻐하였고 수도원 제 집무실에서 따뜻한 분위기에서 인삼차도 들고 함께 주님의 십자가 고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님과 조카는 잠시 성전에 들려 주님께 인사하고 떠났고 나는 9시경 기도 후 네 분 자매들의 면담성사를 드리니 하루가 다 갔습니다만 정말 마음 뿌듯한 행복감에 하느님께 참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계획해도 이런 완벽한 일정은 불가능합니다.
전혀 생각지 않게 하느님 시간표에 따라 오전 1시 기상하여 강론 쓰기로 시작한 하루 일과가 참 순조롭게 완료됐고 하느님께 많이 감사했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서 대림 제3주일 좋은 깨우침을 주셔서 오늘도 한밤중에 일어나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가톨릭신문, 말씀 묵상란 ‘기쁨의 훈련’이란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얼마 전 썼던 희망의 훈련이란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예일대 신학부의 ‘기쁨의 신학과 좋은 삶’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미로슬바브 볼프 교수의 말입니다.
기쁨은 미덕일 뿐 아니라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훈련하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쁨의 훈련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또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요 영약(靈藥)입니다.
하느님 주신 최고의 영약이 기쁨입니다.
기쁨의 훈련에 이어 기쁨의 선물, 기쁨의 발견, 기쁨의 선택, 기쁨의 영약인 것입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대림 제3주일 우리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기뻐할 것을 권합니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신다.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대림 축제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뻐하듯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희망과 기쁨이 됩니다.
대림의 기쁨의 여정은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를 뵈올 기쁨에 날로 기쁨도 더해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방문했을 때 말기암 투병중인 평화로 가득한 사촌 누님의 표정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날로 주님과 가까이 가는 대림의 여정이니 기뻐하라고 간곡히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기쁨과 희망만이 아닙니다.
평화도 감사도 사랑도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영약입니다.
그러니 기쁨과 희망에 이어 평화, 감사, 사랑도 만병통치약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고맙고 고무적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감사’와 ‘평화’가 키워드, 열쇠말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훈련, 감사의 선물,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영약입니다.
평화의 훈련, 평화의 선물, 평화의 발견, 평화의 선택, 평화의 영약입니다.
그러니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이 모두가 회개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역시 사랑의 훈련, 사랑의 선물, 사랑의 발견, 사랑의 선택, 사랑의 영약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 동사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회개한 후 세례를 청하는 이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러합니다.
비상한 사랑 실천이 아니라 본분에 충실한 평범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자선주일에 주는 참 좋은 지침입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각자의 눈높이에 맞는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사람마다 그에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는 분별력의 대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의 덕은 함께 갑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대가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분별의 지혜와 겸손의 미덕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 생명의 성령, 주님 사랑의 불로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하나 더붙여 겸손의 훈련, 겸손의 선물, 겸손의 발견, 겸손의 선택, 겸손의 영약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희망과 기쁨, 평화와 감사, 사랑과 겸손의 영약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평생 한결같이 이들의 훈련병이, 수행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공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 “운이 좋았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그런 상황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만의 힘으로는 성공의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을 바꿔준 상황과 은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자기 모습에서 그런 상황과 은인을 부른 것입니다.
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곁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자기 잘난 척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잘난 체만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은인이 다가가려고 하고, 또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찾아갈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운이 없어요.”
긍정적인 사람, 겸손한 사람, 경청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곁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빨리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는 먼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군인들은 자기들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수도 생활이나 영웅적인 생활을 강요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옳은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나누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세리 역시 정당한 세금만 받는 생활개선을 하라고 합니다.
군사도 왔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에게 온 군사는 이방인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 역시 회개해서 생활개선만 하면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 사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장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기뻐하여라. 주님 안에서>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 그래서 독서들에 기쁨과 관련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고 자연스레 기쁨에 대한 성찰을 우리도 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는 진정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성찰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요즘 그리고 갈수록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의미보다 재미를 더 추구하고 그래서 재미없으면 아무리 의미 있는 영화도 보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요즘 타령' 할 것 없이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기쁨보다 즐거움을을 더 좋아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인간을 애기할 때 ‘Homo Ludens’(놀이의 인간)라고도 하지요.
당연한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둘 다 만족감이고 그래서 우리가 흔히 기쁨과 즐거움을 같이 붙여서 쓰곤 하는데, 그런데 만족감이란 면에서 같지만 시차적 만족감인 기쁨에 비해 즐거움은 행위 동시적인 만족감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고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 동시에 만족감이 오고 그래서 즐겁지만, 대학 합격과 취업과 같은 기쁨과 바라고 바라던 집을 살 때의 기쁨은 최소 3년의 공부와 10년, 20년 주택 청약 적금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기쁨은 시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까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고통이지요.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이 고통이고, 즐기고 싶은데 즐기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것이 고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즐거움, 곧 우리가 흔히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당장은 즐겁지만 즐거움 뒤에 허무가 온다던지 실패나 좌절이 오지요.
신나게 놀고 즐기다 대학에 떨어지고 심지어 인생이 실패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움보다 기쁨을 추구하는 편이 낫는데, 기쁨 중에서도 성취적인 기쁨보다는 인격적인 기쁨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취적 기쁨이란 일이 내 뜻대로 잘 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 곧 보람이고, 인격적 기쁨이란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인데, 오늘 독서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기쁨 곧 신앙인의 기쁨은 이 기쁨 중에서도 오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기쁨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기쁨, 특히 대림절의 기쁨은 임박(臨迫)한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며, 그리고 마침내 오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며, 오신 주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사는 우리는 이제 두 가지 실천을 하는데, 곧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자선의 실천입니다.
복음 선포와 자선의 실천이 우리의 영적 기쁨과 즐거움의 결과라는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기쁨이 넘친다면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워져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자선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오늘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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